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군도 얼마든지 잔인할 수 있다”
“여군도 얼마든지 잔인할 수 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을 황폐화시키는 골육상쟁의 내전에서 무기를 든 여성 전사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오랜 내전에 시달리고 있다. 그곳 반군 소속인 멜비아는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히고 싶어 한다. 그녀가 반군에 합류한 것은 타피오카 전분을 끓이는 등 주로 여성 대원이 맡는 잡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자신의 마을을 공격해 집을 불태우고 할머니의 목숨을 앗아간 남자들에게 복수하기를 원했다. “밥이나 지으려고 반군에 들어온 게 아니다”고 그녀는 말했다. “난 남자들과 똑같이 싸우고 싶었다.”
멜비아가 소속된 반군 부대엔 여성이 여럿이다. 그중에서도 그녀는 무기를 든 여성 중 한 명이다(그런 여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유엔이 집단학살의 조짐이 보인다고 경고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내전에서 14개의 무장단체가 영토와 자원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운다. 그 무장단체의 대다수는 남성이다. 그러나 멜비아 같은 여성도 다수 무기를 들었다. 정부 관리와 구호요원은 주로 그들의 존재를 잘 모르거나 부인한다. 그들은 무장단체가 남성 지배적인 곳이라 여성의 전투 참여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고정 관념이나 추측과 달리 이곳에서 여성은 줄곧 전투에 참가해왔다.
멜비아는 왼손 관절을 우두둑 꺾으며 자신이 받은 무기 훈련을 설명했다. 그녀는 AK-47 소총의 분해와 결합, 보초 교대근무, 순찰, 전선 배치시 요령 등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녀는 먼 하늘을 쳐다보며 집에서 만든 수제총으로 몇 번이나 사격했는지 돌이켰다. 멜비아는 완전한 자격을 갖춘 전투원은 아니지 않느냐는 질문에 호탕하게 웃었다. “우린 다른 전투대원과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 남자들과 똑같이 한다. 나도 남자 대원처럼 엄격한 명령을 내릴 수 있다.” (뉴스위크는 이 기사에 인용되는 여성이 보복 받거나 낙인 찍히지 않도록 성 없이 이름만 밝히기로 동의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내전은 ‘셀레카’로 알려진 무슬림 반군이 2013년 3월 수도 방기를 점령하고 프랑수아 보지제 전 대통령을 축출한 이래 4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현지 상고어로 ‘동맹’이란 뜻을 지닌 셀레카는 ‘민주세력연합’ ‘정화평화애국자협의회’ 등 3개 무장단체의 연합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수도를 점령하면서 민간인을 살해하고 집을 불태우며 재산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과정에서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가 나뉘어져 토지 소유권 쟁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특히 셀레카가 기독교계 주민에 대해 약탈 및 살해를 자행하기 시작하자 ‘안티발라카’라는 기독교 민병대가 결성돼 그들을 상대로 싸웠다. 양 세력 간의 치열한 전투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셀레카는 수도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혼란은 끝나지 않았다. 현재 셀레카 분파와 여러 무장단체가 수도를 제외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지난해 말 전투가 다시 시작돼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진다. 그러자 유엔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잊혀진’ 위기로 알려진 내전에서 판세가 뒤바뀌는 상황을 경고하고 나섰다.
물론 전선에서 직접 총을 들고 싸우는 여성 대원이 많지 않다. 무장단체와 연관된 여성의 다수는 결혼을 강요당하거나 성폭력에 사달리거나 식사 준비와 간호 등 ‘전통적’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일부 여성의 좀 더 역동적인 역할(예를 들면 전투원)을 인정하는 것이 평화와 안정을 이루는 데 필수적이며 그런 여성이 사회에서 생산적인 역할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된다고 지적한다. 유엔 여성기구의 정책 전문가 알레한드로 산체스는 “전쟁이라고 하면 언제나 남성이나 힘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여성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식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로운 사회를 도모하고 지속가능한 평화를 이루기 원한다면 무장단체에 속한 여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동부 전략 요충지 브리아에서 마리아메(21)는 부대장과 동료들 사이에서 남자처럼 ‘그’라고 불린다. 그래도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남자 대원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똑같은 무기를 들고 똑같은 일(전투를 말한다)을 하기 때문이다. 마리아메는 “그들은 나를 남자처럼 대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남자 대원 여러 명과 함께 기관총이 설치된 픽업 트럭에 올라탔다. “난 두렵지 않다. 최선을 다해 조국을 지킬 것이다.”
그곳에서 약 2㎞ 떨어진 곳에 경쟁 무장단체의 임시 거점이 있다. 그곳의 여성 레티시아도 전투원으로 활동한다. 주변에 남자들이 총을 메고 서 있는 동안 그녀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며 “우리들 사이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난 다른 모든 대원들과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싸운다. 우리가 공격당해 남자들이 나가서 방어해야 할 때 나도 그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한다.”
이런 여성 전투원을 둘러싼 여러 오해 중 하나는 그들이 강제로 모집됐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끔찍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 대다수는 자발적으로 무장단체에 합류했다. 남자 대원이 그렇듯이 그들이 총을 든 동기도 다양하다. 복수심, 호기심, 힘의 추구, 규율적인 생활의 필요성 등. 스테비아(17)가 무장단체에 합류한 동기는 복수였다. 그녀가 어머니와 함께 마을 시장에서 채소와 향신료를 팔고 있었을 때 셀레카 대원들이 들이닥쳐 총을 난사했다. 그들이 마을을 습격하는 동안 그녀는 어머니와 농장으로 피신했다. 스테비아는 “셀레카가 우리 마을에 쳐들어와 집에 있던 주민을 사살하며 만행을 저질렀다”고 돌이켰다. “아버지와 다른 식구들은 집에 있었는데 돌아가보니 그들은 모두 주검이 돼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언니는 다른 곳에 있다가 살아남았다. 언니는 셀레카에 맞서는 안티발라카 무장단체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래서 자매는 그 단체를 찾아나섰다. 스테비아는 “우린 너무 격분해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고 그 단체에 들어가려 했다”고 말했다. “정확히 누가 우리 아버지를 사살했는지 몰랐지만 우린 마주치는 모든 셀레카 대원을 없애버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들 자매는 안티발라카 거점을 찾으려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스테비아는 “그 단체엔 여성을 포함해 많은 대원이 있었다”고 돌이켰다. “그래서 우리도 합류할 용기가 났다.”
안티발라카는 처음엔 그들 자매를 의심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따져 물었다. 스테비아는 “우린 아버지가 어떻게 당했는지 그들에게 얘기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에게 ‘두렵지 않다면 우리와 함께해도 좋지만 무섭다면 당장 떠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우린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며 그곳에 남았다.” 스테비아의 언니는 그녀에게 전선에 나가기엔 아직 너무 어리니 뒤에 남아 식사 준비나 도우라고 했다. “하지만 난 거부했다”고 스테비아는 말했다. “나는 총을 들고 나가 싸우고 싶었다.” 결국 그들 자매는 가난 때문에 안티발라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스테비아는 지금도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직 복수 생각이 너무 간절해 기회가 있으면 다른 무장단체에라도 들어갈 생각이다. 복수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선 그런 단체를 무장해제하고 전투원을 사회로 재통합시키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유엔과 국제기구에서 ‘DDR’로 부르는 과정이다. DDR은 ‘disarmament(무장해제)·demobilization(동원해제)·reintegration(재통합)’을 의미한다. 그 프로그램 중 하나가 2015년 10월 실시됐다. 유엔에 따르면 그 프로그램에 등록한 전투원이 4324명이었고 그중 여성이 737명이었다. 그보다 규모가 작은 ‘예비’ 프로젝트가 2017년 8월 수도 방기에서 유엔평화유지군의 지원으로 실시됐다. 각 무장단체에서 그 프로젝트에 등록해 지난 9월 무장해제한 전투원은 109명이었고 그중 여성은 6명이었다. 몇 주 뒤 부아르에서 무장해제한 전투원 20명 중 여성은 2명이었다. 유엔 여성기구의 산체스는 “경험에 따르면 DDR 프로그램 대부분은 여성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DDR 프로그램이 여성을 자원한 전투원이 아니라 그냥 무장단체 대원에게 딸린 식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재통합 프로그램에서 여성을 피해자, 조리사, 청소부로만 생각하면 그들의 전투 경험과 훈련,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고려하지 않고 그들에게 청소하고 식사 준비하는 일로 돌아갈 것을 강요함으로써 전통적인 여성 역할에 관한 고정 관념을 고착시킬 수 있다.
에스더(26)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줄무늬 셔츠에 모조 보석 장식의 조끼를 입고 단단한 팔과 어깨를 드러낸 그녀는 자신은 늘 군인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셀레카가 수도 방기를 점령했을 때 군인이 되는 길은 그들 단체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에스더는 “그들은 나라를 지킬 군인이 되도록 우리를 훈련시켰다”고 말했다. “나는 괜찮은 급여를 받는 진짜 군인이 되기 위해 수준 높은 군사훈련을 받고 싶었다.”
구보, 진흙탕 포복, 장애물 통과, 지구력 테스트 등 훈련은 지옥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훈련하는 여성이 적지 않았다. 에스더는 장거리 구보 훈련에서 동료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피로, 부상과 싸우며 몸을 던졌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강해야 살아남는다. 나는 강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다.”
에스더는 여자는 군인이 될 수 없다는 사람들의 생각을 비웃었다. “난 스스로 여자 군인이라고 생각한다. 총을 어떻게 들고 어떻게 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웃으며 “여자 군인도 얼마든지 잔인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토록 어려운 훈련을 받았는데도 에스더는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다. 셀레카가 정권을 빼앗기고 외곽으로 쫓겨나면서 용감하고 멋진 군인이 되겠다는 그녀의 야망도 물거품이 됐다. 에스더는 “거기서 얻은 게 전혀 없다”고 말했다. 걸걸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풀이 죽었다. “그들과 함께 있었던 숱한 시간이 순전히 낭비였다. 세월만 낭비하고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자리도 얻을 수 없게 됐다.”
- 카산드라 비노그라드 뉴스위크 기자
※ 이 기사는 미국 비영리 저널리즘 조직 ‘퓰리처 위기보도 센터(Pulitzer Center on Crisis Reporting)’의 지원을 받아 취재·작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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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비아가 소속된 반군 부대엔 여성이 여럿이다. 그중에서도 그녀는 무기를 든 여성 중 한 명이다(그런 여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유엔이 집단학살의 조짐이 보인다고 경고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내전에서 14개의 무장단체가 영토와 자원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운다. 그 무장단체의 대다수는 남성이다. 그러나 멜비아 같은 여성도 다수 무기를 들었다. 정부 관리와 구호요원은 주로 그들의 존재를 잘 모르거나 부인한다. 그들은 무장단체가 남성 지배적인 곳이라 여성의 전투 참여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고정 관념이나 추측과 달리 이곳에서 여성은 줄곧 전투에 참가해왔다.
멜비아는 왼손 관절을 우두둑 꺾으며 자신이 받은 무기 훈련을 설명했다. 그녀는 AK-47 소총의 분해와 결합, 보초 교대근무, 순찰, 전선 배치시 요령 등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녀는 먼 하늘을 쳐다보며 집에서 만든 수제총으로 몇 번이나 사격했는지 돌이켰다. 멜비아는 완전한 자격을 갖춘 전투원은 아니지 않느냐는 질문에 호탕하게 웃었다. “우린 다른 전투대원과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 남자들과 똑같이 한다. 나도 남자 대원처럼 엄격한 명령을 내릴 수 있다.” (뉴스위크는 이 기사에 인용되는 여성이 보복 받거나 낙인 찍히지 않도록 성 없이 이름만 밝히기로 동의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내전은 ‘셀레카’로 알려진 무슬림 반군이 2013년 3월 수도 방기를 점령하고 프랑수아 보지제 전 대통령을 축출한 이래 4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현지 상고어로 ‘동맹’이란 뜻을 지닌 셀레카는 ‘민주세력연합’ ‘정화평화애국자협의회’ 등 3개 무장단체의 연합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수도를 점령하면서 민간인을 살해하고 집을 불태우며 재산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과정에서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가 나뉘어져 토지 소유권 쟁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특히 셀레카가 기독교계 주민에 대해 약탈 및 살해를 자행하기 시작하자 ‘안티발라카’라는 기독교 민병대가 결성돼 그들을 상대로 싸웠다. 양 세력 간의 치열한 전투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셀레카는 수도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혼란은 끝나지 않았다. 현재 셀레카 분파와 여러 무장단체가 수도를 제외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지난해 말 전투가 다시 시작돼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진다. 그러자 유엔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잊혀진’ 위기로 알려진 내전에서 판세가 뒤바뀌는 상황을 경고하고 나섰다.
물론 전선에서 직접 총을 들고 싸우는 여성 대원이 많지 않다. 무장단체와 연관된 여성의 다수는 결혼을 강요당하거나 성폭력에 사달리거나 식사 준비와 간호 등 ‘전통적’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일부 여성의 좀 더 역동적인 역할(예를 들면 전투원)을 인정하는 것이 평화와 안정을 이루는 데 필수적이며 그런 여성이 사회에서 생산적인 역할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된다고 지적한다. 유엔 여성기구의 정책 전문가 알레한드로 산체스는 “전쟁이라고 하면 언제나 남성이나 힘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여성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식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로운 사회를 도모하고 지속가능한 평화를 이루기 원한다면 무장단체에 속한 여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동부 전략 요충지 브리아에서 마리아메(21)는 부대장과 동료들 사이에서 남자처럼 ‘그’라고 불린다. 그래도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남자 대원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똑같은 무기를 들고 똑같은 일(전투를 말한다)을 하기 때문이다. 마리아메는 “그들은 나를 남자처럼 대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남자 대원 여러 명과 함께 기관총이 설치된 픽업 트럭에 올라탔다. “난 두렵지 않다. 최선을 다해 조국을 지킬 것이다.”
그곳에서 약 2㎞ 떨어진 곳에 경쟁 무장단체의 임시 거점이 있다. 그곳의 여성 레티시아도 전투원으로 활동한다. 주변에 남자들이 총을 메고 서 있는 동안 그녀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며 “우리들 사이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난 다른 모든 대원들과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싸운다. 우리가 공격당해 남자들이 나가서 방어해야 할 때 나도 그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한다.”
이런 여성 전투원을 둘러싼 여러 오해 중 하나는 그들이 강제로 모집됐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끔찍한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들 대다수는 자발적으로 무장단체에 합류했다. 남자 대원이 그렇듯이 그들이 총을 든 동기도 다양하다. 복수심, 호기심, 힘의 추구, 규율적인 생활의 필요성 등. 스테비아(17)가 무장단체에 합류한 동기는 복수였다. 그녀가 어머니와 함께 마을 시장에서 채소와 향신료를 팔고 있었을 때 셀레카 대원들이 들이닥쳐 총을 난사했다. 그들이 마을을 습격하는 동안 그녀는 어머니와 농장으로 피신했다. 스테비아는 “셀레카가 우리 마을에 쳐들어와 집에 있던 주민을 사살하며 만행을 저질렀다”고 돌이켰다. “아버지와 다른 식구들은 집에 있었는데 돌아가보니 그들은 모두 주검이 돼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언니는 다른 곳에 있다가 살아남았다. 언니는 셀레카에 맞서는 안티발라카 무장단체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래서 자매는 그 단체를 찾아나섰다. 스테비아는 “우린 너무 격분해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고 그 단체에 들어가려 했다”고 말했다. “정확히 누가 우리 아버지를 사살했는지 몰랐지만 우린 마주치는 모든 셀레카 대원을 없애버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들 자매는 안티발라카 거점을 찾으려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스테비아는 “그 단체엔 여성을 포함해 많은 대원이 있었다”고 돌이켰다. “그래서 우리도 합류할 용기가 났다.”
안티발라카는 처음엔 그들 자매를 의심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따져 물었다. 스테비아는 “우린 아버지가 어떻게 당했는지 그들에게 얘기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에게 ‘두렵지 않다면 우리와 함께해도 좋지만 무섭다면 당장 떠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우린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며 그곳에 남았다.” 스테비아의 언니는 그녀에게 전선에 나가기엔 아직 너무 어리니 뒤에 남아 식사 준비나 도우라고 했다. “하지만 난 거부했다”고 스테비아는 말했다. “나는 총을 들고 나가 싸우고 싶었다.” 결국 그들 자매는 가난 때문에 안티발라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스테비아는 지금도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직 복수 생각이 너무 간절해 기회가 있으면 다른 무장단체에라도 들어갈 생각이다. 복수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선 그런 단체를 무장해제하고 전투원을 사회로 재통합시키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다. 유엔과 국제기구에서 ‘DDR’로 부르는 과정이다. DDR은 ‘disarmament(무장해제)·demobilization(동원해제)·reintegration(재통합)’을 의미한다. 그 프로그램 중 하나가 2015년 10월 실시됐다. 유엔에 따르면 그 프로그램에 등록한 전투원이 4324명이었고 그중 여성이 737명이었다. 그보다 규모가 작은 ‘예비’ 프로젝트가 2017년 8월 수도 방기에서 유엔평화유지군의 지원으로 실시됐다. 각 무장단체에서 그 프로젝트에 등록해 지난 9월 무장해제한 전투원은 109명이었고 그중 여성은 6명이었다. 몇 주 뒤 부아르에서 무장해제한 전투원 20명 중 여성은 2명이었다. 유엔 여성기구의 산체스는 “경험에 따르면 DDR 프로그램 대부분은 여성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DDR 프로그램이 여성을 자원한 전투원이 아니라 그냥 무장단체 대원에게 딸린 식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재통합 프로그램에서 여성을 피해자, 조리사, 청소부로만 생각하면 그들의 전투 경험과 훈련,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고려하지 않고 그들에게 청소하고 식사 준비하는 일로 돌아갈 것을 강요함으로써 전통적인 여성 역할에 관한 고정 관념을 고착시킬 수 있다.
에스더(26)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줄무늬 셔츠에 모조 보석 장식의 조끼를 입고 단단한 팔과 어깨를 드러낸 그녀는 자신은 늘 군인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셀레카가 수도 방기를 점령했을 때 군인이 되는 길은 그들 단체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에스더는 “그들은 나라를 지킬 군인이 되도록 우리를 훈련시켰다”고 말했다. “나는 괜찮은 급여를 받는 진짜 군인이 되기 위해 수준 높은 군사훈련을 받고 싶었다.”
구보, 진흙탕 포복, 장애물 통과, 지구력 테스트 등 훈련은 지옥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 훈련하는 여성이 적지 않았다. 에스더는 장거리 구보 훈련에서 동료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피로, 부상과 싸우며 몸을 던졌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강해야 살아남는다. 나는 강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었다.”
에스더는 여자는 군인이 될 수 없다는 사람들의 생각을 비웃었다. “난 스스로 여자 군인이라고 생각한다. 총을 어떻게 들고 어떻게 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웃으며 “여자 군인도 얼마든지 잔인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토록 어려운 훈련을 받았는데도 에스더는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다. 셀레카가 정권을 빼앗기고 외곽으로 쫓겨나면서 용감하고 멋진 군인이 되겠다는 그녀의 야망도 물거품이 됐다. 에스더는 “거기서 얻은 게 전혀 없다”고 말했다. 걸걸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풀이 죽었다. “그들과 함께 있었던 숱한 시간이 순전히 낭비였다. 세월만 낭비하고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자리도 얻을 수 없게 됐다.”
- 카산드라 비노그라드 뉴스위크 기자
※ 이 기사는 미국 비영리 저널리즘 조직 ‘퓰리처 위기보도 센터(Pulitzer Center on Crisis Reporting)’의 지원을 받아 취재·작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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