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한인타운 지역구로 둔 피터 구 뉴욕시의원] 한국인이 일본에게 원하는 건 'I am Sorry' 세 단어
[뉴욕 한인타운 지역구로 둔 피터 구 뉴욕시의원] 한국인이 일본에게 원하는 건 'I am Sorry' 세 단어
위안부 추모길 조성 추진하다 일본 극우단체 테러 위협도 한국의 60세 미만 성인의 70%가 한국을 떠나 살고 싶다는 설문이 나왔다. 성인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지난 12월 15일 제119차 양성평등정책포럼 발표자료 ‘청년 관점의 젠더 갈등 진단과 포용국가를 위한 정책 대응방안 연구: 공정 인식에 대한 젠더 분석’을 공개했다. 자료에 따르면 설문 대상 5000명 중 19~34세 청년 10명 중 7.5명이, 35~59세 중장년층 10명 중 6.5명이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답했다. 난민이 아닌 한 한국을 떠나는 방법은 해외 이주다. 이를 이민(외국 영주권 획득)으로 좁혀봐도 마찬가지다. 통계청 해외이주신고자 현황을 보면 이민자 수는 2017년 1443명에서 2018년 6330명으로 급증했다. 이 중 절반 이상이 미국을 택했다. 미국 영주권을 획득한 한국인 수는 2017년 909명에서 2018년 3223명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미국 이민자의 상당수가 이민의 첫발을 한인타운으로 내딛는다. 뉴욕을 택한 이민자들이라면 식당과 술집이 밀집해 있는 맨해튼 34번가의 코리아타운이 아니라 퀸즈 보로(구)의 플러싱으로 향할 것이다. 한국 여행자들은 관광 일정에 넣지도 않는 오래되고 낡은 한인타운이 플러싱이다. 하지만 이민자의 도시 뉴욕에는 그리스인의 거리 아스토리아, 남미 이민자의 거리 잭슨하이츠, 중국인과 한국인이 밀집한 플러싱과 같은 지역들이 상당히 많다. 여행자와 유학생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1세대 이민자들이 자국어를 쓰고싶어서 모여산다고 생각하지만, 편견이다. 이민자들이 자국에서 온 여행자들의 핀잔에도 함께 모여 사는 이유는 그들을 위한 관료와 정치가가 그들을 위해서 활동하는 유일한 지역이 플러싱, 아스토리아, 잭슨하이츠라는 믿음 때문이다. 한국, 중국 등 동북아시아에서 온 이민자들의 거리 플러싱을 지역구로 한 피터 구 뉴욕시의원은 한 때 ‘김치’가 뉴욕시 행정부의 단속 위험에 처하자 이 규정을 무효화 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고, 이를 관철시켰다. 피터 구 의원은 e메일 인터뷰에서 “김치는 한인 커뮤니티에 무척 중요한 음식”이라고 말했다.
뉴욕시 보건국이 6년 전 김치를 위험식품으로 분류해 단속 규정을 강화하려고 하자 이를 저지하고, 관련 조례도 만들었다. 중국계 시의원이 한국에서 온 이민자들을 위해서 나선 이유가 무엇인가?
“플러싱에서만 3선을 했다. 지역구민을 위하는 일이 곧 나의 일이다. 플러싱에서 한인 커뮤니티의 위상은 무척 높다. 뉴욕시 공무원들이 전통음식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다. 뉴욕시 보건국이 발효식품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만들려고 했다. 위험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만약 새 규정이 생겼으면 김치는 아마 안전하지 못한 식품으로 간주돼 한식당에서 제대로 제공할 수 없었을 거다. 그러나, 김치는 한인 커뮤니티에 무척 중요한 음식이다. 나도 좋아한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식당 위생 단속과 그에 따른 커뮤니티 파급효과 등을 시 보건국장에게 조언할 수 있는 자문위원회를 구성하는 관련 조례안을 2013년 통과시켰다.”
한국의 위안부 이슈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본인들로부터 테러 위협까지 당했다고 들었다.
“홍콩에서 성장하면서 제국주의를 이해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힘이 없으면 짓밟힌다. 국가는 물론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시의원이 된 이후 많은 한인이 내게 위안부에 대해 이야기 했다. 위안부 이슈는 내가 성장하면서 느꼈던 제국주의의 그늘을 상기시켜줬다. 매우 부당하다고 느꼈다. 중국 난징대학살 사건도 상기시켜줬다. 우리는 젊은 세대가 우리 역사를 알고 과거를 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를 되풀이 할 운명을 짊어지게 됩니다. 역사가 중요한 이유다. 중국은 이런 역사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중국이 과거 식민지였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에서 실수를 배우고, 그래서 나쁜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과거 독일의 나치처럼, 사람들은 소수 그룹에 의해 세뇌당하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과거를 기억해야 하고, 과거가 반복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여전히 (일본의) 사죄를 요청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에 화가 난 것 뿐이다. 한국인들은 모국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신들이 외세에 의해 학대당했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당사국이 올바른 일을 하기를 바란다. 한국인들이 그들에게서 원하는 것은 ‘아이 엠 쏘리(I am sorry)’ 세 단어다."
피터 구 시의원은 한인 밀집지역에 ‘위안부 추모길’과 ‘기림비’ 건립을 적극 추진하다가 일본 정부와 극우세력으로부터 강한 방해 공작을 받았다. 일본의 민간단체 소속 회원들은 뉴욕시의원들에게 '위안부는 매춘부다. 추모길 조성과 기림비 건립을 중단하라'는 내용의 우편 테러를 가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까다로운 규정과 한인사회의 무관심, 자금 문제 등으로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한인들과 밀접한 조례, 결의안을 많이 추진했다. 최근에는 어떤 일을 준비 중인가?
“2014년 9월에 매년 1월 13일을 '미주 한인의 날'로 기념하는 결의안이 뉴욕시의회 전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나를 포함해 동료 시의원 20명이 공동 발의자로 참여했다. 116년 전 한인이 처음 미국 땅에 도착한 후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을 고국으로 부르고 있다. 한인 이민자들은 문화와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하게 공헌하고 있다.”
피터 구 의원은 2020년 1월중 통과가 유력한 (가칭)‘입양아 시민권 법안 통과 촉구 결의안’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왔다. 연방의회가 신속히 ‘입양아 시민권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촉구하는 내용이다. 결의안을 추진한 이유는 한인을 포함해 세계 각국에서 온 입양아들이 시민권을 받지 못해 본국으로 추방되는 문제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양부모들의 파양, 이혼 또는 관련 이민법규에 대한 무지로 입양된 아이들이 시민권 취득 시기를 놓치는 일이 많다. 입양아 권익 운동을 펼치는 월드허그파운데이션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 입양됐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시민권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약 3만5000명이며, 이 중 한인이 2만여 명에 달한다. 현재 뉴욕주에 거주중인 한인 입양인은 2000여명이다.
피터 구는 1952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생후 3개월 만에 난민이 됐다. 1949년 중국 공산단이 정권을 잡자 그의 부모는 이에 반대했고, 아들을 데리고 홍콩으로 밀항했다. 그는 난민 신분으로 유년기를 보냈다.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새는 집에 살았고, 그의 부모는 봉제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1960년대 초 홍콩에 미국 항공모함 한 척이 입항했다. 초등학생이던 피터 구는 이 항공모함의 거대함에 놀랐고, 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나라인 미국으로 가겠다는 꿈을 가졌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7세에 혼자 미국에 도착해 패스트푸드 식당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텍사스 엘파소, 하와이주립대 등에서 화학을 전공했한 후 뉴멕시코주립대에서 약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종합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하던 그는 뉴욕으로 건너와 ‘스타사이드 약국’ 체인을 만들었다. 28세 때 일이다. 이후 뉴욕 아시안 최대 밀집지역인 퀸즈 플러싱의 20선거구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3선 임기를 보내고 있다. 그는 미국에 도착한 첫날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첫날 친구 아파트에 갔는데, 7명이 함께 지내며 마루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나도 한 켠에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이 친구들과 함께샌프란시스코 ‘레드 루비 레스토랑’에서 접시를 닦았고, 남는 시간에는 양파, 새우 껍질을 벗겼다.”
젊은 나이에 사업에 성공했다. 보통 그 정도면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고 하는데, 공직에 도전한 이유는 무엇인가?
“남을 돕는 것을 좋아했다. 약국에서 사람들이 뭐든지 물어보면, 조언해줬다. 정부 의료보험인 메디케이드나 메디케어를 모르면 설명해줬고, 돈이 없어 인슐린을 못사는 사람한테는 그냥 주기도 했다. 당시 내가 지역 커뮤니티에 기부한 돈이 지역 은행들이 기부한 것보다 많았을 거다. 사업이 잘됐기 때문에 커뮤니티에 돌려주고 싶었다. 당시 아시안 정치인은 드물었다. 뉴욕시의회와 뉴욕주하원에 한 명씩 있었다.”
지역구인 플러싱에는 한인 이민자들이 많이 산다. 이들은 어떤 문제를 겪고 있나?
“많은 한인이 노인이거나 늦게 이민 온 중장년층이다. 그래서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고, 시 정부 서비스에 접근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우리 사무실 직원들이 노인들이 가져오는 정부 기관 편지를 번역해 주거나, 노인 아파트 입주 신청 또는 노인 복지 서비스 등 민원 신청을 대행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 한인 보좌관(안준용 디렉터)을 통해서 한인사회의 주요 현안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다.”
- 한정연 기자 han.jeongyeon@joongang.co.kr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미국 이민자의 상당수가 이민의 첫발을 한인타운으로 내딛는다. 뉴욕을 택한 이민자들이라면 식당과 술집이 밀집해 있는 맨해튼 34번가의 코리아타운이 아니라 퀸즈 보로(구)의 플러싱으로 향할 것이다. 한국 여행자들은 관광 일정에 넣지도 않는 오래되고 낡은 한인타운이 플러싱이다. 하지만 이민자의 도시 뉴욕에는 그리스인의 거리 아스토리아, 남미 이민자의 거리 잭슨하이츠, 중국인과 한국인이 밀집한 플러싱과 같은 지역들이 상당히 많다. 여행자와 유학생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1세대 이민자들이 자국어를 쓰고싶어서 모여산다고 생각하지만, 편견이다. 이민자들이 자국에서 온 여행자들의 핀잔에도 함께 모여 사는 이유는 그들을 위한 관료와 정치가가 그들을 위해서 활동하는 유일한 지역이 플러싱, 아스토리아, 잭슨하이츠라는 믿음 때문이다. 한국, 중국 등 동북아시아에서 온 이민자들의 거리 플러싱을 지역구로 한 피터 구 뉴욕시의원은 한 때 ‘김치’가 뉴욕시 행정부의 단속 위험에 처하자 이 규정을 무효화 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고, 이를 관철시켰다. 피터 구 의원은 e메일 인터뷰에서 “김치는 한인 커뮤니티에 무척 중요한 음식”이라고 말했다.
뉴욕시 보건국이 6년 전 김치를 위험식품으로 분류해 단속 규정을 강화하려고 하자 이를 저지하고, 관련 조례도 만들었다. 중국계 시의원이 한국에서 온 이민자들을 위해서 나선 이유가 무엇인가?
“플러싱에서만 3선을 했다. 지역구민을 위하는 일이 곧 나의 일이다. 플러싱에서 한인 커뮤니티의 위상은 무척 높다. 뉴욕시 공무원들이 전통음식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해서 벌어진 일이다. 뉴욕시 보건국이 발효식품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만들려고 했다. 위험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만약 새 규정이 생겼으면 김치는 아마 안전하지 못한 식품으로 간주돼 한식당에서 제대로 제공할 수 없었을 거다. 그러나, 김치는 한인 커뮤니티에 무척 중요한 음식이다. 나도 좋아한다.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식당 위생 단속과 그에 따른 커뮤니티 파급효과 등을 시 보건국장에게 조언할 수 있는 자문위원회를 구성하는 관련 조례안을 2013년 통과시켰다.”
한국의 위안부 이슈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본인들로부터 테러 위협까지 당했다고 들었다.
“홍콩에서 성장하면서 제국주의를 이해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힘이 없으면 짓밟힌다. 국가는 물론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시의원이 된 이후 많은 한인이 내게 위안부에 대해 이야기 했다. 위안부 이슈는 내가 성장하면서 느꼈던 제국주의의 그늘을 상기시켜줬다. 매우 부당하다고 느꼈다. 중국 난징대학살 사건도 상기시켜줬다. 우리는 젊은 세대가 우리 역사를 알고 과거를 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를 되풀이 할 운명을 짊어지게 됩니다. 역사가 중요한 이유다. 중국은 이런 역사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중국이 과거 식민지였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에서 실수를 배우고, 그래서 나쁜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과거 독일의 나치처럼, 사람들은 소수 그룹에 의해 세뇌당하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과거를 기억해야 하고, 과거가 반복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여전히 (일본의) 사죄를 요청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에 화가 난 것 뿐이다. 한국인들은 모국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신들이 외세에 의해 학대당했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당사국이 올바른 일을 하기를 바란다. 한국인들이 그들에게서 원하는 것은 ‘아이 엠 쏘리(I am sorry)’ 세 단어다."
피터 구 시의원은 한인 밀집지역에 ‘위안부 추모길’과 ‘기림비’ 건립을 적극 추진하다가 일본 정부와 극우세력으로부터 강한 방해 공작을 받았다. 일본의 민간단체 소속 회원들은 뉴욕시의원들에게 '위안부는 매춘부다. 추모길 조성과 기림비 건립을 중단하라'는 내용의 우편 테러를 가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까다로운 규정과 한인사회의 무관심, 자금 문제 등으로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한인들과 밀접한 조례, 결의안을 많이 추진했다. 최근에는 어떤 일을 준비 중인가?
“2014년 9월에 매년 1월 13일을 '미주 한인의 날'로 기념하는 결의안이 뉴욕시의회 전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나를 포함해 동료 시의원 20명이 공동 발의자로 참여했다. 116년 전 한인이 처음 미국 땅에 도착한 후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을 고국으로 부르고 있다. 한인 이민자들은 문화와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하게 공헌하고 있다.”
피터 구 의원은 2020년 1월중 통과가 유력한 (가칭)‘입양아 시민권 법안 통과 촉구 결의안’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왔다. 연방의회가 신속히 ‘입양아 시민권 법안’을 통과시키도록 촉구하는 내용이다. 결의안을 추진한 이유는 한인을 포함해 세계 각국에서 온 입양아들이 시민권을 받지 못해 본국으로 추방되는 문제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양부모들의 파양, 이혼 또는 관련 이민법규에 대한 무지로 입양된 아이들이 시민권 취득 시기를 놓치는 일이 많다. 입양아 권익 운동을 펼치는 월드허그파운데이션 자료에 따르면, 미국에 입양됐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시민권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약 3만5000명이며, 이 중 한인이 2만여 명에 달한다. 현재 뉴욕주에 거주중인 한인 입양인은 2000여명이다.
피터 구는 1952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생후 3개월 만에 난민이 됐다. 1949년 중국 공산단이 정권을 잡자 그의 부모는 이에 반대했고, 아들을 데리고 홍콩으로 밀항했다. 그는 난민 신분으로 유년기를 보냈다.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새는 집에 살았고, 그의 부모는 봉제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1960년대 초 홍콩에 미국 항공모함 한 척이 입항했다. 초등학생이던 피터 구는 이 항공모함의 거대함에 놀랐고, 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나라인 미국으로 가겠다는 꿈을 가졌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7세에 혼자 미국에 도착해 패스트푸드 식당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텍사스 엘파소, 하와이주립대 등에서 화학을 전공했한 후 뉴멕시코주립대에서 약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종합병원에서 약사로 근무하던 그는 뉴욕으로 건너와 ‘스타사이드 약국’ 체인을 만들었다. 28세 때 일이다. 이후 뉴욕 아시안 최대 밀집지역인 퀸즈 플러싱의 20선거구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3선 임기를 보내고 있다. 그는 미국에 도착한 첫날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첫날 친구 아파트에 갔는데, 7명이 함께 지내며 마루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나도 한 켠에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이 친구들과 함께샌프란시스코 ‘레드 루비 레스토랑’에서 접시를 닦았고, 남는 시간에는 양파, 새우 껍질을 벗겼다.”
젊은 나이에 사업에 성공했다. 보통 그 정도면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고 하는데, 공직에 도전한 이유는 무엇인가?
“남을 돕는 것을 좋아했다. 약국에서 사람들이 뭐든지 물어보면, 조언해줬다. 정부 의료보험인 메디케이드나 메디케어를 모르면 설명해줬고, 돈이 없어 인슐린을 못사는 사람한테는 그냥 주기도 했다. 당시 내가 지역 커뮤니티에 기부한 돈이 지역 은행들이 기부한 것보다 많았을 거다. 사업이 잘됐기 때문에 커뮤니티에 돌려주고 싶었다. 당시 아시안 정치인은 드물었다. 뉴욕시의회와 뉴욕주하원에 한 명씩 있었다.”
지역구인 플러싱에는 한인 이민자들이 많이 산다. 이들은 어떤 문제를 겪고 있나?
“많은 한인이 노인이거나 늦게 이민 온 중장년층이다. 그래서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고, 시 정부 서비스에 접근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우리 사무실 직원들이 노인들이 가져오는 정부 기관 편지를 번역해 주거나, 노인 아파트 입주 신청 또는 노인 복지 서비스 등 민원 신청을 대행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 한인 보좌관(안준용 디렉터)을 통해서 한인사회의 주요 현안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다.”
- 한정연 기자 han.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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