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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인력 ‘태부족’인데 석·박사 유출 장려?

[한국 반도체의 명암]④
외교부 숙원 사업 ‘한국인 전용 美 전문직 취업 비자’ 신설
반도체 학계 “인력 교류 아닌 인재 유출 장려 정책” 비판
외교부 “반도체 분야만 해당하는 비자 아냐…유학생 선택권 강화”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 임직원들이 화성캠퍼스에서 3나노 웨이퍼를 들고 있는 모습. [사진 삼성전자]

[이코노미스트 정두용 기자] “외교부는 미국 의회에 지속해 한국인에게만 발급되는 전문가 취업 비자 설립을 요청하고 있다. 양국의 인적 교류가 원활히 진행되려면 전문직 취업 비자 발급이 확대되어야 한다고 본다. 미국 의회를 상대로 이를 지속 설득하고 있다.”(이미연 외교부 양자경제외교국장)

“이게 무슨 황당한 얘기냐. 지금 반도체 엔지니어의 해외 유출을 무조건 막아야 하는데, 외교부는 되레 장려하겠다고 하니 무슨 말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현장에 있는 교수 입장에선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반도체 인력은 한번 해외에 나가면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황철성 서울대학교 재료공학부 석좌교수)

최근 국회에서 열린 반도체 관련 포럼에서 오간 설전이다. 국내 반도체 산업은 현재 석·박사급 전문 인력 부족으로 허덕이고 있다. 국내 경제 대들보인 반도체 산업이 안에서부터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와중에 외교부가 국내 반도체 인재의 미국 진출을 장려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논쟁이 됐다.

반도체 학계와 외교부의 의견이 엇갈리는 지점은 ‘한국 국적자의 미국 내 전문직 취업을 위한 비자 발급 확대’의 필요성이다. 외교부는 미국 내 전문직 직군에 한국인이 원활하게 취업하려면 비자 발급 수가 확대돼 한다고 봤다. 외교부가 한국인 전용 전문직 취업 비자 신설이 미국 의회에서 논의될 수 있도록 장시간 다양한 인사들을 접촉해 온 이유다.

반면 반도체 학계에선 외교부의 이런 접근이 자칫 국내 석·박사급 전문 인력의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취업 비자는 결국 미국 당국이 신청자를 심사한 후에 발급한다. 미국 정부가 세계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사활을 걸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인 전용 전문직 취업 비자 제도 신설이 인재 유출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외교부는 왜 미국 의회 설득에 나섰나

한국인 전용 전문직 취업 비자 신설을 골자로 한 법안이 미국 의회에 처음으로 발의된 시점은 2013년이다. 당시 법안이 발의된 후 구체적 논의가 진행되지 않아 의결에 이르지 못했다. 해당 법안은 미국 의회 회기 때마다 발의됐으나, 늘 우선순위에서 밀려 제때 처리되지 못하고 번번이 무산됐다.

외교부는 첫 법안 발의가 무산된 후에도 미국 의회에 지속해 ‘한국인 전용 전문직 취업 비자 설립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약 10년간 제도 신설의 필요성을 피력해 온 셈이다. 현재 한국인에게 발급되는 미국 내 전문직 취업 비자 수가 수요에 비해 현저히 적다는 점을 해결하기 위해선, 미국 의회의 설득이 우선돼야 한다는 게 외교부 측 판단이다.

그 결과 지난 4월 ‘한국과 파트너 법안’(Partner with Korea Act)이 미국 연방 의회 상·하원에서 동시에 재발의됐다. 해당 법안이 통과되면 연간 최대 1만5000개의 한국인 전용 전문직 취업 비자가 E-4란 이름으로 발급될 수 있다. 연방 하원에선 영 김 외교위원회 인도·태평양 소위원장과 제럴드 코널리 코리아 코커스(지한파 의원 모임) 공동의장이, 연방 상원 의원 중에선 마지 히로노·마크웨인 뮬린이 공동 발의했다.

현재 한국 국적자가 미국 내 전문직에 취업하려면, 전 세계 신청자를 대상으로 발급하는 H-1B 비자를 받아야 한다. 해당 비자의 한도는 연간 약 8만개다. 통상적으로 ▲학사 소지자(취득 국가 무관) 약 6만5000개 ▲미국 내 고등교육기관 석사 이상 소지자 약 2만개 등으로 설정된다. 미국 당국은 이 요건을 충족한 H1-B 비자 발급 신청자가 매해 몰려 무작위 추첨 방식으로 배정하고 있다.

한국 국적자가 H-1B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선, 신청자가 많은 중국·인도 국적자와 추첨 경쟁을 벌여야 한다. 외교부는 한국 국적자가 H-1B 비자를 발급받는 비율이 매해 전체 발급 수의 1~1.5%(약 1400명) 수준에 불과하다고 파악하고 있다. 인도 국적자에게 전체의 60% 정도가, 중국 국적자에게는 10% 수준이 발급되고 있다.

외교부가 한국 국적자 전용 전문직 취업 비자 신설이 미국 내 필요하다고 본 배경이다. 미국 정부는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5개국을 대상으론 H-1B 비자와 별개로 연간 쿼터(할당량)를 주고 있다. 캐나다(무제한)·멕시코(무제한)·싱가포르(5400명)·칠레(1400명)·호주(1만500명)가 대상이다. 외교부는 국내 전문 인력이 이공계 영역에서 뛰어난 역량을 지녔다는 점과 한미 동맹 강화 등을 근거로 쿼터가 한국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미국 의회 인사들을 설득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외교부 청사(왼쪽)와 정부서울청사 전경. [사진 신인섭 기자]

학계 “설득 논리로 기술 팔아선 안돼” vs 외교부 “반도체만 적용되는 비자 아냐”

반도체 관련 학계는 ‘한국 국적자 전용 전문직 취업 비자 신설’의 미국 내 안착을 위해 국내 인력이 볼모로 잡힐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미국 의회에 전달되는 설득 논리에 ‘한국인 반도체 전문 인력의 공급’이 들어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을 특히 경계하는 분위기다.

복수의 반도체 관련 학과 교수들은 “취업 비자 확대를 위해 국내 반도체 제조 기술이 팔려선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자공학과 교수는 “ 미국 의회서 E-4 비자 신설을 입법화하는 과정 중 ‘한국인 반도체 인력 수급’에 대한 필요성이 핵심 논리로 전달될 수 있다”며 “이런 여론이 형성된다면 국내 인력 유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비자 발급 심사는 결국 미국 정부의 판단하에 진행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미국 정부는 자국 내 반도체 공급망 마련에 사활을 걸고 있다. 현재 반도체 전문 인력을 영입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며 “심지어 영주권도 기존 절차와 비교해 ‘자동으로 주는’ 정도로 간소화하고 있다. 우리 외교부가 이런 상황에 나서 전문직 취업 비자 확대를 장려한다는 점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꼬집었다. 이어 “교육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중심으로 한국 정부도 반도체 인력 육성에 사활을 걸고 있는데, 외교부는 이와 정반대의 ‘엇박자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셈”이라고 했다.

삼성전자가 지난 3월 27일 국내 반도체 인력 부족에 대응해 울산·대구·광주 등 3개 과학기술원과 반도체 계약학과를 신설하기로 협약했다. 삼성전자가 국내 대학과 운영하는 반도체 계약학과는 이로써 전국 7곳으로 늘었다. 사진은 울산과학기술원(UNIST) 반도체 계약학과 신설 협약식. [사진 삼성전자]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산업 인력 수요는 2021년 17만7000명에서 2031년 30만4000명까지 연평균 5.6% 늘어날 전망이다. 직업계고와 대학(원)에서 배출되는 반도체 산업 인력은 매년 약 5000명에 불과하다. 반도체 산업 경쟁력과 직결되는 석·박사 배출 인력은 연간 200명에 못 미친다. 10년간 8만명의 인력 공백이 생기는 셈이다. 매년 1600명의 인력이 부족하지만, 대학에서 배출되는 관련 전공 졸업생은 650명 수준이라는 집계도 나온다. 반도체 학계에서 외교부의 미국 취업 비자 확대 추진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외교부는 다만 반도체 학계의 우려가 ‘오해’에서 비롯됐다는 입장이다. E-4 비자가 신설된다고 해도, 대상자가 반도체 전문 인력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외교부 관계자는 “미국 의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E-4 비자의 신청 대상자는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며 “반도체는 물론 수학·법학·의학·콘텐츠·문학 등 분야를 특정하지 않고 ‘전문성’만을 기준으로 두는 데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한국으로 돌아오는 구조다. 영구적 인력 유출로 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인력 유출 문제에 대해선 “E-4 비자 신설이 미국 의회를 통과한다고 하더라도 1만5000명이 모두 채워질지 현재로선 미지수고, 이 중에서 반도체 인력이 얼마나 될지도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반도체 인력을 대상으로 비자 발급이 안 되도록 미국 의회를 설득할 수도 없을뿐더러, 된다 하더라도 이는 차별적 요소”라며 “비자 발급 확대는 반도체에 한정된 문제가 절대 아니다. 미국에 나가 있는 모든 한국인 유학생의 선택권을 높여준다는 취지에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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