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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 맞서는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뿌리는?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대립하는 서안지구 온건주의-가자지구 강경주의 정파
이슬람주의-민족주의가 결합한 하마스, 서구선 반유대주의 조직으로 평가

 
 
팔레스타인인들이 21일(현지시간) 가자시티에서 하마스와 이스라엘 사이에 휴전을 축하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AP=연합뉴스]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 도시들을 로켓으로 공격하면서 촉발된 중동 분쟁이 국제사회의 중재로 ‘휴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양측의 갈등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전쟁의 불씨는 남아있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벌인 주체는 ‘팔레스타인’이 아닌, 가자지구, 그리고 하마스라고 보고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라는 2개의 지역으로 나뉘었는데, 현재의 분쟁은 서안지구를 뺀 가자지구와의 싸움이라는 이야기다.
 
현재의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선 ‘하마스’를 알아야 한다. 팔레스타인 자치지구는 서안지구를 통치하는 파타와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하마스라는 2개의 정파로 분열돼 있다. 파타와 하마스는 지향점이 사뭇 다른 것은 물론 동족이라는 말을 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서로 대립하고 적대시한다.
 

팔레스타인의 두 정파, ‘파타’와 ‘하마스’

‘승리’라는 뜻의 파타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이끌던 야세르 아라파트가 1957년 설립한 정당이다. 정치적으로 중도좌파로 분류되며, 세속주의와 온건 민족주의를 지향한다.

파타는 대이스라엘 정책에서 온건파로 통한다. 1993년 오슬로 협정에서 합의한 ‘2국가체제’를 지지하는 세력이다. ‘2국가 체제’는 이스라엘과 장래 들어설 팔레스타인 국가가 평화롭게 안전하게 공존하는 방안이다. 2국가 체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라는 두 집단이 하나의 나라를 구성하는 ‘1국가 체제’나, 이스라엘과 서안지구·가자지구가 각각 병립하는 ‘3국가 체제’와 대른 개념이다.

하마스는 이념과 정책에서 파타와 완전히 극과 극이다. 대이스라엘 정책에서 철저한 강경파다. 철저한 반유대주의다. 이스라엘을 타도하고 유대인을 내쫓아 전체 팔레스타인 지역을 ‘해방’하는 게 목표다. 당연히 ‘2국가체제’를 거부한다. 하마스는 이를 위해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을 내세운다. 이번에 로켓을 이스라엘 지역으로 무차별 발사한 이유다.

이런 하마스의 뿌리를 살펴보는 것은 이번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고 향후 상황을 전망하는 데 필수적일 것이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의 정당이자 이슬람주의 정치·사회 운동 조직이며 반이스라엘 무장단체다. 하마스라는 말은 ‘이슬람 저항운동’을 뜻하는 아랍어 머릿글자에서 왔다. ‘하마스 운동’으로 옮기기도 한다.
하마스 고위 관리 오사마 함단이 지난 17일 레바논 남부 베이루트에서 레바논의 무장단체 헤즈볼라에 의해 조직된 집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AP= 연합뉴스]

하마스는 1987년 12월 14일 가자지구에서 설립됐다. 이스라엘에 점령된 팔레스타인의 주민들이 이스라엘 군용트럭에 어린 소녀들이 치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대대적으로 봉기해 저항운동을 펼치던 시기다. 당시 이슬람 기도 인도자인 아흐마드 야신이 이끌던 무슬림 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를 기반으로 했다.

주목할 점은 하마스가 ‘이슬람주의’로 불리는 이념·사상을 내걸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세속법이 아닌 이슬람법(샤리아)을 바탕으로 국가를 통치하고 사회를 운영하자는 이념이다. 이슬람법은 이슬람 경전인 쿠란과 창시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하디스에 적힌 원리와 규칙을 바탕으로 오랜 세월 동안 무슬림(이슬람 교도) 사회에서 마련되고 축적된 판례와 규범 등으로 이뤄진 율법 체계다. 이슬람 법학자들이 해석하고 적용한다. 이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하마스는 이슬람주의 정치조직으로 볼 수 있다.

하마스가 저항하는 대상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을 무너뜨리고 현재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관할 지역은 물론 이스라엘이 영위하는 전체 영토를 수복해 그 땅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게 목적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자결권과 주권을 누리는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이끄는 이념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다.

하마스는 이슬람주의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가 결합했다는 점에서 종교적 민족주의 단체로 규정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상당수 서방 정부는 하마스가 이처럼 유대인을 모두 내쫓겠다는 주장을 한다는 이유로 반시오니즘·반유대주의의 조직으로 평가한다.
 

알카삼의 ‘무장 투쟁’, 쿠트브의 ‘사회개조론’

독특한 것은 하마스가 사회활동과 군사를 책임지는 2개의 날개를 주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활동은 ‘초대’를 의미하는 ‘다와’가 책임진다. 다와는 식량 공급과 의료와 교육 제공 등 사회활동을 가리킨다. 이를 통해 상처 입은 사람을 물질로 지원하는 것은 물론 따뜻한 공동체의 정으로 영혼까지 위로한다. 이를 통해 주민의 지지를 얻는다는 점에서 다와의 활동은 정치적이다.

많은 이슬람 정당은 이런 사회활동을 기반으로 지지를 얻는다.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의개발당도 오랫동안 사회 활동을 펼치면서 지지율을 높였다. 하마스도 같은 방식을 사용한다. 다와는 하마스가 풀뿌리 지원을 얻는 기본적인 ‘정치 농사’ 활동을 맡는다.

하마스의 또 다른 날개는 ‘이즈 알 딘 알카삼 여단’으로 불리는 무장 조직이다. 이스라엘 병사를 납치하고, 무기를 개발하고 확보하며, 이스라엘에 로켓을 발사하는 등 무장 활동을 담당한다. 때로는 적에게 이로운 행동을 한 사람들은 잡아서 처형하기도 한다. 군사·보안을 책임지는 무장 조직이다.

이 무장 조직의 이름은 이즈 알 딘 알카삼(1882~1935)이라는 이맘(이슬람 예배지도자)에서 땄다. 알카삼은 당시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영토였던 지금의 시리아 다마스쿠스 근처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면서 지금의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 이라크와 이스라엘, 그리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지역은 영국이 각각 점령해 위임 통치를 했다.

알카삼은 프랑스 위임 통치령에서 영국 위임 통치령인 하이파의 ‘이스티크랄(독립)’이라는 이름의 모스크(이슬람 사원)에서 이맘으로 활동했다. 하이파는 현재 이스라엘의 북부 항구도시로 당시엔 유럽에서 오는 유대인이 처음 가나안 땅에 내리는 주요 항구였다.

알카삼은 아랍 민족주의에 반제국주의, 반시오니즘을 결합한 사상을 키웠다. 알카삼은 서구의 제국주의와 중동 지역에 정착해 나라를 세우려는 유대인의 시오니즘 모두를 배격했다. 제국주의와 시오니즘 모두에 저항하라는 그의 외침은 막 터키 지배에서 벗어난 아랍어 사용 청년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 지역을 위임 통치하던 영국이 유대인 이주 문제를 두고 오락가락하다 결국 유대인 편을 들자 알카삼은 1931년 무장 투쟁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이 전사로 자원했고, 무기 구입 자금을 기부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는 1933년 무장단체를 만들어 영국인과 유대인을 제거하는 투쟁에 나섰다. 알카삼의 무장단체는 1935년 10월 영국인을 위해 일하던 유대인 경찰을 한 명 살해한 뒤 군경의 추적을 받았다. 결국 알카삼을 포함한 3명이 사살되고 4명이 생포됐다.

알카삼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최초로 영국과 유대인에 대한 무장투쟁에 나선 인물로 기록된다. 당시 그의 장례식에는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수많은 아랍인들이 몰렸다. 당시 이들이 외치는 ‘복수’라는 외침이 지축을 뒤흔들었다고 한다. 분노한 군중은 하이파의 경찰서를 습격했다.  

알카삼은 제국주의와 시오니즘 모두에 대항하라고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하마스의 무장조직이 그의 이름에서 명칭을 땄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알카삼은 ‘지하드(성전)’와 ‘복수’를 주장하는 수많은 반서구·반시오니즘 투쟁의 원조가 됐다.

하마스를 거론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사이드 쿠트브라는 이집트인이다. 쿠트브는 급진적인 이슬람 개혁가로 1950~1960년대 이슬람주의 조직인 무슬림 형제단의 이론적 지도자로 통한다. 세속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아랍 사회 개혁을 배격하고 이슬람 신앙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 개조를 주장했다. 쿠트브의 생각은 아랍 세계로 퍼져 수많은 강경파·과격파·무장단체의 이론적 배경이 됐다.

독특한 것은 쿠트브가 교사이자 장학관으로 이집트 교육부에서 일한 엘리트 공직자였으며, 작가이자 비평가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는 1948년 장학금을 받고 미국에 유학을 떠나 스탠퍼드대를 거쳐 노던 콜로라도대에서 교육학 석사를 받았다. 미국을 동서로 횡단하는 여행도 했다. 그는 당시 목격한 미국을 1951년 글로 남겼다. 그가 본 미국은 성적으로 문란하고 도덕적 해이가 극심했으며 물질주의와 경쟁주의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이슬람 세계를 미국의 도덕적 타락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2년 귀국한 그는 무슬림형제단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1952년 쿠데타로 왕정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가말 압델 나세르의 군부는 쿠트브의 지식을 활용하려고 했지만 서로 지향점이 달랐다. 나세르를 비롯한 군인들은 서구의 군사지식과 아랍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이집트의 물질적 조건을 향상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쿠트브는 군부의 아랍민족주의를 정신적 가치가 결핍된 세속적인 것으로 봤다. 쿠트브에겐 아랍민족주의조차 이슬람주의에 방해가 되는 세속주의의 잔재일 뿐이었다. 쿠트브는 이슬람적인 기준으로 아랍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이슬람 가치를 바탕으로 해결책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항상 이슬람 사회가 서양 사회보다 우월하고 현명하다고 생각했으며, 이슬람적 가치가 서구의 물질문명을 이길 것으로 생각했다.  

쿠트브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이집트 아랍공화국이 아니라 이집트 이슬람공화국이었다. 그는 이집트가 이슬람법을 받아들여 이스람주의를 실현하는 선봉대가 돼야 한다고 믿었고, 그렇게 주장했다. 결국 쿠트브는 세속적인 아랍민족주의 정부에 대항했으며 그 결과 긴 투옥을 거쳐 1966년 처형됐다.

쿠트브의 이상은 팔레스타인의 이슬람주의자에게 바통이 넘어갔다. 지중해 연안도시 야슈켈론 출신의 팔레스타인 주민 아흐마드 야신은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살던 곳에서 밀려나 가까운 가자지구로 이주했다. 이맘인 야신은 절은 시절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돼 휠체어를 타고 다닌 인물이었다. 그는 이슬람센터를 세우고 자선 활동과 이슬람 교육으로 동조자를 모았다. 그는 무슬림 형제단의 가자 지부를 이끌었다. 가자지구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전쟁이 끝난 뒤부터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하기 전까지 이집트가 통치했다.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됐다.
 
가자지구에서 21일 휴전 직전 로켓이 발사되는 모습. [AFP=연합뉴스]

휴전 이뤄졌지만… 완전히 꺼지긴 어려운 화약연기

야신과 동지들은 1987년 1차 인티파타 기간 중 무슬림 형제단 가자 지부를 바탕으로 하마스를 발족했다. 첫 활동은 전단지를 뿌리는 것이었다. 이들은 서안지구에 자리잡은 야세르 아라파트의 PLO와는 방식과 속성이 달랐다. PLO는 테러든 외교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봤다. 이들이 지향한 팔레스타인 국가는 세속주의 국가였다. 하마스는 달랐다. 세속주의를 배격하고 이슬람주의를 추구했다. 이슬람법이 지배하는 이슬람 공화국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 물질이 아닌 정신 승리를 추구하겠다는 것이었다.

테러까지 포함한 오랜 무장활동을 통해 힘이 아닌 협상과 타협, 외교술이 더 유효함을 깨달은 PLO가 이스라엘과 공존을 모색한다면 하마스는 비타협의 강경주의를 고수했다. 하마스의 목표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유대인을 내쫓은 뒤 이슬람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이슬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가자지구를 바탕으로 하는 하마스는 2006년 팔레스타인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서안지구를 바탕으로 자치정부를 이끈 파타당과 2007년 내전을 벌였다. 결국 팔레스타인 자치지역은 파타가 통치하는 서안지구와 하마스가 관리하는 가자지구로 분열됐다.

2009년 하마스는 약간의 양보를 하기도 했다. 1967년 6일전쟁 뒤 경계선을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우는 데 동의한 것이다. 하지만 PLO와 이를 이은 정당인 파타가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서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추구했다면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현재 이스라엘이 차지한 고향으로 돌아가서 정착하는 귀향권을 주장했다.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보장할 것도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를 지지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이룰 힘도, 외교력도 없었다. 언제까지 강경 투쟁을 해야 목표를 달성하고 평화와 안정, 번영을 얻을 수 있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2021년 5월에 발생한 하마스의 이스라엘 로켓 공격과 이스라엘의 보복에는 이런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 누구도 풀기 힘든, 난마 같은 배경이다. 휴전이 이뤄져도 언제 다시 화약 연기가 자욱해질지 아무도 모르는 살육극의 연속이다. 그러면서 서로 승리를 주장할 것이고, 믿고 싶은 집단은 이를 또 믿을 것이다. 인간이 풀기 힘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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