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는 공포를 먹고 자란다
혐오는 공포를 먹고 자란다
미국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이 말하는 ‘분노와 혐오’에서 벗어나 희망으로 향하는 길 2018년 12월 미국 맨해튼에 있는 뉴욕공립도서관에서 근사한 행사가 열렸다. 영국의 베아트리스 공주, 모델 칼리 클로스, 데이비드 록펠러 주니어,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의 전 부인 웬디 덩 머독, 케리 케네디 등 세계적인 유명인사들이 철학계의 록스타 격인 마사 누스바움(71)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다. 제3차 연례 베르그루엔 철학상 시상식장이었다. 상금 100만 달러를 수여하는 이 상은 ‘막대한 사회·기술·정치·문화·경제 변화로 급변하는 세상에 나아가야 할 길과 지혜, 그리고 향상된 자아인식을 제시하는 사상가’에게 주어진다.
도덕철학자이자 시카고대학 법학 교수인 누스바움은 정의 그리고 그것이 개인과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관심은 이론적인 차원을 뛰어넘는다. 그녀는 철학을 이용해 시대적 담론을 발전시키는 데 몰두한다. 누스바움은 그런 취지로 5편의 책을 저술했다. 최근의 저서 ‘공포의 군주제(The Monarchy of Fear)’는 감정의 관점에서 현재의 정치 위기, 고대 이후 분노·혐오·선망이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데 어떻게 이용됐는지를 흥미롭게 고찰한 책이다.
누스바움은 현대 학자들이 모두 정치논쟁을 넘어 상아탑에 안주한다는 비아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필시 고대 철학의 대가들에게서 영감을 얻기 때문인 듯하다. 그녀는 “고대 전통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정치적 이슈와 유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세네카는 로마 네로 황제의 멘토였으며 황제가 끔찍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려 했다. 정치 현실을 피할 길은 없었다.”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기 훨씬 오래 전부터 공포가 정치 담론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지난 2년 사이 귀청이 떨어져나가고 몸에 거부반응이 일어날 만큼 소음이 커졌다. 누스바움은 분명 공포를 전체적인 맥락에서 바라볼 뿐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정치전략에 사용되는지를 설명하는 데 능하지만 그녀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거기서 어떻게 벗어날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 증오범죄가 증가하고 탄핵설이 비등하는 요즘 어쩌면 더 시급한 문제도 없는 듯하다. 트럼프 시대에 분노를 ‘정화’하고 희망을 찾는 법에 관해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공포의 군주제’에서 2016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날 느꼈던 깨달음에 관해 썼다.
친구들과 떨어져 일본에 있어서 평소 하던 대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당혹감과 공포를 표현할 수 없었다. 그 뉴스를 들었을 때 패닉상태에 빠졌다. 유권자가 분열된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렇게 공포를 느꼈을까?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깨달았다. 유익한 공포도 있지만 이번에는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서로 의논하지 못하도록 막는 감정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공포를 어떻게 정의하나?
가장 원시적인 감정이다. 어떻게 보면 고통스러운 이 세상으로 나오는 갓난아기가 느끼는 최초의 감정이다. 인생을 살다가 공포로 무기력하게 느낄 때 우리는 남들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이건 모두 그들 잘못이야, 그 여자들 또는 이민자가 우리 나라에 들끓고 있어”라고 말한다. 정당하게 항의하거나 건설적인 해법을 내놓기보다는 만만한 표적에게 감정을 쏟아붓는다.
공포는 또한 죽음의 필연성, 그리고 배설물과 체액 등 인간도 동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인 혐오의 바탕을 이룬다. 이는 어느 사회에서나 예외 없는 진리다. 우리는 인종적 또는 남녀간 하위 그룹 또는 계급에 혐오를 투사한다. 다른 그룹을 동물 취급하면서 그것을 핑계 삼아 그들을 더 복종시키는 것이 사회적 종속과 차별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면서 우쭐함을 느낀다. 우리는 천사, 그들은 동물이 될 수 있다.
생리와 출산을 하는 여성은 모든 문화에서 항상 그런 표적이 돼왔다. 그들은 혐오스러운 육체를 상징하게 됐다. 흑인은 동물에 더 가깝다는 인종차별의 오랜 비유가 있다. 그리고 유대인은 종종 곤충에 비유됐다. 카프카의 ‘변신’은 한 남자가 어떻게 갑자기 바퀴벌레로 변하는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혐오는 우리가 무기력하거나 공포를 느낄 때 때때로 고개를 드는 감정이다. 이젠 사라졌거니 생각했던 방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다. 아프리카 국가들을 거지소굴로, 이민자를 곤충 등의 침입에 비유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오늘날 여성을 향해 표출되는 혐오의 배경은 무엇인가?
남자들이 여자에게 분노하는 것은 여자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기는 남자들의 뒷바라지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직장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종종 남자들을 뛰어넘는다. 과감히 성폭행과 성희롱을 고발한다. 똑바로 처신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역겹게 군다는 이유로 그들을 밟으려는 욕구가 강해진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이라크전 참전군인이자 팔 다리를 잃은 태미 덕워스 상원의원은 자신의 둘째 아이를 데리고 상원에 등원하려 했다. 의회에서 수유를 (공개적으로) 할 수 있도록 규정이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선 그런 변화가 일어났다. 뉴질랜드 총리는 첫 아기를 출산한 뒤 보란 듯이 수유를 했다.
뛰어난 여성이 전국에 널려 있고 이것을 “우리 대 그들”로 이해하지 않고 과거와 다르게 교육을 받아 여성을 존중하는 게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남자가 상당히 많아졌다. 그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져 지금은 여성혐오자가 멸종 위기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좌파에선 보수 진영이 공포의 논리를 퍼뜨린다고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공포에는 자신이 피해를 보리라는 믿음이 요구되며 선동적 웅변으로 쉽게 조작된다. 그러나 우파에만 무책임한 선동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무책임한 보수파가 상당히 많다. [공포의 군주국에서] 나는 트럼프와 대비되는 인물로 몇몇 민주당원이 아니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을 꼽았다. 그는 9·11 테러 후 대단히 신중하고 책임감 있게 발언했다. 그는 이런 일을 저지른 범죄자들을 추적할 것이지만 모든 종교나 국민을 죄악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한 일을 모두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는 국민감정의 책임감 있는 수호자였다.
그런 점에서 특히 뛰어났던 지도자의 예를 들자면?
프랭클린 D. 루스벨트(FDR) 대통령은 신중하고 책임감 있는 국민감정의 수호자였다. FDR은 가난한 사람이 고통 받는 건 그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의 성향을 알고 있었다. 지배 계급의 태도는 “그런 고통을 자초한 건 게으른 종자인 그들”이라는 식이었다. 그는 미국에는 빈민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빈민이 존경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엄한 존재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들이 고통 받는 건 나쁜 행동이나 게으름 탓이 아니라 그들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어떤 사회적 변동에 따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뉴딜 정책(대공황 중 도입된 프로그램과 프로젝트들)을 통해 이를 널리 알릴 예술가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일례로 도로시아 랭은 미국 빈곤의 가장 인상적인 사진들을 찍었다. 존 스타인벡도 같은 맥락에서 소설을 썼다. 이는 중요한 일이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대중의 분노를 어떻게 생각할지 보여주는 모델이다. 수호자로서 그의 문제는 사뭇 달랐다. 자신의 운동뿐 아니라 일반 대중 속에 어떻게 감정을 형성하느냐에 관한 문제였다. 분노에는 끔찍한 잘못이 있었으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가 하면, 우리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보복적 성격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길은 미래지향적이거나 혁신적 또는 급진적이지 않고 단순히 손쉬운 행동 방식이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그는 여겼다.
이어 그는 “분노를 품고 우리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물었다. 그들의 분노를 정화해 표출하도록 하고 정의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희망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 같은 다른 감정과 연계돼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런 사람들을 좋아할 필요도 없지만 그들의 인간성 그리고 선행 가능성에 대해 기본적인 호의를 가져야 한다. 사람은 항상 경청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는 백인을 향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당신들은 ‘자금부족’이라는 부도수표를 우리에게 남겼지만 언제든 당신들의 빚을 갚을 수 있다.”
그것은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미국의 정치 상황에서 여론을 형성하는 훌륭한 방법이었다. 그에게 그런 고매하고 시적인 웅변의 힘이 없었다면 온 나라가 잿더미로 변했을 수 있다. 그가 살아 있었다는 게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민주주의가 온전히 기능하는 데 신뢰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썼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절대적 군주제 아래서 군주가 복종과 충성만을 강요한다면 군주의 명령에 의존할 수 있다. 그러나 의존은 신뢰와 다르다. 신뢰는 그 이상을 의미한다. 자신의 프로젝트와 미래를 외부에 노출시켜 다른 사람의 처분에 따를 수 있게 하려는 의지를 뜻한다. 잘못된 결혼의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 공포로 지배한다면 그 사람의 가혹한 행위에 의존할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을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신의 희망과 미래가 모르는 사람들 손에 달렸다는 사고에 의존한다. 잘못된 결정이 내려지기도 하고 자신의 의견이 항상 채택되지는 않겠지만 대체로 우리가 참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가 나오리라는 신뢰가 있다. 그러려면 상대 진영 사람들이 뭔가를 잘 못한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신뢰는 존중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자신을 외부에 노출시켜 그 결과를 공개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그것은 정치절차를 향한 특정한 태도를 요구하는 큰 주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런 절차를 공격한 데 큰 당혹감을 느낀다. 부정투표가 이슈라기보다 그에 관해 고장 난 레코더처럼 무한 반복하는 게 더 나쁜 일이라는 증거가 많다. 미디어에 대한 트럼프의 공격도 마찬가지다. 뉴스(적어도 그중 다수)가 진실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정치절차가 주효하려면 거기에 의존해야 한다.
기독우파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의 배타적 언사에 대한 그들의 지지는 어떤가?
종교는 상당히 강력한 희망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복음파 기독교도는 그런 배타적 언사에 맞서 싸워 왔다.(2008년 대선 캠페인 중) 오바마가 복음파들에게 지지를 요청했을 때를 기억하는가? 그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올바른 일이었다. 대중의 특정 그룹을 차단해서는 안 된다. 미국에 증오발언의 자리는 없다고 말해야 한다.
희망이 어떻게 공포의 해독제가 되나?
흔히 희망은 공포의 반대말로 간주되며 그런 일면도 있다. 그러나 철학적 전통에선 양자가 대단히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모두 몹시 불확실한 그 결과가 자신에게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뭔가가 될 것을 요구한다.
스토아학파(기원전 3세기 창설된 헬레니즘 철학의 추종자들)는 불확실한 것들, 그리고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만 신경 쓰지 않도록 하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쳤다. 완전한 스토아학파(자신의 이성과 의지에의 순응)라면 두려움이나 희망이 없을 것이다. 아주 많은 게 급속도로 폭정으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세상에선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런 반응은 좋지 않았다. 나처럼 다른 사람이나 조국 또는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공포와 희망을 모두 품게 될 것이다.
키케로는 로마공화국을 사랑한 스토아 학파였다. 그는 로마공화국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 한번은 딸의 죽음과 공화정의 몰락을 애도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그만 두고 스토아학파답게 행동하라고 하자 그는 말했다. “아닐세, 이건 중요한 일이야. 내가 비통해 해야 하네.” 우리는 그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희망컨대 정치적 자객들에게 암살당하지 않고 말이다! 그는 거의 말 그대로 자객들의 칼날에 목을 내밀었다.
그러나 희망은 확률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맞다. 가족이 병 들어 입원했는데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확률이 낮더라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반면 확률은 대단히 높지만 그래도 공포와 숨 막히는 듯한 불안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행동과 연결된 증후군이기도 하다. 저명한 젊은 여성 철학자 아드리엔 마틴이 저술한 ‘우리는 어떻게 희망하는가(How We Hope: A Moral Psychology)’는 이에 관한 명저다. 희망은 행동하려는 성향을 갖고 어떤 상황을 바라보는 방식이라고 그녀는 지적한다. 두려움이 생기면 달아나 머리를 파묻으려는 행동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희망을 갖는다면 자신이 뛰어들어 이 좋은 결과의 가능성을 더 높이려 노력한다.
희망은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넣는다. 희망을 좇아 공직에 출마하거나 후보를 지지하게 된다. 공포와 절망에 빠져 앉아만 있는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한다. 정신과 마음의 습관으로 마음 속에 희망을 키우면 공포 증후군보다 그런 희망을 품게 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
희망을 품는 실용적인 습관 몇 가지를 든다면?
저마다 나름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정치에 참여하거나 항의 시위에 가담하거나 신앙을 갖는 방식이 될 수 있다. 분명 내가 거주하는 시카고에선 흑인 교회가 지역 사회에 희망의 중심지다. 우리 예배당은 사회적 정의를 지향한다. 각자가 커뮤니티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교회 텃밭에서 신선한 농산물을 재배해 빈민에게 공급한다.
한 가지 큰 불변 요소는 엄청난 희망의 양성소인 예술이다. 어떤 작품이든 아주 음울하더라도 예술가는 혐오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더 깊은 이해에 이르도록 사람들 마음 속을 들여다보게 한다.
곧 아서 밀러의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 관한 강좌를 진행할 예정이다. 미국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의 파괴에 관한 무서운 연극이지만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는 뭔가를 우리 커뮤니티와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예술가들은 포용력 있는 인간의 비전을 그린다. 사람을 도구로 보지 않으며 그런 태도가 희망의 습관을 길러준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인문학 교육은 매우 훌륭한 시민정신 학교다. 상상을 자극하면서도 소크라테스 철학 같은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철학은 우리를 합리적이고 정중한 토론 모델로 이끈다. 철학 강의를 듣는다면 누군가에게 고함치지 않고, 그들의 주장을 해부하면서 그 전제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이 결론으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무엇이 잘못됐는지 파악하려 애쓸 것이다. 합리적이고 정중한 숙고의 습관을 갖게 되며 그것이 중요한 희망 훈련이다.
이성적인 논쟁을 말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나?
나는 현재 분극화된 학생들 대상으로 ‘정의와 법의 상충되는 이론들’이라는 새 교육과정을 개발 중이다. 학생들에게 함께 논쟁할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 주고자 한다. 보수적·자유주의적·진보적 그리고 더 급진적 이론을 제시하면 학생들은 그 논쟁에서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자문할 수 있다. 그것을 무엇보다 가장 희망적인 부분으로 꼽을 수 있다. 크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광범위한 스펙트럼에 걸쳐 우정과 교양을 유지하며 대화할 수 있는 교실이다.
보수파 교수들과 공동으로 그 과정을 진행할 계획이다. 이는 학생들이 평소 고려하지도 않을 과정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제다. 학생들은 종종 수강신청으로 강좌에 찬반 의사를 표시하며 스스로를 분극화한다. 우리 로스쿨은 대단히 보수적인 학생들의 비중이 높다는 점에서 주요 로스쿨 중에서도 특이하다. 몰몬교도나 복음주의 기독교도라도 하버드대학이나 예일대학에서처럼 왕따 또는 비난 받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요즘 같은 어려운 시기에 냉소주의나 무관심을 어떻게 극복할지 한마디한다면?
모험을 감수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너무 자기방어적이지 않은 키케로 같은 사람이 인정받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어렵고 고통이 따르며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흔쾌히 즐거운 마음으로 행동한다. 정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다.
나는 냉소적인 반응에 아무 매력도 느끼지 못한다. 모든 게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요즘의 냉소주의는 그 의미가 고대 견유학파(Cynics)와 완전히 다르다. 나처럼 현세가 우리의 유일한 삶이라고 생각할 때 그 삶이 무가치하다면 가치 있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세상에는 사람·자연·동물 등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 천지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지구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우리가 지구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 니나 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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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철학자이자 시카고대학 법학 교수인 누스바움은 정의 그리고 그것이 개인과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관심은 이론적인 차원을 뛰어넘는다. 그녀는 철학을 이용해 시대적 담론을 발전시키는 데 몰두한다. 누스바움은 그런 취지로 5편의 책을 저술했다. 최근의 저서 ‘공포의 군주제(The Monarchy of Fear)’는 감정의 관점에서 현재의 정치 위기, 고대 이후 분노·혐오·선망이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데 어떻게 이용됐는지를 흥미롭게 고찰한 책이다.
누스바움은 현대 학자들이 모두 정치논쟁을 넘어 상아탑에 안주한다는 비아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필시 고대 철학의 대가들에게서 영감을 얻기 때문인 듯하다. 그녀는 “고대 전통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정치적 이슈와 유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세네카는 로마 네로 황제의 멘토였으며 황제가 끔찍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려 했다. 정치 현실을 피할 길은 없었다.”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기 훨씬 오래 전부터 공포가 정치 담론을 지배해 왔다. 그러나 지난 2년 사이 귀청이 떨어져나가고 몸에 거부반응이 일어날 만큼 소음이 커졌다. 누스바움은 분명 공포를 전체적인 맥락에서 바라볼 뿐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정치전략에 사용되는지를 설명하는 데 능하지만 그녀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거기서 어떻게 벗어날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 증오범죄가 증가하고 탄핵설이 비등하는 요즘 어쩌면 더 시급한 문제도 없는 듯하다. 트럼프 시대에 분노를 ‘정화’하고 희망을 찾는 법에 관해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공포의 군주제’에서 2016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날 느꼈던 깨달음에 관해 썼다.
친구들과 떨어져 일본에 있어서 평소 하던 대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당혹감과 공포를 표현할 수 없었다. 그 뉴스를 들었을 때 패닉상태에 빠졌다. 유권자가 분열된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왜 그렇게 공포를 느꼈을까?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깨달았다. 유익한 공포도 있지만 이번에는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서로 의논하지 못하도록 막는 감정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공포를 어떻게 정의하나?
가장 원시적인 감정이다. 어떻게 보면 고통스러운 이 세상으로 나오는 갓난아기가 느끼는 최초의 감정이다. 인생을 살다가 공포로 무기력하게 느낄 때 우리는 남들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이건 모두 그들 잘못이야, 그 여자들 또는 이민자가 우리 나라에 들끓고 있어”라고 말한다. 정당하게 항의하거나 건설적인 해법을 내놓기보다는 만만한 표적에게 감정을 쏟아붓는다.
공포는 또한 죽음의 필연성, 그리고 배설물과 체액 등 인간도 동물이라는 사실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인 혐오의 바탕을 이룬다. 이는 어느 사회에서나 예외 없는 진리다. 우리는 인종적 또는 남녀간 하위 그룹 또는 계급에 혐오를 투사한다. 다른 그룹을 동물 취급하면서 그것을 핑계 삼아 그들을 더 복종시키는 것이 사회적 종속과 차별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면서 우쭐함을 느낀다. 우리는 천사, 그들은 동물이 될 수 있다.
생리와 출산을 하는 여성은 모든 문화에서 항상 그런 표적이 돼왔다. 그들은 혐오스러운 육체를 상징하게 됐다. 흑인은 동물에 더 가깝다는 인종차별의 오랜 비유가 있다. 그리고 유대인은 종종 곤충에 비유됐다. 카프카의 ‘변신’은 한 남자가 어떻게 갑자기 바퀴벌레로 변하는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혐오는 우리가 무기력하거나 공포를 느낄 때 때때로 고개를 드는 감정이다. 이젠 사라졌거니 생각했던 방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다. 아프리카 국가들을 거지소굴로, 이민자를 곤충 등의 침입에 비유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오늘날 여성을 향해 표출되는 혐오의 배경은 무엇인가?
남자들이 여자에게 분노하는 것은 여자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기는 남자들의 뒷바라지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직장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종종 남자들을 뛰어넘는다. 과감히 성폭행과 성희롱을 고발한다. 똑바로 처신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역겹게 군다는 이유로 그들을 밟으려는 욕구가 강해진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이라크전 참전군인이자 팔 다리를 잃은 태미 덕워스 상원의원은 자신의 둘째 아이를 데리고 상원에 등원하려 했다. 의회에서 수유를 (공개적으로) 할 수 있도록 규정이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선 그런 변화가 일어났다. 뉴질랜드 총리는 첫 아기를 출산한 뒤 보란 듯이 수유를 했다.
뛰어난 여성이 전국에 널려 있고 이것을 “우리 대 그들”로 이해하지 않고 과거와 다르게 교육을 받아 여성을 존중하는 게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남자가 상당히 많아졌다. 그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져 지금은 여성혐오자가 멸종 위기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좌파에선 보수 진영이 공포의 논리를 퍼뜨린다고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공포에는 자신이 피해를 보리라는 믿음이 요구되며 선동적 웅변으로 쉽게 조작된다. 그러나 우파에만 무책임한 선동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항상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무책임한 보수파가 상당히 많다. [공포의 군주국에서] 나는 트럼프와 대비되는 인물로 몇몇 민주당원이 아니라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을 꼽았다. 그는 9·11 테러 후 대단히 신중하고 책임감 있게 발언했다. 그는 이런 일을 저지른 범죄자들을 추적할 것이지만 모든 종교나 국민을 죄악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한 일을 모두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는 국민감정의 책임감 있는 수호자였다.
그런 점에서 특히 뛰어났던 지도자의 예를 들자면?
프랭클린 D. 루스벨트(FDR) 대통령은 신중하고 책임감 있는 국민감정의 수호자였다. FDR은 가난한 사람이 고통 받는 건 그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의 성향을 알고 있었다. 지배 계급의 태도는 “그런 고통을 자초한 건 게으른 종자인 그들”이라는 식이었다. 그는 미국에는 빈민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빈민이 존경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엄한 존재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들이 고통 받는 건 나쁜 행동이나 게으름 탓이 아니라 그들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어떤 사회적 변동에 따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뉴딜 정책(대공황 중 도입된 프로그램과 프로젝트들)을 통해 이를 널리 알릴 예술가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일례로 도로시아 랭은 미국 빈곤의 가장 인상적인 사진들을 찍었다. 존 스타인벡도 같은 맥락에서 소설을 썼다. 이는 중요한 일이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대중의 분노를 어떻게 생각할지 보여주는 모델이다. 수호자로서 그의 문제는 사뭇 달랐다. 자신의 운동뿐 아니라 일반 대중 속에 어떻게 감정을 형성하느냐에 관한 문제였다. 분노에는 끔찍한 잘못이 있었으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는가 하면, 우리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보복적 성격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길은 미래지향적이거나 혁신적 또는 급진적이지 않고 단순히 손쉬운 행동 방식이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그는 여겼다.
이어 그는 “분노를 품고 우리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물었다. 그들의 분노를 정화해 표출하도록 하고 정의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희망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 같은 다른 감정과 연계돼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런 사람들을 좋아할 필요도 없지만 그들의 인간성 그리고 선행 가능성에 대해 기본적인 호의를 가져야 한다. 사람은 항상 경청하고 변화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는 백인을 향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당신들은 ‘자금부족’이라는 부도수표를 우리에게 남겼지만 언제든 당신들의 빚을 갚을 수 있다.”
그것은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미국의 정치 상황에서 여론을 형성하는 훌륭한 방법이었다. 그에게 그런 고매하고 시적인 웅변의 힘이 없었다면 온 나라가 잿더미로 변했을 수 있다. 그가 살아 있었다는 게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민주주의가 온전히 기능하는 데 신뢰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썼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절대적 군주제 아래서 군주가 복종과 충성만을 강요한다면 군주의 명령에 의존할 수 있다. 그러나 의존은 신뢰와 다르다. 신뢰는 그 이상을 의미한다. 자신의 프로젝트와 미래를 외부에 노출시켜 다른 사람의 처분에 따를 수 있게 하려는 의지를 뜻한다. 잘못된 결혼의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 공포로 지배한다면 그 사람의 가혹한 행위에 의존할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을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신의 희망과 미래가 모르는 사람들 손에 달렸다는 사고에 의존한다. 잘못된 결정이 내려지기도 하고 자신의 의견이 항상 채택되지는 않겠지만 대체로 우리가 참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가 나오리라는 신뢰가 있다. 그러려면 상대 진영 사람들이 뭔가를 잘 못한다고 생각하더라도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신뢰는 존중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자신을 외부에 노출시켜 그 결과를 공개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그것은 정치절차를 향한 특정한 태도를 요구하는 큰 주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런 절차를 공격한 데 큰 당혹감을 느낀다. 부정투표가 이슈라기보다 그에 관해 고장 난 레코더처럼 무한 반복하는 게 더 나쁜 일이라는 증거가 많다. 미디어에 대한 트럼프의 공격도 마찬가지다. 뉴스(적어도 그중 다수)가 진실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정치절차가 주효하려면 거기에 의존해야 한다.
기독우파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의 배타적 언사에 대한 그들의 지지는 어떤가?
종교는 상당히 강력한 희망의 원천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복음파 기독교도는 그런 배타적 언사에 맞서 싸워 왔다.(2008년 대선 캠페인 중) 오바마가 복음파들에게 지지를 요청했을 때를 기억하는가? 그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올바른 일이었다. 대중의 특정 그룹을 차단해서는 안 된다. 미국에 증오발언의 자리는 없다고 말해야 한다.
희망이 어떻게 공포의 해독제가 되나?
흔히 희망은 공포의 반대말로 간주되며 그런 일면도 있다. 그러나 철학적 전통에선 양자가 대단히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모두 몹시 불확실한 그 결과가 자신에게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뭔가가 될 것을 요구한다.
스토아학파(기원전 3세기 창설된 헬레니즘 철학의 추종자들)는 불확실한 것들, 그리고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만 신경 쓰지 않도록 하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쳤다. 완전한 스토아학파(자신의 이성과 의지에의 순응)라면 두려움이나 희망이 없을 것이다. 아주 많은 게 급속도로 폭정으로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세상에선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런 반응은 좋지 않았다. 나처럼 다른 사람이나 조국 또는 내가 통제하지 못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공포와 희망을 모두 품게 될 것이다.
키케로는 로마공화국을 사랑한 스토아 학파였다. 그는 로마공화국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 한번은 딸의 죽음과 공화정의 몰락을 애도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그만 두고 스토아학파답게 행동하라고 하자 그는 말했다. “아닐세, 이건 중요한 일이야. 내가 비통해 해야 하네.” 우리는 그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희망컨대 정치적 자객들에게 암살당하지 않고 말이다! 그는 거의 말 그대로 자객들의 칼날에 목을 내밀었다.
그러나 희망은 확률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맞다. 가족이 병 들어 입원했는데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확률이 낮더라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반면 확률은 대단히 높지만 그래도 공포와 숨 막히는 듯한 불안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행동과 연결된 증후군이기도 하다. 저명한 젊은 여성 철학자 아드리엔 마틴이 저술한 ‘우리는 어떻게 희망하는가(How We Hope: A Moral Psychology)’는 이에 관한 명저다. 희망은 행동하려는 성향을 갖고 어떤 상황을 바라보는 방식이라고 그녀는 지적한다. 두려움이 생기면 달아나 머리를 파묻으려는 행동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희망을 갖는다면 자신이 뛰어들어 이 좋은 결과의 가능성을 더 높이려 노력한다.
희망은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넣는다. 희망을 좇아 공직에 출마하거나 후보를 지지하게 된다. 공포와 절망에 빠져 앉아만 있는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한다. 정신과 마음의 습관으로 마음 속에 희망을 키우면 공포 증후군보다 그런 희망을 품게 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
희망을 품는 실용적인 습관 몇 가지를 든다면?
저마다 나름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정치에 참여하거나 항의 시위에 가담하거나 신앙을 갖는 방식이 될 수 있다. 분명 내가 거주하는 시카고에선 흑인 교회가 지역 사회에 희망의 중심지다. 우리 예배당은 사회적 정의를 지향한다. 각자가 커뮤니티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교회 텃밭에서 신선한 농산물을 재배해 빈민에게 공급한다.
한 가지 큰 불변 요소는 엄청난 희망의 양성소인 예술이다. 어떤 작품이든 아주 음울하더라도 예술가는 혐오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 더 깊은 이해에 이르도록 사람들 마음 속을 들여다보게 한다.
곧 아서 밀러의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 관한 강좌를 진행할 예정이다. 미국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의 파괴에 관한 무서운 연극이지만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는 뭔가를 우리 커뮤니티와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예술가들은 포용력 있는 인간의 비전을 그린다. 사람을 도구로 보지 않으며 그런 태도가 희망의 습관을 길러준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인문학 교육은 매우 훌륭한 시민정신 학교다. 상상을 자극하면서도 소크라테스 철학 같은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 철학은 우리를 합리적이고 정중한 토론 모델로 이끈다. 철학 강의를 듣는다면 누군가에게 고함치지 않고, 그들의 주장을 해부하면서 그 전제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이 결론으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무엇이 잘못됐는지 파악하려 애쓸 것이다. 합리적이고 정중한 숙고의 습관을 갖게 되며 그것이 중요한 희망 훈련이다.
이성적인 논쟁을 말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나?
나는 현재 분극화된 학생들 대상으로 ‘정의와 법의 상충되는 이론들’이라는 새 교육과정을 개발 중이다. 학생들에게 함께 논쟁할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 주고자 한다. 보수적·자유주의적·진보적 그리고 더 급진적 이론을 제시하면 학생들은 그 논쟁에서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자문할 수 있다. 그것을 무엇보다 가장 희망적인 부분으로 꼽을 수 있다. 크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광범위한 스펙트럼에 걸쳐 우정과 교양을 유지하며 대화할 수 있는 교실이다.
보수파 교수들과 공동으로 그 과정을 진행할 계획이다. 이는 학생들이 평소 고려하지도 않을 과정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문제다. 학생들은 종종 수강신청으로 강좌에 찬반 의사를 표시하며 스스로를 분극화한다. 우리 로스쿨은 대단히 보수적인 학생들의 비중이 높다는 점에서 주요 로스쿨 중에서도 특이하다. 몰몬교도나 복음주의 기독교도라도 하버드대학이나 예일대학에서처럼 왕따 또는 비난 받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요즘 같은 어려운 시기에 냉소주의나 무관심을 어떻게 극복할지 한마디한다면?
모험을 감수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너무 자기방어적이지 않은 키케로 같은 사람이 인정받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어렵고 고통이 따르며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흔쾌히 즐거운 마음으로 행동한다. 정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다.
나는 냉소적인 반응에 아무 매력도 느끼지 못한다. 모든 게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요즘의 냉소주의는 그 의미가 고대 견유학파(Cynics)와 완전히 다르다. 나처럼 현세가 우리의 유일한 삶이라고 생각할 때 그 삶이 무가치하다면 가치 있는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세상에는 사람·자연·동물 등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 천지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지구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우리가 지구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 니나 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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