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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府’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제5府’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달포 전까지만 해도 이회창·이인제 대세론이 요지부동한 것처럼 보이던 대선 예비전이 어떻게 갑자기 노무현 대세론으로 바뀔 수 있는가. 노무현은 무슨 힘을 믿고 역대 대선 향방을 좌우해온 막강한 신문들과 맞붙어 싸우고 있는가. 노무현을 향한 이념 공세는 왜 먹히지 않는가. 언론과 여론조사 회사들은 왜 밑바닥 정서를 정확히 찍어내지 못했는가. 이같은 물음들은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갖는 의문이다. 광주 경선에서 쓴맛을 본 이인제가 음모론에 이어 이념투쟁을 선언하며 노후보의 과격노선을 연일 공격해 대고 여기에 메이저 신문들이 이를 크게 보도하면서 이후보 공세에 힘을 실어주고 있으나 별 무효과다. 특히 메이저 국유화와 사주퇴진 주장 등 노무현의 언론관련 발언들에 대한 비판적 보도가 연일 메이저에 대서특필되는데도 노후보는 끄떡 않고 중요한 인천경선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메이저들은 노무현의 이념 및 언론관도 문제지만 그보다 말바꾸기와 거짓말이 더 큰 문제라면서 사설을 통해 인격과 도덕성까지 비판하고 나섰으나, 약발이 먹히지 않고 있다. 특히 노무현은 4월8일자 조선·동아일보 보도를 놓고 “오늘 아침 조선일보를 보면 신문인지 노무현 죽이기인지 구분이 안 가게 사실 근거없이 도배질했다”면서 “(두 신문이) 경선에 영향을 미치려고 악의적으로 기사를 쓴다는 것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면 다 알 수 있다”며 정면으로 맞서고 나섰다. 과거 대선후보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노후보의 언론관을 둘러싼 정면대결이 연말 대선에서 어떻게 나타날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왜 그러한 현상이 가능한지는 당장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문제의 언론관 발언이 이루어진 작년 8월1일 기자들과의 저녁식사 대화 자리에는 동아·조선·중앙 등 소위 메이저 신문기자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참석한 기자들이 모두 대학 84학번으로 386세대 기자라는 점이다. 노무현이 메이저 기자들을 별도로 만났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당시는 언론사 세무조사 문제로 메이저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 특별한 별도 모임은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동안 메이저의 보도 또한 이회창·이인제 대세론 영향으로 노무현에 대해 특별했을 것 같지도 않아 결국 노후보는 메이저의 각광을 받지 않고서도 오늘의 돌풍을 가능케 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그 힘은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했을까. 한마디로 그동안 널리 알려진 제4부(府)로서의 언론 이외에 제5부(府)의 세계가 실존하고 있으며, 그 영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언론의 역할 기능 및 비중이 워낙 커 입법·사법·행정 등 3부(府)와 견주어 언론기관을 제4부라고 불러온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신문 등 인쇄매체를 중심으로 한 제4부는 그동안 막강한 힘을 발휘해 왔으나, 그 힘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고 이제는 제5부가 빠른 속도로 우리의 생활이나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제5부를 구성하고 있는가. 제5부란 거의 무제한의 다중(국민)이 인터넷을 통해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고 사실·생각·의견 등을 서로 주고받는 온라인 세계를 말한다. 인터넷을 도구로 한 온라인 세계에 대해 뉴욕 타임즈는 지난 99년 10월19일자에서 “미국 대통령 후보들의 선거운동 본부는 이제 주소가 www로 시작되는 공간에 있다”(At an address starting with www)는 한마디로 제5부의 위력을 정확히 설명했다. 미국에서 제5부의 위력을 실감나게 보여준 것은 98∼99년 백악관 인턴과의 성추문으로 지난 74년 당시 닉슨 대통령과 똑같이 탄핵 위기에 몰렸던 클린턴 대통령을 제5부 세력이 탄핵당하지 않도록 막은 사실이다. 닉슨 대통령은 워싱턴 포스트를 중심으로 한 제4부의 인쇄매체로부터 워터게이트 도청 및 은폐 등과 관련한 집중적인 탐사보도 공세를 당해 결국 대통령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클린턴은 르윈스키와 섹스를 하지 않았다고 TV를 통해 손가락질을 해가며 버젓이 거짓말을 하고서도 정치적으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바로 제5부의 힘 때문이었다는 것. 당시 미의회와 주요 언론 및 공화당 중심의 보수주의 세력이 클린턴의 스캔들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동안 제5부는 조기에 종결짓고 국사에 전념할 것을 요구해 탄핵을 피하게 했다. 예를 들어 자발적인 인터넷 시민단체인 ‘MoveOn.org’는 의회에 시민들이 탄핵에 반대하고 있다는 이메일 공세를 취해 의회의 탄핵표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MoveOn.org는 의회가 클린턴 스캔들에 매달려 주요 국정마저 지연시키는 사태를 맞자 실리콘 밸리에서 벤처기업을 하는 몇 명이서 98년에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이다.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이들 젊은 벤처인들은 의회가 클린턴을 견책하려면 빨리하고 아니면 앞으로 나아가자(Censure and Move On)는 구호 아래 이메일 조직망을 통해 국민여론을 수렴, 의회에 청원하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보수주의 세력이 스캔들을 물고 늘어지고 있는 동안 클린턴은 이들 인터넷 세력의 힘을 빌어 교사 충원·학교 증축·10대 흡연대책·의보정책·지구온난화 대책 등 인터넷 세대의 요구에 맞춘 정책들을 내놓아 국민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조성했다. 한마디로 닉슨 대통령이 제4부에 의해 탄핵됐다면 클린턴은 제5부에 힘에 의해 구제된 셈이다. 인쇄매체와 공중파 TV를 중심으로 한 제4부는 또한 최근 수년간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케이블 TV에 의해서도 침범당하고 있다. 뉴스 측면에서 미국의 3대 공중파 TV는 시간이 흐를수록 CNN·Fox News·C-SPAN 등 케이블 TV에 밀리고 있다. 기존 매체는 인쇄와 배달의 시차 때문에 동시·상호·무한이라는 특성을 가진 제5부와 대비가 되고 있다. 인터넷을 도구로 한 제5부의 힘은 국민과 국민간, 국민과 정부조직 간, 국민과 언론 간 등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시키는 매체(a medium for conneting people)로서의 역할에 있다. 특히 30∼40대를 중심으로 한 인터넷 세대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사실이나 생각을 인터넷을 통해 전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습성이 몸에 배어 그 전파력은 의외로 크다. 한국전쟁 경험이 전혀 없는데다 탈냉전 시대에 살고 있는 이들 30∼40대는 이념의 잣대로 세상을 보기보다는 변화에 대한 욕구가 더 커 이념공세에 흔들리지 않고 개혁 지향적이어서 기성세대와 대비되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말썽도 많았고 반드시 성공적이라 할 수 없지만 2000년 4월 총선에서 경실련·총선연대의 후보 관련정보 홈페이지에 수십만건씩의 접속이 밀려들었던 사실도 제5부가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클린턴의 1급 정치참모였던 딕 모리스는 ‘VOTE.com’이라는 홈페이지와 책에서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정치세력(a new political force)인 제5부가 돈을 앞세운 로비스트나 언론매체의 기능 및 역할을 급속도로 대체하고 있어 미국의 정치 지형이 바뀌고 있다고 주장했다. 제5부는 또한 선거에서 돈의 역할을 약화시키고 의회와 정당의 권한을 축소시킬 뿐만 아니라 클린턴 사례와 같이 스캔들 폭로가 힘을 못쓰도록 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제5부가 등장하면서 종래 정치나 선거관련 여론조사의 위력 또한 크게 약화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이번 민주당 경선 과정에서도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제5부의 힘이 한국에도 똑같은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노무현이 이같은 힘에 의해 뜨고 있는지와, 이러한 제5부의 힘을 믿고 제4부와 정면대결하고 있는지도 속단할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한국의 인터넷 보급률과 정보화가 세계 최고 수준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아파트 밀집 주거환경 때문에 인터넷 확산이 용이해 유권자 총 3천2백만 중 2천만명이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같은 한국의 온라인 현실을 볼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제5부가 우리의 정치·경제·사회에 하나의 중요한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아직 제5부가 기존 4부 언론매체를 크게 약화시켰다는 분명한 증좌를 찾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현재 노무현이 주요 언론을 상대로 정면대립하고 있는 양상이 12월 대선 투표 결과 어떻게 나타날지 크게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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