절친 또는 적친(敵親)?
절친 또는 적친(敵親)?
트럼프는 푸틴과 잘 지낼 수 있다지만 러시아의 대 서방 비밀공작에는 어떻게 대처할까 세계 지도자가 보낸 메시지 중 가장 먼저 도착한 전보였다. 지난 11월 9일 아침 크렘린 당국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고 발표했다. “양국이 공동으로 미-러 관계의 위기 해소를 위해 힘쓸 뿐 아니라 시급한 국제현안에 대처하고 글로벌 안보 문제에 효과적인 대응책을 모색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이다. 바로 몇 분 전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러시아 의회에서 박수갈채가 터져 나온 뒤였다.
푸틴은 두 사람이 사이 좋게 지낼 것이라고 시사한 트럼프의 거듭된 발언에 호응하는 듯했다. 지난 7월 28일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트럼프는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와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푸틴에게 단호히 대처하겠지만 현 정부의 방식과는 반대로 러시아에 우호적인 방향 말고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야 다른 나라와 함께 IS를 격퇴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내 사이에 싹트는 브로맨스(남자끼리의 친밀한 관계)는 내년 1월 20일 트럼프가 미국의 군통수권자가 되면서 갑자기 끝나버릴 수 있다. 그때 가면 트럼프는 미국과 그 우방들을 상대로 원한에 사무쳐 공격적인 첩보활동과 프로파간다(선전선동) 공세를 벌이는 옛 초강대국 러시아를 매일 상대해야 한다. 러시아는 냉전 이후 어느 때보다 가장 열렬하고 위협적인 존재가 됐다. 트럼프는 양자택일의 선택에 직면할 수 있다. 전임자들이 그랬듯 치열해지는 그림자 전쟁(공식 전쟁이 아니라 요인 암살이나 사이버 공격 등을 통한 은밀한 공격)을 계속하든지 아니면 대 러시아 제재를 끝내고 동유럽 등지에서 푸틴이 사실상 영향력을 키울 수 있게 하는 길이다. 트럼프는 답변을 내놓으라는 큰 압력을 받을 것이다. 지난 11월 초 영국 MI5의 앤드류 파커 국장이 그 국내 정보기관 수장으론 107년 만에 처음으로 인터뷰를 했다. 영국 가디언 신문에 프로파간다·첩보·전복·사이버 공격 등 해외에서 러시아의 외교정책을 갈수록 공격적으로 전개하는 각종 국가조직과 세력에 관해 설명했다. 러시아의 비밀 전쟁은 불법적인 사보타주·첩보활동·언론플레이 등 갖가지 수법뿐 아니라 파괴적 정치 운동 지원과 사이버인프라 심층 침투까지 망라한다. 한 번도 공직에 선출된 적 없는 미국 대통령으로선 취임 첫날부터 감당하기 벅찬 과제다.
트럼프의 승리로 러시아는 해킹·프로파간다·불신 조장으로 이뤄진 러시아의 강력한 혼합처방이 잘 먹혀들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프랑스·발트해안·독일 등지의 우파 후원을 통해 혼란을 계속 확산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어느 때보다 강하다. 마이클 맥폴 전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는 트럼프의 승리 후 “푸틴이 미국 선거에 개입해 큰 성공을 거뒀다”고 트윗을 띄웠다. 러시아 지도층은 미국 대선 레이스에 크렘린이 개입했다는 의혹과 무관하다고 잡아떼면서도 트럼프의 승리에 기뻐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푸틴 측근인 러시아 의회 비야체슬라프 니코노프 의원은 “처음에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이젠 힐러리”라며 “얼마 전까지 미국은 러시아가 석유뿐인 주유소, 지역강국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분명 우리가 미국의 대선 결과를 판가름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진 듯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고대 중국의 전략을 따른다. 강둑에 앉아 적의 시체가 떠내려가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러시아가 마냥 앉아서 기다리지는 않는다. 은밀하기는 해도 적극적으로 적대 공작을 벌인다. 2014년 3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그에 따른 국제적인 제재 이후 크렘린의 그림자 전쟁 강도가 높아졌다. 그 순간부터 “서방에 대한 반대 활동에서 자신들의 의미를 찾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했다”고 MI5의 파커 국장은 가디언에 말했다. “러시아는 수십 년 전부터 은밀한 위협요소였다. 요즘엔 동원 가능한 수단이 갈수록 많아진다는 점이 다르다. 사이버공간에서 눈에 띄지 않게 위협적인 활동이 활발하다.”
지난 1년 사이 러시아는 몇몇 갈수록 대담한 고도의 작전을 진두 지휘했다. 우크라이나 전력망, 백악관 서버,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그리고 서방 정보기관들이 러시아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독일 의회 해킹 공격 등이 대표적이다. 서방 정부들은 뒤늦게 그 규모를 깨닫고 냉전 종식 후 최대의 방첩 작전을 준비한다. 첩보 기관들은 부랴부랴 방향을 전환해야 했다. 1991년 옛 소련 제국의 몰락으로 소련 진영과의 수십 년에 걸친 핵 대치정국이 사실상 종결되자 서방 정보기관들은 대부분 관심과 자원을 다른 지역, 특히 중동과 아프가니스탄으로 돌렸다. 이슬람주의 극단주의자들의 공격이 서방에 최대 위협으로 떠오르는 듯한 상황이었다. 그 문제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러시아가 제기하는 위협이 되살아나고 있다. 러시아의 새로운 스파이 군단을 움직이는 이념은 한 가지, 러시아의 힘을 약화시키고 모스크바의 뒷마당에서 불안과 혁명을 선동하려는 서방의 공작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 관측통에는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대다수 러시아인(특히 푸틴과 그의 측근 실세 그룹)은 2003년과 2004년 조지아·우크라이나·키르기스스탄을 휩쓸었던 친민주화 혁명, 2012년 모스크바의 대규모 푸틴 반대 시위,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친러시아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 반대 폭동 모두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주도 아래 모스크바를 약화시키려는 음모의 일환이라고 확신한다. 체코 프라하 소재 국제관계연구소의 마크 갈레오티 선임 연구원은 “이는 단순히 웃어넘길 만한 구호가 아니라 진정한 신념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 정부가 온갖 비정부기구(NGO)를 ‘외국 스파이’로 간주할 때는 단순히 비판세력에 재갈을 물리고 왕따시키려는 편법이 아니다. 서방이 러시아의 탐사보도 기자들과 반부패 운동을 후원하는 데는 표면적인 명분뿐 아니라 정권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 있다는 확신을 반영한다.”
따라서 러시아의 첩보 공작은 공격에 대한 대규모 반격 작전의 일환으로 정당화된다. 러시아 서부 스베르들로프스크의 블로거 에브게니 스미르노프는 지난 9월 이렇게 썼다. “미국인은 여러 해 동안 우리 선거에 개입했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개입한다. 당해 보니 기분이 어떤가? 러시아가 프로파간다를 통해 미국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미국에서 배운대로다.”
러시아의 미국 정치 개입 억지는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해결해야 할 과제다. 하지만 러시아·푸틴 그뿐 아니라 그 밖의 거의 다른 모든 주요 정책 분야와 관련해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불투명하다. 물론 트럼프의 승리 이후 한동안 러시아의 TV 토크쇼에는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푸틴에 관해 호의적 발언을 하는 영상자료들이 넘쳐났다. 트럼프는 푸틴을 가리켜 물러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보다 “더 강력한 지도자”라고 불렀으며 지난 7월에는 ABC 방송에서 “내가 듣기론 크림 공화국 사람들은 전보다 러시아에 속하는 쪽을 좋아한다더라”고 말했다. 지난 7월에는 크림공화국을 인정하고 제재를 해제할 용의가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트럼프는 “그렇다, 검토할 의향이 있다”고 답해 모스크바에 환호성이 울려퍼지게 했다. 러시아 공산당 원로 지도자 겐나디 주가노프는 “트럼프는 전쟁보다 평화를 지지하는 지도자라고 본다. 러시아의 이해를 존중하고 지난 정부처럼 우리 국경을 침략하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푸틴을 비판하기도 했다. 지난 9월 트윗을 통해 ‘러시아는 이른바 오바마 임기 중 크림반도를 점령했다’며 ‘모를 사람이 없을 텐데 왜 오바마는 비판 받지 않는가’라고 밝혔다. 그리고 러시아의 제재 해제 기대도 착각일 수 있다. 트럼프의 “예, 검토하겠다”는 반응은 많은 기자들이 지적하듯 그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고자 할 때 자주 던지는 대사에 지나지 않는다. 러시아 해커들이 트럼프의 당선을 도왔을지 모르지만 크렘린 정부가 트럼프에 실망할 경우엔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가령 러시아의 후원을 받는 분리주의자들과 우크라이나 정부의 싸움에서 정부를 강력히 지지하는 공화당 의원들에게 트럼프가 금방 굴복할 경우). 미국의 제44대, 43대 그리고 42대 대통령을 그렇게 괴롭혔던 모스크바의 무자비한 적을 제45대 대통령도 대적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푸틴의 온라인 특수부대가 현실세계에 어떤 피해를 줄 수 있는지 트럼프가 찾아보고자 한다면 지난해 12월 23일 시작된 사이버공격 관련 브리핑을 CIA에 요구하면 된다. 러시아 해커들이 우크라이나 서부 이바노-프랑키프스크 지역의 전력망을 장악했을 때는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현지 발전시설 프리카르파티야오블레네르고 본부 관계자들은 컴퓨터 통제권을 빼앗긴 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커서들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발전시설 중앙통제 시스템의 회로차단장치를 클릭해 변전시설들을 차례로 멈춰 세웠다. 30분도 안돼 주민 70만 명뿐 아니라 병원과 학교로의 전력공급이 중단됐다. 그것은 한 나라를 상대로 사상 최대의 그리고 가장 오래 지속된 사이버 공격의 신호탄이었다. 우크라이나 보안국에 따르면 그 후 9개월에 걸쳐 수도 키예프의 보리스필 국제공항 관제시스템으로부터 중앙선거위원회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의 핵심 인프라에 대한 해커들의 사보타주 시도가 1만5000회를 웃돌았다. 사이버 공격으로 인한 사망자는 아직껏 없지만 해커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수술실과 공항 기능을 정지시킬 수 있음을 증명했다.
미국 워싱턴의 싱크탱크 아틀란틱 카운슬의 알렉산더 클림버그 선임연구원은 “분명 루비콘강을 건넜다”고 말했다. 미래에 인터넷에서 전쟁이 어떻게 치러질지 묘사한 근간 예정 ‘다크웹(The Dark Web)’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사이버무기가 현대전 병기 대열에 공식 합류했다”고 덧붙였다.
푸틴은 러시아의 보안 당국자들에게 옛 소련 스파이들이 꿈꿔왔지만 달성하지 못한 임무를 부여한 듯하다. 직선적인 정보수집이라는 더 전통적인 역할에 상응하는 은밀한 파괴공작의 수행이다. 러시아의 공식 군사 독트린 최신 버전에선 현대의 이른바 혼성 전쟁의 핵심 과업을 이렇게 묘사한다. “정보전 수단을 사전 활용해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고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고 그 뒤 군사력 동원에 대한 세계 공동체의 여론을 우호적인 방향으로 유도한다.” 이를 위해 러시아 보안기관의 지휘 아래 모든 국가 자원은 “정보전 병력과 자원을 개발”할 책임이 있다.
운동가 단체 벨링캣의 미국인 연구원 애릭 톨러는 그 정보전의 공작 대상이었다. 2014년 영국인 블로거 엘리엇 히긴스가 설립한 밸링캣은 소셜미디어 포스트와 유튜브 동영상 같은 오픈소스(편집 또는 공유 가능) 자료를 이용해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러시아 군대의 불법 군사활동을 폭로해 왔다. 무엇보다도 2014년 7월 17일 우크라이나 동부 상공에서 말레이시아 항공 17편을 격추시킨 러시아군 BUK 로켓탄 발사기의 정확한 이동로를 추적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EU와 미국의 대 러시아 경제 제재조치는 러시아의 MH17편 격추 개입 그리고 그 뒤의 조사 방해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러시아가 종종 주장하듯 크림반도 합병이 문제가 아니었다. 모스크바는 자신들의 BUK 로켓은 격추와 관련 없다고 계속 주장해 왔다. 우크라이나 제트기나 우크라이나 지대공 미사일 등 갖가지 다른 격추 시나리오를 둘러댔다. 그러나 그 운명의 날 우크라이나 동부를 드나든 BUK의 진로를 추적한 수십 개의 정보원에 기초한 벨링캣의 증거는 단순히 인터넷 전문가 작품 수준을 뛰어넘는다. 네덜란드와 말레이시아 당국의 수사관들은 그에 기초해 관련 러시아 군인과 당국자들을 대상으로 공식 기소장을 작성하고 있다. 벨링캣은 MH17에 관한 진실 은폐 시도를 노출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러시아 경제에 대한 수십억 달러 투자를 중단시켰다. 크렘린 정부가 벨링캣 공격에 그렇게 열을 올리는 것도 그 때문인 듯하다.
지난 18개월 동안 톨러는 수시로 피싱(일종의 개인 금융정보 낚시) 메일을 받았다. 해커들이 그의 컴퓨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바이러스가 담겨 있었다(“우리 중 누군가 그 링크를 클릭할 만큼 멍청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보다 위협적인 일도 있었다. 지난여름 사이 친러시아 온라인 운동가 단체 사이버베르쿠트는 톨러가 키예프 정부와 관련됐다고 주장하는 개인적인 흑색선전을 시도했다. 우크라이나 정부 관료들의 이메일에 침투해 입수한 정보를 이용했다. 끝으로 러시아 투데이와 스푸트니크 같은 러시아 관영 TV 채널들은 벨링캣의 조사를 중상하는 방송을 꾸준히 내보내는 한편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미디어에선 일단의 ‘악플러’들이 시간 단위로 열심히 그들을 비방하는 댓글을 올린다.
톨러는 “우리는 러시아 정보 공작 시스템이 총력전을 펼치는 대상이 됐다”며 “그들이 러시아 정부나 그 앞잡이 단체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우리가 받은 피싱 메일이 DNC를 공격한 것과 같다”고 말했다.
지난 6월 러시아 해커들은 DNC의 이메일 데이터베이스에 침입해 힐러리 클린턴에 망신을 주는 이메일을 공개해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쳤다. 공격 배후의 해커 단체들 APT 28과 APT 29(미국 사이버 보안 업체들은 이들에게 ‘코지 베어’와 ‘팬시 베어’라는 더 그럴싸한 별명을 붙여줬다)는 각각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러시아군 정보기관 GRU와 연계됐다. 미국 국가정보국(DNI) 제임스 클래퍼 국장은 미국 대선에 대한 러시아 개입공작 혐의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DNC 해킹이 대선 캠페인 중 자신에게 도움을 줬지만 팬시 베어와 코지 베어의 공격표적이 광범위하다는 사실이 그 뒤 드러났음을 고려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지난 9월 세계반도핑기구에서 빼돌린 민감한 데이터의 공개에도 이들 단체가 연루됐다. 러시아 선수들이 불법 약물사용으로 대거 출전 금지된 반면 서방의 정상급 선수 여럿(미국 테니스 스타 비너스와 세레나 윌리엄스 자매 포함)이 올림픽 대회 중 금지약물을 복용하고도 제재대상에서 제외됐음이 데이터에서 드러났다. 그달 하순 이들 단체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전 유럽 동맹군 최고사령관 필립 브리들러브 장군의 이메일을 빼돌려 공개했다. 몇몇 유럽 우방국에 불만을 토로한 내용이었다. 그 뒤 백악관에서 퍼스트 레이디 미셸 오바마의 여권과 민감한 여행 정보를 빼돌려 공개했다. 지난 10월 팬시 베어는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의 이메일을 잇따라 공개하면서 제철 만난 미국 대선 시즌 해킹의 절정을 이뤘다. 파월 전 국무는 그 이메일에서 “나는 클린턴을 찍지 않겠다”며 그녀가 “오랫동안 통제 불가능의 야망과 탐욕을 드러냈으며 혁신적이지 않다”고 묘사했다.
러시아 정부가 이미 미국 정권 교체에 대비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차기 대통령과 보좌관들이 갖기에 충분한 증거들이다. 내년 1월 이후 러시아 해커들이 새로 미국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더라도 크렘린 당국은 관련되지 않았다고 신임 대통령에게 시치미를 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러시아 정부 개입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서방 첩보 소식통과 컴퓨터 보안 전문가들은 말한다. 러시아 공작원들이 러시아의 악명 높은 사이버 범죄자들과 연합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스파이들은 범죄자들을 앞잡이로 내세운다. 크렘린의 후원을 받는 해커 병기의 “절반 어쩌면 그 이상이 사이버 범죄에서 나왔다”고 인터넷 보안 전문가 클림버그는 말했다. 러시아 범죄자들과 러시아 스파이들 간의 협력체제는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통칭 ‘러시아 비즈니스 네트워크’로 알려진 해커들이 트로이 목마 바이러스로 감염시킨 컴퓨터를 유통시켜 봇넷으로 알려진 좀비 단말기 네트워크를 구축한 뒤 에스토니아의 인터넷 서버들을 공격해 다운시켰다. 그 공격은 분명 에스토니아가 옛 소련 적군 병사 기념비를 철거한 데 대한 응징인 듯했다. DNC 해킹 때와 마찬가지로 크렘린 정부는 발끈하며 개입하지 않았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러나 후속 조사에서 친크렘린 청년 단체 나시와 전 의회 측근 등이 관련된 것으로 밝혀졌다. 명확한 지휘계통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사이버 범죄자들이 크렘린의 사이버 해결사 역할을 하는 패턴이 드러났다.
한 영국 고위 보안 당국자는 ‘오프 더 레코드’로 이렇게 말했다. “정부가 깨끗하지 못한 일에 범죄자를 동원한 예가 없지 않았다. 과거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극우 국가주의단체 OAS에 대해 코르시카 마피아를, CIA는 쿠바인을 상대로 이탈리아 마피아를 동원했다. 그러나 우리 대다수는 냉전 종식으로 그런 구습도 배반자 독살 같은 수법과 함께 퇴출됐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착각으로 드러났다.”
지난 10월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조사 이후 국제경찰 인터폴이 발부한 영장으로 러시아 해커가 체코 프라하에서 체포됐다. 체코 경찰에서 예브게니 N으로만 신원이 알려진 해커는 2012년 비즈니스 전문 소셜네트워크 링크드인 대상의 대규모 해킹 연루 혐의로 체포됐다고 회사 대변인이 로이터 통신에 전했다. 그 사건으로 이용자 1억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돼 링크드인은 대대적인 비밀번호 재설정 작업을 벌여야 했다. 서방 정부에 컨설팅을 제공하는 한 사이버 전문가에 따르면 예브게니 N은 사법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 그가 해킹 활동 중 수집한 정보가 “그 뒤 분명 러시아 정부가 사주한 것으로 여겨지는 해킹에 사용됐다”는 의혹 때문이다.
러시아의 전면적인 해킹 공세에 복수의 정보 기관이 연루됐다. 그중 일부는 급속히 규모가 커지고 있다. FSB는 러시아 최대 보안기구이며 지난 9월 러시아 신문 콤메르산트 데일리에 유출된 문서에 따르면 국가보안을 담당하는 슈퍼 부서 신설 계획 덕분에 곧 더 확대될 예정이다. 갈레오티 연구원에 따르면 크렘린의 대통령부(Presidential Administration, 대통령 직속 행정기관)는 러시아의 그림자 전쟁에 연루된 가장 영향력 있는 기관이다. 스푸트니크와 영어 TV 뉴스 채널 ‘RT’ 같은 국영 방송매체가 담당하는 프로파간다 활동과 함께 러시아 해외정보국(SVR)이 관리하는 전통 스파이들의 활동을 기획·조정한다. ‘러시아 투데이’를 모체로 하는 RT는 전 세계 100여 개국 7억 명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다. 모스크바 야세네보 지역에 있는 SVR 본부는 2007년 이후 2배로 규모가 커졌다. ‘미국과학자연맹’이 운영하는 비밀주의 뉴스 블로그의 투명성 운동가 스티븐 애프터굿이 온라인에 올린 이미지들에서 명확히 밝혀진 정보들이다.
그 안의 책상과 사무실을 채우는 인력은 컴퓨터 전문가들뿐이 아니다. 러시아 전통 스파이들의 서방을 약화시키려는 노력은 옛 소련 스파이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영국의 전자감시기구 정부통신본부(GCHQ) 관료 출신 존 베일리스에 따르면 “요즘 영국 내 러시아 첩보요원이 냉전 절정기보다 더 많다.”
스웨덴의 SAPO 정보국의 수석 애널리스트 빌헬름 웅게는 지난 10월 스웨덴 주재 러시아 외교관 전체의 3분의 1이 정보 요원으로 1980년대보다 크게 늘어났으며 러시아는 “스웨덴에 대한 최대 첩보 위협”으로 떠올랐다고 경고했다. 지난 5월 폴란드 바르샤바 군사재판소는 규율상 문제가 있는 군인 관련 정보를 러시아 정보원에게 넘겨준 혐의를 받는 폴란드 육군 중령의 유죄를 확정했다(당국에 적발된 적 있는 군인들은 첩보원으로 모집하기가 더 쉽다고 검사들은 주장했다). 친서방 성향의 몬테네그로 공화국 장수 총리 밀로 주카노비치는 지난 10월 “강력한 외국 세력이 관련된” 쿠데타 기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몬테네그로 치안군은 10월 16일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 20명을 체포했으며 알렉산다르 부치치 세르비아 총리는 몬테네그로에서 체포된 사람들이 세르비아에서 러시아 정보요원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 음모를 꾸몄다고 공식 확인했다. 그리고 뷰치치 총리는 격앙된 목소리로 세르비아가 “세계 강국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도록” 방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몬테네그로 쿠데타에 대한 모스크바 정부의 개입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여러 유럽국가의 국내정치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 노력이 크게 증가했다는 증거는 비일비재하다. 지난 10월 체코 공화국의 BIS 정보국은 러시아가 자국 내에서 스파이 활동뿐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내부 긴장을 조성 또는 조장했다”고 비난했다. 예를 들어 국내의 극단주의자와 포퓰리스트 단체를 은밀히 후원하는 식이다. “그들은 국내·국제 문제에서 시종일관 친러시아 입장을 취하는 편이다. 또한 나토와 EU를 소리 높여 비판하고 체코 공화국도 영국처럼 EU 탈퇴를 모색해야 한다는 견해를 부채질한다.” 지난 9월 발표된 체코 정보국의 연례 보고서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러시아가 원하면 언제든지 체코 사회를 흔들거나 조종하는 것”이 크렘린 정부의 목표라고 단언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정부는 프랑스의 국민전선에도 적극적으로 손을 뻗친다. 국민전선의 반 이민, 반 EU 지도자 마린 르펜은 러시아 미디어에서 스타가 됐다. 국민전선은 2014년 모스크바 소재 ‘퍼스트 체크 러시안 은행’에서 900만 유로를 빌렸다고 공식 확인했다. 한편 지난 2월에는 당의 재무 책임자 발레랑 드 생-쥐스트는 ‘다른 어떤’ 러시아은행에서든 돈을 빌려 주기만 한다면 최대 2300만 유로를 대출 받겠다고 공공연히 떠벌렸다. 모스크바 도심의 영어 테마 주점에서 열린 비공개의 친트럼프 당선 축하 파티에 참석했을 때 특별 제작한 초상화 3개가 가장 눈에 잘 띄는 자리에 걸려 있었다. 트럼프·푸틴·르펜의 초상화였다. 르펜은 대 러시아 제재 해제, 모스크바가 주문한 미스트랄급 전함 2척 건조 계약의 승인을 촉구했다(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후 미국의 강력한 압력으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중단시켰다).
정치학자 세르게이 미케예프는 “우리는 정치의 신시대에 접어든다”며 “유럽은 워싱턴의 러시아공포증에 복종하는 대신 자유롭게 스스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르펜은 미국의 강압을 거부할 태세를 갖춘 애국자”라고 말했다.
르펜은 내년 봄 프랑스 대선에 후보로 나선다. 그녀가 선전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선거 주기상 비슷한 단계의 트럼프가 그랬듯이 어느 누구도 그녀의 승리를 점치지 않는다. 서방은 푸틴의 위협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자신이 “진정한 지도자”로 불렀던 인물과 맞서 싸우려는 노력을 지휘하는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이달 미국의 가장 중요한 우방 영국은 19억 파운드 규모의 새 국가 사이버 안보 전략을 발표했다. 필립 해먼드 재무장관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외 불량국가들의 사이버 공격 능력에 대적”할 수 있는 이른바 “완벽한 수준의 사이버 공격 역량”을 개발하려는 취지다. 영국은 사이버 혁신 센터를 신설하고 1900명의 인력을 충원해 보안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대략 2500명의 인적자원을 보유한 정보기관 MI6에 신규 인력 중 절반 이상이 배치될 예정이다. 확대계획에 정통한 전 비밀정보국(SIS) 관계자는 “확대 분야는 분명 소셜미디어 같은 인터넷 자원과 아울러 얼굴인식 기술의 활용”을 통한 정보 수집이라며 “과거처럼 요원들만 활용하는 방식에서 탈피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 GCHQ 관료 베일리스에 따르면 인력을 충원한다고 해도 영국 정보원 1명 당 러시아 정보원은 6배 이상이 된다.
서방 정보 기관들은 러시아 전문가 채용과 훈련에 안간힘을 쓴다. 미국은 1991년 옛 소련 붕괴 후 처음으로 러시아에 맞서기 위해 대 테러 자원을 방첩 분야로 돌렸다고 지난해까지 미 국방부의 러시아 담당 고위 책임자로 일한 에벌린 파카스는 말했다. 그는 최근 공영방송 NPR에 “솔직히 말해 지난 20여 년간 러시아 쪽 정보원들은 더 한가한 편이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상당히 활발하게 움직인다. 우리에게 유입되는 온갖 러시아어와 기타 언어 정보를 분석할 수 있는 언어 전문가를 물색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정보기관들에 러시아어 가능자 모집을 중단하고 푸틴 뜻대로 하도록 놔두라고 요구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가 취임할 때쯤엔 푸틴과의 공감대는 실상 슬로건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둘 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전성기에 강한 향수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 트럼프가 지난 3월 한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말이다. “누구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모두가 미국을 존경했다. 미국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둘 다 사회적 보수주의 이념을 신봉하고, 고학력 엘리트 계급에 대한 불신을 주장하고, 미국·러시아 근로계급의 지지에 의존한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의 이해를 나타낸 벤 다이어그램 도표에선 겹치는 부분이 크지 않다.
러시아는 유럽을 와해하고 분열시키려 한다. 하지만 미국에는 유럽이 번영되고 통합되고 평화로워야 이롭다. 시리아에서 러시아는 군사·외교적 지원으로 바샤르 알 아사드 같은 동맹 독재자의 권력을 지켜줄 수 있음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반면 미국은 오래 전부터 시리아에서 지하드(성전주의자) 아닌 야권 단체들을 모두 포함하는 민주 선거가 열려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를 또 다시 동맹 국가로 만들거나 실패할 경우 장기적인 내전을 사주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려 한다. EU에 가입해 탈소련 성공스토리가 되지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다. 그러나 미국 공화당 의원들(오바마 정부의 백악관과 발맞춰)은 예전부터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말하는 이른바 이들 ‘포로 국가’의 옛 러시아 지배자들에 대한 투쟁을 강력히 지지해 왔다.
게다가 발트해 연안지역도 있다. 트럼프가 필시 지금껏 많이 생각해 보지 않았을 유럽 북동부의 한 귀퉁이다. 트럼프와 푸틴의 잠재적인 우호 관계가 가장 먼저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지역이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같은 발트해 국가다. 모두 한때 옛 소련의 구성원으로 러시아 민족이 인구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들이다. 트럼프는 나토를 가리켜 “구시대적이고 극히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며 다른 동맹국들이 비용을 공정하게 분담하지 않을 경우 니토 회원국들의 집단방위 공약을 준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그런 발언을 되풀이할 뿐 아니라 나아가 이행할 경우 푸틴은 러시아 민족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워 러시아 군대나 현지 끄나풀 세력들에게 발트해 국가(모두 나토 회원국)들을 공격하거나 혼란을 유발하도록 지시할 수도 있다. 리투아니아의 사울리우스 스크베르넬리스 차기 총리는 지난 11월 9일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에서 “방위체제와 러시아 관련 발언이 대체로 대선 캠페인의 일환이기를 정말 희망한다”며 “지금은 대선 캠페인이 끝난 시점에서 더 패닉할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스크베르넬리스 차기 총리의 희망대로 될지는 앞으로 몇 개월 사이 밝혀질 듯하다. 운이 좋으면 리얼리티 TV 스타 출신의 트럼프가 미국 우방이 어떤 나라이고 리투아니아 같은 친미 국가들의 보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빠른 시일 안에 깨닫게 될 것이다. 트럼프는 지난 9월 “상당히 불완전한 세상이라 항상 친구를 선택할 수는 없다”며 “그래도 적은 언제든 알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차기 미국 대통령 트럼프로선 푸틴이 적인지 친구인지 알아내야 할 시간이 불과 몇 주 남지 않았다.
- 오웬 매튜스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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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은 두 사람이 사이 좋게 지낼 것이라고 시사한 트럼프의 거듭된 발언에 호응하는 듯했다. 지난 7월 28일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트럼프는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와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푸틴에게 단호히 대처하겠지만 현 정부의 방식과는 반대로 러시아에 우호적인 방향 말고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야 다른 나라와 함께 IS를 격퇴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내 사이에 싹트는 브로맨스(남자끼리의 친밀한 관계)는 내년 1월 20일 트럼프가 미국의 군통수권자가 되면서 갑자기 끝나버릴 수 있다. 그때 가면 트럼프는 미국과 그 우방들을 상대로 원한에 사무쳐 공격적인 첩보활동과 프로파간다(선전선동) 공세를 벌이는 옛 초강대국 러시아를 매일 상대해야 한다. 러시아는 냉전 이후 어느 때보다 가장 열렬하고 위협적인 존재가 됐다. 트럼프는 양자택일의 선택에 직면할 수 있다. 전임자들이 그랬듯 치열해지는 그림자 전쟁(공식 전쟁이 아니라 요인 암살이나 사이버 공격 등을 통한 은밀한 공격)을 계속하든지 아니면 대 러시아 제재를 끝내고 동유럽 등지에서 푸틴이 사실상 영향력을 키울 수 있게 하는 길이다. 트럼프는 답변을 내놓으라는 큰 압력을 받을 것이다. 지난 11월 초 영국 MI5의 앤드류 파커 국장이 그 국내 정보기관 수장으론 107년 만에 처음으로 인터뷰를 했다. 영국 가디언 신문에 프로파간다·첩보·전복·사이버 공격 등 해외에서 러시아의 외교정책을 갈수록 공격적으로 전개하는 각종 국가조직과 세력에 관해 설명했다. 러시아의 비밀 전쟁은 불법적인 사보타주·첩보활동·언론플레이 등 갖가지 수법뿐 아니라 파괴적 정치 운동 지원과 사이버인프라 심층 침투까지 망라한다. 한 번도 공직에 선출된 적 없는 미국 대통령으로선 취임 첫날부터 감당하기 벅찬 과제다.
트럼프의 승리로 러시아는 해킹·프로파간다·불신 조장으로 이뤄진 러시아의 강력한 혼합처방이 잘 먹혀들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프랑스·발트해안·독일 등지의 우파 후원을 통해 혼란을 계속 확산시키고자 하는 욕구가 어느 때보다 강하다. 마이클 맥폴 전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는 트럼프의 승리 후 “푸틴이 미국 선거에 개입해 큰 성공을 거뒀다”고 트윗을 띄웠다. 러시아 지도층은 미국 대선 레이스에 크렘린이 개입했다는 의혹과 무관하다고 잡아떼면서도 트럼프의 승리에 기뻐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푸틴 측근인 러시아 의회 비야체슬라프 니코노프 의원은 “처음에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이젠 힐러리”라며 “얼마 전까지 미국은 러시아가 석유뿐인 주유소, 지역강국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분명 우리가 미국의 대선 결과를 판가름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진 듯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고대 중국의 전략을 따른다. 강둑에 앉아 적의 시체가 떠내려가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러시아가 마냥 앉아서 기다리지는 않는다. 은밀하기는 해도 적극적으로 적대 공작을 벌인다. 2014년 3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그에 따른 국제적인 제재 이후 크렘린의 그림자 전쟁 강도가 높아졌다. 그 순간부터 “서방에 대한 반대 활동에서 자신들의 의미를 찾고 그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했다”고 MI5의 파커 국장은 가디언에 말했다. “러시아는 수십 년 전부터 은밀한 위협요소였다. 요즘엔 동원 가능한 수단이 갈수록 많아진다는 점이 다르다. 사이버공간에서 눈에 띄지 않게 위협적인 활동이 활발하다.”
지난 1년 사이 러시아는 몇몇 갈수록 대담한 고도의 작전을 진두 지휘했다. 우크라이나 전력망, 백악관 서버,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그리고 서방 정보기관들이 러시아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독일 의회 해킹 공격 등이 대표적이다. 서방 정부들은 뒤늦게 그 규모를 깨닫고 냉전 종식 후 최대의 방첩 작전을 준비한다. 첩보 기관들은 부랴부랴 방향을 전환해야 했다. 1991년 옛 소련 제국의 몰락으로 소련 진영과의 수십 년에 걸친 핵 대치정국이 사실상 종결되자 서방 정보기관들은 대부분 관심과 자원을 다른 지역, 특히 중동과 아프가니스탄으로 돌렸다. 이슬람주의 극단주의자들의 공격이 서방에 최대 위협으로 떠오르는 듯한 상황이었다. 그 문제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러시아가 제기하는 위협이 되살아나고 있다. 러시아의 새로운 스파이 군단을 움직이는 이념은 한 가지, 러시아의 힘을 약화시키고 모스크바의 뒷마당에서 불안과 혁명을 선동하려는 서방의 공작에 맞서 싸우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 관측통에는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대다수 러시아인(특히 푸틴과 그의 측근 실세 그룹)은 2003년과 2004년 조지아·우크라이나·키르기스스탄을 휩쓸었던 친민주화 혁명, 2012년 모스크바의 대규모 푸틴 반대 시위,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친러시아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 반대 폭동 모두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주도 아래 모스크바를 약화시키려는 음모의 일환이라고 확신한다. 체코 프라하 소재 국제관계연구소의 마크 갈레오티 선임 연구원은 “이는 단순히 웃어넘길 만한 구호가 아니라 진정한 신념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 정부가 온갖 비정부기구(NGO)를 ‘외국 스파이’로 간주할 때는 단순히 비판세력에 재갈을 물리고 왕따시키려는 편법이 아니다. 서방이 러시아의 탐사보도 기자들과 반부패 운동을 후원하는 데는 표면적인 명분뿐 아니라 정권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 있다는 확신을 반영한다.”
따라서 러시아의 첩보 공작은 공격에 대한 대규모 반격 작전의 일환으로 정당화된다. 러시아 서부 스베르들로프스크의 블로거 에브게니 스미르노프는 지난 9월 이렇게 썼다. “미국인은 여러 해 동안 우리 선거에 개입했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개입한다. 당해 보니 기분이 어떤가? 러시아가 프로파간다를 통해 미국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미국에서 배운대로다.”
러시아의 미국 정치 개입 억지는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해결해야 할 과제다. 하지만 러시아·푸틴 그뿐 아니라 그 밖의 거의 다른 모든 주요 정책 분야와 관련해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불투명하다. 물론 트럼프의 승리 이후 한동안 러시아의 TV 토크쇼에는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푸틴에 관해 호의적 발언을 하는 영상자료들이 넘쳐났다. 트럼프는 푸틴을 가리켜 물러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보다 “더 강력한 지도자”라고 불렀으며 지난 7월에는 ABC 방송에서 “내가 듣기론 크림 공화국 사람들은 전보다 러시아에 속하는 쪽을 좋아한다더라”고 말했다. 지난 7월에는 크림공화국을 인정하고 제재를 해제할 용의가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트럼프는 “그렇다, 검토할 의향이 있다”고 답해 모스크바에 환호성이 울려퍼지게 했다. 러시아 공산당 원로 지도자 겐나디 주가노프는 “트럼프는 전쟁보다 평화를 지지하는 지도자라고 본다. 러시아의 이해를 존중하고 지난 정부처럼 우리 국경을 침략하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푸틴을 비판하기도 했다. 지난 9월 트윗을 통해 ‘러시아는 이른바 오바마 임기 중 크림반도를 점령했다’며 ‘모를 사람이 없을 텐데 왜 오바마는 비판 받지 않는가’라고 밝혔다. 그리고 러시아의 제재 해제 기대도 착각일 수 있다. 트럼프의 “예, 검토하겠다”는 반응은 많은 기자들이 지적하듯 그가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고자 할 때 자주 던지는 대사에 지나지 않는다. 러시아 해커들이 트럼프의 당선을 도왔을지 모르지만 크렘린 정부가 트럼프에 실망할 경우엔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가령 러시아의 후원을 받는 분리주의자들과 우크라이나 정부의 싸움에서 정부를 강력히 지지하는 공화당 의원들에게 트럼프가 금방 굴복할 경우). 미국의 제44대, 43대 그리고 42대 대통령을 그렇게 괴롭혔던 모스크바의 무자비한 적을 제45대 대통령도 대적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이브리드 전쟁
미국 워싱턴의 싱크탱크 아틀란틱 카운슬의 알렉산더 클림버그 선임연구원은 “분명 루비콘강을 건넜다”고 말했다. 미래에 인터넷에서 전쟁이 어떻게 치러질지 묘사한 근간 예정 ‘다크웹(The Dark Web)’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사이버무기가 현대전 병기 대열에 공식 합류했다”고 덧붙였다.
푸틴은 러시아의 보안 당국자들에게 옛 소련 스파이들이 꿈꿔왔지만 달성하지 못한 임무를 부여한 듯하다. 직선적인 정보수집이라는 더 전통적인 역할에 상응하는 은밀한 파괴공작의 수행이다. 러시아의 공식 군사 독트린 최신 버전에선 현대의 이른바 혼성 전쟁의 핵심 과업을 이렇게 묘사한다. “정보전 수단을 사전 활용해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고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고 그 뒤 군사력 동원에 대한 세계 공동체의 여론을 우호적인 방향으로 유도한다.” 이를 위해 러시아 보안기관의 지휘 아래 모든 국가 자원은 “정보전 병력과 자원을 개발”할 책임이 있다.
운동가 단체 벨링캣의 미국인 연구원 애릭 톨러는 그 정보전의 공작 대상이었다. 2014년 영국인 블로거 엘리엇 히긴스가 설립한 밸링캣은 소셜미디어 포스트와 유튜브 동영상 같은 오픈소스(편집 또는 공유 가능) 자료를 이용해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러시아 군대의 불법 군사활동을 폭로해 왔다. 무엇보다도 2014년 7월 17일 우크라이나 동부 상공에서 말레이시아 항공 17편을 격추시킨 러시아군 BUK 로켓탄 발사기의 정확한 이동로를 추적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EU와 미국의 대 러시아 경제 제재조치는 러시아의 MH17편 격추 개입 그리고 그 뒤의 조사 방해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러시아가 종종 주장하듯 크림반도 합병이 문제가 아니었다. 모스크바는 자신들의 BUK 로켓은 격추와 관련 없다고 계속 주장해 왔다. 우크라이나 제트기나 우크라이나 지대공 미사일 등 갖가지 다른 격추 시나리오를 둘러댔다. 그러나 그 운명의 날 우크라이나 동부를 드나든 BUK의 진로를 추적한 수십 개의 정보원에 기초한 벨링캣의 증거는 단순히 인터넷 전문가 작품 수준을 뛰어넘는다. 네덜란드와 말레이시아 당국의 수사관들은 그에 기초해 관련 러시아 군인과 당국자들을 대상으로 공식 기소장을 작성하고 있다. 벨링캣은 MH17에 관한 진실 은폐 시도를 노출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러시아 경제에 대한 수십억 달러 투자를 중단시켰다. 크렘린 정부가 벨링캣 공격에 그렇게 열을 올리는 것도 그 때문인 듯하다.
지난 18개월 동안 톨러는 수시로 피싱(일종의 개인 금융정보 낚시) 메일을 받았다. 해커들이 그의 컴퓨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바이러스가 담겨 있었다(“우리 중 누군가 그 링크를 클릭할 만큼 멍청해야 하지만 말이다”). 그보다 위협적인 일도 있었다. 지난여름 사이 친러시아 온라인 운동가 단체 사이버베르쿠트는 톨러가 키예프 정부와 관련됐다고 주장하는 개인적인 흑색선전을 시도했다. 우크라이나 정부 관료들의 이메일에 침투해 입수한 정보를 이용했다. 끝으로 러시아 투데이와 스푸트니크 같은 러시아 관영 TV 채널들은 벨링캣의 조사를 중상하는 방송을 꾸준히 내보내는 한편 트위터를 비롯한 소셜미디어에선 일단의 ‘악플러’들이 시간 단위로 열심히 그들을 비방하는 댓글을 올린다.
톨러는 “우리는 러시아 정보 공작 시스템이 총력전을 펼치는 대상이 됐다”며 “그들이 러시아 정부나 그 앞잡이 단체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우리가 받은 피싱 메일이 DNC를 공격한 것과 같다”고 말했다.
지난 6월 러시아 해커들은 DNC의 이메일 데이터베이스에 침입해 힐러리 클린턴에 망신을 주는 이메일을 공개해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쳤다. 공격 배후의 해커 단체들 APT 28과 APT 29(미국 사이버 보안 업체들은 이들에게 ‘코지 베어’와 ‘팬시 베어’라는 더 그럴싸한 별명을 붙여줬다)는 각각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러시아군 정보기관 GRU와 연계됐다. 미국 국가정보국(DNI) 제임스 클래퍼 국장은 미국 대선에 대한 러시아 개입공작 혐의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DNC 해킹이 대선 캠페인 중 자신에게 도움을 줬지만 팬시 베어와 코지 베어의 공격표적이 광범위하다는 사실이 그 뒤 드러났음을 고려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지난 9월 세계반도핑기구에서 빼돌린 민감한 데이터의 공개에도 이들 단체가 연루됐다. 러시아 선수들이 불법 약물사용으로 대거 출전 금지된 반면 서방의 정상급 선수 여럿(미국 테니스 스타 비너스와 세레나 윌리엄스 자매 포함)이 올림픽 대회 중 금지약물을 복용하고도 제재대상에서 제외됐음이 데이터에서 드러났다. 그달 하순 이들 단체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전 유럽 동맹군 최고사령관 필립 브리들러브 장군의 이메일을 빼돌려 공개했다. 몇몇 유럽 우방국에 불만을 토로한 내용이었다. 그 뒤 백악관에서 퍼스트 레이디 미셸 오바마의 여권과 민감한 여행 정보를 빼돌려 공개했다. 지난 10월 팬시 베어는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의 이메일을 잇따라 공개하면서 제철 만난 미국 대선 시즌 해킹의 절정을 이뤘다. 파월 전 국무는 그 이메일에서 “나는 클린턴을 찍지 않겠다”며 그녀가 “오랫동안 통제 불가능의 야망과 탐욕을 드러냈으며 혁신적이지 않다”고 묘사했다.
러시아 정부가 이미 미국 정권 교체에 대비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차기 대통령과 보좌관들이 갖기에 충분한 증거들이다.
사기꾼과 스파이들
한 영국 고위 보안 당국자는 ‘오프 더 레코드’로 이렇게 말했다. “정부가 깨끗하지 못한 일에 범죄자를 동원한 예가 없지 않았다. 과거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극우 국가주의단체 OAS에 대해 코르시카 마피아를, CIA는 쿠바인을 상대로 이탈리아 마피아를 동원했다. 그러나 우리 대다수는 냉전 종식으로 그런 구습도 배반자 독살 같은 수법과 함께 퇴출됐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착각으로 드러났다.”
지난 10월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조사 이후 국제경찰 인터폴이 발부한 영장으로 러시아 해커가 체코 프라하에서 체포됐다. 체코 경찰에서 예브게니 N으로만 신원이 알려진 해커는 2012년 비즈니스 전문 소셜네트워크 링크드인 대상의 대규모 해킹 연루 혐의로 체포됐다고 회사 대변인이 로이터 통신에 전했다. 그 사건으로 이용자 1억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돼 링크드인은 대대적인 비밀번호 재설정 작업을 벌여야 했다. 서방 정부에 컨설팅을 제공하는 한 사이버 전문가에 따르면 예브게니 N은 사법당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다. 그가 해킹 활동 중 수집한 정보가 “그 뒤 분명 러시아 정부가 사주한 것으로 여겨지는 해킹에 사용됐다”는 의혹 때문이다.
러시아의 전면적인 해킹 공세에 복수의 정보 기관이 연루됐다. 그중 일부는 급속히 규모가 커지고 있다. FSB는 러시아 최대 보안기구이며 지난 9월 러시아 신문 콤메르산트 데일리에 유출된 문서에 따르면 국가보안을 담당하는 슈퍼 부서 신설 계획 덕분에 곧 더 확대될 예정이다. 갈레오티 연구원에 따르면 크렘린의 대통령부(Presidential Administration, 대통령 직속 행정기관)는 러시아의 그림자 전쟁에 연루된 가장 영향력 있는 기관이다. 스푸트니크와 영어 TV 뉴스 채널 ‘RT’ 같은 국영 방송매체가 담당하는 프로파간다 활동과 함께 러시아 해외정보국(SVR)이 관리하는 전통 스파이들의 활동을 기획·조정한다. ‘러시아 투데이’를 모체로 하는 RT는 전 세계 100여 개국 7억 명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다. 모스크바 야세네보 지역에 있는 SVR 본부는 2007년 이후 2배로 규모가 커졌다. ‘미국과학자연맹’이 운영하는 비밀주의 뉴스 블로그의 투명성 운동가 스티븐 애프터굿이 온라인에 올린 이미지들에서 명확히 밝혀진 정보들이다.
그 안의 책상과 사무실을 채우는 인력은 컴퓨터 전문가들뿐이 아니다. 러시아 전통 스파이들의 서방을 약화시키려는 노력은 옛 소련 스파이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영국의 전자감시기구 정부통신본부(GCHQ) 관료 출신 존 베일리스에 따르면 “요즘 영국 내 러시아 첩보요원이 냉전 절정기보다 더 많다.”
스웨덴의 SAPO 정보국의 수석 애널리스트 빌헬름 웅게는 지난 10월 스웨덴 주재 러시아 외교관 전체의 3분의 1이 정보 요원으로 1980년대보다 크게 늘어났으며 러시아는 “스웨덴에 대한 최대 첩보 위협”으로 떠올랐다고 경고했다. 지난 5월 폴란드 바르샤바 군사재판소는 규율상 문제가 있는 군인 관련 정보를 러시아 정보원에게 넘겨준 혐의를 받는 폴란드 육군 중령의 유죄를 확정했다(당국에 적발된 적 있는 군인들은 첩보원으로 모집하기가 더 쉽다고 검사들은 주장했다). 친서방 성향의 몬테네그로 공화국 장수 총리 밀로 주카노비치는 지난 10월 “강력한 외국 세력이 관련된” 쿠데타 기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몬테네그로 치안군은 10월 16일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 20명을 체포했으며 알렉산다르 부치치 세르비아 총리는 몬테네그로에서 체포된 사람들이 세르비아에서 러시아 정보요원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 음모를 꾸몄다고 공식 확인했다. 그리고 뷰치치 총리는 격앙된 목소리로 세르비아가 “세계 강국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도록” 방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몬테네그로 쿠데타에 대한 모스크바 정부의 개입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여러 유럽국가의 국내정치에 대한 러시아의 개입 노력이 크게 증가했다는 증거는 비일비재하다. 지난 10월 체코 공화국의 BIS 정보국은 러시아가 자국 내에서 스파이 활동뿐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내부 긴장을 조성 또는 조장했다”고 비난했다. 예를 들어 국내의 극단주의자와 포퓰리스트 단체를 은밀히 후원하는 식이다. “그들은 국내·국제 문제에서 시종일관 친러시아 입장을 취하는 편이다. 또한 나토와 EU를 소리 높여 비판하고 체코 공화국도 영국처럼 EU 탈퇴를 모색해야 한다는 견해를 부채질한다.” 지난 9월 발표된 체코 정보국의 연례 보고서는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러시아가 원하면 언제든지 체코 사회를 흔들거나 조종하는 것”이 크렘린 정부의 목표라고 단언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정부는 프랑스의 국민전선에도 적극적으로 손을 뻗친다. 국민전선의 반 이민, 반 EU 지도자 마린 르펜은 러시아 미디어에서 스타가 됐다. 국민전선은 2014년 모스크바 소재 ‘퍼스트 체크 러시안 은행’에서 900만 유로를 빌렸다고 공식 확인했다. 한편 지난 2월에는 당의 재무 책임자 발레랑 드 생-쥐스트는 ‘다른 어떤’ 러시아은행에서든 돈을 빌려 주기만 한다면 최대 2300만 유로를 대출 받겠다고 공공연히 떠벌렸다. 모스크바 도심의 영어 테마 주점에서 열린 비공개의 친트럼프 당선 축하 파티에 참석했을 때 특별 제작한 초상화 3개가 가장 눈에 잘 띄는 자리에 걸려 있었다. 트럼프·푸틴·르펜의 초상화였다. 르펜은 대 러시아 제재 해제, 모스크바가 주문한 미스트랄급 전함 2척 건조 계약의 승인을 촉구했다(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후 미국의 강력한 압력으로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중단시켰다).
정치학자 세르게이 미케예프는 “우리는 정치의 신시대에 접어든다”며 “유럽은 워싱턴의 러시아공포증에 복종하는 대신 자유롭게 스스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르펜은 미국의 강압을 거부할 태세를 갖춘 애국자”라고 말했다.
르펜은 내년 봄 프랑스 대선에 후보로 나선다. 그녀가 선전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선거 주기상 비슷한 단계의 트럼프가 그랬듯이 어느 누구도 그녀의 승리를 점치지 않는다.
적이냐 친구냐
서방 정보 기관들은 러시아 전문가 채용과 훈련에 안간힘을 쓴다. 미국은 1991년 옛 소련 붕괴 후 처음으로 러시아에 맞서기 위해 대 테러 자원을 방첩 분야로 돌렸다고 지난해까지 미 국방부의 러시아 담당 고위 책임자로 일한 에벌린 파카스는 말했다. 그는 최근 공영방송 NPR에 “솔직히 말해 지난 20여 년간 러시아 쪽 정보원들은 더 한가한 편이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상당히 활발하게 움직인다. 우리에게 유입되는 온갖 러시아어와 기타 언어 정보를 분석할 수 있는 언어 전문가를 물색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정보기관들에 러시아어 가능자 모집을 중단하고 푸틴 뜻대로 하도록 놔두라고 요구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그가 취임할 때쯤엔 푸틴과의 공감대는 실상 슬로건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둘 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전성기에 강한 향수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 트럼프가 지난 3월 한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말이다. “누구도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모두가 미국을 존경했다. 미국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둘 다 사회적 보수주의 이념을 신봉하고, 고학력 엘리트 계급에 대한 불신을 주장하고, 미국·러시아 근로계급의 지지에 의존한다. 그러나 미국과 러시아의 이해를 나타낸 벤 다이어그램 도표에선 겹치는 부분이 크지 않다.
러시아는 유럽을 와해하고 분열시키려 한다. 하지만 미국에는 유럽이 번영되고 통합되고 평화로워야 이롭다. 시리아에서 러시아는 군사·외교적 지원으로 바샤르 알 아사드 같은 동맹 독재자의 권력을 지켜줄 수 있음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반면 미국은 오래 전부터 시리아에서 지하드(성전주의자) 아닌 야권 단체들을 모두 포함하는 민주 선거가 열려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를 또 다시 동맹 국가로 만들거나 실패할 경우 장기적인 내전을 사주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려 한다. EU에 가입해 탈소련 성공스토리가 되지 못하게 막으려는 의도다. 그러나 미국 공화당 의원들(오바마 정부의 백악관과 발맞춰)은 예전부터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말하는 이른바 이들 ‘포로 국가’의 옛 러시아 지배자들에 대한 투쟁을 강력히 지지해 왔다.
게다가 발트해 연안지역도 있다. 트럼프가 필시 지금껏 많이 생각해 보지 않았을 유럽 북동부의 한 귀퉁이다. 트럼프와 푸틴의 잠재적인 우호 관계가 가장 먼저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지역이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같은 발트해 국가다. 모두 한때 옛 소련의 구성원으로 러시아 민족이 인구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들이다. 트럼프는 나토를 가리켜 “구시대적이고 극히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며 다른 동맹국들이 비용을 공정하게 분담하지 않을 경우 니토 회원국들의 집단방위 공약을 준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그런 발언을 되풀이할 뿐 아니라 나아가 이행할 경우 푸틴은 러시아 민족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워 러시아 군대나 현지 끄나풀 세력들에게 발트해 국가(모두 나토 회원국)들을 공격하거나 혼란을 유발하도록 지시할 수도 있다. 리투아니아의 사울리우스 스크베르넬리스 차기 총리는 지난 11월 9일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에서 “방위체제와 러시아 관련 발언이 대체로 대선 캠페인의 일환이기를 정말 희망한다”며 “지금은 대선 캠페인이 끝난 시점에서 더 패닉할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스크베르넬리스 차기 총리의 희망대로 될지는 앞으로 몇 개월 사이 밝혀질 듯하다. 운이 좋으면 리얼리티 TV 스타 출신의 트럼프가 미국 우방이 어떤 나라이고 리투아니아 같은 친미 국가들의 보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빠른 시일 안에 깨닫게 될 것이다. 트럼프는 지난 9월 “상당히 불완전한 세상이라 항상 친구를 선택할 수는 없다”며 “그래도 적은 언제든 알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차기 미국 대통령 트럼프로선 푸틴이 적인지 친구인지 알아내야 할 시간이 불과 몇 주 남지 않았다.
- 오웬 매튜스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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