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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 자금 블랙홀로 부상한 회사채

올해 1분기 공모 회사채 수요예측 참여 금액은 약 86조원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세 배 증가…작년 전체 규모도 뛰어넘어
금리 인하 기대에 연초효과 겹친 영향
2분기는 SVB 리스크 등으로 시장 불안…1분기 같은 활황 쉽지 않을 듯

[이코노미스트 마켓in 안혜신 기자] 올 들어 회사채 시장이 시중 자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올해 1분기 회사채 수요가 폭발하면서 수요예측에만 80조원이 넘는 자금이 쏠렸다. 이미 지난해 전체 수요예측 참여 금액을 뛰어넘었다. 통상 연초는 회사채 시장 성수기인데다 금리인상 마무리에 대한 기대감이 작용하면서 기관투자자들이 앞다퉈 회사채 담기에 나선 것이다.

다만 이제 막을 올린 2분기는 지난 1분기처럼 시장의 폭발적인 수요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AA급 우량채가 대부분이었던 1분기와 달리 2분기는 A급 비우량채가 본격적으로 시장에 나오는 데다가 연초효과도 사라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시장 불안정성이 1분기보다 커졌다는 점과, 연초보다 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이 한풀 꺾인 점도 채권시장 활황이 지속되기 어려운 이유로 꼽히고 있다.

이미 수요예측에서 미매각을 기록한 기업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고, 발행금리 역시 1분기에는 AA급과 A급 가리지 않고 민간 채권평가사들이 평가한 기업 고유 금리보다 낮은 수준에 발행되는 '언더 발행'이 대부분이었지만 2분기 들어서는 '오버 발행'이 주를 이루는 모습이다.

1분기 수요예측 참여 규모 작년 전체 규모 넘어서

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공모 회사채 수요예측에 참여한 자금은 총 86조8640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1분기 기록했던 27조7000억원보다 세 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뿐만 아니라 이는 지난해 한 해동안 수요예측 참여금액인 65조4000억원도 훌쩍 뛰어넘었다. 지난해 수요예측 참여규모는 최근 5년래 최저 수준이었다. 올해 수요예측에 참여한 기업 수도 이날까지 181개로 지난해 같은 기간 기록했던 143개보다 26.6% 증가했다.



작년 회사채 시장은 냉골이었다. 금리 인상과 레고랜드 사태 등으로 인해 기업들이 회사채 발행 시기를 늦추거나 자금조달 경로를 바꾸는 등 시장 분위기가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가 바뀌면서 이런 분위기는 급격히 반전됐다. 오히려 공급에 비해 수요가 넘치는 말 그대로 뜨거운 시장이 됐다.

올해 1분기 회사채 시장이 유례없는 ‘호황’을 겪은 가장 큰 이유는 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다. 연초효과에 금리가 정점을 찍었다는 전망이 커지면서 회사채 시장에 자금이 모여든 것이다. 
김은기 삼성증권 연구원은 “채권 시장은 전통적으로 연말에는 기관 북클로징으로 주춤하다가 연초 자금이 유입되는 흐름을 보인다”면서 “다만 올해는 연초 기준금리 인상 마무리를 넘어 인하에 대한 기대까지 있었고 이로 인해 자금 유입 규모가 컸다”고 말했다.

회사채 순발행 전년보다 두 배 늘어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회사채 발행 규모는 33조2978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 기록했던 25조4754억원보다 약 28.4% 증가했다. 같은 기간 순발행액(회사채 발행에서 상환을 뺀 금액)은 15조3601억원으로 전년 7조4491억원보다 두 배가량 늘어났다. 회사채 상환보다 발행이 많았다는 것으로 자금 시장 상황이 좋을 때 선제적으로 자금 확보에 나선 기업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올해 1분기 회사채 시장이 역대급 활황을 기록한 데는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가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연말 레고랜드 사태로 회사채 시장이 사실상 일찍 문을 닫으면서 대기 자금이 쌓여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통상 연초 기관이 장부를 채우는 연초효과가 더해지면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올해 각국 중앙은행이 금리 인상 기조를 멈추고 인하로 돌아설 것이라는 기대감 역시 수요 폭발에 한몫했다. 연초 금리가 가장 정점일 것이라는 의견이 확산하면서 현재 높은 수준의 금리로 수익을 얻는 것은 물론, 향후 금리 하락시 채권 가격 상승에 따른 차익까지 노리는 투자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지난 1월만 해도 수요예측만 했다하면 조(兆)단위 자금이 몰려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올해 가장 처음으로 수요예측을 진행했던 KT(030200)(AAA)에는 2조8850억원의 주문이 들어왔고, 이어 #포스코(AA+)와 LG화학(051910)(AA+) 수요예측에는 각각 3조9700억원과 3조8750억원의 자금이 쏠리는 등 수요예측 한 번에 4조원에 가까운 뭉칫돈이 몰려들기도 했다.

이화진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레고랜드 사태 이후 자금 경색으로 작년 발행이 급감하면서 전반적인 물량 부족으로 수급 여건이 개선된 영향”이라면서 “연초 자금집행 연기금 수요, 고금리를 제시하는 금고·신협· 농협, 보험사 상품판매, 연기금 대체투자 대안,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회사채 비과세 등 전방위적인 크레딧 수요 증가로 연초 크레딧 발행도 크게 증가했고 강세 발행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채권 개미' 증가도 회사채 시장 활황 한몫


채권에 투자하는 개인 투자자인 ‘채권 개미’가 늘어난 점도 회사채 시장의 활황에 한 몫했다는 의견도 나온다. 채권 개미들은 신용등급 ‘BBB’급인 비우량채 중에서도 비교적 위험도가 낮은 기업을 선별해 ‘금리 사냥’에 나서고 있다.

대표적으로 에스엘엘중앙(SLL)은 지난 2월 250억원 규모 회사채 발행 수요예측을 진행했는데 목표 규모의 4배인 1000억원의 주문을 끌어냈다. 에스엘엘중앙은 희망 범위로 6.8~7.8%의 금리를 제시했는데 수요가 몰리면서 범위 하단인 6.8%에서 발행 목표 물량을 모두 채우게 됐다. 수요가 몰리면서 에스엘엘중앙은 목표보다 두 배 많은 500억원까지 증액 발행했다.

낮은 신용등급에도 에스엘엘중앙이 ‘완판’을 기록할 수 있었던 데는 고금리를 노린 개인 투자자들의 힘이 컸다는 평가다. 실제 당시 물량을 받아간 곳은 대부분 개인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증권사나 운용사 WM채권팀 혹은 리테일마케팅팀으로 확인됐다.

중앙일보 계열사는 올 들어 채권에 관심이 높아진 개인 투자자들의 덕을 제대로 누리고 있다. 올 들어 BBB등급 중 가장 먼저 수요예측에 나섰던 제이티비씨(JTBC, BBB0)는 1년물 350억원에 대한 기관 대상 수요예측에서 미매각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추가 청약에서 리테일 수요에 힘입어 400억원으로 증액하기도 했다.

이어 중앙일보(BBB0) 역시 수요예측에서 주문이 몰리면서 흥행에 성공했다. 중앙일보는 1년물 200억원 모집에 희망 금리밴드로 7.3~8.3%를 제시했는데 350억원의 자금이 모였다. 발행금리도 희망 금리밴드 하단에 가까운 7.5%로 결정됐다. 당시 주문이 들어온 부서가 모두 증권사 리테일팀이었다. 고금리를 노린 개인 투자자들이 회사채 수요예측의 흥행도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개인 투자자들의 올 해 1분기 채권 순매수 규모는 8조6554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기록했던 1조4451억원보다 약 6배 늘어났다. 채권 개인투자자 순매수 규모는 이미 지난해 20조6113억원을 기록하면서 전년(4조5675억원)보다 4배 이상 증가했다.

금리가 정점을 찍었다는 분석 역시 개인 투자자들을 채권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예금과 적금 금리가3% 수준까지 내려온 상황에서 4%대 금리를 확보할 수 있는 우량채는 매력적인 투자처다. 금리와 가격이 반대로 움직이는 채권 특성상 현재 금리가 고점이라고 가정할 경우 당장 이자수익은 물론 향후 채권 가격 상승에 따른 채권 매매수익까지 덤으로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채권이 기본적으로 주식보다 안정적인 성격이라는 점도 매력 요인으로 꼽힌다. 채권은 정해진 기간마다 주기적으로 이자를 지급하기 때문에 수익률을 예측하기가 주식보다 훨씬 수월하다. 발행 기관이 부도가 나지만 않는다면 만기까지 보유하고 있기만 해도 정해진 이자 수익을 얻을 수 있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신용도가 A급 이하인 회사채는 기관 입장에서는 등급강등 리스크나 가격하락 위험 때문에 담지 않지만 만기까지 보유하면서 이자수익을 얻겠다는 개인투자자들은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6~7%대 이자율이 꽤 쏠쏠하다고 보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1분기 뜨거웠지만…2분기는 ‘글쎄’

다만 2분기는 뜨거웠던 1분기와 비교하면 다소 차분해질 전망이다. 우선 연초보다 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이 한층 꺾인 상태다. 이달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총재는 ‘연내 기준금리 인하는 없을 것’이라고 못박으면서 금리 인하 기대감이 가득했던 시장에 찬물을 뿌렸다.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과 크레디트스위스(CS) 사태 등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금융시장 전반적인 불확실성이 커진 점도 회사채 시장 수요에 영향을 줄 전망이다.정혜진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낮은 국채 금리 수준은 크레딧 투자 매력을 높이는 요인이지만 아직 글로벌 은행 불안과 국채 금리 변동성이 지속되고 있다”면서 “연초와 같은 발행 주도의 강세를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회사채 시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우려 역시 여전히 회사채 시장 리스크 요인으로 꼽힌다.

건설업종에 대한 악화한 투자심리는 회사채 시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당장 이달 말 수요예측을 진행한 신세계건설(034300)(A)은 모기업 ‘신세계’라는 뒷배경에도 불구하고 2년물 800억원 수요예측에 단 100억원의 주문이 들어오는데 그치면서 건설업종에 대한 여전히 싸늘한 시장의 시선을 확인해야 했다. 한국토지신탁(034830)(A-)과 한신공영(004960)(BBB) 등 신용등급이 낮은 건설업체들도 수요예측에서 미매각을 기록했고, PF 비중이 높은 현대차증권(001500)(AA-)이 미매각을 기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달 들어서는 콘텐트리중앙(BBB)이나 GS엔텍(A) 등 비우량채가 수요예측에서 미매각을 기록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콘텐트리중앙은 2년물 물량은 채웠지만 1년물 250억원 수요예측에서 60억원의 주문을 받아내는데 그쳤다. GS엔텍 역시 2년물 700억원 수요예측에서 120억원만 들어오면서 흥행에 실패했다.

뿐만 아니라 한솔제지(213500)(A)와 한일시멘트(300720)(A+) 등 지난달 말 수요예측에서 모집 물량을 채우며 흥행에 성공한 기업들도 발행 금리가 민평(민간채권평가사) 평가 금리 대비 높은 수준에서 금리가 결정되는 등 연초와는 시장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다만 불안정한 시장 상황 속에서도 ‘초우량채’인 SK텔레콤(AAA)은 2000억원 규모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1조원이 넘는 자금을 끌어내면서 흥행에 성공했고, 현대중공업(A, A-) 역시 1000억원 규모 수요예측에서 목표 금액의 6배가 넘는 6180억원의 주문을 받아내는 등 회사채 시장에서도 실적이나 전망에 따라 극명하게 수요예측 흥행이 나눠지는 분위기다.

정 연구원은 “기업 신용등급 하향 조정, 부동산 PF 부실 등 연내 크레딧 이벤트 우려들은 연내 지속될 것”이라면서 “이런 부담들이 우량등급으로 투자자 수요를 집중시켜 등급별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 역시 “2분기는 은행 위기와 자금경색에 대한 우려 등으로 회사채 시장도 냉각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은행 사태는 안정화될 가능성이 높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라기보다는 단기적인 안정일 뿐 하반기 신용 위기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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