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행 DLF 행정소송 1심 판결문 보니…“제재 과해 취소한 것, 하지 말란 것 아냐”
재판부 “우리은행 징계처분사유 일부 인정”
우리은행의 투표조작·규범위반 행태 지적
“부결 상품인데 출시해 선정심사 형식적”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이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손실 사건으로 인해 중징계를 받은 데 불복해 금융감독원장(금감원)을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승소하면서 금융당국을 비롯한 금융권에서는 후폭풍이 일고 있다. 금감원은 항소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금융권은 제재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손 회장은 1심 재판에서 세간의 예측과 달리 승기를 먼저 잡았다. 하지만 판세 입지가 아직 다져지지 않아 여전히 불안한 상태다. 금감원이 1심에서 졌지만 손 회장을 제재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들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손 회장에게 사건의 책임이 있으며 그래서 금감원이 제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금감원도 애초부터 알고 있는 사안이지만 재판부가 재확인해준 셈이다. 이 때문에 금감원의 항소 등 양측의 법적 공방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은보 금융감독원장은 2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DLF 1심 패소와 관련해 “(항소 여부를) 열심히 고민하고 있다”며 “금융위원회(금융위)와 잘 협조해서 결론을 내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고승범 금융위원장과 정은보 금감원장이 취임 후 첫 회동을 가졌다.
DLF 1심 패소에 대해 항소해야 한다는 의견은 금감원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대법원 판결이 나야 더 다툼의 여지가 없어질 것”이라며 “법원도 손 회장의 잘못은 인정했으며, 지금까지 제재와 관련해 항소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1심 판결, 우리은행의 위반 실태 10여쪽에 걸쳐 지적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우리은행이 DLF 상품 선정 절차 상에서 저질렀던 ▶투표 결과 조작 ▶투표지 위조 ▶형식적인 상품선정위원회 운영 등 내부통제 규범과 기준 위반 등 실태를 10여쪽에 걸쳐 조목조목 지적했다.
재판부는 “DLF를 포함해 원래 상품선정위원회의 표결대로라면 부결됐어야 할 상품이 출시되기에 이르는 등 위원회가 사실상 자산관리(WM) 추진부 의사에 지배돼 유명무실하게 운영될 수 있다는 점은 경영진으로서도 사전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며 우리은행의 규범 위반 실태를 지적한 배경을 설명했다.
재판부 “내부통제 위반으로 감독자인 손태승 처벌 가능”
재판부는 또한 은행 CEO에 대한 문책경고 조치는 금감원장 권한임을 인정했다. 금융사 지배구조법 35조 3항을 근거로 ‘은행·보험사·여신전문금융사 임원에 대한 제재 조치는 금감원으로 하여금 하도록 하고 있다”라고 판결문에 판시했다.
이에 금감원 내부에선 항소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항소할 경우 손 회장과 비슷한 이유로 징계를 받았거나 예고한 다른 금융사 CEO들의 줄소송이 예상돼 진퇴양난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현재 DLF 사태, 라임, 옵티머스 등 사모펀드 사태와 관련해 손 회장처럼 내부통제 미비를 이유로 금융위의 징계를 받은 금융사 CEO는 10명이나 더 있다. 금감원이 이번 손 회장 관련 법원 판결을 받아들이면 그동안의 조치한 징계들이 부적절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수모를 겪어야 한다.
금감원 법무실은 1심 판결문을 입수해 법리 검토에 착수했다. 분석 결과를 토대로 추석 전까지는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구상이다. ‘금융사 CEO에 대한 제재에 변화가 있을 예정이냐’는 질문에 정 금감원장은 “검토하겠다”며 말을 아꼈다.
우리은행에 진 금감원, 9월 하나은행 제재심에 고심
이에 따라 당장 하나은행에 대한 제재심의위원회를 앞두고 있는 금감원의 속내가 더욱 복잡해졌다. 손 회장 선고가 확정 판결은 아니기 때문에 제재심의위 위원들은 의견이 엇갈리면서 제재심 일정도 못 잡고 있는 상황이다.
금감원은 라임펀드 등 각종 사모펀드의 불완전 판매 책임을 물어 당시 은행장이던 지성규 하나금융 부회장에게 ‘문책경고’ 중징계를 이미 사전 통보한 상태다. 이번 재판에서 제재 근거 5개 중 4개가 위법이라고 해석한 재판부의 판단에서 인정받은 1가지 근거인 ‘내부통제기준 준수의무’를 활용해 금감원이 제재를 강화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재판부의 판단이 당장 DLF 판매와 관련해 문책경고를 받은 전 하나은행장인 함영주 부회장 판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금융권은 예상하고 있다. 함 부회장은 DLF 징계와 관련해 금감원과 행정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앞서 하나은행에 대한 금감원의 제재안에는 ‘DLF 신상품 대부분(753개 펀드 중 651개, 86.5%)이 사전심의가 누락된 채 프라이빗뱅커(PB)들에게 공급됐고, 펀드 불완전판매가 광범위하게 발생했다’며 ‘금감원 양매도 상장지수증권(ETN) 신탁상품 검사시 여러 지적에도 불완전판매가 지속적으로 추가 발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내용이 있다. 즉, 내부통제기준 마련 의무 위반 사항을 지적한 것이다.
금융위, 내부통제 준수의무 강화한 지배구조법 마련에 ‘속도’
정부는 개정안에서 내부통제기준을 신설했다. 개정안에는 실효성 있는 예방 대책 마련, 내부통제 기준의 준수 여부에 대한 충실한 점검 등을 새로 추가했다. 일각에선 법과 시행령 개정이 쉽지 않을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빠르게 변화하는 금융 환경에서 금융사가 마련해야 할 내부통제 기준을 시행령과 행정규칙 등에 일일이 넣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김광수 은행연합회장을 비롯한 정희수 생명보험협회장, 나재철 금융투자협회장 등 금융권 협회장 6명은 1일 비대면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금융협회장들이 “금융당국의 지배구조법 개정은 미국 등 금융 선진국처럼 개인이 아닌 금융사를 제재하는 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며 내부통제 제도 개선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김하늬 기자 kim.hon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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