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 후폭풍’ 몰아친다
‘김선일 후폭풍’ 몰아친다
고 김선일씨가 피랍된 것으로 추정되는 5월 31일 김천호 가나무역 사장이 곧바로 현지 대사관에 신고했다면? 김선일씨 비디오테이프를 입수한 미국 언론사 APTN이 6월 3일 한국 외교통상부에 김씨의 피랍 여부를 문의했을 때 곧바로 조사를 실시했다면?
피랍 기간 20여일 동안 정부가 단 한차례만이라도 교민들 개개인에 대한 안위 점검을 했다면? 정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해 납치 상황을 사전에 인지할 수 있었다면? 아니 무장단체가 제시한 데드라인 24시간을 앞두고 한국 정부가 서툴게 파병 방침을 강조만 하지 않았다면? 이중 한가지라도 제대로 됐다면 김선일씨는 싸늘한 주검이 아닌 채 환한 안도의 웃음을 머금고 살아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을 지도 모른다.
현재 한국 국민들은 처참하게 살해된 김씨에 대한 충격과 자국민을 죽음으로 내몬 정부에 대한 분노로 떨고 있다. 한마디로 김씨 피살 사건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허술한 참여정부 외교·안보라인의 총체적 위기 상황을 가감 없이 드러낸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을 전적으로 외교부 책임으로 돌리는 것만으로는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외교부는 말 그대로 외교·안보라인에서 얼굴 역할을 하는 부처이고, 실질적으로 외교·안보정책을 통합 조정하며 정보를 취합하고 위기 관리를 하는 곳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이며, 정보 취득과 공작을 담당하는 곳은 국가정보원이다. 청와대와 정치권에서 이번 사태의 책임을 외교부뿐 아니라 NSC와 국정원 책임자들에게 강하게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최재천 의원은 “이번 사건은 공개된 정보를 취급하는 외교부보다는 NSC와 국정원의 책임이 훨씬 크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여권 관계자도 “이번 감사원 조사의 핵심은 외교·안보라인 정보체계에 대한 총체적 점검과 체계적 정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경제·사법 개혁만큼은 확고한 신념을 갖고 추진하지만 외교·안보 문제에는 자신감이 덜한 것 같다는 게 노대통령을 보좌하는 관계자들의 얘기다. 자신없는 분야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노대통령의 성향상 외교·안보 문제만큼은 NSC 시스템에 일임해 놓은 측면이 강했다. 국정원으로부터 직보를 받던 관례도 깨고 모든 것을 NSC를 통해 보고받았으며,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교·안보 현안에 관한 한 NSC의 영향력과 통제력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노대통령은 지난해 6월 NSC 위기관리센터 개소식에서 “대통령과 정부의 주요 책무인 국가 위기 관리의 대상에는 ‘포괄안보’ 개념에 의해 전쟁 등 군사적 충돌뿐 아니라 대형 재난재해, 국가 기능 마비 등 다양한 위기 유형들이 있는데 이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예방과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여 전반적인 국가 위기 관리 능력을 제고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NSC 중심의 위기 관리 시스템을 규정한 것이다. 또 최근 NSC가 자랑스럽게 내놓은 ‘참여정부의 안보정책 구상- 평화번영과 국가안보’ 책자에도 “참여정부는 증대된 국가 위기 관리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그동안 정부 부처·기관이 산발적으로 운용해 오던 위기 관리체계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비·개선해 왔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이 책자에는 NSC가 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첫째 위기 영역별 전담 조직 및 의사 결정체계의 지속적인 정비와 유관 부처·기관간 유기적 협조체제를 통한 역량 강화, 둘째 국가 위기 관리 활동 방향과 기준을 제시하는 각종 규범 정비를 통한 체계적 위기 관리 활동, 셋째 정부 각 부처의 위기 관리 업무에 대한 미비점을 지속적으로 발굴·개선해 부처별 위기 관리 업무 능력 향상, 넷째 새로운 위협 요인에 대한 신속하고 효율적인 대응체계를 구축하여 국가 위기 관리상의 공백을 방지하겠다”고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김선일씨 피살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NSC가 위 네가지 사항 중 무엇을 시행했는지 궁금하다.
NSC 상임위는 지난 4월 한국인 7명이 억류되었다가 석방된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교민 안전을 위해 ‘일일 점검체제’를 더욱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이라크 내 납치 및 테러 위협을 감안하여 재외 국민 보호 매뉴얼 대응체계에 따라 만전을 기해 대비키로 하고, 이라크 외교부·연합군 임시행정처와 유사시 신속하고 긴밀히 협력하는 체제를 구축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테러 위협에 대비해 이라크 교민들에 대해 일일 점검을 해왔다면 도대체 왜 김씨 피랍 사실을 3주 동안이나 알지 못했을까. 납치 및 테러 위협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겠다는 것은 모두 허망한 수사(修辭) 에 불과했던 것일까.
NSC를 주축으로 하는 외교·안보라인의 대응은 위에서 공언했던 것과 같은 사전 대비는 물론이고 사건 발생 직후에도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안일했다. NSC·외교부 등은 김선일씨 석방과 관련해 6월 22일 대통령에게 “현지 언론 보도 및 현지 공관과 연락을 취해본 결과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때 김씨는 이미 차가운 시신이 돼 타국 길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국가의 최고 정보라인이 내놓은 전망이라는 것이 고작 자신들의 희망 사항에 불과했던 것이다. 정부의 이러한 허술한 정보체계와 안일한 대응 방식은 국회에서도 질타를 받았다. 한나라당의 맹형규 의원은 6월 24일 열린 국회 김씨 피살사건 긴급 현안 질의에서 “이러한 사태가 벌어졌을 때 제대로 맥을 찾아 처리하지 못하고 엉뚱한 사람들을 만나 헛소리나 듣고 앉아 있다는 얘기 아니냐”고 비난했다.
NSC는 김씨가 피살당할 것을 예견이라도 했던 것인지 6월 22일 열린우리당과의 간담회에서 김씨가 참수당한 이후의 대책을 보고했다가 의원들의 호된 질책을 듣기도 했다. 서훈 NSC 정보관리실장은 이날 국회에서 “김씨의 조속한 석방을 위해 가능한 모든 채널을 확보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라크 무장단체와의 직접 채널은 확보하지 못했다”며 김씨가 참수당할 경우 정부의 보상 대책과 시신 운송 방안 등을 공개했었다. 이에 의원들은 “정부가 최선을 다해 자국민을 구해낼 궁리는 안하고 참수당할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준비하느냐”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로 보면 어쩌면 NSC를 비롯한 외교·안보라인은 자신들의 무능을 처음부터 인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정부는 단 한차례도 김씨를 납치했던 무장단체와 직접이든 간접이든 협상을 하지 못했다.
뉴스위크 한국판 취재 결과 김씨 피랍 기간 중 한국 정부가 한 협상이라고는 고작 임홍재 주이라크 대사가 팔루자의 한 이슬람 성직자를 면담한 것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때 이 이슬람 성직자는 “한국은 평화·재건이 아닌 미국을 돕기 위해 온 것이다. 이라크인에게 한국은 적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가 한 일이라고는 대책회의를 열고 담화문을 작성한 것이 고작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한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테러범들이 김씨 살해 협박을 하는 와중에 열린 대책회의에서 한 고위 관료가 담화문에 “테러리스트를 강력히 응징하겠다”는 취지의 말을 넣어야 한다는 섬뜩한 주장까지 했다고 한다. 김씨 피살 사건은 현행 NSC 중심의 외교·안보체제의 문제점이 가장 극단적이고 처참한 방식으로 드러난 사건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외교·안보 시스템을 진두지휘하는 NSC는 김씨 피살 직후에도 외교부로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에만 급급했던 것 같다.
심지어 NSC는 외교부에 대한 진상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노대통령은 민정수석실을 통해 NSC를 포함한 외교·안보라인에 대한 포괄적인 조사 실시를 명령했고, 좀 더 총체적인 조사를 위해 감사원으로 조사권을 이양했다”고 말했다. 국회에서도 6월 25일 국정조사를 하기로 여야가 합의하고 특위를 구성했다. 특히 한나라당은 NSC·국정원의 문제점 및 사건 축소 은폐 의혹을 집중 부각할 계획이다. 한나라당은 “총괄 기능을 갖는 NSC가 이런 중대한 사안에 대한 책임을 온통 외교부와 국정원으로 떠넘기고 있는데도 노대통령은 이종석 사무차장을 감싸고 있다”고 비난했다.
국정원 역시 정보 수집 활동과 한국 교민 및 파병군 보호를 위한 이라크 내 안정화 공작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NSC·외교부와 함께 커다란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다. 김씨와 함께 납치됐던 이라크인 운전사는 6월 3일 풀려났다. 그리고 김천호 사장은 김씨를 납치한 강도단체와 몸값을 깎기 위해 협상을 벌이다가 결국 결렬됐고, 이 단체는 알- 자르카위가 이끄는 ‘유일신과 성전’이라는 테러단체에 김씨를 넘긴 것이라는 충격적 진술도 이라크 현지 관계자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참여연대는 6월 25일 논평을 내고 “상황을 보면 국정원이 정보 수집 활동에 실패한 것임이 분명하다”며 “많은 국민들은 국정원의 조직적인 은폐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규모 추가 파병에 앞서 국정원은 이라크 현지에 충분한 요원을 파견해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한 정보 관계자는 “키르쿠크 지역이 자이툰 부대의 유력한 파병지로 언급될 때 국정원은 이 지역에 요원들을 파견해 민사심리작전을 폈었다”고 말했다. 이 요원들은 마을 공동체의 부족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 키르쿠크 안정화를 위한 공작을 펼쳤다.
그러나 파병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주둔 지역이 변경되면서 이 요원들은 철수했다.
이 정보 관계자는 “이라크 전역에 대한 공작이 필요했는데 바그다드 지역조차 하지 않았다”면서 “현지 정보원을 확보하는 데에도 게을리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도 “외교부는 임시정부를 상대하는 기관이고, 위험 지대는 외교관이 아닌 국방부와 국정원 전문 요원들이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라면서 “일반 민사작전이나 파병·테러 관련 부문은 국방부나 국정원이 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독자 정보가 없다 보니 파병을 비롯한 모든 결정을 할 때 전적으로 미국측 정보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외교부의 책임이 가벼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본부나 현지 공관에 아랍권에 정통한 전문가가 거의 전무했고, 이라크에 파견된 5명의 외교관 중 아랍어를 구사할 수 있는 외교관은 단 한명뿐이었을 정도로 이라크에 대해 소홀했다. 그나마 현지에 급파한 정부 고위 협상단 단장도 아랍권에 대해 경험이 전무한 장재룡 대사를 보냈다. 이는 모두 외교부의 현 시스템에서 비롯된다. 외교부는 민간 컨설팅 업체에 의뢰해 실시한 외교부 현상 진단 결과 조직 구조, 인력 자질, 인력 운용, 업무 시스템, 조직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최하위 그룹으로 분류돼 ‘말기 암 환자’라는 진단을 받을 정도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부처였다(뉴스위크 한국판 6월 23일자 참조).
많은 외교·안보 관련 전문가들과 컨설팅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내부의 잘못된 인사관행과 비효율적 시스템이 급기야 자국민을 죽음으로 내모는 비극적인 상황을 만들고 만 것이다. 전문성을 살리지 않는 잦은 순환근무체제와 전문가 영입을 가로막는 경직된 채용 방식은 아랍권과 같은 특정 지역 전문가 양성에 실패했다. 더군다나 이라크나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 국가는 인사권자의 눈 밖에 나거나 내부고발 등을 통해 ‘왕따’를 받는 직원이 유배되는 기피 지역으로 취급받아온 게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71명의 교민이 주재하고 있고 서희·제마 부대가 이미 파병돼 있으며 조만간 추가 파병이 이뤄질지도 모르는 중요 지역인 이라크에 현지 정보원과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근본 문제를 떠나 사건 발생 후 대응에서도 외교부는 엄청난 실기를 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외교부는 협상 주체, 협상 목표와 전략, 협상을 위한 정확한 정보 그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이 없었던 것 같다. 반기문 장관은 “피랍된 김씨의 석방을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루트를 가동했으며 다각적인 노력과 함께 전력투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김씨를 살해한 ‘알 타후히드 왈 지하드’(유일신과 성전)라는 테러단체와는 단 한차례도 접촉하지 못했고, 간접적으로라도 협상을 시도한 증거가 없다.
김씨 피랍 사실이 밝혀진 직후 무장단체가 파병 철회를 요구하는 가운데 “이라크 파병 방침 불변”을 재차 강조한 것도 커다란 실수였다. 경호업체 NKTS의 현지 파트너인 무하마드 알-오베이디는 6월 23일 한 방송 인터뷰에서 “무장세력이 하는 말은 언론을 통해 이라크에 추가 파병하겠다는 선언을 멈추라는 것”이었다면서 “우선적으로 그런 선언을 멈춰야 하고 그런 다음에야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같은 날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도 “납치범들은 한국 정부가 공격적인 발언을 중단하고 군대 파병에 대해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 한 협상할 의지가 있었다”고도 말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씨가 무장세력에 인질로 잡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시점에서 정부가 파병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한 것이 사태를 극단적으로 악화시킨 셈이다.
청와대와 정치권에서도 외교·안보라인의 총체적 인적 쇄신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또 NSC를 중심으로 한 시스템과 정보라인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점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성난 민심을 달래고 국민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총리 인사와 함께 곧바로 인적 쇄신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청와대는 인적 쇄신에 대한 시기를 조절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국가 위기 상태에서 대대적 인적 쇄신을 할 경우 안정을 해치고 테러 위험성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우선 안정화를 통해 사태를 수습하고, 감사원 결과를 보고받은 후 그 결과에 따라 문책을 하는 것이 파장을 최소화하는 올바른 절차인 것 같다”고 말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로부터 조사권을 이양받은 감사원은 6월 25일부터 2주간 감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조사 대상에는 외교부와 국방부·국정원·NSC가 포함되며 외교·안보라인의 정보체계와 공조 시스템 전반에 대해 총체적인 조사를 할 계획이다. 이번 조사를 위해 감사원은 이라크 현지에 직원들을 파견해 가나무역 직원들과 교민들을 모두 조사할 계획이며 현지에 주재 중인 외교관도 긴급 소환했다.
김선일씨는 “노무현 대통령, 나는 살고 싶다. 이것은 당신의 실수다”라고 절규하면서 죽어갔다. 그리고 김씨의 유족인 김진학씨는 6월 26일 김해공항 대기실에서 김씨의 유해를 기다리며 정부 관계자들에게 “국민과 정부 어디가 더 중요합니까? 정직·신뢰·믿음 그런 기본이 안 되어 있으니까 여기에 우리가 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길이 대한민국이 살 길입니다”라고 호소했다.
김씨의 처참한 죽음은 현 정권이 안고 있는 외교·안보 시스템의 총체적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참여정부는 김씨의 마지막 절규와 유족들의 호소를 값비싼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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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랍 기간 20여일 동안 정부가 단 한차례만이라도 교민들 개개인에 대한 안위 점검을 했다면? 정보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해 납치 상황을 사전에 인지할 수 있었다면? 아니 무장단체가 제시한 데드라인 24시간을 앞두고 한국 정부가 서툴게 파병 방침을 강조만 하지 않았다면? 이중 한가지라도 제대로 됐다면 김선일씨는 싸늘한 주검이 아닌 채 환한 안도의 웃음을 머금고 살아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을 지도 모른다.
현재 한국 국민들은 처참하게 살해된 김씨에 대한 충격과 자국민을 죽음으로 내몬 정부에 대한 분노로 떨고 있다. 한마디로 김씨 피살 사건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허술한 참여정부 외교·안보라인의 총체적 위기 상황을 가감 없이 드러낸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번 사건을 전적으로 외교부 책임으로 돌리는 것만으로는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외교부는 말 그대로 외교·안보라인에서 얼굴 역할을 하는 부처이고, 실질적으로 외교·안보정책을 통합 조정하며 정보를 취합하고 위기 관리를 하는 곳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이며, 정보 취득과 공작을 담당하는 곳은 국가정보원이다. 청와대와 정치권에서 이번 사태의 책임을 외교부뿐 아니라 NSC와 국정원 책임자들에게 강하게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이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최재천 의원은 “이번 사건은 공개된 정보를 취급하는 외교부보다는 NSC와 국정원의 책임이 훨씬 크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여권 관계자도 “이번 감사원 조사의 핵심은 외교·안보라인 정보체계에 대한 총체적 점검과 체계적 정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경제·사법 개혁만큼은 확고한 신념을 갖고 추진하지만 외교·안보 문제에는 자신감이 덜한 것 같다는 게 노대통령을 보좌하는 관계자들의 얘기다. 자신없는 분야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노대통령의 성향상 외교·안보 문제만큼은 NSC 시스템에 일임해 놓은 측면이 강했다. 국정원으로부터 직보를 받던 관례도 깨고 모든 것을 NSC를 통해 보고받았으며,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교·안보 현안에 관한 한 NSC의 영향력과 통제력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노대통령은 지난해 6월 NSC 위기관리센터 개소식에서 “대통령과 정부의 주요 책무인 국가 위기 관리의 대상에는 ‘포괄안보’ 개념에 의해 전쟁 등 군사적 충돌뿐 아니라 대형 재난재해, 국가 기능 마비 등 다양한 위기 유형들이 있는데 이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예방과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여 전반적인 국가 위기 관리 능력을 제고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NSC 중심의 위기 관리 시스템을 규정한 것이다. 또 최근 NSC가 자랑스럽게 내놓은 ‘참여정부의 안보정책 구상- 평화번영과 국가안보’ 책자에도 “참여정부는 증대된 국가 위기 관리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그동안 정부 부처·기관이 산발적으로 운용해 오던 위기 관리체계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비·개선해 왔다”고 강조하고 있다.
또 이 책자에는 NSC가 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첫째 위기 영역별 전담 조직 및 의사 결정체계의 지속적인 정비와 유관 부처·기관간 유기적 협조체제를 통한 역량 강화, 둘째 국가 위기 관리 활동 방향과 기준을 제시하는 각종 규범 정비를 통한 체계적 위기 관리 활동, 셋째 정부 각 부처의 위기 관리 업무에 대한 미비점을 지속적으로 발굴·개선해 부처별 위기 관리 업무 능력 향상, 넷째 새로운 위협 요인에 대한 신속하고 효율적인 대응체계를 구축하여 국가 위기 관리상의 공백을 방지하겠다”고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김선일씨 피살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NSC가 위 네가지 사항 중 무엇을 시행했는지 궁금하다.
NSC 상임위는 지난 4월 한국인 7명이 억류되었다가 석방된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교민 안전을 위해 ‘일일 점검체제’를 더욱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 이라크 내 납치 및 테러 위협을 감안하여 재외 국민 보호 매뉴얼 대응체계에 따라 만전을 기해 대비키로 하고, 이라크 외교부·연합군 임시행정처와 유사시 신속하고 긴밀히 협력하는 체제를 구축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테러 위협에 대비해 이라크 교민들에 대해 일일 점검을 해왔다면 도대체 왜 김씨 피랍 사실을 3주 동안이나 알지 못했을까. 납치 및 테러 위협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겠다는 것은 모두 허망한 수사(修辭) 에 불과했던 것일까.
NSC를 주축으로 하는 외교·안보라인의 대응은 위에서 공언했던 것과 같은 사전 대비는 물론이고 사건 발생 직후에도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안일했다. NSC·외교부 등은 김선일씨 석방과 관련해 6월 22일 대통령에게 “현지 언론 보도 및 현지 공관과 연락을 취해본 결과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이때 김씨는 이미 차가운 시신이 돼 타국 길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국가의 최고 정보라인이 내놓은 전망이라는 것이 고작 자신들의 희망 사항에 불과했던 것이다. 정부의 이러한 허술한 정보체계와 안일한 대응 방식은 국회에서도 질타를 받았다. 한나라당의 맹형규 의원은 6월 24일 열린 국회 김씨 피살사건 긴급 현안 질의에서 “이러한 사태가 벌어졌을 때 제대로 맥을 찾아 처리하지 못하고 엉뚱한 사람들을 만나 헛소리나 듣고 앉아 있다는 얘기 아니냐”고 비난했다.
NSC는 김씨가 피살당할 것을 예견이라도 했던 것인지 6월 22일 열린우리당과의 간담회에서 김씨가 참수당한 이후의 대책을 보고했다가 의원들의 호된 질책을 듣기도 했다. 서훈 NSC 정보관리실장은 이날 국회에서 “김씨의 조속한 석방을 위해 가능한 모든 채널을 확보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라크 무장단체와의 직접 채널은 확보하지 못했다”며 김씨가 참수당할 경우 정부의 보상 대책과 시신 운송 방안 등을 공개했었다. 이에 의원들은 “정부가 최선을 다해 자국민을 구해낼 궁리는 안하고 참수당할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준비하느냐”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로 보면 어쩌면 NSC를 비롯한 외교·안보라인은 자신들의 무능을 처음부터 인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정부는 단 한차례도 김씨를 납치했던 무장단체와 직접이든 간접이든 협상을 하지 못했다.
뉴스위크 한국판 취재 결과 김씨 피랍 기간 중 한국 정부가 한 협상이라고는 고작 임홍재 주이라크 대사가 팔루자의 한 이슬람 성직자를 면담한 것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때 이 이슬람 성직자는 “한국은 평화·재건이 아닌 미국을 돕기 위해 온 것이다. 이라크인에게 한국은 적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가 한 일이라고는 대책회의를 열고 담화문을 작성한 것이 고작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한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테러범들이 김씨 살해 협박을 하는 와중에 열린 대책회의에서 한 고위 관료가 담화문에 “테러리스트를 강력히 응징하겠다”는 취지의 말을 넣어야 한다는 섬뜩한 주장까지 했다고 한다. 김씨 피살 사건은 현행 NSC 중심의 외교·안보체제의 문제점이 가장 극단적이고 처참한 방식으로 드러난 사건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외교·안보 시스템을 진두지휘하는 NSC는 김씨 피살 직후에도 외교부로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에만 급급했던 것 같다.
심지어 NSC는 외교부에 대한 진상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노대통령은 민정수석실을 통해 NSC를 포함한 외교·안보라인에 대한 포괄적인 조사 실시를 명령했고, 좀 더 총체적인 조사를 위해 감사원으로 조사권을 이양했다”고 말했다. 국회에서도 6월 25일 국정조사를 하기로 여야가 합의하고 특위를 구성했다. 특히 한나라당은 NSC·국정원의 문제점 및 사건 축소 은폐 의혹을 집중 부각할 계획이다. 한나라당은 “총괄 기능을 갖는 NSC가 이런 중대한 사안에 대한 책임을 온통 외교부와 국정원으로 떠넘기고 있는데도 노대통령은 이종석 사무차장을 감싸고 있다”고 비난했다.
국정원 역시 정보 수집 활동과 한국 교민 및 파병군 보호를 위한 이라크 내 안정화 공작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NSC·외교부와 함께 커다란 책임이 있다는 지적이다. 김씨와 함께 납치됐던 이라크인 운전사는 6월 3일 풀려났다. 그리고 김천호 사장은 김씨를 납치한 강도단체와 몸값을 깎기 위해 협상을 벌이다가 결국 결렬됐고, 이 단체는 알- 자르카위가 이끄는 ‘유일신과 성전’이라는 테러단체에 김씨를 넘긴 것이라는 충격적 진술도 이라크 현지 관계자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참여연대는 6월 25일 논평을 내고 “상황을 보면 국정원이 정보 수집 활동에 실패한 것임이 분명하다”며 “많은 국민들은 국정원의 조직적인 은폐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규모 추가 파병에 앞서 국정원은 이라크 현지에 충분한 요원을 파견해 관련 정보를 수집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한 정보 관계자는 “키르쿠크 지역이 자이툰 부대의 유력한 파병지로 언급될 때 국정원은 이 지역에 요원들을 파견해 민사심리작전을 폈었다”고 말했다. 이 요원들은 마을 공동체의 부족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 키르쿠크 안정화를 위한 공작을 펼쳤다.
그러나 파병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주둔 지역이 변경되면서 이 요원들은 철수했다.
이 정보 관계자는 “이라크 전역에 대한 공작이 필요했는데 바그다드 지역조차 하지 않았다”면서 “현지 정보원을 확보하는 데에도 게을리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도 “외교부는 임시정부를 상대하는 기관이고, 위험 지대는 외교관이 아닌 국방부와 국정원 전문 요원들이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라면서 “일반 민사작전이나 파병·테러 관련 부문은 국방부나 국정원이 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독자 정보가 없다 보니 파병을 비롯한 모든 결정을 할 때 전적으로 미국측 정보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외교부의 책임이 가벼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본부나 현지 공관에 아랍권에 정통한 전문가가 거의 전무했고, 이라크에 파견된 5명의 외교관 중 아랍어를 구사할 수 있는 외교관은 단 한명뿐이었을 정도로 이라크에 대해 소홀했다. 그나마 현지에 급파한 정부 고위 협상단 단장도 아랍권에 대해 경험이 전무한 장재룡 대사를 보냈다. 이는 모두 외교부의 현 시스템에서 비롯된다. 외교부는 민간 컨설팅 업체에 의뢰해 실시한 외교부 현상 진단 결과 조직 구조, 인력 자질, 인력 운용, 업무 시스템, 조직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최하위 그룹으로 분류돼 ‘말기 암 환자’라는 진단을 받을 정도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부처였다(뉴스위크 한국판 6월 23일자 참조).
많은 외교·안보 관련 전문가들과 컨설팅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내부의 잘못된 인사관행과 비효율적 시스템이 급기야 자국민을 죽음으로 내모는 비극적인 상황을 만들고 만 것이다. 전문성을 살리지 않는 잦은 순환근무체제와 전문가 영입을 가로막는 경직된 채용 방식은 아랍권과 같은 특정 지역 전문가 양성에 실패했다. 더군다나 이라크나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 국가는 인사권자의 눈 밖에 나거나 내부고발 등을 통해 ‘왕따’를 받는 직원이 유배되는 기피 지역으로 취급받아온 게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71명의 교민이 주재하고 있고 서희·제마 부대가 이미 파병돼 있으며 조만간 추가 파병이 이뤄질지도 모르는 중요 지역인 이라크에 현지 정보원과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근본 문제를 떠나 사건 발생 후 대응에서도 외교부는 엄청난 실기를 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외교부는 협상 주체, 협상 목표와 전략, 협상을 위한 정확한 정보 그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이 없었던 것 같다. 반기문 장관은 “피랍된 김씨의 석방을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루트를 가동했으며 다각적인 노력과 함께 전력투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김씨를 살해한 ‘알 타후히드 왈 지하드’(유일신과 성전)라는 테러단체와는 단 한차례도 접촉하지 못했고, 간접적으로라도 협상을 시도한 증거가 없다.
김씨 피랍 사실이 밝혀진 직후 무장단체가 파병 철회를 요구하는 가운데 “이라크 파병 방침 불변”을 재차 강조한 것도 커다란 실수였다. 경호업체 NKTS의 현지 파트너인 무하마드 알-오베이디는 6월 23일 한 방송 인터뷰에서 “무장세력이 하는 말은 언론을 통해 이라크에 추가 파병하겠다는 선언을 멈추라는 것”이었다면서 “우선적으로 그런 선언을 멈춰야 하고 그런 다음에야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같은 날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도 “납치범들은 한국 정부가 공격적인 발언을 중단하고 군대 파병에 대해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 한 협상할 의지가 있었다”고도 말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씨가 무장세력에 인질로 잡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시점에서 정부가 파병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한 것이 사태를 극단적으로 악화시킨 셈이다.
청와대와 정치권에서도 외교·안보라인의 총체적 인적 쇄신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또 NSC를 중심으로 한 시스템과 정보라인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점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성난 민심을 달래고 국민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총리 인사와 함께 곧바로 인적 쇄신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청와대는 인적 쇄신에 대한 시기를 조절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국가 위기 상태에서 대대적 인적 쇄신을 할 경우 안정을 해치고 테러 위험성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면서 “우선 안정화를 통해 사태를 수습하고, 감사원 결과를 보고받은 후 그 결과에 따라 문책을 하는 것이 파장을 최소화하는 올바른 절차인 것 같다”고 말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로부터 조사권을 이양받은 감사원은 6월 25일부터 2주간 감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조사 대상에는 외교부와 국방부·국정원·NSC가 포함되며 외교·안보라인의 정보체계와 공조 시스템 전반에 대해 총체적인 조사를 할 계획이다. 이번 조사를 위해 감사원은 이라크 현지에 직원들을 파견해 가나무역 직원들과 교민들을 모두 조사할 계획이며 현지에 주재 중인 외교관도 긴급 소환했다.
김선일씨는 “노무현 대통령, 나는 살고 싶다. 이것은 당신의 실수다”라고 절규하면서 죽어갔다. 그리고 김씨의 유족인 김진학씨는 6월 26일 김해공항 대기실에서 김씨의 유해를 기다리며 정부 관계자들에게 “국민과 정부 어디가 더 중요합니까? 정직·신뢰·믿음 그런 기본이 안 되어 있으니까 여기에 우리가 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길이 대한민국이 살 길입니다”라고 호소했다.
김씨의 처참한 죽음은 현 정권이 안고 있는 외교·안보 시스템의 총체적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참여정부는 김씨의 마지막 절규와 유족들의 호소를 값비싼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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