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도장 찍었어도 ‘재협상’ 주저말라

도장 찍었어도 ‘재협상’ 주저말라

일러스트/김회룡
석유화학제품을 원재료로 하는 상품의 장기 공급계약을 체결한 중소업체 CEO 강경해(가명)씨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국제정세의 영향으로 원재료 가격이 폭등하는 바람에 벌써 몇 개월째 적자 납품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내 경기도 불황으로 매출이 감소해 이제는 매일매일의 현금 흐름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아무래도 다음달부터는 적자 납품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러나 계약 내용을 위반하고 A사에 대한 납품을 안 하면 사업을 접어야 한다. A사는 몇 년 동안 공들여 온 가장 중요한 거래처이기 때문이다. 한데 이 분야는 시장 규모가 커져 가고 있기에 고비만 넘기면 납품수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아무래도 장기적 관점에서 계약 내용을 그대로 이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강사장은 거래은행을 중심으로 자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더 이상의 차입은 불가능하다는 통고를 받고 자포자기 상태다. 이럴 때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까.

1.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한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지켜왔으나 주위 환경의 변화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계약을 파기해 버리는 방법이다. 물론 계약을 일방적으로 이행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해 올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소송을 제기한다고 해도 갖고 있는 재산은 이미 다 없어지고 없으니 소송에 대해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법률적 문제와 관련해 변호사와 상담을 했다. 역시 계약위반에 대해서는 형사적 책임을 질 필요는 없고, 다만 손해배상을 해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상황을 볼 때 법률적인 문제는 어떻든 해결이 될 것 같다. 문제는 이렇게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하고 나면 나중에 사정이 나아졌을 때 상대 기업과 다시 거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힘들게 만들어 온 상대방과의 관계인데 쉽게 포기하는 것은 너무 짧은 생각이란 느낌이 들었다.

2. 어떻게 해서든 계약을 지킨다 강사장은 계약 내용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 친척과 친구에게 돈을 빌리고 사채를 동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계약을 이행한 사실을 상대방이 알아주고 나중에 추가 계약을 체결할 때 지금 감수하고 있는 손해를 보전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물론 강사장의 기대가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같은 강사장의 기대는 너무 자기중심적 사고의 발상이다. 여러 업체와 수많은 거래를 하고 있는 상대방이 원가 분석을 스스로 해서 손실을 감수하며 계약을 이행하고 있는 강사장을 알아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 오늘날 비즈니스는 그렇게 한가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하는 고객들과 거래처를 상대하기에도 바쁜 세상이다. 오히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계약을 지키면서, 상대방이 이를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강사장의 해결 방법은 상대방에게 이런 생각을 품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처음 계약 때 얼마나 많은 이익을 남겼으면 원자재 가격이 이렇게 폭등했는데도 불평 한 마디 없이 계약을 이행할까. 나중에는 좀 더 철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

3.재협상을 시도한다 강사장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재협상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계약 내용에도 불구하고 비즈니스 환경이 변했으니 변한 내용을 지난번 합의된 계약에 반영되도록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계약이란 일단 체결하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과 같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일단 체결된 계약은 지키는 것이 건전한 상식이다. 그리고 계약을 존중하는 풍토가 만들어지지 못하면 정상적 비즈니스를 할 수도 없다. 그러나 계약은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과는 달리 단순히 쌍방이 협상과정을 통해 합의한 내용을 기록해 놓은 문서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계약의 내용은 쌍방이 합의를 하기만 하면 자유롭게 고칠 수도 있다. 이같이 계약 속성을 이해한다면 강사장은 일방적으로 계약을 위반하거나 극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이행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택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계약의 내용을 변경하자는 재협상을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협상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의향서·양해각서는 물론 협상의 최종 결과를 기록한 계약서와 같이 문서로 기록된 내용도 재협상을 통해 변경할 수 있다. 그리고 이같은 적극적인 협상 태도는 강사장은 물론 상대방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다. 장기적인 비즈니스 관계를 만들어 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다. 이같은 신뢰는 상대방에 대해 잘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강사장이 솔직하게 어려움을 이야기하며 납품가격을 인상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준비해서 상대방과 재협상을 하면 적어도 두 가지 중 하나는 얻어낼 수 있다. 하나는 원래 목적대로 상대방 설득에 성공해서 계약 내용을 새로 변경하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렇다. 지금 당장 상대방이 합의를 해주지 않아도 강사장이 지금 원래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알려줄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을 알게 된 상대방은 후속 협상을 할 때 현재 어려움에 대한 많은 고려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비상계단 몰래 깎아"...대구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

2"올림픽 휴전? 러시아만 좋은 일"...젤렌스키, 제안 거부

3일론 머스크, 인도네시아서 '스타링크' 서비스 출범

4취업 준비하다 봉변...日 대학생 인턴, 10명 중 3명 성희롱 피해

5주유소 기름값 또 하락...내림세 당분간 이어질 듯

6아이폰 더 얇아질까..."프로맥스보다 비쌀 수도"

7 걸그룹 '뉴진스', 모든 멤버 법원에 탄원서 제출

8 尹 "대한민국은 광주의 피·눈물 위 서 있어"

9성심당 월세 '4억' 논란...코레일 "월세 무리하게 안 올려"

실시간 뉴스

1"비상계단 몰래 깎아"...대구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

2"올림픽 휴전? 러시아만 좋은 일"...젤렌스키, 제안 거부

3일론 머스크, 인도네시아서 '스타링크' 서비스 출범

4취업 준비하다 봉변...日 대학생 인턴, 10명 중 3명 성희롱 피해

5주유소 기름값 또 하락...내림세 당분간 이어질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