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익 내세우는 ‘시라크 독트린’
국익 내세우는 ‘시라크 독트린’
The Chirac Doctrine
프랑스 대통령이 ‘국익’을 운운하면 설명하고 싶지 않은 뒷거래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레젭 타입 에르도안 터키 총리가 유럽연합(EU)에 가입하려는 자국의 소망을 프랑스가 지원해주기를 바라면서 지난주 파리에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비위를 맞출 때는 실익(實益) 정치가 전면에 등장했다.
한 터키 고위 관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 취지는 “프랑스가 뿌리치지 못할 선물 보따리”를 시라크 앞에 펼쳐놓자는 것이었다.
터키 항공사는 에어버스 36대의 구매계획(15억달러 이상)을 발표했다. 에르도안은 또 프랑스의 비싼 핵기술을 구입할 가능성도 암시했다. 몇해 동안 암묵적으로 반대하고 어정쩡한 입장을 취했던 시라크는 갑자기 터키의 EU 가입이 ‘국익’에 부합한다고 결정했다. 유럽이 변방을 넓혀가면서, EU 내부의 권력과 영향력의 확대를 꾀해온 프랑스는 외부 국가들로 그 대상을 바꿨다.
터키·이스라엘·이라크, 아니 실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체와의 관계가 중시된다. 정치인생의 내리막에 접어든 시라크는 자신의 업적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밀하게 짜여진 새 유럽, 다시 말해 미국을 대신할 축으로서의 유럽을 만들고자 한다. 동시에 유럽의 무슬림 뒷마당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제한하고자 한다.
이 시라크 독트린은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터키에 관한 그의 최근 입장은 상징적이다. 냉소적이라고 볼 수도 있고 정치가답다고 볼 수도 있으며, 그 둘일 수도 있다. 다만 인기가 없는 것은 분명하다. 프랑스 유권자들의 약 60%는 터키의 EU 가입에 반대한다. 시라크의 소속당인 공화국연합을 비롯한 우파 정치인으로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금기다.
시라크는 전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조밀하게 통합된 유럽을 부르짖어 왔다. 인구가 많고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터키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면 프랑스의 영향력은 당연히 희석될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가 요즘 정답기는 하지만 원초적 경쟁의식은 그대로 남아 있다. 터키는 경제적으로나 이민인구 분포상, 또 역사적으로 독일과 밀접하기 때문에 유럽의 힘의 균형이 한층 더 독일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있다.
만일 시라크의 목표가 터키의 EU 가입이라면 타이밍은 최악이다. 프랑스 국민은 이미 최근의 EU 확대에 대한 불만이 크다. 근로자들은 일자리가 임금이 낮은 동유럽으로 이동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며, 새 유럽헌법에 따르면 프랑스는 전과 같은 거부권이 없어 정부가 예외적 보호를 요구할 입장이 못된다. 한편 시라크는 내년 하반기 유럽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는데 이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터키의 가입 문제까지 겹치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시라크는 지금 미국을 신경쓰고 있다. 프랑스판 먼로 독트린을 선언해 옛날 미국이 유럽에 대해 중남미 문제에서 손 떼라고 경고했듯이 미국은 유럽의 뒷마당에서 손 떼라고 경고하고 싶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미국은 이라크 점령을 계기로 전에 없이 깊숙이 중동에 발을 디뎠다. 이스탄불 정상회담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미국 정부는 터키의 EU 가입에 찬성한다고 말하자 시라크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것은 그때문이었다. “이건 유럽 문제요”라고 시라크는 말을 잘랐다. 터키를 미국의 영향권에서 빼내 유럽으로 편입시키는 동시에, 독일 대신 나서서 저울추를 터키 정부에 유리하게 기울이는 나라가 된다면 좀더 달콤한 복수가 될 것이다.
지난주 에르도안은 기꺼이 맞장구를 칠 용의가 있는 것 같았다. 터키 언론은 황홀경에 빠졌다. 그러나 터키인들은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게다. 미셸 바르니에 프랑스 외무장관은 올 12월의 EU 정상회담 이후 브뤼셀이 터키와 정식 협상을 시작하더라도 가입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고 신속히 토를 달았다. “터키의 EU 가입은 당장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바르니에는 말했다. “앞길은 여전히 멀다.”
시라크의 입장이 진지하다면 당내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재무장관의 도전을 물리쳐야 한다.
사르코지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로부터 지휘권을 빼앗을 준비를 하고 있다. 사르코지는 터키의 가입에 단호히 반대한다. 그러나 시라크는 과연 진지하게 고려 중인가? “EU에는 무엇에 찬성한다고 말해놓고 뒤로 다른 사람이 거부하도록 조장하는 전통이 있다”고 영국의 유럽의회 의원 대니얼 해넌은 말했다. EU의 절차가 좀 해괴해서 프랑스가 에르도안의 면전에서는 ‘예스’라고 말하고, 오스트리아 같이 터키를 싫어하는 나라들이 반대하기를 희망하거나 조장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결정적 시기가 오면 터키 문제를 놓고 유럽은 EU의 확대를 전반적으로 지지하는 영국이나 스칸디나비아 같은 유럽 회의론파와, 좀더 조밀하고 통합적이며 불-독 양대 축이 지배하는 연합을 원하는 프랑스 같은 유럽 통합론파로 갈릴 가능성이 있다. 일부 관측통들은 그것이 바로 시라크가 실제로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확대된 ‘새’ 유럽이 관리 불능이 되어 ‘옛’ 유럽이 회의론파를 물리치고 유럽의 중심에서 좀더 조밀하고 결정적인 연합으로 뭉치는 것 말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게 거창한 생각은 말이 쉽지 실천은 어렵다. 지금까지 시라크는 꽤 잘해왔다. 에어버스 돈을 챙기고 달아날 수 있다. 물론 국익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With OWEN MATTHEWS in Istanbul
and TRACY MCNICOLL in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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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통령이 ‘국익’을 운운하면 설명하고 싶지 않은 뒷거래가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레젭 타입 에르도안 터키 총리가 유럽연합(EU)에 가입하려는 자국의 소망을 프랑스가 지원해주기를 바라면서 지난주 파리에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비위를 맞출 때는 실익(實益) 정치가 전면에 등장했다.
한 터키 고위 관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 취지는 “프랑스가 뿌리치지 못할 선물 보따리”를 시라크 앞에 펼쳐놓자는 것이었다.
터키 항공사는 에어버스 36대의 구매계획(15억달러 이상)을 발표했다. 에르도안은 또 프랑스의 비싼 핵기술을 구입할 가능성도 암시했다. 몇해 동안 암묵적으로 반대하고 어정쩡한 입장을 취했던 시라크는 갑자기 터키의 EU 가입이 ‘국익’에 부합한다고 결정했다. 유럽이 변방을 넓혀가면서, EU 내부의 권력과 영향력의 확대를 꾀해온 프랑스는 외부 국가들로 그 대상을 바꿨다.
터키·이스라엘·이라크, 아니 실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전체와의 관계가 중시된다. 정치인생의 내리막에 접어든 시라크는 자신의 업적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밀하게 짜여진 새 유럽, 다시 말해 미국을 대신할 축으로서의 유럽을 만들고자 한다. 동시에 유럽의 무슬림 뒷마당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제한하고자 한다.
이 시라크 독트린은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터키에 관한 그의 최근 입장은 상징적이다. 냉소적이라고 볼 수도 있고 정치가답다고 볼 수도 있으며, 그 둘일 수도 있다. 다만 인기가 없는 것은 분명하다. 프랑스 유권자들의 약 60%는 터키의 EU 가입에 반대한다. 시라크의 소속당인 공화국연합을 비롯한 우파 정치인으로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금기다.
시라크는 전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조밀하게 통합된 유럽을 부르짖어 왔다. 인구가 많고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터키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면 프랑스의 영향력은 당연히 희석될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가 요즘 정답기는 하지만 원초적 경쟁의식은 그대로 남아 있다. 터키는 경제적으로나 이민인구 분포상, 또 역사적으로 독일과 밀접하기 때문에 유럽의 힘의 균형이 한층 더 독일쪽으로 기울 가능성이 있다.
만일 시라크의 목표가 터키의 EU 가입이라면 타이밍은 최악이다. 프랑스 국민은 이미 최근의 EU 확대에 대한 불만이 크다. 근로자들은 일자리가 임금이 낮은 동유럽으로 이동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며, 새 유럽헌법에 따르면 프랑스는 전과 같은 거부권이 없어 정부가 예외적 보호를 요구할 입장이 못된다. 한편 시라크는 내년 하반기 유럽헌법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는데 이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터키의 가입 문제까지 겹치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시라크는 지금 미국을 신경쓰고 있다. 프랑스판 먼로 독트린을 선언해 옛날 미국이 유럽에 대해 중남미 문제에서 손 떼라고 경고했듯이 미국은 유럽의 뒷마당에서 손 떼라고 경고하고 싶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미국은 이라크 점령을 계기로 전에 없이 깊숙이 중동에 발을 디뎠다. 이스탄불 정상회담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미국 정부는 터키의 EU 가입에 찬성한다고 말하자 시라크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것은 그때문이었다. “이건 유럽 문제요”라고 시라크는 말을 잘랐다. 터키를 미국의 영향권에서 빼내 유럽으로 편입시키는 동시에, 독일 대신 나서서 저울추를 터키 정부에 유리하게 기울이는 나라가 된다면 좀더 달콤한 복수가 될 것이다.
지난주 에르도안은 기꺼이 맞장구를 칠 용의가 있는 것 같았다. 터키 언론은 황홀경에 빠졌다. 그러나 터키인들은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게다. 미셸 바르니에 프랑스 외무장관은 올 12월의 EU 정상회담 이후 브뤼셀이 터키와 정식 협상을 시작하더라도 가입이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고 신속히 토를 달았다. “터키의 EU 가입은 당장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바르니에는 말했다. “앞길은 여전히 멀다.”
시라크의 입장이 진지하다면 당내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재무장관의 도전을 물리쳐야 한다.
사르코지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로부터 지휘권을 빼앗을 준비를 하고 있다. 사르코지는 터키의 가입에 단호히 반대한다. 그러나 시라크는 과연 진지하게 고려 중인가? “EU에는 무엇에 찬성한다고 말해놓고 뒤로 다른 사람이 거부하도록 조장하는 전통이 있다”고 영국의 유럽의회 의원 대니얼 해넌은 말했다. EU의 절차가 좀 해괴해서 프랑스가 에르도안의 면전에서는 ‘예스’라고 말하고, 오스트리아 같이 터키를 싫어하는 나라들이 반대하기를 희망하거나 조장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결정적 시기가 오면 터키 문제를 놓고 유럽은 EU의 확대를 전반적으로 지지하는 영국이나 스칸디나비아 같은 유럽 회의론파와, 좀더 조밀하고 통합적이며 불-독 양대 축이 지배하는 연합을 원하는 프랑스 같은 유럽 통합론파로 갈릴 가능성이 있다. 일부 관측통들은 그것이 바로 시라크가 실제로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확대된 ‘새’ 유럽이 관리 불능이 되어 ‘옛’ 유럽이 회의론파를 물리치고 유럽의 중심에서 좀더 조밀하고 결정적인 연합으로 뭉치는 것 말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게 거창한 생각은 말이 쉽지 실천은 어렵다. 지금까지 시라크는 꽤 잘해왔다. 에어버스 돈을 챙기고 달아날 수 있다. 물론 국익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With OWEN MATTHEWS in Istanb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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