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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원짜리 파는데 57원 세금 내라니…”

“100원짜리 파는데 57원 세금 내라니…”

힘겹게 소생의 기운을 찾아가던 하이닉스호(號)가 또다시 좌초위기를 맞았다. 지난 2일 미국 상무부가 한국 정부의 D램 산업에 대한 보조금을 지급했다는 이유로 하이닉스에 대해 57.37%라는 고율의 상계관세 예비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2001년 5조7백억원, 지난해 1조9천5백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당기순손실을 기록한 뒤 채권단의 채무 재조정으로 희망의 불씨를 살리던 하이닉스에게는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조치로 하이닉스는 미국에 반도체를 수출하면서 판매가의 절반이 넘는 세금을 미국 정부가 지정한 금융기관에 예치해야 한다. 하이닉스의 미주지역 D램 수출비중이 전체 수출물량의 25%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매달 2천3백만 달러의 추가 부담이 생긴 셈이다. 2000년 시작된 반도체 경기의 불황과 만성적인 부채로 설비투자를 제대로 못해 가뜩이나 원가 경쟁력이 취약한 하이닉스의 입장에서는 1백원짜리 제품을 팔면서 57원의 세금을 무는 꼴이어서 사실상 대미 직접 수출의 길이 완전히 막혔다고밖에 볼 수 없다. 게다가 같은 이유로 유럽연합(EU)도 이달 24일께 30∼35%에 이르는 높은 관세를 하이닉스에 부과할 것으로 알려졌다. 하이닉스의 EU 수출비중이 10% 정도이니 간접수출·현지생산분을 빼더라도 최소한 15%의 시장을 한꺼번에 잃게 되는 결과다.

월 2천3백만 달러 추가부담 물론 아직 최종판정까지는 3개월여의 시한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정부의 설득 노력과 하이닉스의 혐의 입증 여하에 따라 관세율 폭이 크게 줄어들 가능성은 있다. 이번 예비판정에서 미국은 2000년 12월의 신디케이트론, 수출환어음(DA) 한도제도, 산업은행의 회사채 신속인수제도, 2001년 2월의 전환사채(CB) 인수와 채무만기 연장 등 1차 금융지원, 같은해 4월의 신규 대출과 출자전환 등의 2차 금융지원 등 마이크론의 제소 내용을 모두 보조금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금융지원에 정부가 개입했는지 여부가 쟁점이었지만 미국은 상업은행도 사실상 정부의 지배 아래 있는 것으로 간주, 금융지원 부분에서만 56%가 넘는 보조금률을 매겼다. 우리나라의 카운터파트인 산업자원부는 이점에 주목한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금융기관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총리훈령을 통해 정부의 불간섭 원칙을 법제화했고 공적자금 투입에 따른 정부지분은 금융 구조조정 과정에서 생긴 필연적·일시적인 현상으로 봐야 한다는 게 산자부의 설명이다. 게다가 신디케이트론 등 다른 금융 프로그램에 외국계 자문사들이 참여한 점, 외환위기 이후 진행된 기업구조조정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에 따라 민간 자율협의체인 채권금융기관협의회에 의해 시행된 점 등을 강하게 설득하면 미국도 어느 정도 이를 수용할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이 최종판정 때 고려해야 할 외적인 요인이 있다는 항간의 지적도 곱씹을 만하다. 최근 국회의 이라크 파병안 처리로 어색했던 노무현 정부와 부시 행정부의 관계가 호전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데다 양국간 북핵위기 등 상호 협의해야 할 현안이 산적한 상태에서 굳이 두 나라 정부가 통상문제로 부딪칠 필요가 있느냐는 점이다. 하지만 이같은 요인들은 부과된 관세의 경감 요인일 뿐 하이닉스에 무겁게 드리워진 부담을 완전히 덜어주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만일 7월 말과 8월 초 미국과 EU의 최종판정에서도 하이닉스가 30% 이상의 상계관세를 물어야 한다면 하이닉스의 독자생존 희망은 절망으로 바뀔 공산이 크다. 다행히 IT(정보기술) 경기가 갑자기 회복돼 반도체 산업이 90년대 후반의 호황을 맞거나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이 인수작업에 나선다면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그럴 가능성도 기대하기 어렵다. 일각에서 지금의 경기침체가 지속될 경우 하이닉스는 설비 일부를 매각 또는 폐쇄할 수밖에 없어 1∼2년 내에 생사의 기로에 설 것이라는 전망이 흘러나오고 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하이닉스의 전도(前道)가 마냥 잿빛만은 아니다. 하이닉스는 작년 12월 말 채권단이 도이체방크가 제시한 채무재조정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재무구조에 안정을 되찾고 있다. 21대 1 감자안이 마무리되면 하이닉스는 현재 자기자본 26조원, 발행주식 수 52억주에 이르는 기형적 재무구조가 자기자본 6조원(납입자본금 2조2천억원), 발행주식 수 4억4천5백만주, 부채비율 70%로 탈바꿈하게 된다. 또 올해(1조원)와 내년(3조4천억원)에 도래하는 회사채 등의 채무상환 부담을 덜게 돼 운전자금 조달에 허덕이던 자금운용에 ‘숨통’이 트인다. 채권단 계산대로라면 채무 재조정과 자구계획 이행이 순조로울 경우 올해부터 4년간 4조4천억원의 설비투자(TFT-LCD 매각분 포함) 여력을 확보할 수 있어 투자 지연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게 된다. 유동성 문제가 있지만 이미지퀘스트 등 자회사의 지분과 비메모리 생산라인의 매각 작업이 진행 중이어서 결과에 따라 적잖은 ‘현찰’을 손에 쥘 수도 있다. 지금은 작년 29달러였던 마이크론의 주식 1억8백60만주를 평균 35달러(당시 현금 환산시 4조원)에 받기로 마이크론과 매각에 합의하고는 이사회에서 번복, 협상을 결렬시킨 뒤 휘청이던 예전의 하이닉스가 아니라는 얘기다.

“경쟁력 키우든가 빨리 팔든가” 이번 고율의 상계관세에 따른 악영향이 생각보다 적을 것이라는 전망도 잇따르고 있다. 메릴린치증권은 “잠정적인 판정과 최종 결론은 달라질 수 있다”면서 미국 정부의 상계관세 조치 철회 가능성을 제기했다. 미국의 정보기술(IT) 전문 온라인매체 EBN은 하이닉스의 패러드 타브리지 메모리칩 마케팅 담당 부사장의 말을 인용, “한국의 생산제품을 미국 고객사의 해외공장으로 출하하고 유진공장의 생산용량을 완전히 가동하면 미국 고객에게 출하되는 D램 중 80%는 상계관세를 피할 수 있어 하이닉스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고 보도했다. 이강원 외환은행장도 “하이닉스가 이번 예비판정으로 영업에 부담을 느끼겠지만 충분히 견딜 수 있다”고 예측했다. 하지만 문제는 결국 미국과 EU의 상계관세 판정은 하이닉스의 목을 조여올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하이닉스가 수출선을 동남아로 전환하고 유진공장의 설비능력을 키워 상계관세 파고를 어느 정도 넘는다 하더라도 수익성 악화는 불가피하다. 게다가 대규모 시설투자와 지속적인 연구개발 투자가 필수 불가결한 반도체 산업의 특성으로 볼 때 이미 투자 적기를 놓친 하이닉스가 삼성전자·마이크론·독일의 인피니온·대만의 난야테크놀러지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삼성전자·난야·인피니온이 이미 3백㎜ 웨이퍼 투자를 통해 나노시대를 향해 부지런히 달리고 있는데 하이닉스는 여전히 0.15∼0.18㎛의 생산설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한때 20%를 넘나들던 세계시장 점유율이 몇 년 사이 투자지연과 구조조정으로 12.8%로 꼬꾸라졌다는 것은 하이닉스의 경쟁력이 급전직하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증권사의 반도체 애널리스트는 “하이닉스가 최악의 상황을 맞아 무너진다면 2천여 협력업체의 연쇄도산으로 이어져 우리나라는 9조∼10조원의 직접손실을 보게 된다”면서 “이를 막기 위해서는 채권단과 하이닉스이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과감한 재투자를 통해 경쟁력을 키우든지 하루빨리 매각하는 방법밖에는 대안이 없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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