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인생이 담긴 ‘슈발 블랑’
사랑과 인생이 담긴 ‘슈발 블랑’
늦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주말 저녁에 한 커플이 와인바를 찾았다. 둘 다 무척 밝은 얼굴이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오는 4월에 결혼한다고 했다. 적잖이 놀랐다. 두 사람은 두 달 전만 해도 매주 일요일 와인 강좌를 함께 들었던 동기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세대답게 “처음부터 ‘필(feel)’이 꽂혔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강좌를 시작한 지 겨우 1년 남짓한데 벌써 세 커플이나 맺어졌다.
이 정도면 결혼상담소를 차려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와인 강좌는 일요일 오후에 와인을 배우려는 젊은 친구들이 모여 두어 시간 와인을 마시며, 부담없이 대화를 나누는 사교의 장이 된다. 그뿐이랴. 강좌가 끝나면 2, 3차로 이어지면서 늦게까지 함께하는 기회가 많다. 선입관이나 부담없이 상대의 자연스러운 내면을 저울질해 볼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와인을 인연 삼아 부부가 되는 사람들도 나올 법하다. 사실 와인이 사랑의 메신저가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나에게도 기억에 남는 메신저가 있다.
몇 년 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호텔 연회장에서 30여 명의 선남선녀가 모여 와인동호회 신년 모임을 연 적이 있었다. 남녀 모두 분위기를 한층 돋보이게 하는 정장 차림이었다. 테이블엔 1인당 10여 개의 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격식을 갖추느라 와인 병마다 잔을 달리해 마셔야 한다고 떼를 써 호텔 측이 선심을 쓴 터였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등장한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생 테밀리옹(St-Emillion) 지역 최고의 와인 ‘슈발 블랑(Cheval Blanc) 1994년산’이었다.
클래식에서 뉴에이지 음악의 중심이었던 폴 모리아(Paul Mauriat) 오케스트라의 앨범 중 ‘프랑스의 최고(The Best of France)’라는 초기 레이저디스크(LD)가 있었다. 고전 팝 음악을 천재적 솜씨로 편곡한 곡을 30인조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면서 프랑스 명소들을 배경화면으로 찍은 것이었다.
그 LD를 볼 때마다 프랑스에 대한 환상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곤 했다. 그 가운데 이 생 테밀리옹 지역의 두 거목인 슈발 블랑과 오존느(Ausone)의 포도밭 ·와인저장고 ·라벨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폴 모리아의 섬세한 선율과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편곡은 와인과도 여유있게 어울렸다. 와인에서 벗어날 수 없을 만큼 그 매력에 빠져들 무렵이었고, 와인동호회도 선남선녀들로 넘쳐났다. 슈발 블랑은 균형잡힌 향기와 맛, 그리고 긴 여운을 남기는 이른바 환상적인 관능미를 보여주었다.
그 황홀한 저녁이 있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해 어느 포구에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지금 바닷가에서 혼자 와인을 마시고 있어요. 잔이 없어서 종이컵으로요.” 그는 흐느끼는 듯했고 매우 쓸쓸한 목소리였다. 한 여인을 두고 세 남자가 경쟁을 벌였는데 형뻘 되는 두 사람의 협박성 강요로 여자에게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는 것. 와인으로 맺어질 뻔한 인연을 마무리하기 위해 겨울 바닷가에서 종이컵에 와인을 따라 기울여야 했었다. 세월이 약이었던지 그녀는 아이 엄마가 되었고, 종이컵의 사나이도 결혼해 지금은 호주에 산다.
며칠 전 와인이 주요 배경이 되는 영화 <사이드 웨이> 를 보았다.
와인에 심취된 주인공이 일생에서 가장 특별한 날에 마시려고 아꼈던 슈발 블랑 1961년산을 캘리포니아 어느 길목 초라한 식당에서 종이컵으로 마시는 장면이 나왔다. 그 와인의 값어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인생을 포기할 거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결정적인 복선이었다. 예전 <구름 위의 산책> 이 와인 이해를 돕는 기초편이라면 <사이드 웨이> 는 와인의 세계에 빠져든 사람에게 진하게 다가오는 전문편에 속한다. 이 영화 역시 와인처럼 몇 번은 곱씹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슈발 블랑 같은 보르도 10대 와인을 종이컵에 마신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허무다. 특히 1961년이란 전설적인 빈티지는 와인 애호가로선 꼭 특별한 날 마셔야 될 와인에 해당한다.
와인은 인생 그 자체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마야의 마지막 대사가 심금을 울린다. “와인은 인생과 너무 닮았어요. 포도가 자라는 과정을 보는 게 좋아요. 그 여름 햇살이 비춘 각도도, 날씨가 어땠는지 생각하는 것도 좋고…. 한 병의 와인은 인생 그 자체죠. 포도가 자라고, 숙성하고, 그리고 복합적 요소를 갖게 되고…. 그러면서 그 맛도 정말 끝내줍니다.” 사이드> 구름>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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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결혼상담소를 차려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와인 강좌는 일요일 오후에 와인을 배우려는 젊은 친구들이 모여 두어 시간 와인을 마시며, 부담없이 대화를 나누는 사교의 장이 된다. 그뿐이랴. 강좌가 끝나면 2, 3차로 이어지면서 늦게까지 함께하는 기회가 많다. 선입관이나 부담없이 상대의 자연스러운 내면을 저울질해 볼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와인을 인연 삼아 부부가 되는 사람들도 나올 법하다. 사실 와인이 사랑의 메신저가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나에게도 기억에 남는 메신저가 있다.
몇 년 전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호텔 연회장에서 30여 명의 선남선녀가 모여 와인동호회 신년 모임을 연 적이 있었다. 남녀 모두 분위기를 한층 돋보이게 하는 정장 차림이었다. 테이블엔 1인당 10여 개의 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격식을 갖추느라 와인 병마다 잔을 달리해 마셔야 한다고 떼를 써 호텔 측이 선심을 쓴 터였다. 그날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에 등장한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생 테밀리옹(St-Emillion) 지역 최고의 와인 ‘슈발 블랑(Cheval Blanc) 1994년산’이었다.
클래식에서 뉴에이지 음악의 중심이었던 폴 모리아(Paul Mauriat) 오케스트라의 앨범 중 ‘프랑스의 최고(The Best of France)’라는 초기 레이저디스크(LD)가 있었다. 고전 팝 음악을 천재적 솜씨로 편곡한 곡을 30인조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면서 프랑스 명소들을 배경화면으로 찍은 것이었다.
그 LD를 볼 때마다 프랑스에 대한 환상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곤 했다. 그 가운데 이 생 테밀리옹 지역의 두 거목인 슈발 블랑과 오존느(Ausone)의 포도밭 ·와인저장고 ·라벨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다. 폴 모리아의 섬세한 선율과 신비로움을 더해주는 편곡은 와인과도 여유있게 어울렸다. 와인에서 벗어날 수 없을 만큼 그 매력에 빠져들 무렵이었고, 와인동호회도 선남선녀들로 넘쳐났다. 슈발 블랑은 균형잡힌 향기와 맛, 그리고 긴 여운을 남기는 이른바 환상적인 관능미를 보여주었다.
그 황홀한 저녁이 있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해 어느 포구에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지금 바닷가에서 혼자 와인을 마시고 있어요. 잔이 없어서 종이컵으로요.” 그는 흐느끼는 듯했고 매우 쓸쓸한 목소리였다. 한 여인을 두고 세 남자가 경쟁을 벌였는데 형뻘 되는 두 사람의 협박성 강요로 여자에게 더 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는 것. 와인으로 맺어질 뻔한 인연을 마무리하기 위해 겨울 바닷가에서 종이컵에 와인을 따라 기울여야 했었다. 세월이 약이었던지 그녀는 아이 엄마가 되었고, 종이컵의 사나이도 결혼해 지금은 호주에 산다.
며칠 전 와인이 주요 배경이 되는 영화 <사이드 웨이> 를 보았다.
와인에 심취된 주인공이 일생에서 가장 특별한 날에 마시려고 아꼈던 슈발 블랑 1961년산을 캘리포니아 어느 길목 초라한 식당에서 종이컵으로 마시는 장면이 나왔다. 그 와인의 값어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인생을 포기할 거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결정적인 복선이었다. 예전 <구름 위의 산책> 이 와인 이해를 돕는 기초편이라면 <사이드 웨이> 는 와인의 세계에 빠져든 사람에게 진하게 다가오는 전문편에 속한다. 이 영화 역시 와인처럼 몇 번은 곱씹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슈발 블랑 같은 보르도 10대 와인을 종이컵에 마신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허무다. 특히 1961년이란 전설적인 빈티지는 와인 애호가로선 꼭 특별한 날 마셔야 될 와인에 해당한다.
와인은 인생 그 자체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마야의 마지막 대사가 심금을 울린다. “와인은 인생과 너무 닮았어요. 포도가 자라는 과정을 보는 게 좋아요. 그 여름 햇살이 비춘 각도도, 날씨가 어땠는지 생각하는 것도 좋고…. 한 병의 와인은 인생 그 자체죠. 포도가 자라고, 숙성하고, 그리고 복합적 요소를 갖게 되고…. 그러면서 그 맛도 정말 끝내줍니다.” 사이드> 구름>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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