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한 감시·뒷북 대책…"돈들고 튀어라~"
사이버 공간에 숨겨져 있는 불법 비자금 95억 달러, 이를 가로채려는 스파이와 그를 뒤쫓는 수사관 그리고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특급 해커. 미국 마약 단속국이 불법으로 모은 비자금을 세탁하는 프로그램 코드명이 제목인 영화 ‘스워드 피시’는 사이버 금융사기 사건을 극적으로 그렸다. 지난 8월23일 국내 주식시장에서도 영화 같은 금융사고가 터졌다. 작전 세력이 현대투신운용의 법인 계좌를 도용해 대우증권 창구로 델타정보통신 주식 2백58억원어치의 매수 주문을 낸 것. 온라인 증권 매매 시스템의 헛점을 노린 대형 ‘사이버 사기극’이었다. 한 가지 영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라면 주인공이 해커일 필요도 없었다는 것. 8월28일 오전 인천공항에 도착해 경찰에 연행된 대우증권 직원 안모씨는 현대투신운용 계좌의 비밀번호를 쉽게 알아냈다. 대다수 기관 투자자의 계좌 비밀번호가 0000 또는 1111이란 건 증권업계에서 널리 알려진 비밀이기 때문이었다. 허술한 내부통제 시스템과 금융인의 도덕적 해이가 빚은 금융사고는 이 뿐만 아니다. 특히 은행부터 새마을금고까지 거의 모든 금융기관에서 잇따라 사고가 터지고 있다. 우리은행 주안 지점의 계약직 여직원 서모씨는 지난 8월21일 전산 단말기를 조작해 거액의 예금을 허위로 입금한 뒤 몰래 빼돌리는 수법으로 18억3천4백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이틀 뒤인 23일에는 경기도 여주의 새마을금고에선 지난 5년간 28억여원을 빼돌린 유모씨가 경찰에 붙잡혔다. 대출 업무를 담당하던 유씨는 예금주가 차명으로 만들어 놓은 계좌 1백27개를 노렸었다. 이밖에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경남은행(35억원)·하나은행(20억원)·제일화재(29억원)·으뜸상호저축은행(4억원) 등에서도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99년 1월부터 올해 6월 말까지 금융감독원에 보고된 금융사고는 모두 1천55건이며, 금액으로는 8천3백11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금융기관이 알아서 해결하고 신고하지 않은 사고도 많이 있어 사고 수와 금액은 이보다 훨씬 많을 걸로 보고 있다. 이용찬 금융감독원 검사제도팀장은 “사고가 잇따라 터져서 그렇지 사고 수와 금액은 2000년을 정점으로 줄어들고 있다”며 “한번 사고가 나면 유행병처럼 번질 수 있기 때문에 서둘러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팀장은 “외국에서는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금융사고를 빼곤 공식 발표를 하지 않는 게 관행인데 국내에선 국회의원 등쌀에 공개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전산 시스템이 발달하면서 사고 유형도 다양해지고 있다. 창구 직원의 횡령 같은 전통적 수법에서 온라인 거래망을 파고든 사기까지 각양각색이다. 이른바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인 우리은행 직원 서씨는 A계좌에서 B계좌로 돈을 옮기는 게 아니라 자신의 단말기에서 없는 돈을 넣는 ‘무자원 입금’ 방식을 써서 은행과 경찰을 놀라게 했다. 동남아와 유럽을 거쳐 결국 붙잡힌 대우증권 직원 안모씨는 기관 계좌를 도용하는 새로운 기법(?)을 선보였다. 여주 새마을금고 유씨는 허위 대출 수법과 더불어 고객들이 정기 예탁금을 해지한 것처럼 컴퓨터를 조작해 돈을 빼내는 수법을 썼다. 금융가에서는 요즘 도미노처럼 터지고 있는 금융사고는 기본적으로 내부통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서라고 보고 있다. 우리은행 직원 서씨의 경우 차장급 직원이 관리하는 패스 카드(전산망에 접속하는 권한이 부여된 카드)를 곧잘 마음대로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은행의 내부통제 시스템이 엉망이었기 때문에 범행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시중은행 임원은 “이상한 거래가 이뤄지면 은행 감시 시스템에 잡히기 마련인데 우리은행에서는 왜 그렇지 않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반면 우리은행측은 “영업점에서 10년 정도 일했으면 웬만한 불법 거래는 마음대로 저지를 수 있다”며 “내부 시스템을 다시 점검하고 직원들도 다시 다잡고 있다”고 밝혔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대대적으로 이뤄진 구조조정의 후유증이란 분석도 있다. 감원에서 명퇴까지 언제 잘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유혹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 또 정리한 인력을 다시 계약직으로 불러들이는 경우도 많아 인력구조가 기형적으로 변한 것도 사고의 단초가 됐다는 관측이다. 예컨대 한빛은행 시절부터 사고가 끊이질 않았던 우리은행의 경우 외환위기 뒤 8백여명의 계약직 직원을 뽑아 창구업무를 맡겼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대부분의 시중은행 사정도 우리은행과 비슷하다”며 “계약직의 경우 정규 직원과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월급이나 복지 수준은 떨어져 창구에서 ‘사람 열명이 도둑 한명을 못잡는’ 해프닝이 빚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금융기관의 경우 신뢰가 생명이라 웬만한 사고는 쉬쉬하며 덮어두는 관행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금융사고가 터지더라도 돈을 되찾게 되면 금융당국에 보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형사고발조차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내려오고 있다. 내부통제 시스템이 아무리 잘 짜여 있어도 결국은 사람이 문제라는 주장도 만만찮다. 대우증권 직원 안씨의 경우 6억원의 빚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용찬 금융감독원 검사제도팀장은 “금융사고는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직원의 횡령일 경우가 많다”며 “직원의 성향이나 사정을 잘 파악해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영업 일선보다 후선업무를 맡기는 등의 관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금융사고가 교통사고만큼 자주 일어나다 보니 씨티·HSBC 등 외국계 은행의 국내 지점 사정은 어떤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99년부터 올해 6월까지 국내 은행에서 발생한 사고 수는 모두 6백71건이었다. 반면 이 가운데 외국계 은행(41개)의 사고 수는 4∼5건에 그쳤다. HSBC 관계자는 “내부에서 준법 감시 활동이 엄격하고 아태지역 본부의 감사도 철저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국내 은행 관계자는 “외국계 은행의 경우 기업금융 중심이었고 지점을 늘리기 시작한 것도 2∼3년 전부터라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적었다”고 주장했다. 금융사고가 잇따르자 지난 8월25일 일요일에 허둥지둥 대책을 발표한 금융감독원은 9월12일부터 일주일간 2백여명의 인력을 투입해 4백60개 금융회사 영업점의 내부통제제도에 대한 특별 검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또 이에 앞서 인터넷 뱅킹과 사이버 트레이딩 등 IT부문도 점검할 계획이다. 아울러 내부통제 소홀로 사고가 일어날 경우 금융기관 임원에 대해 책임을 묻고 금융사고에 따른 문책 또는 주의적 기관경고 대상 금액도 낮추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금융연구원 관계자는 “돈 거래에선 물샐 틈이 없어야 되는 금융기관에서 대규모 금전사고가 빈발한다는 것은 금융계의 신뢰 상실을 넘어 사회 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문제”라며 “정부의 뒷북 대책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그나마라도 꼼꼼히 잘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또 “금융권의 경우 인력은 줄고 경쟁은 격해져 내부통제가 잘 먹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며 “금융기관 경영자들의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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