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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 마케팅’으로 한국 시장 연착륙

‘스타 마케팅’으로 한국 시장 연착륙

한국의 엠포리오 아르마니는 올 상반기부터 소위 ‘스타 마케팅’을 시작했다. 얼마전 종영된 MBC 드라마 ‘불새’의 이은주·이서진·에릭 등을 시작으로, MBC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의 명세빈·유준상 등에게 촬영용 의상을 협찬했다. 초호화 캐스팅으로 주목받고 있는 KBS 드라마 ‘풀하우스’에서는 아르마니 진을 입은 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스타 마케팅의 결과는 특정 상품 ‘품절’이라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 왔다. 특히 비가 착용하고 나온 독수리 목걸이를 구하려는 전화가 폭주해 매장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한국의 명품 시장은 해마다 규모가 커지고 있다. 이중 아르마니는 다른 명품에 비해 적은 물량을 공급하면서도 인지도와 시장 점유율을 착실하게 높여가고 있다. 한국을 이해하는 마케팅 전략과 우수한 품질관리, 그리고 70세의 고령이지만 정열적으로 기업을 이끌고 있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때문이다.

아르마니 그룹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점점 시장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는 중이다. 다른 패션업체들이 ‘현상 유지’를 목표로 했던 2004년 상반기에도 아르마니 그룹의 전세계 소매 매출은 9%, 도매상으로부터의 예약은 10%, 그리고 구두 및 가방의 판매는 34%가 증가했다. 이에 힘입어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포브스지가 선정한 2004년도 세계 부호 서열 2백47위에 올랐다. 아르마니는 뉴스위크 한국판과의 인터뷰에서 “이는 아르마니 그룹이 업계를 선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자평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하루 12시간을 일에 몰두하며 해마다 3천 가지 이상의 아이템을 직접 디자인하고 있는 세계 패션계의 거물 아르마니도 사실은 40세가 돼서야 자신의 회사를 갖고 사업을 시작한 늦깎이 사업가였다. 1975년 친구 세르조 가레오티와 함께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타고 다니던 폴크스바겐 자동차를 팔아 사무실을 마련했던 어려운 시절도 있었다.

당시 그는 30년 후 자신의 모습은커녕 1년 후의 미래도 모르던 ‘철없는’ 디자이너이자 사업가였다. 당시에 대해 아르마니는 “솔직히 뭘 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몰랐다. 그저 디자인이 너무 좋아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실제로 아르마니는 첫번째 직원을 고용하는 인터뷰에서도 당시 학생 신분이던 지원자에게 “우리 회사는 내년에 망할 수도 있으니 학교를 그만두지 말고 일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 직원은 결국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30년째 그와 함께 일하고 있다.

그가 늦은 나이에 패션업계에 뛰어든 것은 자신의 길에 대해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34년 이탈리아 밀라노 외곽의 소도시 피아첸차에서 태어난 아르마니는 30세가 넘도록 꿈을 찾지 못하던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는 서부영화와 네오리얼리즘 계열의 이탈리아 영화에 열광하던 평범한 젊은이였다. 스무살이 되던 해 가족의 권유로 밀라노에 있는 베간 의대에 2년간 다니기도 했고, 군에 입대해서는 의무병 생활을 했다.

병역임무를 마친 후에는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의대를 자퇴하고 백화점 매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군 생활 내내 제대 후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 결과 의사 생활은 자신이 원하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간신히 백화점에 들어가 전시장 디스플레이를 담당하기 시작한 미래 패션계의 황제는 너무 초현실적이고 전위적인 연출을 한다는 이유로 백화점 구매부로 전출되는 등 백화점에서도 그리 평탄한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하지만 아르마니는 패션 감각에 눈뜨게 되면서 백화점에서 조금씩 주목받는 존재로 자리잡게 된다. “디자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신선했다”는 아르마니는 “지나가는 사람만 봐도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디자인을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는 1964년 남성복 디자이너 니노 세루치의 문하로 들어가 잠시 수업을 받으며 신사복과 숙녀복 디자인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했다. 아르마니가 얼마 후 백화점에서 나와 스스로 디자인을 공부하며 느낀 점은 주위에 보이는 모든 옷들이 너무 경직돼 있다는 것이었다.

“인체는 곡선인데 옷들은 딱딱한 직선이었고, 그나마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을 갖고 있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르마니는 편하고 우아한 곡선을 가진 옷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다. 이때 그가 구상한 디자인은 최근의 아르마니 제품과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너무 오래 같은 스타일의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지만 이에 대해 아르마니는 “변화가 필요한 것은 인정하지만 너무 파격적인 디자인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입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있다면 한 시절이 아닌 오랜 기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업자인 세르조 가레오티는 60년대 중반 백화점 디자인팀에서 일하다 만나게 된다. 건축학도 출신의 가레오티와 아르마니는 금방 의기투합해서 새로운 패션에 대해 토론을 벌이게 됐고, 이들은 결국 70년 프리랜서로 독립하게 된다. 이들이 돈에 쪼들려가며 준비한 첫번째 소규모의 패션쇼에는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 그리고 극소수의 업체 인사들만이 참석했다. 하지만 “뭔가 다르다”는 반응이 있었고 주위에서 그에게 옷을 주문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됐다. 가레오티는 “당신의 옷은 누구와도 다르다”며 그를 격려했고, 결국 75년 ‘조르지오 아르마니 SpA’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디자인에 자신이 생긴 아르마니는 75년 밀라노 최고의 패션쇼인 밀라노 컬렉션에 자신의 양복을 출품했고 이는 ‘아르마니 풍’이라는 고유명사가 생기는 계기가 됐다. 어깨에 봉을 넣어 억지로 역삼각형을 만들어 내던 기존 양복 형식에서 탈피해 어깨선과 허리선을 부드럽게 살린 아르마니 신사복이 나오자 여기저기서 그를 모방한 옷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인체의 곡선을 보여주는 디자인은 여성복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디자인한 카디건 스타일의 여성용 재킷은 80년대 이후 사무실에서 일하는 숙녀들의 교복처럼 사용됐기 때문이다.

아르마니의 신사복과 숙녀복이 이탈리아에서 너무나 선풍적 인기를 끌게 되면서 1978년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양의 주문이 밀려 왔다. 아르마니는 이탈리아 섬유기업협회와 기술자·숙련공 고용에 대한 계약을 체결하고 대량 생산에 들어가면서 오늘날 전세계에 자신의 매장을 갖게 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전세계에 걸쳐 위세를 떨치고 있는 아르마니의 마케팅 기법은 희소성과 브랜딩, 그리고 스타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아르마니 그룹은 최대한 1백을 팔 수 있다 해도 70정도만 판매하는 희소성 원칙을 지키며 브랜드를 관리하고 있다. 아르마니는 매출이 떨어져도 고품격 이미지만 유지된다면 매출을 다시 회복할 수 있지만 만일 이미지가 떨어지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다고 믿고 있다. 아르마니가 “전세계 인구의 3%만 내 옷을 이해해주면 된다”는 말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두번째는 브랜드 파워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라는 명품 브랜드로 브랜드 가치를 상승시킨 다음 아르마니 콜레지오니·엠포리오 아르마니·아르마니 진 같은 제품을 소개하는 것이다. 이들의 가격은 조르지오 아르마니만큼 비싸지 않지만 명품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브랜드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타 마케팅을 들 수 있다. 1980년 ‘아메리칸 지골로’라는 영화의 주연으로 나온 리처드 기어의 의상을 직접 담당한 사람이 바로 아르마니였다.

1979년 아르마니 미국 법인을 설립한 다음 시장 진출을 위한 마케팅에 직접 나선 것이다. 영화의 주요 장면마다 아르마니 양복을 입고 나온 기어의 영향으로 아르마니에 대한 인지도가 크게 올라갔고 그 이후 미국에서 옷이 없어 못 팔 정도의 큰 성공을 거뒀다. 지금도 아카데미상 시상식 같은 행사에서 할리우드 스타들은 아르마니의 옷을 가장 즐겨 입고 있다.

디자이너와 경영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아르마니는 7월 11일 열린 그의 70번째 생일파티에서 “내년, 나의 69번째 생일파티에 여러분을 초대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평범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사람들은 그저 나이를 거꾸로 먹기 원하는 노인의 재미있는 농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노인이 한해 매출만 1조7천1백70억원을 올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 한번 생각해볼 만한 말이다.

아르마니의 은퇴는 그의 후계자를 꿈꾸는 이들, 경쟁사, 그리고 그가 직접 디자인한 양복을 구입하기 원하는 이들과 심지어 지구 반대편에서 그의 제품을 모방한 가짜 명품을 만드는 사람들에게까지 커다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는 은퇴에 대해 묻는 이들에게 “내게 일하고자 하는 정열이 남아 있는 한 나는 젊다. 인생 마지막까지 나는 멈추지 않고 일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꿈이 있는 노인 앞에서 나이는 의미없는 ‘덧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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