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大山)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 탄생 100주년
대산(大山)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 탄생 100주년
세계 보험업계의 선구자인 대산(大山)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 탄생 100주년을 맞아 9월7일부터 기념음악회, 기념사진전, 학술심포지엄 등 그를 조명하는 행사가 진행된다. 세계 최초로 교육보험을 창안하고 교보문고 설립으로 ‘참사람 육성’을 실천한 대산의 숭고한 일생과 업적을 재조명했다. 대산(大山) 신용호(1917~2003) 교보생명 창립자는 20세기 한국경제를 빛낸 기업인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세계 최초로 교육보험을 창안했고 생명보험 외길 인생을 통해 ‘보험의 선구자, 보험의 거목’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보험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세계보험대상’을 수상하고 ‘보험의 대스승’으로 추대되는 등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보험업계를 쥐락펴락했던 퍼스트 무버다.
2003년 9월, 8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대산의 삶을 관통했던 키워드는 ‘국민교육’, 즉, ‘참사람 육성’이었다. 그가 평생 지향했던 ‘교육’은 학교교육을 뛰어넘는, 보다 포괄적이고 실전체험을 통한 ‘산교육’이었다. 일제 식민지와 6.25전쟁을 거치며 치열했던 삶을 통해 피어난 ‘국민교육’에 대한 열정은 세계 최초로 교육보험을 탄생시켰고, 서울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교보문고를 세웠으며, 대산문화재단 등 3개 공익재단 설립으로 이어졌다.
대산에게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란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 자기개발과 인간성장을 일생 동안 추구하는 참사람을 키워가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력서의 최종 학력란에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배운다’라고 썼던 대산에겐 ‘만나는 모든 사람이 스승이고,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배움의 대상’이었다. 대산은 1917년 8월, 전남 영암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잦았던 탓에 초등학교 문턱도 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고 스스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선다. 자라면서 건강을 회복한 대산은 독학을 결심하고 1000일 동안 쉬지 않고 책을 읽겠다는 ‘천일독서(千日讀書)’로 배움의 열망을 채워나갔다. 뒤늦게 시작한 독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뜨게 했다. 책을 읽을수록 사회와 현실을 제대로 알게 됐고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게 됐다.
청년이 된 그는 큰 꿈을 품고 조국을 떠나 만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중국으로 건너가 다롄, 베이징 등지에서 사업을 펼치던 대산은 시인 이육사(1904~1944)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대산은 이육사와 교류하면서 ‘교육이 민족의 미래’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민족자본가로서의 꿈을 키우게 된다.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수한 인적자원을 키워내고, 민족자본을 형성해 경제자립의 기반을 구축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해방 후 귀국한 대산은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뜨겁게 피어오른 국민들의 교육열에 주목하고 교육보험 사업을 결심했다. 수년 간의 연구 끝에 생명보험의 원리와 교육을 접목한 ‘교육보험’ 제도를 창안하고 ‘교육보험회사’ 설립에 착수했다. 당시 창립이념은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 형성’. 교육을 통해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를 키우고, 보험을 통해 자립경제의 바탕이 될 자본을 형성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회사 이름도 남달랐다. 다른 생명보험사와 달리 ‘○○생명보험’이 아닌 ‘대한교육보험’이라고 이름 붙인 것.
하지만 회사이름에 반드시 ‘생명보험’이 들어가야 한다는 당시 보험업법 규정 때문에 설립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교육보험’이라는 이름을 반드시 지키고 싶었던 대산은 당시 김현철 재무부 장관을 만나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집 앞에서 기다린 지 반년 만에 독대할 수 있었다. 김 장관도 그의 소신에 공감하고 예외적으로 대한교육보험 상호 사용을 승인했다. 마침내, 1958년 8월 7일 종로의 작은 사무실에서 대산은 ‘대한교육보험 주식회사’의 닻을 올렸다.
당시 창립과 동시에 출시한 ‘진학보험’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보험상품이었다. 국민들에게 매일 담배 한 갑 살 돈만 아끼면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출시 이후 30년간 약 300만 명의 학생들이 학자금을 받아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 교육의 기회를 얻게 된 인재들은 1960년 이후 우리나라 경제개발 시대의 주역으로 활약하게 된다.
“오늘 이 개업식을 초라하다고 서글퍼 하지 맙시다. 선진국에서도 보험회사가 자리를 잡기까지 보통 50년이 걸립니다. 본인은 그 절반인 25년 이내에 우리 회사를 세계적인 회사로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서울의 제일 좋은 자리에 사옥을 짓겠습니다.” 1958년 8월7일 ‘대한교육보험 주식회사’ 개업식에서 대산은 이렇게 약속했다.
교보생명은 교육보험의 선풍적인 인기로 1967년 창립 9년 만에 업계 정상에 오르는 등 비약적으로 성장해나갔다. 1980년, 대산은 드디어 종로1가 1번지에 광화문의 랜드마크 교보빌딩을 세웠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개업 당시의 약속을 3년이나 앞당긴 것이다.
창립 이후 대산과 교보생명이 이룬 보험업계 ‘최초’의 기록들은 한국 보험산업 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 1977년 국내 최초로 종업원퇴직적립보험을 개발해 퇴직연금시장을 선도했고, 1980년 국내 최초로 개발한 암보험으로 본격적인 보장성보험 시대의 막을 열기도 했다. 또 업계 최초 순보험료식 책임준비금 100% 적립, 계약자 이익배당 실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교보생명은 한국 보험산업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렇듯 보험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며 우리나라 보험산업을 세계 8위권으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한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대산은 세계적으로도 공로를 인정받아 1983년 세계보험협회(IIS)로부터 보험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세계보험대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하며 ‘보험의 대스승’으로 추대됐다. 1996년에는 ‘세계보험 명예의 전당(Insurance Hall of Fame Award)’에 헌정되며 전 세계 보험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보험산업으로 국가 생산성 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아시아·태평양 지역 금융인으로는 최초로 아시아생산성기구(APO)로부터 ‘APO국가상’을 받기도 했다.
1997년 세계보험협회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신용호세계보험학술대상(Shin Research Excellence Award)’을 제정했다. 한국인 이름으로 전 세계 보험학자에게 수여하는 유일한 상이다. 매년 보험산업연구에 공이 큰 보험학자들을 선발해 IIS 연차총회에서 시상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세계 각국 60여 명의 보험석학들이 이 상을 수상했다.
대산의 ‘국민교육’에 대한 신념 한 가닥이 교보생명으로 구현되었다면 다른 한 가닥은 교보문고였다. 광화문 교보생명빌딩 지하 1층에는 우리나라 대표 지식문화기업 ‘교보문고’가 자리잡고 있다. 연간 5000만 명이 방문하고 4000만 권의 도서가 판매되는 ‘국민책방’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산은 당시 개발도상국에 진입하려면 국민 모두가 어느 정도 지적 축적이 있어야 하고, 독서량을 늘려 스스로 학습하는 평생교육이 정착돼야 한다고 여겼다. ‘독서입국(讀書入國)’의 원대한 꿈은 서점을 통해 구체화된다. 광화문 네거리, 금싸라기 땅에 돈도 안 되는 서점을 들이겠다고 했을 때 임직원들은 모두 반대했다.
그러나 대산은 “사통팔달(四通八達) 제일의 목에 청소년을 위한 멍석을 깔아줍시다. 와서 사람과 만나고, 책과 만나고, 지혜와 만나고, 희망과 만나게 합시다. 책을 읽은 청소년들이 작가나 대학교수, 사업가, 대통령이 되고 노벨상도 탄다면 그 이상 나라를 위하는 일이 어디 있으며, 얼마나 보람 있는 사업입니까!”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1981년 6월 교보문고가 문을 열었다. 단일면적으로 세계 최대 규모로, 서가(書架) 길이는 무려 24.7㎞에 달했다. 교보문고는 개장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명소가 됐다.
개점 후에도 대산은 틈만 나면 교보문고를 돌아보며 기뻐했다. 그는 다섯 가지 지침을 정해 직원들에게 알리고 이를 실천하도록 당부했다. ▶모든 고객에게 친절하고 초등학생들에게도 존댓말을 쓸 것 ▶한 곳에 오래 서서 책을 읽어도 그냥 둘 것 ▶책을 이것저것 보고 사지 않더라도 눈총 주지 말 것 ▶책을 노트에 베끼더라도 그냥 둘 것 ▶ 책을 훔쳐가더라도 망신 주지 말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좋은 말로 타이를 것.
여기엔 청소년들이 책을 통해 큰 그릇이 되고 참된 인재로 커나가길 바라는 대산의 소망이 담겨 있다. 5대 지침은 지금도 교보문고의 운영방침으로 이어지고 있다. 교보문고 입구의 표지석에 새겨진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글귀는 대산의 독서 철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산은 한발 더 나아가 1993년부터 전 국민을 대상으로 ‘천만 명 독서인구 저변확대운동’을 펼쳤다. 어린 시절 독서로 지식을 키워 온 그는 독서를 통해 우리 국민의 교육과 의식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대산의 오랜 꿈이 담긴 공간, 교보문고는 누구나 원하는 책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책의 천국’이자 도심 속 지식 문화공간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독서문화 저변 확대에 지대한 공헌을 해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사회문화적 가치를 창출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현재 교보문고는 현재 전국 24개 매장을 운영하는 등 종이책 유통 1위 회사를 뛰어넘어 온라인과 디지털콘텐트 시장을 포괄하는 명실상부한 지식문화기업으로 성장했다.
대산은 민족의 미래를 먼저 생각하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기업을 일궜다. 그는 기업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과정에서도 ‘국민교육’의 신념을 놓지 않았다. 그는 평소 “기업의 이윤 추구는 기업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기업 이미지가 목적이 아닌 배고픈 사람에게 낚싯대를 구해주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고민했다. 재단을 설립함에 앞서 각계 인사들을 만나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발전해야 하지만 소외된 분야가 무엇인지를 파악했다. 그리고 마침내 농촌, 문학, 환경 분야의 지원을 위한 공익재단을 설립한다.
우리 민족의 삶의 뿌리인 농촌을 살리기 위한 ‘대산농촌재단’, 한국 문학 발전과 세계화를 후원하는 ‘대산문화재단’, 교육의 공익적 가치 실현을 위한 ‘교보교육재단’을 통해 선진농업연구, 교육과 문학 지원사업, 장학사업 등을 펼치며 소외된 곳까지 교육과 지식의 뿌리를 내리도록 했다. 3개 공익재단 운영은 지금도 교보생명을 대표하는 사회공헌사업이다. 교보생명은 대산의 뜻을 이어받아 2002년 ‘교보다솜이 사회봉사단’을 창단해 체계적이고 차별화된 사회공헌활동을 펼치고 있다.
교보생명은 지난해 국내 기업 중 가장 투명하고 윤리적인 경영을 펼친 기업으로 선정돼 경제5단체로부터 ‘2016 투명경영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조업 분야가 아닌 금융업계에서 대상을 받은 것은 교보생명이 처음이었다. “세상에는 거저(공짜)와 비밀이 없다”라는 대산의 신조는 교보생명의 핵심가치인 ‘정직과 성실’로 계승돼 오늘날 투명경영, 윤리경영의 밑거름이 됐다. 1991년 1월, 광화문 네거리에 ‘광화문글판’을 처음 내건 것도 대산이었다. 첫 문안은 ‘우리 모두 함께 뭉쳐 경제활력 다시 찾자’로, 초기 문안은 계몽적 메시지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 후 대산은 “기업 홍보는 생각지 말고, 시민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판으로 운영하자”고 제안했고, 광화문글판에 시심(詩心)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광화문글판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갈아입으며 주옥 같은 글귀로 시민들에게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30자도 안 되는 짧은 글이지만 시심(詩心)을 녹여낸 글귀에는 큰 울림이 있다. 시나브로 26살 청년이 된 글판을 수놓은 글귀만 해도 82편에 이른다. 지금까지 공자, 헤르만 헤세, 파블로 네루다, 서정주, 고은, 도종환, 김용택, 나태주 등 50여 명에 이르는 동서고금의 현인과 시인의 작품이 광화문글판으로 재탄생했다. 이제 광화문글판은 어떤 글귀가 등장할 지 시민들 사이에 궁금증을 낳을 정도로 새로운 문화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네티즌들은 SNS를 통해 많은 이들과 공유하며, 신문 칼럼의 단골 주제로 등장할 정도로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성적인 메시지로 우리 사회에 시와 문학을 대중화하는 데에도 기여하고 있다.
이외에도 교보생명은 매년 ‘교보생명컵 꿈나무체육대회’를 열어 기초종목의 체육꿈나무를 발굴·육성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1985년부터 33년째 꿈나무 후원에 정성을 쏟는 이유는 대산의 남다른 인재육성 철학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건강한 체력을 길러야 인성과 지식도 잘 자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유소년의 체력 증진을 위한 체육대회를 만든 것.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영국의 이튼스쿨에서 강조한 ‘체.덕.지(體.德.智)’를 롤모델로 삼았다. 지금까지 대회를 거쳐간 어린 선수는 13만 명에 이르고, 350여 명의 국가대표 선수를 배출했다. 이들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획득한 메달 수만 140여 개에 달한다. 메달리스트의 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한 대산이 우리 사회에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비결은 끊임없는 자기개발과 불굴의 의지였다. 학력(學歷)이 아닌 학력(學力)의 힘을 믿은 그는 학교 교육만큼 중요한 것이 사회 교육이란 신념을 갖고 있었다. 대산은 많은 책을 읽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산교육’을 몸소 실천했다. 학교 교육을 넘어 스스로 공부하고 사람들과 부딪치며 평생동안 살아있는 지식을 체득했다.
‘북 스마트’(책을 통해 지식을 체득한 사람)를 뛰어넘어 ‘스트리트 스마트’(실전경험을 통해 노하우를 축적한 사람)를 체화해 깊은 통찰력과 지혜를 갖추게 된 것. 대산은 “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는” 불굴의 의지와 오뚝이 같은 도전정신을 가진 경영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힘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유래가 없는 독창적인 상품인 ‘교육보험’을 발명하고, 광화문 금싸라기 땅에 국내 최대의 서점인 ‘교보문고’를 세운 원동력이 됐다. 대산은 개인에게 닥친 고난을 스스로 극복하고, ‘교육’에 대한 남다른 철학으로 국가 발전과 민족의 미래에 기여한 창의적 경영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대산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
1917년 8월: 전남 영암의 항일운동 집안에서 출생
1936년: 이육사, 신갑범 등 독립운동가와 교류
1946년: 만주, 북경에서 사업
1958년: 대한교육보험 창립, 세계 최초 교육보험 창안
1980년: 교보문고 설립
1983년: ‘세계보험대상’수상, ‘보험의 대스승’으로 추대
1991년~1997년: 3개 공익재단 설립
1996년: 세계보험협회(IIS) ‘세계보험 명예의 전당’ 헌정, ‘금관문화훈장’ 수훈
2000년: ‘APO국가상’수상
2003년 9월: 향년 86세 영면
- 오승일 기자 oh.seung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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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 8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대산의 삶을 관통했던 키워드는 ‘국민교육’, 즉, ‘참사람 육성’이었다. 그가 평생 지향했던 ‘교육’은 학교교육을 뛰어넘는, 보다 포괄적이고 실전체험을 통한 ‘산교육’이었다. 일제 식민지와 6.25전쟁을 거치며 치열했던 삶을 통해 피어난 ‘국민교육’에 대한 열정은 세계 최초로 교육보험을 탄생시켰고, 서울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교보문고를 세웠으며, 대산문화재단 등 3개 공익재단 설립으로 이어졌다.
대산에게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란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 자기개발과 인간성장을 일생 동안 추구하는 참사람을 키워가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력서의 최종 학력란에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배운다’라고 썼던 대산에겐 ‘만나는 모든 사람이 스승이고,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배움의 대상’이었다.
세계 최초로 ‘교육보험’을 발명한 혁신가
청년이 된 그는 큰 꿈을 품고 조국을 떠나 만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중국으로 건너가 다롄, 베이징 등지에서 사업을 펼치던 대산은 시인 이육사(1904~1944)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대산은 이육사와 교류하면서 ‘교육이 민족의 미래’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민족자본가로서의 꿈을 키우게 된다. 우리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수한 인적자원을 키워내고, 민족자본을 형성해 경제자립의 기반을 구축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해방 후 귀국한 대산은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뜨겁게 피어오른 국민들의 교육열에 주목하고 교육보험 사업을 결심했다. 수년 간의 연구 끝에 생명보험의 원리와 교육을 접목한 ‘교육보험’ 제도를 창안하고 ‘교육보험회사’ 설립에 착수했다. 당시 창립이념은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 형성’. 교육을 통해 국가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를 키우고, 보험을 통해 자립경제의 바탕이 될 자본을 형성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회사 이름도 남달랐다. 다른 생명보험사와 달리 ‘○○생명보험’이 아닌 ‘대한교육보험’이라고 이름 붙인 것.
하지만 회사이름에 반드시 ‘생명보험’이 들어가야 한다는 당시 보험업법 규정 때문에 설립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교육보험’이라는 이름을 반드시 지키고 싶었던 대산은 당시 김현철 재무부 장관을 만나기 위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집 앞에서 기다린 지 반년 만에 독대할 수 있었다. 김 장관도 그의 소신에 공감하고 예외적으로 대한교육보험 상호 사용을 승인했다. 마침내, 1958년 8월 7일 종로의 작은 사무실에서 대산은 ‘대한교육보험 주식회사’의 닻을 올렸다.
당시 창립과 동시에 출시한 ‘진학보험’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보험상품이었다. 국민들에게 매일 담배 한 갑 살 돈만 아끼면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출시 이후 30년간 약 300만 명의 학생들이 학자금을 받아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 교육의 기회를 얻게 된 인재들은 1960년 이후 우리나라 경제개발 시대의 주역으로 활약하게 된다.
“오늘 이 개업식을 초라하다고 서글퍼 하지 맙시다. 선진국에서도 보험회사가 자리를 잡기까지 보통 50년이 걸립니다. 본인은 그 절반인 25년 이내에 우리 회사를 세계적인 회사로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서울의 제일 좋은 자리에 사옥을 짓겠습니다.” 1958년 8월7일 ‘대한교육보험 주식회사’ 개업식에서 대산은 이렇게 약속했다.
교보생명은 교육보험의 선풍적인 인기로 1967년 창립 9년 만에 업계 정상에 오르는 등 비약적으로 성장해나갔다. 1980년, 대산은 드디어 종로1가 1번지에 광화문의 랜드마크 교보빌딩을 세웠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개업 당시의 약속을 3년이나 앞당긴 것이다.
창립 이후 대산과 교보생명이 이룬 보험업계 ‘최초’의 기록들은 한국 보험산업 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 1977년 국내 최초로 종업원퇴직적립보험을 개발해 퇴직연금시장을 선도했고, 1980년 국내 최초로 개발한 암보험으로 본격적인 보장성보험 시대의 막을 열기도 했다. 또 업계 최초 순보험료식 책임준비금 100% 적립, 계약자 이익배당 실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교보생명은 한국 보험산업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렇듯 보험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며 우리나라 보험산업을 세계 8위권으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한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한국 보험산업을 세계 반열에 올려놓다
1997년 세계보험협회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신용호세계보험학술대상(Shin Research Excellence Award)’을 제정했다. 한국인 이름으로 전 세계 보험학자에게 수여하는 유일한 상이다. 매년 보험산업연구에 공이 큰 보험학자들을 선발해 IIS 연차총회에서 시상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세계 각국 60여 명의 보험석학들이 이 상을 수상했다.
대산의 ‘국민교육’에 대한 신념 한 가닥이 교보생명으로 구현되었다면 다른 한 가닥은 교보문고였다. 광화문 교보생명빌딩 지하 1층에는 우리나라 대표 지식문화기업 ‘교보문고’가 자리잡고 있다. 연간 5000만 명이 방문하고 4000만 권의 도서가 판매되는 ‘국민책방’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산은 당시 개발도상국에 진입하려면 국민 모두가 어느 정도 지적 축적이 있어야 하고, 독서량을 늘려 스스로 학습하는 평생교육이 정착돼야 한다고 여겼다. ‘독서입국(讀書入國)’의 원대한 꿈은 서점을 통해 구체화된다. 광화문 네거리, 금싸라기 땅에 돈도 안 되는 서점을 들이겠다고 했을 때 임직원들은 모두 반대했다.
그러나 대산은 “사통팔달(四通八達) 제일의 목에 청소년을 위한 멍석을 깔아줍시다. 와서 사람과 만나고, 책과 만나고, 지혜와 만나고, 희망과 만나게 합시다. 책을 읽은 청소년들이 작가나 대학교수, 사업가, 대통령이 되고 노벨상도 탄다면 그 이상 나라를 위하는 일이 어디 있으며, 얼마나 보람 있는 사업입니까!”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1981년 6월 교보문고가 문을 열었다. 단일면적으로 세계 최대 규모로, 서가(書架) 길이는 무려 24.7㎞에 달했다. 교보문고는 개장과 동시에 대한민국의 명소가 됐다.
개점 후에도 대산은 틈만 나면 교보문고를 돌아보며 기뻐했다. 그는 다섯 가지 지침을 정해 직원들에게 알리고 이를 실천하도록 당부했다. ▶모든 고객에게 친절하고 초등학생들에게도 존댓말을 쓸 것 ▶한 곳에 오래 서서 책을 읽어도 그냥 둘 것 ▶책을 이것저것 보고 사지 않더라도 눈총 주지 말 것 ▶책을 노트에 베끼더라도 그냥 둘 것 ▶ 책을 훔쳐가더라도 망신 주지 말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좋은 말로 타이를 것.
여기엔 청소년들이 책을 통해 큰 그릇이 되고 참된 인재로 커나가길 바라는 대산의 소망이 담겨 있다. 5대 지침은 지금도 교보문고의 운영방침으로 이어지고 있다. 교보문고 입구의 표지석에 새겨진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라는 글귀는 대산의 독서 철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대산은 한발 더 나아가 1993년부터 전 국민을 대상으로 ‘천만 명 독서인구 저변확대운동’을 펼쳤다. 어린 시절 독서로 지식을 키워 온 그는 독서를 통해 우리 국민의 교육과 의식 수준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도심 속 지식문화공간 ‘교보문고’설립
대산은 민족의 미래를 먼저 생각하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기업을 일궜다. 그는 기업의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과정에서도 ‘국민교육’의 신념을 놓지 않았다. 그는 평소 “기업의 이윤 추구는 기업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
기업 이미지가 목적이 아닌 배고픈 사람에게 낚싯대를 구해주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고민했다. 재단을 설립함에 앞서 각계 인사들을 만나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발전해야 하지만 소외된 분야가 무엇인지를 파악했다. 그리고 마침내 농촌, 문학, 환경 분야의 지원을 위한 공익재단을 설립한다.
우리 민족의 삶의 뿌리인 농촌을 살리기 위한 ‘대산농촌재단’, 한국 문학 발전과 세계화를 후원하는 ‘대산문화재단’, 교육의 공익적 가치 실현을 위한 ‘교보교육재단’을 통해 선진농업연구, 교육과 문학 지원사업, 장학사업 등을 펼치며 소외된 곳까지 교육과 지식의 뿌리를 내리도록 했다. 3개 공익재단 운영은 지금도 교보생명을 대표하는 사회공헌사업이다. 교보생명은 대산의 뜻을 이어받아 2002년 ‘교보다솜이 사회봉사단’을 창단해 체계적이고 차별화된 사회공헌활동을 펼치고 있다.
교보생명은 지난해 국내 기업 중 가장 투명하고 윤리적인 경영을 펼친 기업으로 선정돼 경제5단체로부터 ‘2016 투명경영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조업 분야가 아닌 금융업계에서 대상을 받은 것은 교보생명이 처음이었다. “세상에는 거저(공짜)와 비밀이 없다”라는 대산의 신조는 교보생명의 핵심가치인 ‘정직과 성실’로 계승돼 오늘날 투명경영, 윤리경영의 밑거름이 됐다. 1991년 1월, 광화문 네거리에 ‘광화문글판’을 처음 내건 것도 대산이었다. 첫 문안은 ‘우리 모두 함께 뭉쳐 경제활력 다시 찾자’로, 초기 문안은 계몽적 메시지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IMF 외환위기 후 대산은 “기업 홍보는 생각지 말고, 시민들에게 위안을 주는 글판으로 운영하자”고 제안했고, 광화문글판에 시심(詩心)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광화문글판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을 갈아입으며 주옥 같은 글귀로 시민들에게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30자도 안 되는 짧은 글이지만 시심(詩心)을 녹여낸 글귀에는 큰 울림이 있다. 시나브로 26살 청년이 된 글판을 수놓은 글귀만 해도 82편에 이른다. 지금까지 공자, 헤르만 헤세, 파블로 네루다, 서정주, 고은, 도종환, 김용택, 나태주 등 50여 명에 이르는 동서고금의 현인과 시인의 작품이 광화문글판으로 재탄생했다. 이제 광화문글판은 어떤 글귀가 등장할 지 시민들 사이에 궁금증을 낳을 정도로 새로운 문화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네티즌들은 SNS를 통해 많은 이들과 공유하며, 신문 칼럼의 단골 주제로 등장할 정도로 사회적, 문화적으로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성적인 메시지로 우리 사회에 시와 문학을 대중화하는 데에도 기여하고 있다.
이외에도 교보생명은 매년 ‘교보생명컵 꿈나무체육대회’를 열어 기초종목의 체육꿈나무를 발굴·육성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1985년부터 33년째 꿈나무 후원에 정성을 쏟는 이유는 대산의 남다른 인재육성 철학 때문이다.
국가발전과 민족의 미래에 기여한 창의적 경영인
제도권 교육을 받지 못한 대산이 우리 사회에 뚜렷한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비결은 끊임없는 자기개발과 불굴의 의지였다. 학력(學歷)이 아닌 학력(學力)의 힘을 믿은 그는 학교 교육만큼 중요한 것이 사회 교육이란 신념을 갖고 있었다. 대산은 많은 책을 읽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산교육’을 몸소 실천했다. 학교 교육을 넘어 스스로 공부하고 사람들과 부딪치며 평생동안 살아있는 지식을 체득했다.
‘북 스마트’(책을 통해 지식을 체득한 사람)를 뛰어넘어 ‘스트리트 스마트’(실전경험을 통해 노하우를 축적한 사람)를 체화해 깊은 통찰력과 지혜를 갖추게 된 것. 대산은 “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는” 불굴의 의지와 오뚝이 같은 도전정신을 가진 경영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힘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유래가 없는 독창적인 상품인 ‘교육보험’을 발명하고, 광화문 금싸라기 땅에 국내 최대의 서점인 ‘교보문고’를 세운 원동력이 됐다. 대산은 개인에게 닥친 고난을 스스로 극복하고, ‘교육’에 대한 남다른 철학으로 국가 발전과 민족의 미래에 기여한 창의적 경영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대산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
1917년 8월: 전남 영암의 항일운동 집안에서 출생
1936년: 이육사, 신갑범 등 독립운동가와 교류
1946년: 만주, 북경에서 사업
1958년: 대한교육보험 창립, 세계 최초 교육보험 창안
1980년: 교보문고 설립
1983년: ‘세계보험대상’수상, ‘보험의 대스승’으로 추대
1991년~1997년: 3개 공익재단 설립
1996년: 세계보험협회(IIS) ‘세계보험 명예의 전당’ 헌정, ‘금관문화훈장’ 수훈
2000년: ‘APO국가상’수상
2003년 9월: 향년 86세 영면
- 오승일 기자 oh.seung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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