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3)]"걸레질 하고 책상 나르며 학원 키웠죠"
[제2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3)]"걸레질 하고 책상 나르며 학원 키웠죠"
샐러리맨 생활 5년만에 퇴직 준비 1980년 11월 코오롱상사 스포츠 사업부 시절이었다. 사회생활 2년차였던 그는 판매직원 14명을 둔 명동 직영점의 주임이었다. 당시 매장에서는 코오롱 제품과 함께 다른 회사 스포츠 용품도 다양하게 취급했다. 한 고객이 들어와 스키 세트를 찾았다. 취급하지 않는 품목이었다. 하지만 조주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없습니다”가 아니었다. “지금은 없지만, 내일 오시면 갖다 놓겠습니다”였다. 그리고 곧장 남대문 시장으로 뛰어가 2백50만원에 스키세트를 샀다. 그리고 3백만원에 팔아 50만원을 남겼다. 그때 그는 장사의 묘미를 알았다고 한다. ‘악바리’ 조병규의 인생을 바꿔놓은 계기는 87년 코오롱 FIK 창립팀장 파견이었다. 코오롱이 패션교육사업을 시작하면서 조학장이 발령을 받은 것이다. 아래 직원들도 있었지만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걸레질·책상 나르기에서 전국 대학에 포스터 붙이는 일까지 모든 일을 직접 했다. 주인의식, 즉 기업가 정신이었던 셈이다. “신생 학원이라 주요 고객인 대학생들에게 홍보를 해야 했어요. 전국을 돌며 대학을 일일이 방문해 포스터를 붙였는데 그 일을 제가 직접 했죠. 1백50개가 넘는 대학을 돌아다녔어요. 학원 수강생들의 취업을 위해 인맥을 총동원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기억도 납니다.‘내가 사장이다’하는 생각으로 일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FIK는 그에게 사장 같은 마인드, 기업가 정신을 불어넣어 줬다. 바쁜 생활이었지만 전문성을 더 키우기 위해 경영대학원을 다녔다. “정말 열심히 했는데, 한계가 느껴졌어요. 속칭 명문대 출신이 아니면 최고경영자(CEO)의 자리에 오를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제안을 ‘일만 많아지고, 실패의 리스크를 지기 싫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는 관료주의적 행태, 이런 것들이 절망스러웠죠. 지금은 대기업도 실적주의 도입·팀제 활성화 등으로 많이 달라졌지만, 80년대 말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실적에 대한 배려가 참 없었습니다.” 명문대 출신에 치이고, 관료주의에 실망한 조학장은 조금씩 퇴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마음에 둔 것은 카인테리어 사업이었다. “87년쯤인가, 과장 시절이었어요. 샐러리맨 생활에 대한 회의가 들어서 뭘 할까 생각하다 카인테리어 사업을 떠올렸죠. 봐둔 가게가 있었거든요.” 그는 서울역 앞 2급정비사 자격증 학원에 등록했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2∼3시간씩 학원에서 공부하고 11시가 넘어야 집에 돌아가는 생활이었다. 낮에는 코오롱 과장, 밤에는 정비사 자격증 준비생의 이중생활이 3개월 정도 이어졌다. “권리금을 9천만원이나 달라는 바람에 카인테리어 사업 계획은 무산됐죠. 제가 생각했던 가격보다 터무니없이 비쌌거든요." 임대료 못내 쫓겨나기도 결국 FIK 과장을 끝으로 그는 직접 패션학원을 운영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입사 동기생 한 명과 동업하기로 하고 함께 사표를 썼다. 그래서 차린 게 한일패션학원이었다. 신생 학원으로서의 단점은 일본의 유명 패션학원인 ‘ODA’브랜드로 포장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ODA분교’라는 이름으로 홍보를 했다. 정식 분교는 아니지만 일본 문화복장학원 출신으로 일본 패션계 인맥을 갖고 있는 일본인을 디자인 실장으로 앉히면서 일본 ODA로부터 묵인을 받았다. 하지만 이게 문제였다. 당시 교육부 규정상 분교 표현은 쓸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ODA 간판을 내린 그는 ‘서울모드’로 이름을 고치고 패션학원 사업을 계속했다. 강사료를 아끼려고 마케팅·머천다이징(MD) 강의를 직접 맡기도 했지만, 학생이 적어서 임대료 내기도 버거웠다. 부업으로 패션교육 기획 사업도 해보고, 잡지도 만들어 봤지만 강사료는 늘 몇 개월씩 밀렸다. 매일 담배 2∼3갑을 태웠고, 일과가 끝나면 술 없이 맨 정신으로 집에 들어가는 날이 없었다. 교사 월급으로 몇 년째 생활비를 책임지고 있는 아내 얼굴을 볼 낯도 없었다. 월 1천만원씩 내는 임대료가 밀리다가 결국 보증금 1억원을 다 까먹는 상황까지 왔다. 빌딩에서 쫓겨나고, 동업하던 동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며 사업을 포기했다. “코오롱 시절, 일본 출장을 가서 문화복장학원을 견학한 적이 있습니다. 학원으로 출발해 패션전문대학으로 발전해 일본 패션산업의 산실로 성장한 모습에 감명을 받았죠. 한국도 꼭 그렇게 될 거라고 믿었어요.” 대학 이외의 기관에서 이수한 학점이 정부의 인정을 받는 학점은행제·전문학사 학위제가 도입되는 분위기도 무르익어 갔다. 머지않아 한국에도 패션학원이 패션전문대학으로 발전하는 날이 올 것으로 믿었다. 제도가 정비되면 수강 수요도 크게 늘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믿음 때문에 조학장은 어려움 속에서도 패션학원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즈음 코오롱 시절 상사로 모시던 김정렬 현 서울모드 이사장이 1억원을 투자하며 합류했다. 덕분에 보증금을 마련해 새 빌딩으로 이사를 갈 수 있었다. 조학장은 ‘생존’을 위해 의류사업도 했다. 학원을 시작한 후 4년여 만인 95년께였다. 외국에서 옷을 수입해 ‘타이밍’이라는 브랜드를 붙여서 팔았다. 인건비를 아끼려고 박스와 옷걸이를 짊어진 채 백화점 매장을 오르내리고 나면 온몸에 비오듯 땀이 났다. 모두 ‘학원’사업에서 버티기 위한 방편이었지 한눈을 판 것은 아니었다. 97년에는 고3짜리 아들 앞으로 신청한 교육보험이 취소되는 바람에 받은 5백40만원으로 가계수표를 막은 일도 있었다. “당시 19년간 보험료를 붓고 마지막 1달만 더 내면 되는 시점이었죠. 교육 자금 지급에 앞서 보험사에서 신체검사를 하러 나왔는데 가슴에 콩알만한 종양이 발견됐어요. 교육 자금 지급은 취소됐지만 종양으로 인한 보험금 덕분에 돈을 막았습니다. 씁쓸하더군요.” 정밀검사 결과 당장 수술해야 할 형편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조학장이 꿈에도 그리던 ‘직업학교 인가’를 열흘 앞둔 시점이었다.서울모드가 직업학교로 인정이 되면 학점이 인정돼 이를 기초로 비전공 학생들도 대학의 패션 관련 학과에 편입학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었다. 정해진 학점을 이수하면 산업예술학사로 인정받을 수도 있었다. 학원으로서는 성장의 기폭제가 될 중대한 기로였다. 그는 담당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할 일을 마치고 오겠습니다. 그 때 살려주십시오.” 조학장은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 열흘 만에 인가를 받아냈다. 패션학원 최초였다. 조학장은 곧바로 입원해 18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1백명 안팎이던 수강생은 불과 1년 뒤 6백∼7백명으로 불어났다. “패션전문대학 만들겠다” 그 즈음 학원의 임대료는 월 2천8백만원까지 올랐다. 조학장은 곰곰 생각했다. ‘연간 3억원 이상을 임대료로 지출할 바에야 30억원짜리 빌딩을 사는 게 낫겠다.’ 20억원을 대출받아도 월세보다 적은 연간 2억원 정도 이자를 물면 됐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학원이 안되면 임대료를 받아도 커버할 수 있는 액수였다.건물을 사는 데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돈도 없이 빌딩을 사겠다고 나서니 주위에서 다들 의아해했다. “당시 건물 이름이 SM빌딩이었어요. 건물 위치 등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는데 이름까지 서울모드의 영문 이니셜과 똑같이 SM빌딩이더라고요. 이건 운명이다 싶었죠.” 그는 건물 주인을 찾아갔다. 하지만 주인은 도무지 팔 마음이 없었다. 조학장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6개월간 하루도 빠짐없이 건물 앞에 가서 마음속으로 ‘내 건물이 될 거다’라며 자기 암시를 했다. 빌딩 관리를 책임지고 있던 주인의 친척과 어울려 술도 마시고, 노래방에도 다니며 열심히 ‘꼬셨다’. 그렇게 해서 6개월 만에 매각 약속을 받아냈다. “그때부터는 돈이 문제였죠. 1년 반 동안 사업을 해서 번 돈 5억∼6억원과 이리저리 갖고 있던 돈을 싹싹 긁어 모아도 20억원이 모자라더군요.” 담보 등으로 대출이 가능한 금액은 15억원. 나머지 5억원은 구할 길이 없었다. 그는 상호신용금고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부사장을 만나 “빚이 없어 사는 재미가 없다. 대출만 해 주면 갚기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부사장은 껄껄 웃더니 20억원 대출을 승인해 줬다.그가 건물을 매입한 것은 97년 7월이었다. 몇 달 후 IMF가 닥쳤고 금리가 치솟았다. 월 4천5백만원씩 이자를 물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4개월 정도 버티고 나자 금리는 다시 원상 복귀됐다. 조학장의 목표는 전문대를 인수해 ‘패션전문대학’의 꿈을 이루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요즘 마땅한 인수 대상을 물색 중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고아원’ 운영도 목표 중 하나다. 회사 그만두고 자리잡기까지 7년여간 고생하면서 사표 낸 걸 후회한 적 없느냐는 질문에 조학장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코오롱에 입사할 때 동기가 총 1백50명이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단 1명뿐입니다. 창업에도 타이밍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금이나 시장 상황 같은 외부 환경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하고 싶고, 하려는 의지가 충만한 타이밍 말입니다. 그 타이밍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아는 법이죠.” 조병규 학장 약력 1979년 2월 단국대학교 상경대학 무역학과 卒 92년 2월 단국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과 卒 79~91년 코오롱 상사 입사. 스포츠 직영점장, 기획과장 91년 4월 서울모드패션디자인학원 설립 2001년 한양대학교 환경보건관리학 박사과정 2003년 현재 서울모드패션전문학교 학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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