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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자유주의 기수의 화려한 변심?

유럽 자유주의 기수의 화려한 변심?

메르켈 독일 총리, 대연정 붕괴 막기 위해 난민포용 정책에서 후퇴하면서 입지 좁아져
난민 포용을 주장했던 메르켈 총리는 근년 들어 한 발 뒤로 물러나 좀 더 제한적인 정책을 채택했다. / 사진:AP-NEWSIS
독일 기독민주당(기민당)과 기독사회당(기사당)이 난민 정책을 둘러싸고 마찰을 빚으면서 붕괴 위기로 치달았던 대연정이 가까스로 살아났다. 기민당을 이끄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기사당 대표인 호르스트 제호퍼 내무장관이 지난 7월 2일 난민 정책 해법에 극적으로 합의하면서 대연정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메르켈 총리의 대연정은 외부에서 유럽연합(EU)으로 끊임없이 유입되는 난민을 두고 내부적으로 정면 충돌했다. 난민 100만 명 이상이 새로 독일에 도착하자 제호퍼 내무장관은 남부 독일-오스트리아 국경을 통한 난민 유입을 더 철저하게 차단하는 안을 밀어붙였다. 아울러 이전에 다른 EU 회원국에 등록된 난민을 일방적으로 추방하는 방안도 추진했다.

메르켈 총리는 제호퍼 내무장관과 마라톤 회의 끝에 독일-오스트리아 국경지대에 ‘난민환승센터’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원안은 국경 부근에 난민 수용소를 건설하는 것이었으나 제3의 대연정 파트너인 진보파 사회민주당(사민당)의 주장으로 완화됐다. 난민환승센터는 EU 회원국에 망명 신청이 된 난민을 송환하기 전 수용하는 공간이다. 그에 따라 독일 당국은 망명 신청자를 새로 건립될 난민환승센터에서 대기시켜 놓고 이들의 자격 조건을 심사할 계획이다. 망명 신청자 중 다른 EU 회원국에 망명을 신청한 난민의 경우 최초 신청국과 협의를 거쳐 돌려보낸다. 현재로선 그 난민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한 스페인·그리스 등 14개 국가를 상대로만 송환할 예정이다. 모든 회원국에 망명 신청이 된 난민을 돌려보내겠다는 제호퍼 장관의 원래 제안보다는 완화된 방안이다.EU 내 난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지지해온 메르켈 총리가 이런 합의를 한 것은 대연정의 붕괴를 막기 위해 기존 난민 포용책에서 후퇴한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독일 야당인 좌파당의 베른트 릭싱어 대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대규모 ‘강제수용시설’이 들어선다”며 “난민의 인권이 침해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국 언론들도 비판을 쏟아냈다. 뉴욕타임스는 “유럽 자유주의 질서의 기수로 통하던 지도자(메르켈 총리)가 국내 압박에 굴복해 화려하게 변심했다”고 지적했다.

독일 동부 바우첸의 난민 수용 시설.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에 등록된 난민을 그 국가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 사진:AP-NEWSIS
그러나 메르켈 총리는 그런 지적에 “독일 국민이 법과 질서가 작용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모든 형태의 이민에는 질서가 따라야 한다”고 반박했다. 벨기에 소재 싱크탱크인 카네기 유럽의 스테판 르네 객원 연구원도 그에 동의했다. “메르켈 총리가 확실히 승리했다. 독일의 행동이 EU의 법과 원칙을 따르며 EU 회원국들과의 합의에 근거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줬다.”

메르켈 총리는 스페인과 그리스가 자국에 등록된 난민 중 독일-오스트리아 국경에서 독일 입국이 거부된 사람들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북아프리카를 통해 넘어오는 난민의 주요 도착지인 이탈리아가 여전히 문제를 제기한다. 르네 연구원은 “이탈리아에 들어선 새로운 포퓰리스트 연정이 자국에 등록된 난민을 돌려받는 데 응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유럽에서 난민 위기는 왜 발생했을까? 기후변화와 내전, 경제적 혼란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수많은 난민이 2015년부터 유럽 해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초기엔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남부 유럽 국가가 난민을 가장 많이 흡수하면서 EU 회원국 사이에서 분열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국경을 따라 철조망과 장벽이 세워졌다. 유럽의 대통합을 지향하는 EU 프로젝트에 정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러자 EU의 지도자인 메르켈 총리는 독일이 난민 100만 명을 받아들이고 다른 유럽 국가에도 난민을 할당해 정착시키겠다고 약속하며 독일과 유럽에 “우린 이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안심시켰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인 채텀하우스의 한스 쿤드나니 선임연구원은 메르켈 총리의 관대한 난민포용 정책이 지지자들과 비판자 양측 모두에 의해 과장됐다고 믿는다. 그는 뉴스위크에 “2015년 도착한 난민 100만 명을 수용하는 것은 정책적 선택이 아니라 독일이 막을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고 말했다. “용감하거나 무모한 결정이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유럽 대륙의 우익 운동이 이미 탄력을 얻은 상황에서 난민 위기가 우파에 더욱 활기를 불어넣었다. 도착하는 난민 수가 줄어들지만 그 문제는 유럽에 중요한 도전이다. 메르켈 총리도 난민 문제가 “앞으로 EU의 운명을 좌우하는 이슈”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수주의 정부들은 난민을 철저히 배격하는 입장을 명백히 밝혔다. 특히 헝가리가 대표적이다. 헝가리는 “난민은 독”이라고 했던 극우성향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지난 4월 4선에 성공한 후 반난민 패키지 법안을 전방위로 쏟아냈다. 헝가리 의회는 보호받을 자격이 없는 난민에게 재정적 지원이나 체류자격 취득 등의 행위를 하면 최고 징역 1년의 처벌을 받는 내용의 ‘스톱 소로스’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전엔 이민자 지원업무를 하는 시민단체를 설립하려면 국가보안기관의 승인을 거쳐야 하고 외국에서 유입되는 자금에는 25% 정도의 무거운 세금을 부과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헝가리 출신의 세계적인 투자가 조지 소로스가 만든 비정부기구(NGO) 오픈소사이어티재단(OSF)을 겨냥해 정치적 탄압을 가한 것이다. 결국 OSF는 지난달 헝가리 부다페스트 사무실을 닫고 활동 근거지를 독일 베를린으로 옮겼다. 강경 우파인 법과정의당이 집권한 폴란드도 난민에 적대적이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서도 2015년 이래 난민에 반대하는 우익 포퓰리스트가 독자적으로 또는 연정의 일부로서 정권을 잡았고, 영국은 오랜 EU 회의론자들이 ‘브렉시트’를 이끌었다.

그러나 쿤드나니 연구원은 극우와 중도우파의 차이가 일반적인 생각처럼 그렇게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진보 대 반(反)진보의 대결이 아니다.” 메르켈과 오르반 총리 모두 유럽의회의 양대정파인 중도우파 유럽국민당그룹(EPP) 소속이다. 쿤드나니 연구원은 “많은 사람의 생각보다 그들은 훨씬 가깝다”며 “이 일은 중도를 포함해 일반적으로 말하는 ‘우익’이 추진한다”고 말했다.르네 연구원도 많은 EU 회원국에서 ‘유럽 요새’라는 사고방식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난민 이슈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유럽을 괴롭힐 것이라는 사실이다. 난민 문제를 책임 있게 처리하려면 유럽 공통의 해법이 필요하다. 더 나은 EU 법, 더 강한 EU 기구, 회원국 사이의 더 강한 연대를 말한다. 그러나 많은 유럽 국가에서 갈수록 심해지는 국수주의 태도로 인해 그런 해법을 도출하기가 아주 어렵다.”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정부의 친난민 정책에 항의하는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 지지자들. / 사진:AP-NEWSIS
유럽 전체의 차원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메르켈 총리는 2000년부터 맡아온 총리 직책에 자신이 여전히 적임자라는 것을 독일 유권자와 동료 의원들에게 확신 시키려고 애쓰는 와중에 독일 내부에서 한층 더 대담해진 우익의 공세에 직면했다.

지난해 9월 총선에서 반난민·반이슬람을 내세운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12.7%를 득표해 제3정당으로 원내에 입성했다. 더구나 대연정 구성 후에는 제1야당으로 부상해 의회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AfD의 부상은 보수정당인 기사당과 자민당의 우경화까지 초래한다. 난민에 부정적인 보수 유권자를 뺏기지 않기 위해 반난민 정책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극우 정부가 빠질 수 있는 위험을 잘 아는 유권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총선에서 메르켈 총리의 기민당-기사당 연합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지만 이전보다 득표율이 8% 낮아졌다. 결국 메르켈 총리는 가까스로 사민당을 연정 파트너로 끌어들여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메르켈 총리는 근년 들어 친난민 정책에서 물러나 좀 더 제한적인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쿤드나니 연구원은 “독일의 정책이 달라진 것은 근본 이념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론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메르켈 총리의 입지가 크게 위축된 것은 사실이다. 르네 연구원은 “이제 그녀는 정치 경력의 황혼기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 확실한 후계자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메르켈 총리는 난민 수치가 지금처럼 낮게 유지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난민이 다시 급증한다면 자리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유럽외교협회(ECFR) 선임 정책연구원 알무트 몰러는 뉴스위크에 “메르켈 총리의 지지도는 여전히 높지만 보수적인 기사당에서만이 아니라 기민당 내부에서도 메르켈 피로현상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당을 결속시킬 만한 힘이 아직 있다. 이번 대연정 붕괴를 막는 데도 그런 힘이 작용했다. 하지만 그녀 자신도 이번이 총리로서 마지막 임기라는 사실을 안다. 문제는 앞으로 후임자 선출을 둘러싼 전투에서 그녀가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지 여부다.”

르네 연구원은 “메르켈이 앞으로 2년 정도는 자리를 지킬 수 있겠지만 다음 선거까지 버티진 못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지금 당장은 난민 문제에 관한 합의로 대연정이 유지되지만 앞으로 그 문제가 또 다시 연정을 위협할 것이다.” 몰러 연구원도 “난민 문제가 다시 불거지면 메르켈 총리의 대연정이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고 동의했다.

- 데이비드 브레넌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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