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썰렁한 새벽… 손님은 없고 상인들만 ‘한숨’
[현장]썰렁한 새벽… 손님은 없고 상인들만 ‘한숨’
“청계고가 철거로 주차공간 사라질판” 대전시 대흥1동에서 옷 장사를 하는 정모(52)씨는 “1999년 명예퇴직을 하고 부부가 같이 옷 장사에 나섰는데, 요즘 같은 불황은 처음”이라며 “재고가 쌓여 있어 새로 물건을 살 여유가 없지만 유행에 민감한 셔츠나 바지들을 진열해 놓지 않으면 그나마 장사가 더 안 될 것 같아 동대문시장에 왔다”고 말했다. 그는 “도매상들도 불황을 심하게 타는지, 거래업체 중 한 곳은 밤 12시가 다 돼도 문을 열지 않아 다른 곳에서 돈을 더 주고 물건을 구입했다”며 “경기불황에, 임대차보호법 영향으로 임대료도 크게 올라 이중고를 겪고 있다”며 줄담배를 피웠다. 부산대 앞 의류상가에서 10년째 여성복 장사를 하는 김모(45)씨는 “여름 휴가철 장사를 위해 수영복과 옷가지를 사러 왔지만 지난해보다 구입 규모를 줄이고 있다”며 “올해까지 장사를 하다가 그래도 경기가 좋아지지 않으면 문을 닫고 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대문시장의 터주대감인 평화시장 상인들은 최근 시작된 청계고가 철거를 지켜보며 한숨을 짓고 있었다. 신평화시장에서 속옷 장사를 하는 강모(38)씨는 “청계고가 철거로 주차공간이 사라져 매출에 타격을 입을 것 같아 걱정”이라며 “지방상인들은 한꺼번에 많은 옷을 사기 때문에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으면 아예 찾지 않는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반면 평화시장 안쪽 도매상가 입주 상인들은 반사이익을 기대하며 청계고가 철거에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국내 최대의 의류 도매시장인 동대문시장 상인들이 경기불황과 할인점과 홈쇼핑, 인터넷쇼핑 등 이른바 신유통의 발달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삼성패션연구소에 따르면 동대문의 상권을 통해 전국으로 확산되는 노브랜드 제품들의 시장 규모는 지난 2000년 2조8천억원에서, 2001년 2조원, 2002년 1조7천억원대로 줄어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올해는 1조5천억원대로 추정되고 있다. 동대문시장의 상권이 크게 위축되면서 이곳을 찾는 외국관광객들도 줄어들고 있다. 서울시 관광안내사무소 동대문지점 관계자는 “사스(SARS) 영향으로 작년보다 일본인 관광객들의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며 “최근 중국인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값싼 의류와 신발로 상인들한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동대문 시장의 상징인 ‘새벽 시장’도 ‘밤 시장’으로 바뀌는 추세다. 동대문시장은 동대문운동장 앞 흥인문로를 중심으로 종로 쪽은 소매상가와 신당동 쪽은 도매상가들로 나뉘어 있다. 주말장사를 하는 소매상가들의 영업시간은 오전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다. 주말에는 문을 닫고 평일에만 영업을 하는 도매상가들의 영업시간은 오후 8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다. 소매상가에는 주말의 경우 오후 3시부터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요즘은 밤 12시가 되면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긴다. 새벽 1시가 지나면 매장에는 손님보다 상인들이 더 많을 정도다. 도매상가에 가장 손님들이 많은 시간도 새벽 1시에서 밤 11시로 바뀌었다. K쇼핑몰 1층 여성복 매장 김모(29)씨는 “지난해부터 지방상인들도 새벽보다 밤 시간에 많이 온다”며 “지방에서도 장사가 잘 안 돼서 일찍 문을 닫고 서울로 올라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손님보다 상인들이 더 많아 동대문운동장 입구를 환하게 밝히던 포장마차 행렬도 사라졌다. 동대문운동장 맞은편 제일평화시장 앞에는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문을 연 포장마차들이 10여개가 있었지만 손님이 있는 포장마차는 불과 2∼3곳에 불과했다. 평화시장 앞에서 20년째 핫도그와 어묵을 팔고 있는 정모(48)씨는 바쁘게 손을 놀리며 핫도그를 기름에 튀기고 있었다. 정씨는 “이렇게 핫도그를 튀겨 쌓아놓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띄여 하나라도 팔아볼까 하는 심정에서 이렇게 일을 하고 있다”며 “작년까지만 해도 하루 20만원은 벌었는데, 요즘은 10만원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새벽 2시, 상인들의 간식시간이다. 머리 위에 3∼4개의 쟁반을 이고 바쁜 걸음으로 음식 배달에 나선 아줌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 경기가 어때요”란 질문에 대뜸 “보면 몰라요”라며 화부터 낸다. 매장에는 컵라면과 김밥, 편의점에서 사온 만두로 간식을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사가 안 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인들이 간식비도 줄이고 있는 것이다. M상가 뒤편에서 10년째 식당을 하고 있는 이모(55)씨는 “예전에는 외상도 해주고 그랬는데, 요즘은 당일 음식값을 받고 있다”며 “올해 초 음식 외상값을 떼먹고 문을 닫은 업체들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했다”고 말했다. 새벽 3시경, 외곽에 있는 도매상가 상인들은 점포 바닥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들이 이렇게 새우잠을 자는 이유는 손님이 끊긴 탓도 있지만 상가 입점시 관리실 측과 맺은 영업시간 준수 규약 때문에 문을 닫고 귀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새벽 4시가 지나면서 소매전문쇼핑몰 매장에는 손님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새벽 4시30분경 한 소매 전문 쇼핑몰, 원래 새벽 5시까지 영업시간이지만 손님이 끊겼다는 이유로 30분 앞당겨 셔터를 내리고 있었다. 경기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몇몇 대형 의류 쇼핑몰에서는 빈 점포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문을 연 한 의류상가에는 3층부터 빈 점포가 보이기 시작했다. 4층 2개점, 5층 12개점에는 월세를 내지 못해 상가 측으로부터 ‘영업정지’를 알리는 푯말이 걸려 있었다. 외환위기 때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는 도매상가들도 빈 점포들이 속출하는 등 경기불황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다. 도매상가들이 밀집해 있는 중심부를 벗어난 외곽에 있는 몇몇 상가들은 문을 연 점포와 텅빈 점포들이 절반씩 섞여 있었다. 권리금도 거의 사라져 가장 목이 좋다는 1층 점포들도 권리금이 사라진지 오래다. 월세나 보증금도 지난해보다 30∼40% 정도 떨어졌다. 지난해 보증금 4천만∼5천만원에 월세 3백만∼4백만원에 거래됐던 A급 점포는 현재 보증금 2천5백만∼3천만원, 월세 2백50만∼3백만원 수준으로 내려 앉았다. 고객의 발길이 끊긴 데다 상가 권리금까지 없어지면서 아예 업종을 전환해 위기를 탈출하려는 상인들도 늘고 있다. H상가 2층에서 여성복 매장을 운영하는 이모(31)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하루 매출이 2백만∼2백50만원 정도 됐으나 요즘은 70만∼80만원에도 못 미친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씨는 “이곳에 점포를 임대 받기 위해 빌려쓴 빚을 갚을 생각을 하면 눈앞이 캄캄하다”며 “이 상태가 계속되면 보증금도 날리고 거리에 나앉을 판”이라고 말했다. 빈 점포들이 늘어나면서 상가를 관리하는 관리인 측도 매장을 재구성하는 등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M상가의 경우 최근 8층 스넥바를 폐쇄하고 게임기와 휴대폰 전문 매장으로 재단장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줄어든 매출이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는 관리인 측도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모습들이 생기고 있다. 동대문시장에 도매보다 더싼 제품을 파는 또다른 도매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도매 시장이 문을 닫는 새벽 5시경. 방상인들이 하나둘씩 이제 막 문을 연 C상가로 들어갔다. 주로 낮에 영업을 하는 이 상가의 영업시간은 특이하게 새벽 5시∼6시30분과 오전 9시∼밤 9시까지 두차례로 나뉜다. 새벽 영업시간은 지방 상인과 도매상인들이 이용하고 낮시간에는 일반인들이 찾는다고 한다. 동대문 상인들은 이 상가가 1시간 30분동안 짧게 영업을 하고 문을 닫는다고 해서 이른바 ‘반짝시장’이라고 부른다. 할인점에서도 보통 1만원 하는 티셔츠가 이곳에서는 2∼3천원에 거래되고 있다. 여성 셔츠와 바지도 도매상가보다 최소 1∼2천원에서 최대 절반 이상 값이 싸다. 대구에서 옷 장사를 하는 곽모(35)씨는 “지난해 가을부터 ‘반짝시장’이 생겼는데, 가격이 도매 상가보다 싸고 디자인도 좋은 제품들이 많아 귀가하기 전에 반드시 들르곤 한다” 고 말했다. 손님을 끌기 위한 상인들의 홍보경쟁도 치열하다. 바디페인팅과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나레이터 모델이 벌이는 각종 게임과 아이스크림, 팝콘 무료 제공 행사들은 눈요기에 불과하다. 지난 21일 토요일 밤 8시경, H쇼핑몰과 M쇼핑몰 앞 무대에서는 요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한 락가수의 콘서트와 댄서들의 공연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벌어지고 있었다. D상가 관리소 관계자는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이런 이벤트 행사가 자주 열린다”며 “지난해보다 홍보비를 10% 이상 늘렸는데, 하반기에 더 늘리자고 얘기하는 상인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곳 상인들의 체감 경기는 아주 심각한 상태다. 최근 굿모닝쇼핑몰 사기 분양 의혹 사건을 보는 시각도 피해자들의 억울함과 인근 상인들의 안도감이 얽혀 복잡하다. 상인들에 따르면 동대문시장은 이제 포화 상태라고 한다. 연간 10조원의 돈이 나도는 전국 최대 의류도매시장이지만 새로운 쇼핑몰이 들어설 경우 기존 상인들의 매출이 줄어들 뿐 시장 확대 등 긍정적인 효과는 기대하기 힘들다고 한다. M상가 관계자는 “외환위기 때 동대문시장이 잘된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원래 이 지역 큰손들과 대기업들이 대형 쇼핑몰 건축에 나섰지만 지난해부터는 경기가 급격히 내리막을 타고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상가건물 개발업체들이 이 일대에 대형 쇼핑몰 신축을 추진, 기존 상인들의 반감을 사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굿모닝시티 사기 분양 의혹 사건 피해자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기존 상인들은 앞으로 대형 쇼핑몰의 추가 분양 소식이 들리면 시위라도 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유순 삼성패션연구소 연구위원은 “동대문시장이 회생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며 “지방에서 올라오는 소매상인들에 대한 교통편과 휴식시설, 물류지원 등이 구축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연구위원은 “상인들도 고급 디자이너 양성을 위해 교육시설 설립에 대한 투자등 자구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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