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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연체 공화국’인가?

대한민국은 ‘연체 공화국’인가?

신용카드 회사 채권추심팀 직원이 신용불량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카드 빚 상환을 독촉하고 있다.
"채권추심을 하다 보면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 ‘자장’이 됩니다. 요즘엔 더 까만 ‘춘장’이 될 때가 많아요.” 신용카드 회사의 지역채권센터장으로 있는 K씨는 최근 자산관리공사(KAMCO)가 새로운 신용회복 지원 프로그램을 시행한 이후 돈 받아내기가 더 힘들어졌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신용불량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밀린 연체금에 대해 이야기하면 대뜸 “아직도 자산공사에 안 넘겼어요. 넘기라니까. 바쁘니까 끊어요”라는 식의 반응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신용불량 고객들은 빚이 자산관리공사로 넘어가면 카드사를 상대하는 것보다 원리금을 더 적게 낼 수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는 게 K센터장의 설명이다. 실제로 정부에서 빚을 탕감해 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상환능력이 있는 채무자들까지도 지갑을 닫는 등 도덕적 해이가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가운데 인터넷상에는 ‘이자 탕감받는 법’ ‘채권추심 피하는 법’ 등의 정보를 담은 사이트가 우후죽순으로 늘고 있다. 해를 넘기기 전에 한푼이라도 더 받아내려는 금융회사와 버티면 깎아줄 것이라는 ‘배짱’ 채무자들 간의 신경전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신용회복 지원 프로그램을 잘못 이해 11월3일부터 새로 시행된 자산관리공사의 신용회복 지원 프로그램은 부채상환 협약을 맺은 신용불량 고객에게 재산보유 정도에 따라 ‘최대 원금의 30%까지 감면’하는 것을 그 골자로 하고 있다. 감면 규모가 현행 20%에서 30%로 늘어났으며, 상환기간도 최장 5년에서 8년으로 늘어났다. 당초엔 원금 50%와 이자 전액을 합쳐 최대 70%까지 깎아주려던 방침이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 때문에 대폭 축소됐다. 신용불량자에 대한 이같은 지원 방침도 당사자가 부채상환에 합의하고,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에게 ‘버티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심리를 유발하고 있는 것이다.

악성 채권 1%만 회수해도 성공적 한 대금업체에서 채권상환 텔레마케터(TM)로 일하고 있는 A양은 아침 9시부터 전화를 돌리기 시작한다. 하루 5백∼6백통씩 전화를 걸지만 통화 확률은 10%에도 못 미친다. 어렵사리 전화가 연결돼도 “아침부터 왜 이래 재수없게. 돈 넣어주면 되잖아…”라며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기가 일쑤다. 이 업체는 2개월 이상 연체한 채권을 채권관리팀으로 넘긴다. 이렇게 넘어온 채권은 연체 기간에 따라 단기(30일∼60일), 중기(60∼150일), 장기(5개월∼1년)로 나누어 관리한다. 연체 기간이 1년이 넘는 채권은 직급팀으로 넘어가 채무자를 직접 만나 상환을 독촉한다. 그러나 원금 5백만원 이하의 소액 부채의 경우에도 회수율은 1∼2%에 불과하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 게다가 대금업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이미 다른 금융기관으로부터 빚 독촉을 받아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채권추심 직원을 대하는 방법이나 금융 관련 법규에도 상당한 지식이 있어 다루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고 한다.

전화는 효과 없어 직접방문 늘려 A캐피탈사의 한 지역 채권추심 영업소는 최근 총 1백20여명의 직원 중 전화로 추심 업무를 담당하는 내근 직원을 30여명에서 20명으로 대폭 줄였다. 대신 채무자를 직접 방문하는 외근직 숫자를 늘렸다. 전화로는 도무지 ‘약발’이 먹히지 않아 방문 직원 수를 늘린 것이다. 올 초만 해도 내근직과 외근직 수가 거의 같았다. 직원이 하루에 방문해야 하는 고객의 집은 15곳 이상. 그중에서 운이 좋아야 3∼4명 정도를 만날 수 있다. 그래도 전화만 하는 것보다는 효과가 좋다는 게 회사 측의 귀띔이다. 이 지역 센터를 담당하는 P씨는 “자산관리공사가 매입한 부실채권의 가격은 원금의 12.5%”라며 “원금에서 30%를 감면해 줘도 돈만 받을 수 있다면 4∼5배 정도의 고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30%를 탕감하겠다’느니 ‘50%를 탕감하겠다’느니 하는 말들이 과연 다른 금융회사에 미칠 여파를 생각하고 하는 것인지 의문스럽다”며 터뜨렸다. “채무자들이 돈을 갚을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마련해 주는 것은 좋지만 원금 자체를 삭감하는 것은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게 P씨의 주장이다. 그나마 오전 8시∼오후 9시까지로 돼 있는 현행 채권추심 시간을 7∼11시까지로 3시간 연장한 것이 채권추심 회사로서는 다행이다. 채권추심 회사나 그 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추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도 큰 부담이다. 한 카드회사 채권추심 직원 D씨의 말. “우리를 막무가내로 채무자의 안방에 드러눕거나 협박해 돈을 받아내는 해결사나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것이 속상해요.” 그의 말을 빌리면, 추심 직원들은 매일 아침 8시에 지역센터에 모여 채무자 방문시의 예절에서부터 복장까지 꼼꼼하게 점검하고 나선다. 방문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조차 금지돼 있다고 한다. 채무자를 만날 때 반드시 신분증을 목에 걸어야 하고, 명함을 건네주는 것은 기본이다. D씨는 “만일 회사로 민원이 들어오면 영업 실적에서 감점되기 때문에 철저하게 지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빚을 무조건 탕감해 주면 도덕적 해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신용불량 고객들이 장기적으로 상환할 수 있는 방안은 마련해 주되 ‘빌린 돈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원칙은 지켜야 한다는 게 채권추심 현장의 목소리다.

채권추심 직원은 몇 명이나 될까? 지난 9월29일 금융감독원이 국회 정무위원회 김윤식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00년 3천2백30명이었던 국내 카드사들의 채권추심 직원 수가 2001년 5천9백17명, 2002년 1만4천4백93명에서 2003년 6월 말 현재 2만4백78명에 달해 2년 6개월 사이에 6배나 늘어났다. 채권추심 직원 수는 LG(6천2백97명)·삼성(4천5백51명)·국민(5백94명) 순으로 많았고, 후발주자인 신한(1백21명)과 비씨(1백57명)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하지만 연체 대비 채권회수율은 해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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