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 회장 자리 得인가 失인가?
| 김우중,故정주영,故최종현,故이병철,김각중 | 지나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가령,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전국경제인엽합회(전경련) 회장을 맡지 않았더라면 대우는 쓰러지지 않았을까? 아무도 이 질문에 답을 낼 수는 없다. 다만 당시 정황으로 짐작은 할 수 있을 듯 싶다. 대우에 몸담았던 전직 임원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시 김회장이 김대중 대통령과 독대를 하면서, 경제관료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들을 했다. 대표적인 것이 ‘5백억 달러 수출’과 같은 것이다. 외환위기 극복에 밤잠 못이루는 대통령에게 경제관료들은 수출이 어렵다고 보고하는 판에 그들 눈에 ‘일개’ 기업인으로 비치는 김회장이 5백억 달러라는 수치를 제시하니 대통령인들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에게 자기들이 무능한 것처럼 비쳤다는 생각에 자존심 상했을 것이다. 대우가 얼마나 잘 버티나 보자고 속으로 별렀을 수도 있다. 증거는 없지만, 당시 대우는 정부가 충분히 살려줄 수 있었는데도, 관료들때문에 억울하게 당했다는 것이 대우 사람들의 정서다." 이같은 대우맨들의 이야기는 김회장이 재계를 이끄는 전경련 회장으로 활약한 것이 어쩌면 대우 패망을 당겼을 수도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대우에 대한 경제관료들의 ‘기획 해체론’도 이같은 논리에 기초한다. 여기에는 물증이나 당사자들의 증언이 없기 때문에 확인은 불가능하다. 시간을 지금으로부터 2년 전으로 되돌린 지난 2001년 2월13일. 손병두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과 김입삼 고문이 김각중 전경련 회장(경방 회장) 자택을 찾았다. 차기회장 선출을 앞두고 연임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전날인 12일 재계 총수들과 원로자문단은 신라호텔에 모여 차기회장 추대를 논의, 김회장을 연임시키기로 결정했다. 김회장은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연임불가를 선언한 터였다. 당시 63빌딩에서 열렸던 노동장관과 경제5단체장간 간담회를 단독취재하던 기자는 김회장이 한 단체장과 대화를 나누다 “이번에는 ‘죽어도’ 안한다”는 표현을 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그는 차기회장을 추대하기 위한 신라호텔 모임에 아예 나타나지 않았다. 재계가 재추대를 밀어붙일 것이라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감기몸살을 핑계로 ‘도피’한 것이었다. “김각중 회장, 차기 수락”이라는 기사를 송고하기 위해 신라호텔 프레스룸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경련 출입기자들은 주인공이 없는 상태에서 재추대가 결정됐다는 기사를 보내야만 했다. 김회장은 다음날 밤 자택을 찾아온 손부회장과 김고문의 설득에 결국은 무너졌다. 결정적인 해결사는 부인인 차현영 여사였다. 간곡한 설득작업을 옆에서 지켜보던 차여사까지 나서서 “다른 분들이 힘껏 돕겠다는데 뭘 망설이냐”고 거들자 더이상 버티기 힘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전경련으로서는 당시 김회장이 끝까지 수락을 거부할 경우, 사상 처음으로 회장 공석 사태를 맞을 사건이었다. 지금 전경련은 또다시 차기회장 선출을 놓고 진통을 겪고 있다.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전경련 40여년 역사 동안 초대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때부터 2001년 26대 김각중 회장을 선출할 때까지 순탄하게 회장을 선출한 적은 없었다. 김각중 회장의 선친인 김용완 회장은 전경련 회장을 연임하지 않으려고 두달간이나 두문불출 피해 다녔을 정도였다. ‘재계의 본산’으로 불리는 전경련의 회장에게는 ‘재계 총리’라는 닉네임이 붙는다. 재계를 대표해 때로는 정부에다 목소리를 내기도 하고, 때로는 정부를 상대로 협상도 해야 하는 어려운 자리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고 최종현 SK그룹 회장·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은 전경련 회장으로 사명감이 불탔던 인물들로 평가받고 있다. 김각중 회장은 최근 “선친이 전경련 회장을 오래 하지 않으셨다면 회사를 훨씬 더 키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경련 회장은 자기 사업을 어느 정도 희생할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김용완 회장이 6대(4∼5대, 9∼12대)동안 10년, 김각중 회장이 2대 3년 등 총 8대 13년을 경방그룹 집안이 전경련 회장을 맡았다. 기업을 경영하는 오너 입장에서 전경련 회장 자리는 쉽사리 욕심을 내거나 추대를 받더라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정부에 밉보였다가는 단 한번에 기업이 기우뚱할 수도 있는 한국적 현실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오는 2월6일 차기회장 선출을 앞둔 전경련의 고심은 이번에 특히 심하다. 재벌개혁적 성향의 노무현 정부 출범을 앞두고 재벌 총수들은 전경련의 회장을 맡는 데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특히 인수위 출범 직후 대기업 구조조정본부 폐지 해프닝과 전경련 고위인사들의 정부 비판 발언 등으로 전경련이 서너 차례 냉온탕을 들락날락한터라 총수들은 전경련 회장이라면 아예 손사래부터 치는 형국이다. 입바른 소리를 하다가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이 어려움을 겪게 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데 어찌보면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역대 전경련 회장들은 입바른 소리때문에 어떤 고초를 겪었을까? 전경련 회장직이 기업경영에 어떤 점에서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작용했을까? 전경련 회장직을 놓고 그 기업의 운명에 미친 영향을 평가하는 일은 어렵다. 기업의 흥망성쇠는 그리 단순한 요소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대 정부와 전경련 회장 간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통해 새 정부와 전경련 간 향후 바람직한 관계 설정의 교훈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경련과 회장에 세인의 이목이 집중적으로 쏠린 것은 13∼17대 회장을 맡은 정주영(77∼87년) 시절 이후부터 80년대의 강압적인 사회 분위기와 90년대 외환위기 상황에서의 기업구조조정 등으로 경제계가 혼란을 겪었던 시절이다. 이병철 초대회장은 61년1월∼62년9월까지 전경련의 모체인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을 맡았다. 62년 9월 정기총회에서 재선이 확실시되던 이회장이 투표에서 이정림 회장에게 두표차로 밀려나는 이변이 일어났다. 재계의 정설은 이회장이 당시 박정희 국가최고회의 의장을 주로 독대하고, 서슬이 퍼랬던 중앙정보부는 도외시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정보부 차원에서 반 이병철파를 부추기는 공작을 했다는 것이다. 최고 권력과 재계인사 간 독대에는 항상 최고권력자 주변인물의 시기와 질투가 있는 모양이다. 어쨋든 재계 수장으로서 큰 구상을 펴지못하고 1년여 만에 중도하차한 이회장은 기업경영에만 매진했다. 어쩌면 이것이 이후 삼성이 별다른 고난의 역사 없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김용완 회장은 64년 4대 회장에 추대된 뒤, 일주일여 동안 취임을 거부하다가 주위의 설득으로 회장직을 맡게 된다. 그가 10대 회장을 하던 72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 대기업들은 고율의 사채에 허덕이고 있었다. 당시 김회장은 박대통령을 만나 기업을 살리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설득, “사채 동결령”을 이끌어낸다. 김회장의 건의가 먹힐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 면담 건의 전에 이미 경방이 알짜배기 부동산을 처분, 사채를 대부분 변제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전경련 회장으로 재계의 모범을 보였다는 것을 대통령이 높게 평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방 입장에서는 전경련 회장을 맡지 않았다면 알짜배기 땅들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김각중 회장이 “선친이 전경련 회장을 오랫동안 안 했으면 회사를 더 키울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한데는 경영활동보다는 전경련에 시간을 많이 뺐겼다는 점 말고도 이같은 사건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최근 인수위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전경련 임원의 ‘소셜리스트’ 발언 파문의 원조는 정주영 회장이다. 79년 10·26사태 뒤 신군부는 개혁주도세력을 자처하면서 당시 정회장을 전경련 회장자리에서 내몰려고 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인물로 교체하기 위해 경제계에 압박을 가했다. 신군부는 산업설비 과잉을 내세워 중화학기업 구조조정을 강행했다. 정회장은 이런 신군부의 모습이 못마땅했다. 당시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한국경영자총협회 연찬회에서 수많은 보도진이 모여있는 가운데 정회장은 폭탄발언을 하게 된다. “기업의 통폐합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할 일”이라고 선언해 버린 것. 감옥에 갈 각오가 없다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취재 중이던 기자들이 오히려 놀라 “이대로 보도해도 되겠느냐”고 전경련 홍보담당 간부에게 물어볼 정도였다. 다행히 발언 내용은 크게 다뤄지지 않았고, 정회장은 큰 화를 입지는 않았다. 현대가 큰 어려움을 겪은 것은 정회장이 전경련 회장에서 물러난 다음인 92년 대선출마 때문이다. 92년 1월 정치참여를 선언한 정회장은 국민당을 창당, 31석의 의석을 차지했다. 이어 대선출마까지 선언했다. 이후 재계와 정부, 정치권 관계는 긴장일로에 섰다. 마침 현대전자가 대출금 48억원을 국민당에 제공한 사실이 적발되면서 전경련 회장단은 청와대로 불려들어가 정경분리를 약속해야만 했다. 문민정부 들어 현대자동차는 국세청으로부터 강도높은 세무조사를 당했다. 이 일로 정회장은 정계은퇴를 선언해야만 했다. 93년 2월부터 21대 회장으로 전경련을 맡아 3기 연임 회장직을 수행했던 최종현 회장은 정부 눈치를 보지 않는 성격탓에 전경련과 SK그룹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재계 관계자들은 최회장과 정부 사이의 마찰은 93년 2월 전경련 회장에 선출되기 직전 최회장 주도로 “경제계가 바라는 새 정부의 국가경영”이라는 보고서를 내면서부터라고 말한다. 문민정부식 개혁을 준비하던 새 정부 입장에서는 재계의 이같은 건의가 오만스럽게 받아들여졌다는 것. 회장 취임 직후에는 정부의 행정규제 100가지를 거론하며 완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모두들 납작엎드리던 시절 거침없는 소신발언은 급기야 정부의 대반격을 초래했다. 95년 2월14일 전경련 회장 재추대 뒤 기자간담회에서 문제가 터졌다. 애초 서면자료 정도를 기자들에게 돌릴 계획이었던 전경련은 기자들이 회장 간담회를 요구하자, 서둘러 자리를 마련했다. 이게 화근이었다. 최회장은 이날 정부의 경기진정책에 대해 국내 경기가 과열국면이 아닌 만큼 경기진정책을 쓸 시기가 아니라고 못박고, “소유분산 등 정부의 대기업정책도 세계화라는 새로운 상황을 감안 해 전면 재검토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야심찬 세계화를 향한 기업정책과 현실 경기진단을 정면반박하고 나선 것이었다. 최회장의 발언은 강도를 더했다. 그는 “특히 업종전문화 정책은 시대에 뒤진 정책이며, 소유분산 등은 외국에는 없는 정책으로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재계 입장에서는 응당 해야할 소리를 속시원하게 해준 셈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반격을 매서웠다. 청와대와 재정경제부가 상당히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 정부 한 관계자는 “5·6공시절 정권과 결탁해 급성장한 SK가 문민정부들어 전경련 회장을 연임하고 있는 것부터 문제삼을 소지가 있는 게 아니냐”며 SK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기도 했다. 발언 파문이 확산되자 청와대가 나섰다. 최회장에게 홍재형 부총리를 찾아가 사과하라는 것. 최회장은 일단 사태를 수습키로 하고, 당시 홍재형 경제부총리를 방문해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 뒤 공정거래위원회는 SK그룹에 내부거래조사 착수를 통보했다. 국세청도 세무조사를 준비하는 등 강경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물론 정부 측은 “사전에 준비된 작업이었다”면서 ‘괘씸죄’ 적용이나 ‘재벌 길들이기’가 아니냐는 세간의 비판을 피해갔다. 97년에는 노동법 재개정과 관련해, 전경련 차원에서 신문에 시리즈 광고를 실었다가 최종현 회장이 고소당한 일도 있었다. 광고카피에서 현대차 노조의 전임자수를 거론하며 노조전임자 임금금지를 주장했다가 대기업 전체 노조의 반발을 샀던 것. 현대차 노조는 최회장을 포함한 30대 그룹 회장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이 사건은 2000년 3월이 되서야 항소기각으로 끝을 맺었다. 김우중 회장은 준비된 전경련 회장이었다. 97년 말 이미 차기회장으로 추대된 그는 취임전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98년 4월 김대중 대통령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6단체장 오찬모임에도 차기회장 자격으로 최종현 회장과 동반참석하기도 했다. 아마도 김회장은 전경련 회장으로 맹활약하면서 스스로 도취하고, 만족해 했던것 같다. 김용옥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우쭐하게 만들었다는 ‘경제 대통령’이야기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던 김회장이 김대통령으로부터 “정치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소문은 정치권에서 나와 재계로 번졌다. 여기에다 98년 말 전경련 회장에까지 오르면서 김회장 스스로도 밝혔듯이 마치 경제 대통령이라도 된듯 우쭐해지지 않았냐는 것이다. 김회장은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 한 때 경제부총리 물망에도 오른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경제관료들은 김회장이 거론되는데 대해 상당히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98년 6월 「워싱턴포스트」가 “재벌들이 경쟁력 없는 기업들을 퇴출시키려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맞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면서 “김우중 회장이 이를 주도하고 있다”고 보도하자, 경제관료들의 곱지않은 시선이 김회장에게 더욱 몰렸다. 이와중에도 김회장은 거침없는 정부비판 발언을 쏟아내는 등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감행했다. 98년 12월에는 사정이 너무나 급박하게 돌아가자 베트남을 방문 중이던 김대중 대통령을 하노이 대우호텔에서 만나 수출환어음 융통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작업도 무위로 돌아가면서 대우는 서서히 해체의 수순을 밟아갔다. 김우중 회장은 최근 미국 포천지와의 인터뷰에서 “99년 김대중 대통령이 잠깐 (해외에) 나가있으라고 했다”면서 “나중에 돌아오면 대우 경영권을 주겠다”고 주장,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역대 전경련 회장 故이병철 초대회장(1961~62) 故이정림 제2.3대 회장(62~64) 故김용완 제4.5.9.10.11.12대 회장(64~66,69~77) 故홍재선 제 6.7.8대 회장(64~66,69~77) 故정주영 제 13대 17대 회장(77~87) 구자경 현 명예회장, 제 18대 회장(87~89) 유창순 현 명예회장, 제 19.20대 회장(89~93) 故최종현 제21.23대 회장 (93~98) 김우중 제24.25대 회장(98.99) 김각중 제 26.27대 회장(99~현재) |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