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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호 발사…후발국 미국이 이긴 미·소 우주 개발 경쟁의 교훈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고흥 나로도의 원대한 꿈은 '현재진행형'
우주개발 경쟁은 현재도 진행 중인 글로벌 주도권 다툼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KSLV-II)가 지난 21일 고흥군 나로우주센터 제2발사대에서 화염을 내뿜으며 힘차게 날아오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0월 21일은 한국 우주항공 역사에서 길이 기억될 날이다. 로켓 엔진의 설계에서부터 제작·시험·발사운용까지 모두 순수 국내 기술로 완성한 한국형 3단 발사체 누리호(KSLV-ll)가 전남 고흥군 나로우주센터에서 이날 오후 5시에 발사됐다.
 
누리호는 이날 오후 5시 1단 로켓 점화와 발사에 이어 오후 5시 2분 7초엔 고도 59㎞에서 1단 로켓이 분리되고 2단 로켓이 점화했고, 오후 5시 5분 53초엔 고도 191㎞에서 탑재물인 위성모사체를 보호하기 위해 덮은 페이로드 페어링이 분리됐으며, 오후 5시 4분 34초엔 258㎞ 상공에서 2단 로켓이 분리되고 3단 로켓이 점화했다. 여기까지는 완전히 성공적인 비행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했다. 3단 로켓 엔진은 원래 521초 동안 연소해야 하는데 46초 모자란 475초만 연소했다. 오후 5시 15분엔 목표 고도인 700㎞에 이르자 3단 로켓에서 탑재물인 ‘더미 위성(모사체 위성)’을 분리했지만 모사체의 속도가 계획했던 초속 7.5㎞에 이르지 못하고 6.7㎞에 그쳤다. 결국 충분한 추력을 얻지 못해 모사체를 궤도에 올리지 못했다.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원인이 밝혀졌다. 공기가 없는 우주에서 연소해야 하는 로켓 엔진은 연료와 산화제를 가압 시스템을 통해 엔진에 주입하는데 3단 로켓에서 산화제가 샌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연소가 46초 일찍 종료됐다. 엔진과 주입 시스템은 문제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로우주센터는 내년 5월 재발사에서 모사체 위성을 무사히 궤도에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기술로 세계를 주도하는 나라의 반열에

이번에 모사체 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최종 과정을 제외한 로켓의 전 발사 과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한국은 사실상 우주발사체 기술 보유국이 됐다. 한국은 APR-1400을 비롯한 한국형 원자로, 메모리 반도체, 휴대전화, 자동차와 함께 전 세계에 기술력을 증명했다.
 
자체 기술로 우주발사체를 쏘아 올린 것은 1957년 러시아의 R-7과 1958년 미국의 주피터 7호, 1965년 프랑스의 디아망, 1970년 일본의 람다 4S-5, 중국의 창정(長征) 1호(CZ-1), 1980년 인도의 SLV-3호에 이어 세계 일곱 번째다. 우주발사체 기술은 모든 나라가 안보상 이유로 다른 나라와 공유하지 않고 철저히 보안에 붙이기 때문에 발사체를 쏘아 올렸다는 사실 자체로 기술력을 증명한다. 그 뒤에는 과학기술자들의 고뇌와 땀이 배어있다.  
 
사실 우주발사체를 비롯한 우주 프로그램의 본질은 냉전 시대 소련과 미국의 기술 경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시작은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를 발사하면서 시작됐다. 스푸트니크는 러시아가 개발한 코로나19 백신의 이름에도 붙여졌다.
 
미국은 ‘스푸트니크 충격’에 빠졌다. ‘과학기술은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이 무너진 건 물론이고 심각한 안보 위협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의 발사체가 스푸트니크처럼 우주 공간을 거쳐 미국을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중은 패닉에 빠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 총사령관을 지낸 당시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년, 재임 53~61년)에겐 정치적인 위기였다.
 
소련은 연속적으로 미국에 충격을 가했다. 그해 11월 3일 소련은 개를 탑승시킨 위성을 발사해 인류 최초로 생명체를 우주궤도에 올렸다. 귀환 시스템이 없었기에 이 개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지만 이를 통해 인간 우주여행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최초 우주인인 가가린의 우주여행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된 소중한 희생이었다. 모스크바 시내에 유기견으로, 연구원들이 데려와 ‘작은 곱슬’이라는 뜻의 쿠드랴브카로 불렀다. 라이카는 허스키와 비슷한 잡종견의 비공식 종명이다. 전 세계에 라이카로 알려졌으며, 그를 기리는 기념 우표도 발행됐다. 모스크바 우주연구단지에 동상이 들어섰다.  
 
오랫동안 로켓 기술을 개발해왔던 미국도 이에 대응해 그해 12월 6일 뱅가드 TV-3을 발사했지만, 중간에 폭발했다. 해를 넘긴 1958년 1월 31일에야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주노 1호 로켓에 실어 발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스푸트니크에 이은 역사상 두 번째 위성 발사국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혁신으로 역전을 노렸다. 우선 1958년 7월 29일 우주·항공 분야 장기계획을 위한 우주항공국(NASA·나사)을 설립했다. 미국은 나사 창설을 계기로 우주항공 분야는 물론 과학기술 전반에 걸쳐 연구·개발 투자를 대폭 늘렸으며 정책과 행정도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학자와 엔지니어는 물론이고 학생도 미국으로 데려와서 장학금을 주고 과학기술을 가르치고 연구시켰다.
 
그런 미국에 소련은 파상 공세를 펼쳤다. 유인 우주선 발사로 재차 일격을 가했다.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1934~68년)이 R-7 로켓에 실린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인류 최초로 무중력 상태의 우주권에 진입했다. 그는 아무런 조작도 하지 않고 우주선 안에 앉은 채 1시간 48분 동안 지구를 일주하고 귀환했다. 가가린이 기자들 앞에서 “지구는 푸른 빛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본 미국인들은 얼굴이 새파래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스푸트니크 쇼크에 이어 가가린 패닉을 겪어야 했다. 가가린은 인류 최초 유인 우주비행 성공으로 인류 우주개척사만 새로 쓴 게 아니었다. 소련은 이를 통해 미국과의 헤게모니·과학기술·군사력 경쟁에서 한동안 우위를 점했다.  
 
소련이 인류 최초의 우주발사체를 쏘아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리고, 유인 우주비행을 성공시킨 영광의 뒤에는 권력자의 과학기술에 대한 무지와 편견, 그리고 의심을 견딘 항공우주 과학기술의 개척자인 세르게이 코롤료프(1907~66년)의 고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소련의 1세대 로켓 과학자인 코롤료프는 이미 1930년대에 액체 로켓을 시험 발사하고 개발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는 1937~39년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 당시 ‘자원 낭비’ 혐의로 감옥에 갇혔으며,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6년간 중노동에 시달렸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간신히 풀려나 전쟁 수행용 항공기 개발 업무에 투입됐다가 종전 뒤에야 우주비행 개척에 나섰다.  
 

미·소, 나치의 V-2 로켓 관련 기술자 확보 경쟁 벌여

로켓을 개발하다 자원을 낭비했다고 숙청됐던 코롤료프가 죽음의 수용소에서 생환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에 패배한 나치 독일이 로켓 무기를 개발해 영국을 대대적으로 공격하면서 위력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치는 한정된 군사력·경제력·자원으론 전쟁을 수행하려면 첨단 비밀무기를 개발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해 초 군 복무 중이던 과학기술자 4000여 명을 차출해 독일 북부 발트해 연안의 페네뮌데 로켓연구소에 보냈다.
 
이들은 사거리 320㎞짜리 탄도미사일 V-2(Vergel tungswaffe-2·보복무기 2호) 로켓을 개발했다. 세계 최초로 실전 또는 실무에 사용된 로켓이다. 나치는 독일 중부 노르트하우젠의 로켓 공장에서 종전까지 5200기를 생산해 상당수를 벨기에·영국·프랑스 등을 공격하는 데 사용했다.
 
그런데 당시 독일 군사연구협회 직원인 베르너 오젠베르크는 사상 검증이 끝난 과학기술자 명단을 작성해뒀다. ‘오젠베르크 리스트’로 불리는 이 명단은 우연히 종전 직전 독일 서부 본 대학의 화장실에서 발견돼 연합군 손에 들어갔다. 미국은 종전 직후 이 명부를 바탕으로 독일 과학자들을 데려오는 ‘페이퍼클립 작전’을 수행했다.
 
‘로켓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를 비롯한 독일 로켓 과학자 127명이 1945년 6월 1진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에 입국했다. 7명의 합성 연료 기술자와 86명의 항공기술자가 뒤를 이었다. 전쟁 내내 연합군을 골탕 먹였던 암호·통신 전문가 24명도 합류했다.
 
처음엔 1년 계약직으로 미국 땅을 밟았던 이들은 곧 미국 시민이 돼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1946년 시작된 이 프로젝트로 미국은 모두 1600여 명의 독일 과학기술자를 데려와 미국인으로 만들고 두둑한 급료를 지급하고 연구를 시켰다. 이를 통해 로켓은 물론 제트기·통신·암호·합성연료 등 다양한 분야의 옛 독일 기술을 흡수했다. 100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신기술 특허와 아이디어도 얻었다.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1946년부터 ‘오소아비아힘 작전’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수천 명의 독일 전문가를 소련으로 데려가 군사 기술을 얻어냈다. 미국이 독일 과학자들을 자국민으로 받아들인 데 비해 의심이 많은 공산국가 소련은 주요 프로젝트를 외국인에게 맡기지 않았다. 기술 흡수가 어느 정도 끝난 1951년까지 이들을 독일에 돌려보냈다. 귀국 전 1년 정도 연구에서 손을 떼도록 조치해 최신 정보에서 멀어지게 했다. 테크 기업에서 퇴직 인사를 1~2년간 급여를 주면서 쉬게 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브라운의 조수였던 헬무트 그뢰트루프를 비롯한 250명의 로켓 기술자가 소련으로 강제로 옮겨졌다. 페네뮌데 연구소 인력의 상당수는 미국이 차지했지만, 로켓 공장은 소련 몫이었다. 소련은 이를 통째로 뜯어 스탈린그라드 동남쪽 카푸스틴야르에 로켓 연구소를 세웠다. 그뢰투르프는 여기서 소련 과학자 코롤료프와 함께 V-2 로켓을 복제해 소련 최초의 로켓인 R-1을 만들었다. 물론 여기에는 오랫동안 축적된 코롤료프의 노하우가 큰 역할을 했다. 초기 미국과 소련의 로켓 경쟁에서 소련이 앞선 원동력은 바로 코롤료프 것이다.  
 
R-1은 소련 핵미사일과 우주개발의 모태이자 원천이 됐다. 코롤료프가 1957년 5월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R-7 로켓을 개발해 발사했기 때문이다. R-7은 그해 10월 4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우주 공간에 쏘아올려 미국을 경악하게 했다. 유리 가가린을 지구 궤도에 올린 것도 이 로켓이었다. 당시는 소련이 잠시나마 미국을 과학기술로 눌렀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미·소 우주개발 경쟁은 1991년 소련이 몰락할 때까지 계속됐다.
 
코롤료프는 소련의 우주 영광을 이끈 주인공이다. 그의 삶과 업적은 무지·편견·아집으로 과학자를 탄압해 국가발전을 저해한 독재자의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코롤료프는 1966년 암 수술을 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존재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미국 정보기관도 그의 이름을 인지하지 못했을 정도다.
 
코롤료프와 소련 우주선들은 과학기술을 권력자가 자의적으로, 정치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이용하면 국익을 해친다는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그는 소련 최고 지도자들이 묻힌 크렘린 벽 무덤에 안장됐다. 지난 4월 12일 가가린의 세계 최초 유인 우주여행 60주년을 기념해 크렘린 벽의 가가린 무덤을 찾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대통령은 가가린의 무덤과 함께 코롤료프의 묘도 함께 찾아 헌화했다. 가가린은 소련 우주개발의 겉보기 모델이었고, 코롤료프는 숨은 핵심이었음을 현재의 지도자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1969년 7월 20일 달에 도착한 아폴로 11호의 착륙선 이글호와 버즈 올드린. 19분 전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 선장이 찍었다. [사진 NASA]
 
우주 개척의 문을 연 것은 소련이지만 미국도 신속하게 대응했다. 바로 그해 5월 5일 미국의 앨런 셰퍼드가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우주권에 진입했다. 이듬해인 1962년 2월 20일엔 미국의 존 글렌이 미국인으로선 처음으로 지구 궤도를 선회했다. 미국은 일회성 대응에 그치지 않고, 과학기술 국력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한 뒤 반전의 도전장을 내밀었다. 아이젠하워가 나사 창설과 수학·과학 교육 개혁으로 이룬 토대 위에 젊은 대통령 존 F 케네디 대통령(1917~63년, 재임 1961~63년)이 우주 개척의 꿈을 제시했다. 케네디는 1962년 9월 12일 텍사스주 휴스턴의 라이스대에서 국가 우주계획 주제로 연설하면서 우주 개척의 의지를 드러냈다.
 
케네디는 1953년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인 텐징 노르가이의 에베레스트 정복과 1927년 찰스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비행을 예로 들며 인류가 도전정신으로 문명을 발전시켰음을 강조하며 아폴로 계획의 인류사적인 의미를 강조했다. ‘쉬워서가 아니라 어려워서 달에 도전한다’는 케네디의 사자후는 미국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마침내 케네디는 1963년 5월 25일 의회 연설에서 공식 우주 출사표를 던졌다. 케네디는 “1960년대 말까지 인간을 달에 착륙시키고 지구로 무사히 귀환시키는 것”을 국가적 목표로 공식적으로 제시했다. 소련의 우주 기술을 단박에 뛰어넘는 대담한 아폴로 계획은 이렇게 시작됐다.  
 
소련도 미국의 도전장에 대응했다. 1965년 3월 18일엔 소련의 알렉세이 레오노프가 인류 최초의 우주 유영을 한 데 이어 1966년 2월 3일엔 무인우주선 루나 9호를 달에 착륙시켰다.  
 
그런 가운데 미국의 아폴로 프로젝트는 비극으로 시작했다. 1967년 1월 27일 지상 훈련 중이던 아폴로 1호에서 화재가 발생해 내부에 타고 있던 거스그리섬 선장과 에드워드 화이트, 로저채피 등 3명의 우주비행사가 목숨을 잃었다. 아폴로 계획의 희생자이자 인류 우주 도전의 순교자라고 할 수 있다. 나사는 고난을 극복하고 아폴로 4~6호는 무인비행으로, 7~10호는 유인 비행으로 인간을 달에 보내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가 성공적으로 달에 착륙하면서 목표를 이뤘다. 달 착륙은 이러한 의지와 끈기, 그리고 집념의 결과일 것이다.  
 
미국은 아폴로 계획에 따라 1972년까지 인간을 모두 6차례 달에 보냈다. 아폴로 13호가 중간에 사고가 났지만, 우주인들을 무사히 귀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국 외에 달에 인간을 보낸 나라는 5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없다. 미국의 보복은 강력했다. 교언영색의 말이나 정신 승리 구호, 또는 일회성 대응 대신에 미국 자체를 과학기술에 친숙한 미래지향적인 테크 국가로 혁신했다. 그런 노력의 열매는 지금도 세계 경제를 미국의 테크 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우주개발 경쟁은 현재도 진행 중인 글로벌 주도권 다툼의 한 형태다.  
 

나로도의 꿈은 현재진행형

고흥 나로도에서 솟아오른 대한민국 기술입국의 원대한 꿈도 현재진행형이다. 로켓 발사 완벽 성공을 위해 묵묵히 달리는 과학기술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들은 과거 옛소련과 미국이 했던 것처럼 필사적인 노력으로 우리의 운명을 우리 손으로 개척하고 있다. 우주는 우리의 미래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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