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자금, 시장원리로 풀자
정치자금, 시장원리로 풀자
정치자금 문제로 온나라가 들쑤신 듯하다. 급기야 정치권은 대통령에게 권한이 집중된 것이 부패의 근원이라고 해서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까지 들고 나왔다. 대통령 측근 비리 특검 법안도 국회를 통과했다. 검찰은 정치자금의 온상(溫床)인 비자금 문제까지 수사의 칼날을 겨냥했다. 이를 위해 재벌 오너와 재무담당자 등 수십 명이 출국금지됐다. 밑바닥까지 끌로 파서 더 이상 정경유착과 부패가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참여정부의 생각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파헤치고, 엄정하게 처벌하겠다는 말이 미덥지 못한 것은 왜일까?
돌이켜보면 ‘정치자금 대형 파동’은 7~8년에 한 번꼴로 있었다. 1988년 11월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은 5공 청문회 때 증인으로 나와 폭탄선언을 했었다. “전두환의 성격이 오죽 무지막지하지 않은가”, “편안히 살기 위해 돈을 냈다”, “장래성 있는 국회의원에게 돈을 줘왔다”고 발언한 것이다. 온나라가 들썩들썩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7년 후인 1995년 11월 검찰은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줬다는 혐의로 30대 그룹 총수들을 소환조사했다. 현대 정주영 ·삼성 이건희 ·LG 구자경 ·대우 김우중 ·SK 최종현 회장 등 쟁쟁한 오너들이 불려갔고 이 가운데 8명은 법정에서 유죄가 선고됐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이런 파동이 재발하지 않도록 발본색원하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8년이 지난 요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담이 무색하게 정치자금 태풍이 또다시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수사를 지켜보면서 참담함이 앞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수사당국은 늘 “이번에야말로 뿌리뽑겠다”고 말하지만 정치자금은 언제나 뿌리뽑히지 않았다. 정부는 매번 “기업에 대한 조사는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고 강조하지만 ‘진짜’는 한 번도 없었다. 기업은 늘 “합법적인 정치자금만 줬다”고 하지만 언제나 ‘불법자금’이 훨씬 더 많았다. 정당과 국회의원은 “우리는 받은 적 없다”고 강조하지만 검찰에 소환되면 “국민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리곤 정부와 정당은 ‘정치개혁’을 외친다. 고비용 정치구조가 문제라면서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고 한다. 그래서 정치자금법이 개정되고, 정치 ·선거제도도 조금씩 바뀌지만 기본적으로 ‘돈 드는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이젠 절대로 불법적인 정치자금은 안 주겠다”고 강조하면서 경영진의 세대교체와 투자 확대를 발표하지만 그때뿐이다.
정치자금을 둘러싼 정치권과 기업 간 먹이사슬을 끊을 묘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더 큰 비극이다. 고비용 정치구조가 근본문제긴 하지만, 돈이 전혀 안 드는 정치제도란 있을 수 없다. 국회의원이건 대통령이건 당락(當落)은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에 ‘돈을 남보다 많이 써 당선되고자 하는’ 유인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기업도 이젠 많이 커져서 정부와 정치권에서 받을 수 있는 당근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에게 밉보여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정치자금을 제공할 인센티브는 분명히 있다. 게다가 모든 기업이 다 큰 것은 아니다.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지만 그래도 정부와 정치권은 줄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작은 기업들이 크기 위해서는 정치자금을 낼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정치자금을 주고 받는 측의 이해관계가 이처럼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정치자금 시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백약이 무효’다.
◇ 기업이 정치자금을 내는 방식 =“당시 골프를 치고 있었어요. 갑자기 골프장 직원이 허겁지겁 달려와 전화가 왔다며 빨리 받으라고 해요. 그래서 전화를 받으니 대검찰청이었어요. 조사할 게 있으니 빨리 들어오라는 거였어요.”95년 11월의 일이다. 이 무렵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걷어 이 돈을 각 정당에 갖다주는 일을 담당했던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회상했다.
“전경련으로 돌아와 장부를 챙겨 검찰청 담당 검사실로 갔더니 SK 최종현 회장이 앉아 있는 거에요(최 회장은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다). 앉자마자 누구에게 얼마를 갖다 줬느냐, 당시 기록을 내놔라 등 질문과 요구가 쏟아지더군요. 아는 것은 대답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답변했더니 나가 있으라더군요. 대기실로 갔더니 손길승 회장 등 SK 고위층들이 진술서를 쓰고 있었어요.”
이후 그는 한두 차례 더 검찰에 불려갔지만, 기소되지는 않았다. 최 회장과 손 회장도 기소되지 않았다. 정당으로부터 영수증을 받은 ‘합법적인 정치자금’이란 이유에서였다. 93년 김영삼(YS)정부가 출범하면서 YS가 “재임 중 정치자금은 한 푼도 안 받겠다”고 선언하기 전까지 기업들이 정당에 내는 돈은 이런 방식이었다.
“각 정당에서 ‘얼마를 달라’고 전화가 온다. 그러면 각 기업에 할당해 돈을 모았다. YS ·김대중 ·김종필 총재 등을 여러 차례 만났었다. 그들은 항상 1, 2명의 정치인들을 대동했다. 영수증도 그 자리에서 만들어줬다.”앞의 관계자 말이다. 전경련 파워가 지금보다 훨씬 셌던 데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그리고 전경련은 지난 11월 5일 ‘정치자금 개선 방안’을 발표하면서 이 점을 강조했다. “기업이 직접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것을 금지토록 하자”면서 “중앙선관위나 경제단체를 통해 정치자금을 제공하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자금 외에 각 기업이 개별적으로 갖다주는 돈도 있었다. 규모도 더 컸고, 영수증 없이 주는 ‘불법 정치자금’이었다. 그만큼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는 ‘일급 비밀’이었다. 그러나 고 정주영 회장이 92년 1월 정치 참여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나는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정치자금을 냈다”고 폭로해 일부나마 진실이 드러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박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나니 해마다 연말이 되면 양로원 ·고아원 등에 어려운 사람이 많아 돈이 필요하더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돈을 달라는 얘기는 없었지만 통치자로서 그런 돈이 필요하겠구나 싶어 돈을 줬다. 처음엔 5억원, 나중엔 10억원을 주고, 마지막엔 20억원을 줬다.”
정 회장의 말이다. 그는 또 “전두환 때도 추석에 20억원, 연말에 30억원 규모로 줬다”고 밝혔다. 그의 말대로라면 전두환 집권 7년간 정 회장은 350억원을 줬다는 얘기다. “노태우 때는 취임 첫 해엔 전 대통령 때와 같이 줬다. 그러나 좀 부족한 듯해 다음엔 50억원, 90년에 마지막으로 100억원을 줬다.” 정 회장은 노태우 시절 총 200억원을 줬다는 얘기다.
당시 정치자금을 내는 방식은 대통령에게는 각 그룹 오너가 개별적으로 ‘음성적’으로 갖다 주고, 정당에 내는 후원금은 전경련이 중간통로 역할을 하는 이중구조였다는 얘기다. 그러나 YS정부 출범 후 대통령이 정치자금을 안 받겠다고 하니, 전경련도 통로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 정당과 기업들이 1대1로 ‘거래’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히 불법과 합법자금이 서로 섞이기 시작했다. 영수증을 받고 안 받고에 따라 합법이다, 불법이다가 가려지는 셈이다.
◇ 기업들이 정치자금을 내는 이유 =“SK그룹이 계열사를 통틀어 연간 정치자금으로 낼 수 있는 한도액은 25억원 정도다. DJ정부 시절엔 여당인 민주당이 한도를 알고 연초가 되면 먼저 다 가져갔다. 야당인 한나라당에는 거의 못 줬다. 지난해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무렵엔 이상수 당시 민주당 사무총장(현 열린우리당 의원)이 찾아와 ‘당신들이 민주당에 낸 돈은 그들이 다 쓰고 우리(노 후보 측)는 한 푼도 못 쓰니 민주당에 준 만큼 달라’고 해 할 수 없이 25억원을 만들어 줬다.”
손길승 SK 회장이 최근 재계 고위관계자들에게 털어놓은 얘기다.
“다른 그룹은 정치자금을 여당 60%, 야당 40%로 나눠줬는데 우리는 그러지 않았던 것이 불찰이었다. 그러나 알고서 몽땅 달라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손 회장은 한나라당에 100억원의 대선자금을 준 배경도 설명했다.
“민주당에 주느라 한 푼도 못 준 한나라당이 어떻게 알았는지 국회의원을 보냈다. 그는 형평성 얘기를 하면서 ‘왜 우리에겐 안 주느냐’며 정치자금을 요청했다.
당시 나는 이회창 후보가 될 가능성이 상당히 큰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런 차에 이 말을 듣자 ‘아차’ 싶어 그 동안 못 준 돈을 합쳐 100억원을 줬다.”
정치권이 달라고 하니, 대가를 바란 것은 아니고 단지 밉보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어 ‘보험료’조로 돈을 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작고한 정주영 회장의 얘기도 같은 맥락이다. 처음엔 ‘통치자금이 필요하겠거니’ 싶어 줬지만, 나중엔 무지막지한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냈다는 의미다.
재계의 얘기도 일리가 있는 듯하다. 정부가 금융과 차관 등 돈줄은 물론 각종 사업 인허가권도 쥐고 있던 예전에야 기업에 줄 게 많았다. ‘정경유착’이란 말이 인구에 회자됐던 시기도 60년대 후반 ‘차관경제 시대’ 때였다. 국내 자금이 태부족이던 시절 경제를 개발하고 사업을 확장하려면 외국 돈에 의존해야 했다. 정부 인가도 받아야 하고, 지급보증도 필요하고 차관을 들여오려면 정부에 유착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대신 정부 ·여당은 허가해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했다. 사업의 타당성이나 상환능력은 뒷전이었다. 당시 외자도입 심의위원을 지냈던 한 인사는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화섬공장을 건설하는 데 필요하다며 외자도입 인가를 신청한 기업이 두 군데 있었다. 한 기업은 280만 달러, 다른 기업은 800만 달러를 요청했다. 시설용량이나 조건에는 별 차이가 없어 280만 달러를 신청한 기업에 인가가 떨어져야 하는데 실제론 800만 달러 기업에 인가가 떨어졌다. 800만 달러를 신청한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더 많이 받아낼 수 있기 때문인 듯했다.”(김입삼 著, ‘초근목피에서 선진국으로의 증언’에서)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고 재계에선 주장한다. 전경련은 지난 10월 30일 회장단 간담회에서 정치자금 문제에 대해 “고도성장 과정에서 잉태된 기업의 부실처리와 고비용 정치구조로 인해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대가성 자금은 아니었다는 지적이다. 95년 말 30대 재벌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을 때도 같은 주장을 했다. 당시 전경련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과거의 관행이었다’고 강조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권위에 눌려 돈을 줬으며, 자신들도 피해자란 지적이었다.
40년 전에도 재계는 똑같은 주장을 했다. 당시 전경련 2대 회장이었던 이정림 개풍그룹 회장은 “경제인은 돈을 낼 생각이 있다”면서 “그러나 돈을 주고서도 뺨 맞고 교도소에 가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보험료’뿐일까. 전두환 씨는 정주영 회장과 전혀 다른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퇴임하기 직전인 87년 봄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통령이 되니 재벌들이 돈을 막 싸가지고 오는데 너무나 놀랐다. 심지어 100억원을 가져왔다. 그래서 나는 ‘당신네 기업이 지금 어려운데 어떻게 이런 돈을 가져오느냐’고 말했던 적도 있었다.”
95년 검찰은 오너들을 조사한 후 ‘뇌물공여죄’를 걸어 기소했다. 입찰에서 낙찰받기 위해, 땅을 수의계약으로 사들이기 위해, 형제간 재산분쟁 소문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리고 환경오염에 따른 사회적 파문을 줄이기 위해 정치자금을 냈다는 혐의였다. 이번 수사에서도 기업인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이런 ‘과거’ 때문이다.
◇ 과거보다는 한결 나아졌다 =“재임 기간 중 주로 기업인들로부터 성금을 받아 5,000억원을 조성했다. 이 중 대부분을 쓰고, 남은 통치자금은 퇴임 당시 1,700억원이었다.”
정치자금 파문이 거세게 일자 YS정부 시절인 95년 10월 하순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기업들이 노태우 씨에게 준 돈은 이처럼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검찰 기소장에 따르면 대기업들은 추석과 연말 등 1년에 두 차례 각각 20억~30억원씩 줬다. 정태수 한보 전 회장은 90년 당시 서울 수서택지를 수의계약으로 특혜 분양해달라면서 100억원을, 김우중 대우 회장은 건설공사를 수주한 답례로 역시 100억원을 줬다고 검찰은 밝혔다. 노태우 씨도 대통령 시절, 각 기업에 전화를 걸어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자금을 안 내거나 잘못 줬다는 이유로 망한 그룹들도 과거엔 많았다. 10대 재벌 중 하나였던 국제그룹이 80년대, 전남에 본거지를 두면서 진로와 함께 소주업계 1위를 다퉜던 삼학주조가 70년대, 한때 10대 재벌로 군림했던 동립산업과 한국생사그룹이 모두 60년대 망한 것은 정치자금 문제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우선 돈의 액수가 줄어들었다. 1995년에 밝혀진 돈은 대통령에게만 준 돈이다. 정당이나 국회의원에게 준 돈은 제외된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DJ정부 시절 5년간 정치권에 가장 돈을 많이 준 기업은 SK인데 모두 250억원 정도다.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많이 준 액수였다.
게다가 대통령에게 직접 준 돈은 없는 셈이다. 수사가 진행 중이라 단정하긴 힘들지만, YS나 DJ ·노무현 대통령이 기업으로부터 직접 돈을 받은 것은 아니다. 전두환 ·노태우씨처럼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지도 않은 것 같다. 지난 10년 사이 돈을 안 냈다고 해서 망했다고 주장하는 기업도 없다.
“보험성인지 대가성인지는 기업 입장에선 중요하지 않다.
다만 정치권에서 달라고 하면 안 줄 수 없는 우리의 정치 ·사회구조가 문제다.” 재계 고위관계자의 항변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전통은 여전하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사실 국내 정치현실상 돈을 안 쓰고는 정치를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돈을 많이 보유한 곳은 기업밖에 없다. 그러니 정치권은 기업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고, 기업은 안 줄 수가 없다는 얘기다.
다른 재계 고위관계자는 “전경련에서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을 신임 회장대행으로 선출한 것은 정말 잘했다”며 “전경련이 이른바 ‘빅3’ 그룹이나 10대 재벌그룹의 오너 가운데에서 회장을 뽑았다면 ‘제2, 제3의 손길승 회장’이 나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10대 그룹치고 아마 정치자금에 연루되지 않은 곳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재계 관계자들은 어느 그룹이든 ‘아킬레스 건’을 한 가지 이상 갖고 있지 않은 그룹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상속 과정에서의 불법성이나 오너 ·그룹 간 부당내부거래, 비자금 조성과 사용과정에서의 불법성 등이 약점이라고 지적한다. 검찰이 이런 부분에 대해 본격적으로 손을 댄다면 정치자금 이상의 폭발력을 가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최근 수사당국이 이런 부분에 대해 ‘수사 착수 가능성’을 흘리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결국 정치자금 파문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하려면 정치자금 시장을 없애는 길밖에 없다. 정치자금의 수요자인 정치인 또는 공급자인 기업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시장에서 몰아내는 길이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하다. 정치인과 기업인이 없는 나라는 상상할 수가 없다.
게다가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정치자금이 아니라 ‘부정하고 불법적인’ 정치자금이다. 오히려 시장의 규모를 줄이는 게 현재의 여건상 최선책이다. 정치인의 자금 수요를 줄이는 게 가장 급선무다. 선거자금을 국가에서 몽땅 대주는 완전 선거공영제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지역구 국회의원제를 없애는 것도 방법이다. 대신 각 정당이 득표 수에 따라 미리 후보로 뽑아놓은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선출하는 시스템으로 바꾸자는 얘기다. 국회의원 수를 대폭 줄이는 것도 생각해봄 직하다. 숫자가 줄면 정치자금 규모도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정치자금 시장을 유리알처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투명성을 강화하자는 주장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얼마가 들든 좋다. 한도를 지금보다 더 올리더라도 낼 수 있다. 그러나 철저히 투명하게 하자. 영수증은 얼마가 되더라도 다 끊어주고, 받는 즉시 이를 인터넷이든 신문이든 공시하도록 하자”고 말한다. 최소한 돈주고 뺨맞고 교도소 가는 일은 없도록 해달라는 얘기다.
기업처럼 정당에도 감사위원회 등을 두고, 공인회계사의 감사를 받도록 하자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이런 방법으로도 부정한 정치자금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 것이다. 정당보다 훨씬 투명하고 지배구조가 잘 짜여진 기업에서도 ‘10억원 투자해 100억원을 벌 수 있다면 나중에 어찌되더라도 당장은 ‘부정과 불법’을 저지르기 쉽다. 정당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이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이웃 나라 일본만 해도 여전히 기업의 정치헌금 문제로 정 ·재계가 고민하고 있다. 과거보다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것, 이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자위한다면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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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정치자금 대형 파동’은 7~8년에 한 번꼴로 있었다. 1988년 11월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은 5공 청문회 때 증인으로 나와 폭탄선언을 했었다. “전두환의 성격이 오죽 무지막지하지 않은가”, “편안히 살기 위해 돈을 냈다”, “장래성 있는 국회의원에게 돈을 줘왔다”고 발언한 것이다. 온나라가 들썩들썩했다.
그로부터 정확히 7년 후인 1995년 11월 검찰은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줬다는 혐의로 30대 그룹 총수들을 소환조사했다. 현대 정주영 ·삼성 이건희 ·LG 구자경 ·대우 김우중 ·SK 최종현 회장 등 쟁쟁한 오너들이 불려갔고 이 가운데 8명은 법정에서 유죄가 선고됐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이런 파동이 재발하지 않도록 발본색원하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8년이 지난 요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담이 무색하게 정치자금 태풍이 또다시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수사를 지켜보면서 참담함이 앞서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수사당국은 늘 “이번에야말로 뿌리뽑겠다”고 말하지만 정치자금은 언제나 뿌리뽑히지 않았다. 정부는 매번 “기업에 대한 조사는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고 강조하지만 ‘진짜’는 한 번도 없었다. 기업은 늘 “합법적인 정치자금만 줬다”고 하지만 언제나 ‘불법자금’이 훨씬 더 많았다. 정당과 국회의원은 “우리는 받은 적 없다”고 강조하지만 검찰에 소환되면 “국민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한다.
그리곤 정부와 정당은 ‘정치개혁’을 외친다. 고비용 정치구조가 문제라면서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고 한다. 그래서 정치자금법이 개정되고, 정치 ·선거제도도 조금씩 바뀌지만 기본적으로 ‘돈 드는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이젠 절대로 불법적인 정치자금은 안 주겠다”고 강조하면서 경영진의 세대교체와 투자 확대를 발표하지만 그때뿐이다.
정치자금을 둘러싼 정치권과 기업 간 먹이사슬을 끊을 묘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더 큰 비극이다. 고비용 정치구조가 근본문제긴 하지만, 돈이 전혀 안 드는 정치제도란 있을 수 없다. 국회의원이건 대통령이건 당락(當落)은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에 ‘돈을 남보다 많이 써 당선되고자 하는’ 유인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기업도 이젠 많이 커져서 정부와 정치권에서 받을 수 있는 당근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에게 밉보여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정치자금을 제공할 인센티브는 분명히 있다. 게다가 모든 기업이 다 큰 것은 아니다.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지만 그래도 정부와 정치권은 줄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작은 기업들이 크기 위해서는 정치자금을 낼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정치자금을 주고 받는 측의 이해관계가 이처럼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정치자금 시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백약이 무효’다.
◇ 기업이 정치자금을 내는 방식 =“당시 골프를 치고 있었어요. 갑자기 골프장 직원이 허겁지겁 달려와 전화가 왔다며 빨리 받으라고 해요. 그래서 전화를 받으니 대검찰청이었어요. 조사할 게 있으니 빨리 들어오라는 거였어요.”95년 11월의 일이다. 이 무렵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걷어 이 돈을 각 정당에 갖다주는 일을 담당했던 전경련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회상했다.
“전경련으로 돌아와 장부를 챙겨 검찰청 담당 검사실로 갔더니 SK 최종현 회장이 앉아 있는 거에요(최 회장은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다). 앉자마자 누구에게 얼마를 갖다 줬느냐, 당시 기록을 내놔라 등 질문과 요구가 쏟아지더군요. 아는 것은 대답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답변했더니 나가 있으라더군요. 대기실로 갔더니 손길승 회장 등 SK 고위층들이 진술서를 쓰고 있었어요.”
이후 그는 한두 차례 더 검찰에 불려갔지만, 기소되지는 않았다. 최 회장과 손 회장도 기소되지 않았다. 정당으로부터 영수증을 받은 ‘합법적인 정치자금’이란 이유에서였다. 93년 김영삼(YS)정부가 출범하면서 YS가 “재임 중 정치자금은 한 푼도 안 받겠다”고 선언하기 전까지 기업들이 정당에 내는 돈은 이런 방식이었다.
“각 정당에서 ‘얼마를 달라’고 전화가 온다. 그러면 각 기업에 할당해 돈을 모았다. YS ·김대중 ·김종필 총재 등을 여러 차례 만났었다. 그들은 항상 1, 2명의 정치인들을 대동했다. 영수증도 그 자리에서 만들어줬다.”앞의 관계자 말이다. 전경련 파워가 지금보다 훨씬 셌던 데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그리고 전경련은 지난 11월 5일 ‘정치자금 개선 방안’을 발표하면서 이 점을 강조했다. “기업이 직접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것을 금지토록 하자”면서 “중앙선관위나 경제단체를 통해 정치자금을 제공하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자금 외에 각 기업이 개별적으로 갖다주는 돈도 있었다. 규모도 더 컸고, 영수증 없이 주는 ‘불법 정치자금’이었다. 그만큼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는 ‘일급 비밀’이었다. 그러나 고 정주영 회장이 92년 1월 정치 참여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나는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정치자금을 냈다”고 폭로해 일부나마 진실이 드러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는 “박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고 나니 해마다 연말이 되면 양로원 ·고아원 등에 어려운 사람이 많아 돈이 필요하더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돈을 달라는 얘기는 없었지만 통치자로서 그런 돈이 필요하겠구나 싶어 돈을 줬다. 처음엔 5억원, 나중엔 10억원을 주고, 마지막엔 20억원을 줬다.”
정 회장의 말이다. 그는 또 “전두환 때도 추석에 20억원, 연말에 30억원 규모로 줬다”고 밝혔다. 그의 말대로라면 전두환 집권 7년간 정 회장은 350억원을 줬다는 얘기다. “노태우 때는 취임 첫 해엔 전 대통령 때와 같이 줬다. 그러나 좀 부족한 듯해 다음엔 50억원, 90년에 마지막으로 100억원을 줬다.” 정 회장은 노태우 시절 총 200억원을 줬다는 얘기다.
당시 정치자금을 내는 방식은 대통령에게는 각 그룹 오너가 개별적으로 ‘음성적’으로 갖다 주고, 정당에 내는 후원금은 전경련이 중간통로 역할을 하는 이중구조였다는 얘기다. 그러나 YS정부 출범 후 대통령이 정치자금을 안 받겠다고 하니, 전경련도 통로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 정당과 기업들이 1대1로 ‘거래’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히 불법과 합법자금이 서로 섞이기 시작했다. 영수증을 받고 안 받고에 따라 합법이다, 불법이다가 가려지는 셈이다.
◇ 기업들이 정치자금을 내는 이유 =“SK그룹이 계열사를 통틀어 연간 정치자금으로 낼 수 있는 한도액은 25억원 정도다. DJ정부 시절엔 여당인 민주당이 한도를 알고 연초가 되면 먼저 다 가져갔다. 야당인 한나라당에는 거의 못 줬다. 지난해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무렵엔 이상수 당시 민주당 사무총장(현 열린우리당 의원)이 찾아와 ‘당신들이 민주당에 낸 돈은 그들이 다 쓰고 우리(노 후보 측)는 한 푼도 못 쓰니 민주당에 준 만큼 달라’고 해 할 수 없이 25억원을 만들어 줬다.”
손길승 SK 회장이 최근 재계 고위관계자들에게 털어놓은 얘기다.
“다른 그룹은 정치자금을 여당 60%, 야당 40%로 나눠줬는데 우리는 그러지 않았던 것이 불찰이었다. 그러나 알고서 몽땅 달라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
손 회장은 한나라당에 100억원의 대선자금을 준 배경도 설명했다.
“민주당에 주느라 한 푼도 못 준 한나라당이 어떻게 알았는지 국회의원을 보냈다. 그는 형평성 얘기를 하면서 ‘왜 우리에겐 안 주느냐’며 정치자금을 요청했다.
당시 나는 이회창 후보가 될 가능성이 상당히 큰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런 차에 이 말을 듣자 ‘아차’ 싶어 그 동안 못 준 돈을 합쳐 100억원을 줬다.”
정치권이 달라고 하니, 대가를 바란 것은 아니고 단지 밉보여서 좋을 게 하나도 없어 ‘보험료’조로 돈을 줄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작고한 정주영 회장의 얘기도 같은 맥락이다. 처음엔 ‘통치자금이 필요하겠거니’ 싶어 줬지만, 나중엔 무지막지한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냈다는 의미다.
재계의 얘기도 일리가 있는 듯하다. 정부가 금융과 차관 등 돈줄은 물론 각종 사업 인허가권도 쥐고 있던 예전에야 기업에 줄 게 많았다. ‘정경유착’이란 말이 인구에 회자됐던 시기도 60년대 후반 ‘차관경제 시대’ 때였다. 국내 자금이 태부족이던 시절 경제를 개발하고 사업을 확장하려면 외국 돈에 의존해야 했다. 정부 인가도 받아야 하고, 지급보증도 필요하고 차관을 들여오려면 정부에 유착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대신 정부 ·여당은 허가해주는 대가로 돈을 요구했다. 사업의 타당성이나 상환능력은 뒷전이었다. 당시 외자도입 심의위원을 지냈던 한 인사는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화섬공장을 건설하는 데 필요하다며 외자도입 인가를 신청한 기업이 두 군데 있었다. 한 기업은 280만 달러, 다른 기업은 800만 달러를 요청했다. 시설용량이나 조건에는 별 차이가 없어 280만 달러를 신청한 기업에 인가가 떨어져야 하는데 실제론 800만 달러 기업에 인가가 떨어졌다. 800만 달러를 신청한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더 많이 받아낼 수 있기 때문인 듯했다.”(김입삼 著, ‘초근목피에서 선진국으로의 증언’에서)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고 재계에선 주장한다. 전경련은 지난 10월 30일 회장단 간담회에서 정치자금 문제에 대해 “고도성장 과정에서 잉태된 기업의 부실처리와 고비용 정치구조로 인해 불가피했다”고 주장했다. 대가성 자금은 아니었다는 지적이다. 95년 말 30대 재벌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을 때도 같은 주장을 했다. 당시 전경련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과거의 관행이었다’고 강조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권위에 눌려 돈을 줬으며, 자신들도 피해자란 지적이었다.
40년 전에도 재계는 똑같은 주장을 했다. 당시 전경련 2대 회장이었던 이정림 개풍그룹 회장은 “경제인은 돈을 낼 생각이 있다”면서 “그러나 돈을 주고서도 뺨 맞고 교도소에 가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보험료’뿐일까. 전두환 씨는 정주영 회장과 전혀 다른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퇴임하기 직전인 87년 봄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통령이 되니 재벌들이 돈을 막 싸가지고 오는데 너무나 놀랐다. 심지어 100억원을 가져왔다. 그래서 나는 ‘당신네 기업이 지금 어려운데 어떻게 이런 돈을 가져오느냐’고 말했던 적도 있었다.”
95년 검찰은 오너들을 조사한 후 ‘뇌물공여죄’를 걸어 기소했다. 입찰에서 낙찰받기 위해, 땅을 수의계약으로 사들이기 위해, 형제간 재산분쟁 소문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리고 환경오염에 따른 사회적 파문을 줄이기 위해 정치자금을 냈다는 혐의였다. 이번 수사에서도 기업인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이런 ‘과거’ 때문이다.
◇ 과거보다는 한결 나아졌다 =“재임 기간 중 주로 기업인들로부터 성금을 받아 5,000억원을 조성했다. 이 중 대부분을 쓰고, 남은 통치자금은 퇴임 당시 1,700억원이었다.”
정치자금 파문이 거세게 일자 YS정부 시절인 95년 10월 하순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기업들이 노태우 씨에게 준 돈은 이처럼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검찰 기소장에 따르면 대기업들은 추석과 연말 등 1년에 두 차례 각각 20억~30억원씩 줬다. 정태수 한보 전 회장은 90년 당시 서울 수서택지를 수의계약으로 특혜 분양해달라면서 100억원을, 김우중 대우 회장은 건설공사를 수주한 답례로 역시 100억원을 줬다고 검찰은 밝혔다. 노태우 씨도 대통령 시절, 각 기업에 전화를 걸어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자금을 안 내거나 잘못 줬다는 이유로 망한 그룹들도 과거엔 많았다. 10대 재벌 중 하나였던 국제그룹이 80년대, 전남에 본거지를 두면서 진로와 함께 소주업계 1위를 다퉜던 삼학주조가 70년대, 한때 10대 재벌로 군림했던 동립산업과 한국생사그룹이 모두 60년대 망한 것은 정치자금 문제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 우선 돈의 액수가 줄어들었다. 1995년에 밝혀진 돈은 대통령에게만 준 돈이다. 정당이나 국회의원에게 준 돈은 제외된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DJ정부 시절 5년간 정치권에 가장 돈을 많이 준 기업은 SK인데 모두 250억원 정도다.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많이 준 액수였다.
게다가 대통령에게 직접 준 돈은 없는 셈이다. 수사가 진행 중이라 단정하긴 힘들지만, YS나 DJ ·노무현 대통령이 기업으로부터 직접 돈을 받은 것은 아니다. 전두환 ·노태우씨처럼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지도 않은 것 같다. 지난 10년 사이 돈을 안 냈다고 해서 망했다고 주장하는 기업도 없다.
“보험성인지 대가성인지는 기업 입장에선 중요하지 않다.
다만 정치권에서 달라고 하면 안 줄 수 없는 우리의 정치 ·사회구조가 문제다.” 재계 고위관계자의 항변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전통은 여전하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사실 국내 정치현실상 돈을 안 쓰고는 정치를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돈을 많이 보유한 곳은 기업밖에 없다. 그러니 정치권은 기업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고, 기업은 안 줄 수가 없다는 얘기다.
다른 재계 고위관계자는 “전경련에서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을 신임 회장대행으로 선출한 것은 정말 잘했다”며 “전경련이 이른바 ‘빅3’ 그룹이나 10대 재벌그룹의 오너 가운데에서 회장을 뽑았다면 ‘제2, 제3의 손길승 회장’이 나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10대 그룹치고 아마 정치자금에 연루되지 않은 곳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재계 관계자들은 어느 그룹이든 ‘아킬레스 건’을 한 가지 이상 갖고 있지 않은 그룹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상속 과정에서의 불법성이나 오너 ·그룹 간 부당내부거래, 비자금 조성과 사용과정에서의 불법성 등이 약점이라고 지적한다. 검찰이 이런 부분에 대해 본격적으로 손을 댄다면 정치자금 이상의 폭발력을 가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최근 수사당국이 이런 부분에 대해 ‘수사 착수 가능성’을 흘리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결국 정치자금 파문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도록 하려면 정치자금 시장을 없애는 길밖에 없다. 정치자금의 수요자인 정치인 또는 공급자인 기업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시장에서 몰아내는 길이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하다. 정치인과 기업인이 없는 나라는 상상할 수가 없다.
게다가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정치자금이 아니라 ‘부정하고 불법적인’ 정치자금이다. 오히려 시장의 규모를 줄이는 게 현재의 여건상 최선책이다. 정치인의 자금 수요를 줄이는 게 가장 급선무다. 선거자금을 국가에서 몽땅 대주는 완전 선거공영제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지역구 국회의원제를 없애는 것도 방법이다. 대신 각 정당이 득표 수에 따라 미리 후보로 뽑아놓은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선출하는 시스템으로 바꾸자는 얘기다. 국회의원 수를 대폭 줄이는 것도 생각해봄 직하다. 숫자가 줄면 정치자금 규모도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정치자금 시장을 유리알처럼 들여다볼 수 있도록 투명성을 강화하자는 주장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얼마가 들든 좋다. 한도를 지금보다 더 올리더라도 낼 수 있다. 그러나 철저히 투명하게 하자. 영수증은 얼마가 되더라도 다 끊어주고, 받는 즉시 이를 인터넷이든 신문이든 공시하도록 하자”고 말한다. 최소한 돈주고 뺨맞고 교도소 가는 일은 없도록 해달라는 얘기다.
기업처럼 정당에도 감사위원회 등을 두고, 공인회계사의 감사를 받도록 하자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이런 방법으로도 부정한 정치자금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할 것이다. 정당보다 훨씬 투명하고 지배구조가 잘 짜여진 기업에서도 ‘10억원 투자해 100억원을 벌 수 있다면 나중에 어찌되더라도 당장은 ‘부정과 불법’을 저지르기 쉽다. 정당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이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이웃 나라 일본만 해도 여전히 기업의 정치헌금 문제로 정 ·재계가 고민하고 있다. 과거보다 점차 나아지고 있다는 것, 이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자위한다면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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