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치락 뒤치락 세계 표준전쟁史] 기업의 흥망 가른 ‘왕좌의 게임’
[엎치락 뒤치락 세계 표준전쟁史] 기업의 흥망 가른 ‘왕좌의 게임’
전기 표준 대결서 패배한 에디슨, VCR 운명 가른 포르노...인터넷 익스플로러 처럼 표준 뒤집힌 사례도 점점 늘어나 2월 14일은 숨겨둔 사랑을 고백하는 밸런타인데이로 알려져 있다. 1876년 2월 14일에도 많은 연인이 사랑을 고백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해의 밸런타인데이는 기술 발전의 역사에서 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기도 하다. 이날 미국에서는 전화와 관련한 특허가 동시에 두 건 출원됐다. 전화의 발명자로 알려진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과 당시 유명했던 전신 엔지니어 엘리사 그레이가 출원자였다.
그레이는 전화의 특허를 놓고 벨과 충돌한다는 얘기를 접한 후 돌연 자신의 특허를 포기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벨이 발명을 공증받았던 1876년 1월 20일이라는 시점이 그레이보다 앞섰다. 그렇지만 더 중요했던 이유는 당시 그레이가 “전화라는 장난감에 대한 특허를 가지고 다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당시 가장 효율적인 통신 수단이었던 전신을 다루는 엔지니어가 보기에 전화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2년도 지나지 않아 그레이는 이 결정을 후회하기 시작했고, 그의 후회는 평생 이어졌다. 벨의 특허는 같은 해 3월 7일 인가됐다. 이 특허는 역사를 통해 전례를 찾기 힘들 600여 건의 법정 소송을 낳았다. 에디슨을 포함한 수많은 발명가와 엔지니어가 벨 이전에 전화를 발명했다고 소송을 걸었다. 이 중에는 이탈리아 발명가였던 안토니오 메우치 같이 상당히 신빙성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증거를 수반한 벨의 우선권은 확실했고, 그는 자신의 첫 특허를 가지고 이 모든 소송에서 승리했다.
벨은 자신의 특허를 이용해서 1876년부터 첫 17년 동안 다른 발명가나 사업가가 미국에서 전화사업을 하기 힘들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전화라는 기술은 전화 회선에 서비스 요금을 지불하는 것인데, 서비스를 선점한 벨의 전화 회선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전화를 새로 놓는 사람은 다른 회사가 아닌 벨에 가입하기를 원했다. 다른 회사가 더 싸게 서비스를 제공해도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면 값싼 서비스라도 의미가 없었다.
특허가 중요한 건 그것이 기술 표준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표준을 장악하는 게 중요하다. 표준을 둘러싼 경쟁은 기술의 역사를 장식하는 ‘혈투’다. 표준을 장악한 조직은 그 사업의 강자로 부상하며, 장악에 실패한 조직은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를 감출 정도로 표준의 보상과 대가도 분명하다. 표준을 둘러싼 경쟁은 ‘표준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치열하다. 첫 번째 표준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례는 철도의 두 레일 간격을 의미하는 표준궤(標準軌, standard gauge)를 둘러싼 것이었다. 최초로 철도를 발명하고 사업을 시작한 영국의 조지 스티븐슨은 탄광에서 석탄을 나를 때 쓰던 마차의 표준을 채용해서 레일의 간격을 4피트 8인치(1.42m)로 하는 표준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당대 최고 엔지니어라는 명성을 얻은 이삼바드 킹덤 브루넬은 마차보다 훨씬 더 무거운 열차가 이렇게 좁은 레일을 달리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고 7피트4분의 1인치의(2.14m) 넓은 표준을 제창했다. 양측은 자신의 표준을 사용해서 철도를 건설했는데, 1845년에 영국 정부는 양측이 건설한 철도를 비교해서 더 긴 철도를 깔았던 스티븐슨의 표준궤를 표준으로 선정했다. 그렇지만 브루넬의 표준은 1892년까지 글라우스터-버밍엄의 구간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른 표준 전쟁의 사례는 19세기 말엽에 전기가 등장한 후 벌어진 AC(교류)와 DC(직류) 표준 경쟁이다. 처음으로 발전-배전 시스템을 설계했던 토머스 에디슨은 DC를 사용했고, 이에 도전장을 낸 후발 주자인 웨스팅하우스사는 고압 송전이 가능한 AC를 채택했다. 두 시스템에는 모두 약점과 강점이 있었다. DC의 약점은 짧은 송전거리였고, 변압기를 사용해서 전압의 변화를 쉽게 하면서 장거리 송전을 했던 AC에는 모터가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에디슨은 DC를 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고압으로 전송되는 AC의 위험을 집중 홍보했다. 심지어 고압 AC를 쓰는 전기의자를 이용한 사형 집행을 하자는 로비를 해, AC에 ‘처형자의 전류’라는 이름을 붙였다. 실제로 얼마 후 에디슨의 추종자는 전기의자를 발명했고, 1890년 부인을 도끼로 죽인 살인자 윌리엄 케믈러에게 전기의자를 사용한 사형이 집행했다. 처음엔 1000V 고압 AC 전류가 17초 동안 그의 몸에 흐르게 했다. 그럼에도 그는 죽지 않았고, 검시관은 전압을 2000V로 올렸다. 고압 전류는 케믈러의 살을 태웠고, 연기와 냄새가 방을 가득 메웠다. 목격자들은 전기의자가 교수형보다 훨씬 더 잔인하다고 평가를 했다. 웨스팅하우스사는 “차라리 도끼를 사용하는 것이 더 인간적일 것”이라는 냉소적인 비평을 냈다. 이 모든 해프닝은 사람을 새까맣게 태워 죽일 수 있는 AC와 달리 DC는 안전하다는 사실을 홍보하려고 했던 에디슨의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에디슨의 이러한 전략은 성공했을까. 에디슨의 홍보와 로비에도 AC는 계속 확장됐고, 결국 지금 우리가 보듯이 전력 송전-배전의 표준으로 채택됐다. 니콜라 테슬라 등이 AC 모터를 발명했고, 삼상 AC 전류와 같은 다상 전류가 나온 게 AC 승리에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이즈음 에디슨이 전기 사업에서 손을 뗀 것도 AC 표준이 확대된 배경이 됐다. 당시 사람들은 이후 DC가 역사의 커튼 뒤로 금방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지만 실제 역사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 깔려 있던 DC는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존속했다. 이러한 DC의 존속은 로터리 컨버터(rotary converter) 같은 기술이 발명되면서 가능했다. 로터리 컨버터는 고압으로 전송된 AC를 감압한 뒤에 DC로 바꾸어주는 기술이다. 이미 DC를 사용하던 지역에서는 배전망이나 전기제품을 AC용으로 바꾸지 않고도 로터리 컨버터를 통해 기존의 DC를 그대로 쓸 수 있었던 것이다. AC는 DC를 바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공존하면서 서서히 대체했다. 경제사학자 폴 데이비드는 경쟁하는 두 기술을 이어주는 로터리 컨버터 같은 기술을 ‘게이트웨이 기술(gateway technology)’이라고 불렀다. 그는 표준 전쟁에서 경쟁하던 기술 중 하나가 급작스럽게 ‘멸종’하기보다는 게이트웨이 기술의 등장으로 두 기술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지속된 경우가 많다고 주장한다. 앞서 살펴본 철도 표준에도 게이트웨이 기술이 있었다. 영국 글라우스터역은 서로 다른 두 철도 표준이 만나던 지점이다. 이곳에는 수많은 짐꾼이 일하고 있었다. 버밍엄으로 가는 승객들은 글라우스터역에서 열차를 갈아타야 했는데, 승객들이 열차를 갈아타는 동안에 능숙한 짐꾼들이 승객의 가방과 짐을 새 열차로 옮겨 실었다. 이 숙련된 짐꾼들은 두 표준을 오랫동안 공존케 했던 일종의 게이트웨이 기술이었던 것이다.
게이트웨이 기술이 있다 해도 표준을 선점하는 것은 표준 경쟁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일례로 전화를 걸 때 쓰는 인사말 ‘헬로(Hello)’는 에디슨이 배포한 유통설명서에서 사용되었고, 이로부터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와 달리 전화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래엄 벨은 뱃사람들이 사용하던 ‘어호이(Ahoy)’라는 인사말을 채택했는데, 이미 ‘헬로’를 쓰던 사람들은 새로운 인사말을 쓰는 것을 어색해 했다. 결국 ‘어호이’는 사라졌다. 에디슨은 전화 기술의 표준 선점에서는 벨에 뒤졌지만, 전화 인사말의 표준 경쟁에서는 벨을 누른 셈이다.
컴퓨터 자판의 ‘쿼티 키보드(글자 자판 맨 위 왼쪽 문자의 배열이 qwerty인 자판)’도 표준 선점의 위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쿼티 키보드는 타자기에서 유래했다. 글자 자판이 바(bar)와 직접 연결되어 있던 타자기에서는 자주 함께 쓰는 단어를 최대한 떨어뜨려 글자를 엉키지 않게 해야 했고, 쿼티는 여기에 맞게 디자인됐다. 그런데 이 디자인은 바를 사용하지 않는 컴퓨터에서도 계속 사용된다. 더 합리적인 자판을 만들어서 배포하려는 노력이 여러 번 있었지만 쿼티 자판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 번 쿼티 자판을 가지고 타이핑을 배운 사람들이 다른 자판으로 바꾸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장이 처음 열릴 때 표준을 선점하면 나중에 시장이 커지고 심지어 기술이 달라져도 그 선점효과가 지속되는 현상을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 혹은 ‘네트워크 외부효과(network externalities)’라고 한다.
다만 표준 선점이 절대적이거나 영원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거나 유일한 표준이었던 것이 바뀌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금 인터넷을 사용하는 젊은이들은 생소하겠지만, 웹 브라우저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브라우저 마켓을 장악했던 것은 ‘넷스케이프’라는 브라우저였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인터넷 사업에 본격 뛰어들었을 때 넷스케이프는 90% 이상의 시장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MS는 OS 시장을 독점하던 윈도에 인터넷 익스플로러(IE)를 무료로 끼워서 판매함으로써 시장 점유율을 높였고, 결국 넷스케이프를 몰아내고 브라우저 시장을 장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난공불락으로 보였던 IE도 최근에는 오픈 소스를 이용한 ‘파이어폭스’, 구글 ‘크롬’의 공격을 받으면서 시장의 뒤편으로 물러나고 있다. 2005년 미국에서 IE는 점유율 70%를 보였고, 넷스케이프는 0.4%, 파이어폭스가 23% 정도였다. 크롬이 출시된 2008년 하반기에는 IE와 파이어폭스가 비슷하게 45%를 각각 점유했다. 2012년부터는 크롬이 40%대로 1위, 파이어폭스가 2위, IE는 10%대인 3위로 떨어졌고, 2017년 1월 현재 IE는 5%대에 머물고 있는 반면 크롬은 74%의 독점적인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따지고 보면 파이어폭스는 모질라에서, 모질라는 넷스케이프에서 파생된 시스템이다. 죽은 넷스케이프가 산 IE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선점효과를 붕괴시키려면 다양한 전략이 필요하다. 컬러 TV가 개발되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방송국과 가전제품 회사들은 곧 컬러 TV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방송국인 CBS와 흑백 TV 수상기를 제조하던 RCA가 컬러 TV의 표준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는 1950년 CBS의 컬러 TV를 표준으로 채택했다. 그렇지만 RCA를 끌어들이지 못한 상황에서 CBS의 컬러 TV를 제조하는 업체가 없었다. 더구나 결정적으로 CBS의 표준은 흑백 TV와의 ‘후방 호환성(backward compatibility)’이 없었다. 후방 호환성은 신기술을 써서 구기술의 기능이나 서비스를 그대로 누릴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CBS의 컬러 TV로 기존의 흑백 방송을 볼 수 없었다는 얘기다. RCA는 표준을 뒤집기 위해서 여러 전략을 썼다. 가장 절묘했던 것은 흑백 TV를 싸게 공급한 것이었다. TV가 없던 소비자들은 이 기회에 흑백 TV를 장만했다. 이들은 굳이 CBS의 컬러 방송을 보기 위해서 비싼 컬러 TV를 구입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1951년 6월, CBS가 컬러 방송을 시작했을 때 컬러 TV를 소유한 사람은 미국 전체에서 수십 가구에 불과했다. 이런 고착 상황이 해결되지 않자 결국 FCC는 1953년에 기존의 결정을 번복하고 RCA의 표준을 컬러 TV의 표준으로 승인했다.
더 극적인 표준 전쟁 사례는 이른바 ‘포맷 전쟁’이라 불리는 VCR의 사례다. 지금은 박물관에서만 찾아볼 수 있지만 VCR은 30년 가까이 영상을 기록하고, 안방에서 영화를 관람할 수 있게 한 고맙고도 획기적인 영상저장 기술이다. VCR은 소니가 1975년 베타맥스를 출시하면서 상용화됐다. 이에 대항했던 JVC사는 VHS라는 새로운 기술을 1976년에 시장에 내놨다.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소니는 도시바·산요·NEC·아이와·파이오니어사와 연합을 하고 있었고, JVC는 소니의 라이벌인 파나소닉·히타치·미쓰비치·샤프·아카이 등과 동맹 전선을 구축했다. 당시 사람들은 베타맥스가 VHS에 비해 화질이 더 우수하다는 데에 동의했다. 이에 따라 처음에는 기술력이 앞선 베타맥스가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1981년 시장점유율은 베타맥스 25%, VHS 75%로 역전됐고, 곧 이 차이는 10%대 90%로 벌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니의 회장이었던 아키오 모리타는 다른 회사가 베타맥스 테이프를 상영하는 비디오 플레이어를 만들어 팔지 못하게 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회고했다. 표준 기술을 배타적으로 운용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VHS를 만든 JVC는 다른 회사들도 약간의 수수료만 내면 얼마든지 VHS 기계를 만들게 허용했다. 그 결과 더 많은 사람이 VHS 기계를 샀고, 먼저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임계질량’에 도달했다는 분석이다. 또 다른 가설은 저장 가능한 영상의 시간 차이다. 베타맥스의 표준은 1시간이고, VHS의 표준은 2시간이다. 베타맥스는 시청자들이 TV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다른 채널에서 하는 드라마를 녹음해서 이를 나중에 보는 것을 생각해서 만든 기술이었다. VHS는 그보다 더 긴 영화를 녹화하거나 녹화한 영화를 빌려보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시간의 차이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VHS가 홈 무비를 대여해서 보기에 훨씬 더 적합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분석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다. 사실 VHS가 나오기 전에 소니는 경쟁사인 JVC에 라이선스를 제안한 적이 있다. 소니가 처음부터 베타맥스를 배타적인 표준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영상 시간에 대한 분석 역시 허점이 있다. 당시 비디오를 이용하는 사람 중에 실제로 TV를 녹화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홈 무비 대여 사업은 표준 전쟁이 다 끝난 후인 1980년대 중반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VHS가 베타맥스를 누를 수 있었을까. 몇몇 분석가들은 소니가 당시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활성화되던 포르노 산업과 제휴를 하지 않은 데 비해서, VHS는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기술을 포르노 영화의 표준으로 만들게 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초기 비디오의 용도는 TV를 녹화하는 것도, 홈 무비를 대여해서 보는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비디오가 포르노를 즐기는 데 더할 수 없이 적합하다는 것을 알았고, 실제로 VHS로 제작된 포르노 테이프는 미국 중산층의 가정을 파고들면서 비디오 시장을 확장했다. 예상 못했던 포르노라는 콘텐트가 표준의 운명을 좌우한 셈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30년이 지난 후 비슷한 표준 전쟁이 다시 벌어졌다는 것이다. DVD가 나오고 이 뒤를 이은 차세대 광저장장치가 만들어지면서다. 고화질 비디오 표준을 놓고 베타맥스로 고배를 마셨던 소니의 블루레이와 도시바의 HD-DVD가 격돌했다. 소니 진영에는 히타치·파나소닉·삼성 등이 합류했고, 도시바는 NEC·산요·MS·RCA·인텔 등과 연계했다. 당시 소니는 베타맥스 때와 마찬가지로 블루레이 표준에 포르노 콘텐트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발표했지만 슬쩍 일본 외의 지역에서는 포르노를 허용했고, 이어 2008년 세계 최대 영화사인 워너 브라더스가 블루레이 표준만을 채택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시장은 블루레이로 급격히 기울었다.
표준은 선점하는 것도 어렵지만, 장악한 표준을 지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적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기술이 기술적으로 우월하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표준으로 안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사용한다고 표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처음에 시장을 장악했던 기술이 표준에서 밀려나고, 90% 이상의 사용자를 가졌던 기술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경우도 많다. 처음에 표준을 선점했어도 표준에 도전하는 경쟁 기술과 싸워서 이겨야 하고, 새로운 기술 개발을 통해서 사용자들을 자신의 네트워크에 묶어 두어야 한다. 적을 알고, 동맹을 맺어서 아군의 힘을 키우고, 어떤 무기를 사용해야 적을 이길 수 있는지를 간파하는 전쟁의 전략이 표준 전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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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는 전화의 특허를 놓고 벨과 충돌한다는 얘기를 접한 후 돌연 자신의 특허를 포기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벨이 발명을 공증받았던 1876년 1월 20일이라는 시점이 그레이보다 앞섰다. 그렇지만 더 중요했던 이유는 당시 그레이가 “전화라는 장난감에 대한 특허를 가지고 다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당시 가장 효율적인 통신 수단이었던 전신을 다루는 엔지니어가 보기에 전화는 장난감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2년도 지나지 않아 그레이는 이 결정을 후회하기 시작했고, 그의 후회는 평생 이어졌다.
벨, 표준 선점으로 전화시장 장악
벨은 자신의 특허를 이용해서 1876년부터 첫 17년 동안 다른 발명가나 사업가가 미국에서 전화사업을 하기 힘들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전화라는 기술은 전화 회선에 서비스 요금을 지불하는 것인데, 서비스를 선점한 벨의 전화 회선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전화를 새로 놓는 사람은 다른 회사가 아닌 벨에 가입하기를 원했다. 다른 회사가 더 싸게 서비스를 제공해도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면 값싼 서비스라도 의미가 없었다.
특허가 중요한 건 그것이 기술 표준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표준을 장악하는 게 중요하다. 표준을 둘러싼 경쟁은 기술의 역사를 장식하는 ‘혈투’다. 표준을 장악한 조직은 그 사업의 강자로 부상하며, 장악에 실패한 조직은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를 감출 정도로 표준의 보상과 대가도 분명하다. 표준을 둘러싼 경쟁은 ‘표준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치열하다.
에디슨, 표준 장악 위해 ‘전기의자’ 로비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른 표준 전쟁의 사례는 19세기 말엽에 전기가 등장한 후 벌어진 AC(교류)와 DC(직류) 표준 경쟁이다. 처음으로 발전-배전 시스템을 설계했던 토머스 에디슨은 DC를 사용했고, 이에 도전장을 낸 후발 주자인 웨스팅하우스사는 고압 송전이 가능한 AC를 채택했다. 두 시스템에는 모두 약점과 강점이 있었다. DC의 약점은 짧은 송전거리였고, 변압기를 사용해서 전압의 변화를 쉽게 하면서 장거리 송전을 했던 AC에는 모터가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에디슨은 DC를 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고압으로 전송되는 AC의 위험을 집중 홍보했다. 심지어 고압 AC를 쓰는 전기의자를 이용한 사형 집행을 하자는 로비를 해, AC에 ‘처형자의 전류’라는 이름을 붙였다. 실제로 얼마 후 에디슨의 추종자는 전기의자를 발명했고, 1890년 부인을 도끼로 죽인 살인자 윌리엄 케믈러에게 전기의자를 사용한 사형이 집행했다. 처음엔 1000V 고압 AC 전류가 17초 동안 그의 몸에 흐르게 했다. 그럼에도 그는 죽지 않았고, 검시관은 전압을 2000V로 올렸다. 고압 전류는 케믈러의 살을 태웠고, 연기와 냄새가 방을 가득 메웠다. 목격자들은 전기의자가 교수형보다 훨씬 더 잔인하다고 평가를 했다. 웨스팅하우스사는 “차라리 도끼를 사용하는 것이 더 인간적일 것”이라는 냉소적인 비평을 냈다. 이 모든 해프닝은 사람을 새까맣게 태워 죽일 수 있는 AC와 달리 DC는 안전하다는 사실을 홍보하려고 했던 에디슨의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에디슨의 이러한 전략은 성공했을까. 에디슨의 홍보와 로비에도 AC는 계속 확장됐고, 결국 지금 우리가 보듯이 전력 송전-배전의 표준으로 채택됐다. 니콜라 테슬라 등이 AC 모터를 발명했고, 삼상 AC 전류와 같은 다상 전류가 나온 게 AC 승리에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이즈음 에디슨이 전기 사업에서 손을 뗀 것도 AC 표준이 확대된 배경이 됐다. 당시 사람들은 이후 DC가 역사의 커튼 뒤로 금방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지만 실제 역사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 깔려 있던 DC는 생각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존속했다. 이러한 DC의 존속은 로터리 컨버터(rotary converter) 같은 기술이 발명되면서 가능했다. 로터리 컨버터는 고압으로 전송된 AC를 감압한 뒤에 DC로 바꾸어주는 기술이다. 이미 DC를 사용하던 지역에서는 배전망이나 전기제품을 AC용으로 바꾸지 않고도 로터리 컨버터를 통해 기존의 DC를 그대로 쓸 수 있었던 것이다. AC는 DC를 바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공존하면서 서서히 대체했다.
구(舊)기술이 신기술 누르기도
게이트웨이 기술이 있다 해도 표준을 선점하는 것은 표준 경쟁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일례로 전화를 걸 때 쓰는 인사말 ‘헬로(Hello)’는 에디슨이 배포한 유통설명서에서 사용되었고, 이로부터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와 달리 전화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래엄 벨은 뱃사람들이 사용하던 ‘어호이(Ahoy)’라는 인사말을 채택했는데, 이미 ‘헬로’를 쓰던 사람들은 새로운 인사말을 쓰는 것을 어색해 했다. 결국 ‘어호이’는 사라졌다. 에디슨은 전화 기술의 표준 선점에서는 벨에 뒤졌지만, 전화 인사말의 표준 경쟁에서는 벨을 누른 셈이다.
컴퓨터 자판의 ‘쿼티 키보드(글자 자판 맨 위 왼쪽 문자의 배열이 qwerty인 자판)’도 표준 선점의 위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쿼티 키보드는 타자기에서 유래했다. 글자 자판이 바(bar)와 직접 연결되어 있던 타자기에서는 자주 함께 쓰는 단어를 최대한 떨어뜨려 글자를 엉키지 않게 해야 했고, 쿼티는 여기에 맞게 디자인됐다. 그런데 이 디자인은 바를 사용하지 않는 컴퓨터에서도 계속 사용된다. 더 합리적인 자판을 만들어서 배포하려는 노력이 여러 번 있었지만 쿼티 자판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 번 쿼티 자판을 가지고 타이핑을 배운 사람들이 다른 자판으로 바꾸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장이 처음 열릴 때 표준을 선점하면 나중에 시장이 커지고 심지어 기술이 달라져도 그 선점효과가 지속되는 현상을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 혹은 ‘네트워크 외부효과(network externalities)’라고 한다.
다만 표준 선점이 절대적이거나 영원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거나 유일한 표준이었던 것이 바뀌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금 인터넷을 사용하는 젊은이들은 생소하겠지만, 웹 브라우저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브라우저 마켓을 장악했던 것은 ‘넷스케이프’라는 브라우저였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인터넷 사업에 본격 뛰어들었을 때 넷스케이프는 90% 이상의 시장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MS는 OS 시장을 독점하던 윈도에 인터넷 익스플로러(IE)를 무료로 끼워서 판매함으로써 시장 점유율을 높였고, 결국 넷스케이프를 몰아내고 브라우저 시장을 장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난공불락으로 보였던 IE도 최근에는 오픈 소스를 이용한 ‘파이어폭스’, 구글 ‘크롬’의 공격을 받으면서 시장의 뒤편으로 물러나고 있다. 2005년 미국에서 IE는 점유율 70%를 보였고, 넷스케이프는 0.4%, 파이어폭스가 23% 정도였다. 크롬이 출시된 2008년 하반기에는 IE와 파이어폭스가 비슷하게 45%를 각각 점유했다. 2012년부터는 크롬이 40%대로 1위, 파이어폭스가 2위, IE는 10%대인 3위로 떨어졌고, 2017년 1월 현재 IE는 5%대에 머물고 있는 반면 크롬은 74%의 독점적인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따지고 보면 파이어폭스는 모질라에서, 모질라는 넷스케이프에서 파생된 시스템이다. 죽은 넷스케이프가 산 IE의 발목을 잡은 셈이다.
선점효과를 붕괴시키려면 다양한 전략이 필요하다. 컬러 TV가 개발되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방송국과 가전제품 회사들은 곧 컬러 TV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방송국인 CBS와 흑백 TV 수상기를 제조하던 RCA가 컬러 TV의 표준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다.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는 1950년 CBS의 컬러 TV를 표준으로 채택했다. 그렇지만 RCA를 끌어들이지 못한 상황에서 CBS의 컬러 TV를 제조하는 업체가 없었다. 더구나 결정적으로 CBS의 표준은 흑백 TV와의 ‘후방 호환성(backward compatibility)’이 없었다. 후방 호환성은 신기술을 써서 구기술의 기능이나 서비스를 그대로 누릴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CBS의 컬러 TV로 기존의 흑백 방송을 볼 수 없었다는 얘기다.
기술력 우월해도 표준화 장담 못해
더 극적인 표준 전쟁 사례는 이른바 ‘포맷 전쟁’이라 불리는 VCR의 사례다. 지금은 박물관에서만 찾아볼 수 있지만 VCR은 30년 가까이 영상을 기록하고, 안방에서 영화를 관람할 수 있게 한 고맙고도 획기적인 영상저장 기술이다. VCR은 소니가 1975년 베타맥스를 출시하면서 상용화됐다. 이에 대항했던 JVC사는 VHS라는 새로운 기술을 1976년에 시장에 내놨다.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소니는 도시바·산요·NEC·아이와·파이오니어사와 연합을 하고 있었고, JVC는 소니의 라이벌인 파나소닉·히타치·미쓰비치·샤프·아카이 등과 동맹 전선을 구축했다. 당시 사람들은 베타맥스가 VHS에 비해 화질이 더 우수하다는 데에 동의했다. 이에 따라 처음에는 기술력이 앞선 베타맥스가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1981년 시장점유율은 베타맥스 25%, VHS 75%로 역전됐고, 곧 이 차이는 10%대 90%로 벌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니의 회장이었던 아키오 모리타는 다른 회사가 베타맥스 테이프를 상영하는 비디오 플레이어를 만들어 팔지 못하게 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회고했다. 표준 기술을 배타적으로 운용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VHS를 만든 JVC는 다른 회사들도 약간의 수수료만 내면 얼마든지 VHS 기계를 만들게 허용했다. 그 결과 더 많은 사람이 VHS 기계를 샀고, 먼저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임계질량’에 도달했다는 분석이다. 또 다른 가설은 저장 가능한 영상의 시간 차이다. 베타맥스의 표준은 1시간이고, VHS의 표준은 2시간이다. 베타맥스는 시청자들이 TV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다른 채널에서 하는 드라마를 녹음해서 이를 나중에 보는 것을 생각해서 만든 기술이었다. VHS는 그보다 더 긴 영화를 녹화하거나 녹화한 영화를 빌려보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시간의 차이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VHS가 홈 무비를 대여해서 보기에 훨씬 더 적합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표준 선점 만큼 지키는 것도 어려워
그렇다면 왜 VHS가 베타맥스를 누를 수 있었을까. 몇몇 분석가들은 소니가 당시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활성화되던 포르노 산업과 제휴를 하지 않은 데 비해서, VHS는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기술을 포르노 영화의 표준으로 만들게 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초기 비디오의 용도는 TV를 녹화하는 것도, 홈 무비를 대여해서 보는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은 비디오가 포르노를 즐기는 데 더할 수 없이 적합하다는 것을 알았고, 실제로 VHS로 제작된 포르노 테이프는 미국 중산층의 가정을 파고들면서 비디오 시장을 확장했다. 예상 못했던 포르노라는 콘텐트가 표준의 운명을 좌우한 셈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30년이 지난 후 비슷한 표준 전쟁이 다시 벌어졌다는 것이다. DVD가 나오고 이 뒤를 이은 차세대 광저장장치가 만들어지면서다. 고화질 비디오 표준을 놓고 베타맥스로 고배를 마셨던 소니의 블루레이와 도시바의 HD-DVD가 격돌했다. 소니 진영에는 히타치·파나소닉·삼성 등이 합류했고, 도시바는 NEC·산요·MS·RCA·인텔 등과 연계했다. 당시 소니는 베타맥스 때와 마찬가지로 블루레이 표준에 포르노 콘텐트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발표했지만 슬쩍 일본 외의 지역에서는 포르노를 허용했고, 이어 2008년 세계 최대 영화사인 워너 브라더스가 블루레이 표준만을 채택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시장은 블루레이로 급격히 기울었다.
표준은 선점하는 것도 어렵지만, 장악한 표준을 지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적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기술이 기술적으로 우월하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표준으로 안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사용한다고 표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처음에 시장을 장악했던 기술이 표준에서 밀려나고, 90% 이상의 사용자를 가졌던 기술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경우도 많다. 처음에 표준을 선점했어도 표준에 도전하는 경쟁 기술과 싸워서 이겨야 하고, 새로운 기술 개발을 통해서 사용자들을 자신의 네트워크에 묶어 두어야 한다. 적을 알고, 동맹을 맺어서 아군의 힘을 키우고, 어떤 무기를 사용해야 적을 이길 수 있는지를 간파하는 전쟁의 전략이 표준 전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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