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세월 앞에 작아지는 ‘재계 총리’
[포커스]세월 앞에 작아지는 ‘재계 총리’
‘떡고물’보다 ‘떡값’ 더 든다. 정회장은 공업입국·수출입국을 내세운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사실상 경제파트너였다. 10년간 전경련 회장을 하면서 박대통령과 경제문제를 상의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로부터 혜택도 많이 입었다. 아무래도 정부 주도의 경제체제에서는 정부와의 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다. 전경련 회장은 정치자금 제공 등 비용도 많이 들지만 비용 이상의 혜택이 돌아오는 자리였다. 하지만 90년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치권과 재계의 관계는 점차 변해 간다. 정부 주도의 경제체제가 급격히 민간기업 위주로 바뀌면서 정부가 줄 ‘선물’이 줄어들었다. 전경련 회장 자리도 ‘떡고물’보다는 ‘떡값’이 더 많이 드는 곳으로 변했다. 정부의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전경련의 위상도 그만큼 줄어든 셈이다. 여기에 재계 자체의 변화도 전경련의 영향력을 축소시켰다. 우선 창업주 세대들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2세들이 등장하면서 결속력이 떨어졌다. 전경련의 한 관계자도 “명분과 단합을 강조했던 1세들과 달리 2·3세들은 실리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아무래도 어려운 시기 서로 도우면서 일해왔던 창업주들에 비해 2·3세들은 공유할 만한 경험이 적을 수밖에 없다. 기업별로 주력 사업이 분화되면서 공통적인 이슈가 적어진 것도 연합체인 전경련의 역할이 줄어든 계기가 됐다. 과거 수출 일변도·중화학공업 일변도였던 시절에는 재계가 한목소리로 정부에 요구할 것이 많았지만, 지금은 각 기업별로 정부에 요구하는 사항이 다르다. 이런 사회 변화에 따라 전경련의 위상도 점차 변했다. 전경련의 한 고위 간부는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경련 회장은 대통령이나 담당 장관들과 직접 대화해 문제를 해결했다. 당시에는 전경련의 위원회 회의에 국회의원을 부른 적도 없다. 장관 아니면 청와대 수석비서관 정도 돼야 위원회에 참석하곤 했다”며 달라진 위상을 설명했다. 최근에 전경련 상임위가 열리면 국회의원은 물론 시민단체와 농민들도 참석하곤 한다. 전경련 입장에서는 격세지감(隔世之感)인 셈이다. 마무리 안 좋았던 회장들 현실이 이렇다 보니 누구 하나 전경련 회장에 선뜻 나서지 않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전경련 회장들이 평탄했던 것은 아니다. 정주영 회장은 전경련 회장을 물러난 뒤였지만 92년 대선출마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최종현 회장은 정부 눈치를 보지 않는 성격 탓에 전경련과 SK그룹이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그는 95년 전경련 회장에 재추대되면서 “업종 전문화 정책은 시대에 뒤진 정책이며, 소유분산 등은 외국에는 없는 정책으로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며 막 세계화 정책을 발표한 정부에 찬물을 끼얹었다. 발언 파문이 확산되자 최회장은 당시 홍재형 경제부총리를 방문해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 뒤 공정거래위원회는 SK그룹에 내부거래조사 착수를 통보했다. 김우중 회장은 전경련 회장 자리를 활용해 재기를 노렸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얻어 “정치는 내가 대통령이지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당시 경제관료들은 김회장에 대해 상당히 반감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김회장은 대우의 엄청난 부실 때문에 전경련에서 도중하차했고 지금은 외국을 떠돌고 있다. 최근 전경련 회장직을 수행했던 SK그룹의 손길승 회장은 참여정부 출범에 맞춰 전문경영인 출신으로 전경련 회장에 올랐지만, 끝내 SK 분식회계와 비자금 사건으로 중도하차하는 운명에 처했다. 손회장은 현재 비자금과 관련된 재판을 앞두고 있다. 이처럼 전경련 회장을 지낸 인물들의 불행이 겹치면서, 전경련은 회장 자리가 갈수록 기피 대상이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지난 몇년간 대그룹 회장들이 전경련 회장을 기피하면서 전경련의 위상이 많이 흔들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전경련의 이승철 상무는 “전경련 회장의 중요성이 떨어졌다면 누가 회장이 되는지를 놓고 왜 이렇게 시끄럽겠느냐”면서 “예전처럼 대통령이나 경제부총리 등과 독대하던 시대는 갔지만 사회적으로 재계의 목소리를 대변할 필요성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면서 “전경련 회장이 한국 경제에서 여전히 중요한 것은 이 때문”라고 주장했다. |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차에서 자도 됩니다' 대학생 노숙, 미국에선 흔한 일?
2LH, 지난해 영업익 3404억원…전년대비 679% 증가
3서울시, 토허제 입주권 실거주 의무 유예 검토
4트럼프 관세 폭탄에 구찌‧루이비통 글로벌 명품시장도 ‘안사요’
5‘마영전’ IP 신작 ‘빈딕투스: 디파잉 페이트’, 6월 글로벌 알파 테스트 실시
6유튜버 허성범·1타 강사 김민정…우리금융 찾은 사연은?
7퓨리오사AI 방문한 이재명...“중요한 건 먹고 사는 문제, 희망 보인다”
8한미약품, 美 AACR서 비임상 연구 성과 11건 발표
9네이버,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한국의 핫플 소개하는 ‘비로컬’(BE LOCAL) 캠페인 선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