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청량제 없나
| 곽재원·중앙일보 경제연구소 부소장 | “통계만 쳐다보면 흔히 평균치에 얽매인다. 평균치를 보고 괜찮다 싶을 때 이미 서민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졌던 사례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막힌 곳은 뚫고 굽은 곳은 펴는’ 경제 청량제가 필요한 때다.” 지난 1982년 9월 국내외 정세가 아주 어려웠을 때 국무총리에 오른 고 김상협(1920∼1995) 고려대 총장은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일성으로 “막힌 곳은 뚫고 굽은 곳은 펴겠다”고 밝혔다. 당시 국민들에게 이처럼 속을 씻어내는 청량제가 없었다. 경제가 하도 답답하니 옛 생각이 난다. 정부나 경제연구기관의 통계가 나쁘면 서민경제의 실상은 더 형편없다. 이맘때가 되면 연말 경기가 어떤지를 진단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지표가 있다. 우선 ‘달력 인심’이다. 매년 달력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더니 이번엔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 카드도 오고 가는 물량이 약 80%는 줄어든 것 같다. 대신 거의 이메일 카드로 대체됐다. 그러니 인쇄소가 몰려 있는 충무로 경기가 어떨지는 보나마나다. 오피스들이 몰려 있는 태평로와 서소문 일대의 꽃가게도 아우성이다. 경기가 좋으면 연말인사에서 진급이 많아 축하 화분이 줄을 이을 텐데 오히려 감원 바람이 드세니 꽃이 나갈리가 없다. 건물 2~3층을 통째로 터놓고 호황을 누리던 봉천동과 신림동의 대형 횟집들은 어떤가. 수개월 전부터 손님 발길이 끊어져 매일 저녁 불만 훤히 밝히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연말회식 손님도 아주 드문드문 있다고 한다.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우니 모처럼 오던 손님도 되돌아가는 실정이다. 강남 경기는 원래부터 ‘빈익빈 부익부’의 원리에 따라 움직였으나 요즘엔 극히 일부 룸살롱을 빼곤 모두 죽을상이라고 한다. 이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모범택시들도 새벽 늦게까지 빈 차 행렬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목격된다. 한편 서울역의 홈리스들은 자리 다툼을 심하게 하면서 염천교 지하도까지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것들은 통계에 잘 안 잡히는 소위 거리경제지표라 할 수 있다. 반면, 한번 지날 때마다 2,000원씩 내는 남산 제3터널의 차량 통과량, 서울시 쓰레기 처리량, 가정용 전기사용량, 시청이나 신도림역 같은 대형 환승역에서 갈아타는 승객수 등은 통계로 드러나는 서민경제의 한 측면이다. 실제로 경기가 나쁘니 모든 걸 아껴쓰며 가능한한 유료도로는 안 다니고,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뉴스가 있다. 사정이 이럴진대 여야가 타협해 국회정상화를 도모했다느니, LG카드채권단과 LG그룹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느니 하는 것은 서민경제와는 무척 동떨어진 얘기들이다. 올해 경제는 지난해보다 더 어려울 거라고 한다. 서민경제가 더더욱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통계만 보면 평균치에 얽매인다. 평균치를 보고 괜찮다 싶을 때 이미 서민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졌던 사례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 정부의 각 부서들은 업무보고안을 짜는라 정신이 없을 테고, 청와대는 멋진 대통령 연두교서를 위해 이 궁리 저 궁리를 할 것이다. 이럴 때 한번 사람들을 풀어 연말 서민경제를 탐색해 보는 게 어떨까? 정책하는 사람들은 섹시하거나 야심찬 내용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불경기의 골이 깊어지고, 서민경제가 뿌리째 흔들리는 이런 시기엔 서민들을 보다듬는 진솔한 정책이 훨씬 힘이 있다. 그래야 막힌 곳을 뚫고 굽은 곳을 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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