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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정문식 이레전자 사장… “남처럼 하면 남 이상 못돼요”

인터뷰 정문식 이레전자 사장… “남처럼 하면 남 이상 못돼요”

정문식 이레전자 사장.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될 수 있을까? 요즘 중소기업은 대기업으로의 도약을 꿈도 못 꾸는 상황이다. 물리학의 차원 이동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에 지배되는 시장에서 중소기업은 기술·자금력·브랜드 등 모든 면에서 하늘과 땅만큼 대기업과 멀어지고 있다. 하지만 정문식 이레전자 사장은 예외다. 그는 야간 공고, 생산직 출신으로 최첨단 제품인 디지털 TV를 생산하며 대기업과 어깨를 견주고 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편집자> 정문식 이레전자 사장의 최종 학력은 고졸이다. 한양공고 전자과 야간 과정이다.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60명 중에서 58등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가난과 굶주림에 절어 살아왔던 그에게 학교는 ‘먹고 사는 일’ 다음이었다. 그는 열세 살 때 청계천에 있는 공장에 취직, “학교와 공장을 전전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고 군대에 갔다와서도 공장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그가 1990년 사업을 시작했다. 아이템은 카스테레오용 전선 가공. 하지만 ‘돈도 빽도’ 없던 그가 뭘 할 수 있었겠는가. 퇴직금 50만원을 털어 산 중고 압착기를 연립주택 반 지하에 들여놓으면서 시작한 사업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주문은 가뭄에 콩 나듯 들어왔고, 방바닥을 기어다니던 아이들의 피부는 성할 날이 없었다. 날카로운 전선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 퍼렇게 변하고 고름이 생길 때마다 그의 아내는 눈물을 흘렸다. 부부의 하루 마무리는 항상 아이들 피부에서 구리선을 뽑아내는 일이었다. ‘왜 내게는 한번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 그는 한강변에서 자살을 생각했다. 그는 지금도 그때 일을 말할 때 ‘근근이’ ‘겨우겨우’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말도 안 되는 성공신화” 15년이 지난 2005년 5월. 정 사장의 하루는 완전히 달라졌다. ‘근근이’ ‘겨우겨우’라는 단어는 완전히 사라졌다. 바뀐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지난해 이레전자의 매출액은 1400억원에 가깝다. 더 놀라운 것은 이레전자의 주력 상품이다. 이레전자는 지난해 매출의 54%를 첨단 상품인 디지털 TV로 올렸다. 얼마 전에는 ‘J2’라는 차세대 개념의 TV를 만들어내 경쟁사 사장이 임직원들에게 화를 냈을 정도다. 이런 상품을 만들어내는 곳은 삼성·LG를 비롯, 내로라 하는 다국적 기업들이다. 한마디로 ‘골리앗’ 틈에 끼어있는 ‘다윗’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오늘의 ‘이레’를 만든 정 사장은 좋은 학벌도 없고 그럴 듯한 대기업 출신도 아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엘리트도 아닌 밑바닥 출신”이다. 이름이 비슷해 친척이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는 정문술 미래산업 창업자는 “도대체 혈연·지연·학연 등 인맥이 전혀 없고 또 그런 것을 만들어갈 주변도 없어 그의 성공은 더 의미있고 값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더구나 요즘 시장은 빈익빈 부익부에 지배되고 있다.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기술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면서 중소기업이 대기업이 되는 것은 닭이 꿩이 되는 것만큼 어려워지고 있다. 첨단기술은 대규모 투자가 필수적인 데다 예전과 달리 생명이 길지도 않다. 이른바 속전속결인 시장에서 중소기업은 흐름을 따라가기도 벅차다. 하지만 정 사장은 그 ‘상식’을 뒤집고 있다. 닭을 꿩으로 만들고 있다. 주변의 표현에 의하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정말 맨바닥에서 맨주먹으로 가능했던 일이었을까.

충전기


“꿩 대신 닭으로 시작” 1993년 3월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전자박람회에 들른 정 사장은 한 코너에서 발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휴대전화를 전시·판매하는 곳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중국의 덤핑 공세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고민했다. 결론은 하나, 살아남으려면 변해야 했다. 귀국하자마자 300만원이나 하던 휴대전화를 당장 구입, 분해했다. 잘 하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씁쓸한 웃음으로 끝났다. 전화기나 라디오쯤으로 생각했던 것은 판단 착오였다. 다시 조립해 충전기에 휴대전화를 꽂아 놓으며 한숨을 쉬던 그의 머리에 스치는 게 있었다. “그렇지. 충전기!” 그의 마음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내달았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좌충우돌하길 5개월. 차량용 시가(Cigar)잭 충전기를 만든 그는 용산전자상가를 통해 데뷔했다. 구름 저편에 있을 것 같던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내친김에 핸즈프리와 일반 휴대전화 충전기까지 손을 댔다. 그는 이 과정에서 청계천 시절부터 유심히 봐두었던 ‘재야의 전문가’들을 활용했다. 일종의 기술 아웃소싱이었다. “제가 모든 걸 다 해야 한다면 모든 것에서 뒤질 수밖에 없습니다. 청계천 시절 구멍가게 같은 곳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이 그들만의 영역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그는 내친김에 일반 휴대전화 충전기와 무선전화기에까지 손을 뻗쳤다. 특유의 저돌적인 영업으로 현대전자에 휴대전화 충전기를 전량 납품했고, 미국의 벨사에 무선전화기를 대량 납품했다. 절묘한 기술 아웃소싱으로 시작했지만 기술 체화 노력도 잊지 않았다. ‘남다른 기술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청계천의 교훈’ 덕분이었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그는 어느새 한 순간의 방심이 허용되지 않는 정보통신이라는 전쟁터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성공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성공에 고무돼 세계 최초의 제품에 도전했다가 옆구리에 강타를 맞은 권투선수처럼 휘청거리기도 했다. 모니터 화면이 자동으로 분할되는 화면분할기와 회의용 전화기의 연이은 실패가 그것이었다. 휴대폰

“그거 못할까 했는데…” 그렇다고 물러서지는 않았다. “너무 순조롭게 사업이 진행돼 자만심이 들기도” 했지만 “실패를 실패로만 여기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때 현대전자로부터 휴대전화 생산을 해보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기회였다. 현대전자가 회로설계를 맡고 이레가 생산을 담당하는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이었다. 휴대전화를 생산할 수 있다니! 두말없이 제안에 응했고, 산업은행으로부터 장비 담보대출 등을 받은 그는 2000년 10월 유보금을 통틀어 100억원을 투자했다. 거래처는 ‘하늘’ 같은 대기업이었던 것이다. 나름대로 계산은 있었다. 개발·제조·생산의 세 가지 선택 중 아무리 생각해도 개발과 판매는 감당하기 어려운 여건이었다. 휴대전화 같은 첨단제품은 한번 엎어지면 담을 수 없는 물이었다. 만들기만 하자. 하지만 회사 임원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그것마저 무모하다고 말렸다. “저러다 망하고 말 것”이라는 소리도 들렸다. 개의치 않았다. “앞으로 급상승할 산업이 몇 개나 있을 것 같습니까? 휴대전화와 벽걸이 TV, 바로 그것이었어요.” 일은 일사천리로 이뤄졌고 2001년 1월 이레전자에서 휴대전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본 적이 없던 일이었다. 어이없이 일어나는 시행착오는 밤 새우기로 벌충해야 했다. “‘그거 못할까’ 했는데 전화기와는 차원이 달랐어요. 죽어라고 열심히 했는데 현대전자 검사관이 와서 테스트를 해 보면 작동이 안 되는 겁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죠. 열심히 노력한 게 억울하니 눈물이 나오더군요.” 눈물은 오기가 됐고 ‘저러다 망할 것’이라던 소문은 ‘희한한 곳’으로 바뀌었다. 웬만한 기업도 하기 힘든 휴대전화 생산을 몇 달 만에, 그것도 엿장수 엿 잘라내듯 뚝딱뚝딱하더니 월 몇 만 대를 보란 듯이 생산했던 것이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은 그때쯤이었다.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인수하는 빅딜이 이뤄지면서 부푼 꿈은 거품으로 변했다. 위기에 처한 현대전자가 거래중지 통고를 해왔던 것. 2001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죽을 맛이었죠. 기계에 하얀 천을 씌워 놓았는데 마치 시체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것 같았어요. 모두들 망했다고 했죠.” 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었다. LG전자를 찾아가 ‘무작정 영업’을 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거래가 트였다. 다행인 것은 충전기가 무리 없이 잘 나가주고 있어 굶어죽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현재 이레전자는 월 50만∼60만 대 생산 규모의 라인을 갖고 매월 완제품 30만 대, 반제품 15만 대를 생산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휴대전화 누적매출은 600억원. 묘하게도 휴대전화를 직접 개발, 판매했던 곳은 예외 없이 시장에서 사라졌다. “우리가 만들면서도 믿기지 않은 날들이 있었어요. 초창기 시절 ‘완제품 월 10만대(생산)하면 모두에게 10만원씩 준다’고 했을 때 모두 ‘설마’했거든요. 그런데 2년 전 벌써 30만원을 나눠줬어요. 요즘에는 모두들 빨리 100만대 돌파하자고 난리입니다.” LCD 모니터

PC방에서 대박을 내다 2001년 초 알고 지내던 연구개발 회사의 사장이 제안을 해왔다. 자기네 LCD 모니터 사업을 인수하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충전기는 가격경쟁으로 돌입, 수익성이 나빠질 게 불 보듯 뻔했다. 다른 아이템이 있어야 했다. 고민하던 그는 반가운 마음으로 덜컥 받았다. 정보통신기기들이 휴대형으로 전환되고 있었고, 그 가운데서 가장 핵심적인 부품은 정보를 표시해 주는 디스플레이, 즉 화면이었다.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기술자까지 받았어야 했는데 기술만 받았거든요. 순진했죠. 우리는 이런 걸 만들어본 경험이 없잖아요. 인수는 했지, 상품은 안 나오지…. 어쩌겠습니까. 모니터 만든 경험이 있는 삼성이나 LG 물을 조금이라도 먹었다는 연구원들이나 전문가들을 수소문해 무조건 쫓아다녔어요. 매일 밤 10시가 넘으면 수원·안산은 물론이고 청주까지 달려가곤 했습니다. 빈손으로 갈 수 없어 피자나 순대·만두를 사들고 정말 무릎 꿇고 한 수만 가르쳐 달라고 애원했어요. 정성이 갸륵해서 그런지 조금씩 가르쳐주더군요. 그렇게 6∼7개월 만에 개발을 끝낼 수 있었어요.” 개발했다고 게임이 끝난 건 아니었다. 용산전자상가만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일반 시장을 공략할 자금도 브랜드도 없었다. 첫 돌파구는 금융기관이었다. 은행 직원 앞에 놓인 ‘뚱뚱한 모니터’로 인해 고객과 직원이 ‘담’을 쌓고 있다는 데 착안, 창구 직원 전용 모니터를 만들어 담을 허물었다. 업무대 아래에 있는 틈에 넣었던 것. 두 번째 돌파구는 PC방이었다. “뚱뚱한 브라운관(CRT) 30대 놓는 곳에 LCD를 놓으면 45대를 놓을 수 있다고 주인들을 설득했죠. 어디 그뿐입니까. 전기세도 3분의 1밖에 안 들게 설계했고, 화면에 안전 유리를 부착해 깨지지 않게 만들었어요. 아마 유리를 부착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처음이었을 겁니다. 도난 우려를 없애기 위해 스탠드형을 벽에 부착한 걸로 바꿔버렸어요.” 마침 대형 PC체인이 막 생겨나던 시점이어서 수요는 폭발적이었다. 1년에 300억원대를 팔았으니 시쳇말로 대박이었던 셈이다. 디지털 TV

“무지막지한 ‘올인’ 작전” 2001년 초. 구로공단에 있는 이레전자 사장실에 커다란 박스로 포장된 화물 한 개가 도착했다. 곧이어 정 사장이 연구원들을 호출했다. 포장을 뜯은 박스에는 정 사장이 네덜란드에 주문했던 1200만원짜리 필립스제 PDP TV가 들어 있었다. 곧바로 ‘해부’가 시작됐다. 정 사장이 물었다. “어때?” 정 사장의 물음에 베테랑 연구원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금까지 ‘맨주먹 개발’을 해왔지만 한눈에 봐도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만큼 구조가 복잡했다. 이제 모니터를 간신히 개발한 그들에게 그것은 숨이 턱 막히는 물건이었다. “사장님, 이건 안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삼성과 LG도 양산을 못하고 시제품을 생산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 하지만 정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오늘’은 남들이 못하는 것을 한 대가였다. 그는 98년 라스베이거스 전자쇼 이후 PDP TV 모형을 사무실 벽에 붙여놓고 날마다 TV를 마음속에 조각처럼 새기고 있었다. 삼성과 LG에서 근무했던 이들을 찾아나섰다. 마침 명퇴 바람이 불면서 나온 이들이 꽤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다 삼성 출신이 안양에 연구회사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그는 컴퓨터도 없이 사무실 하나 달랑 얻어놓은 이들을 발견했다. 실력은 있었다. 컴퓨터를 사 주고 계측기를 빌려주면서 개발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성공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의지로 되는 일도 아니었다. 정 사장에게나 연구원들에게나 하루하루는 사투였다. 더구나 주위는 물론 회사 내부에서도 반발이 심했다.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연구원에게 무언의 압력이 가해질 정도였다. 그러던 2003년 중반 정 사장은 다시 모든 것을 건 베팅을 했다. 개발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라인 깔기에 들어간 것. 실패하면 모두 실업자가 되는 상황이었다. TV개발의 주역인 박재석 차장은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 잠이 안 왔다”며 “하지만 그것은 우리(연구팀)를 무조건 믿는다는 뜻이기도 해서 죽을 힘을 다해 개발했다”고 말했다. 월급쟁이로 일하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새벽녘 불시에 연구소를 방문하곤 했던 정 사장은 등만 두드려주지 않았다. 얼굴이 노랗게 된 직원을 데리고 가 한약을 지어주었다. 기술 개발은 이런 상호 신뢰의 결과였다. 노력만 들어간 게 아니었다. 이 3년 동안 순수 투자액만 70억∼80억원에 이르는 등 100억원 이상이 들어갔다. 자본은 물론이고 기술도 일천한 중소기업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사업에 ‘올인’했던 것. 정 사장 스스로도 “무지막지한 투자였다”고 말했다. 뽑은 칼은 휘둘러야 했다. “아는 게 있어야죠. 삼성 출신 전문가들에게 직원들을 파견하면서 개발을 했습니다. 기술을 배워야 하잖아요. 첫 1년은 개발은커녕 이해만 겨우 하는 수준이었고, 다음 1년쯤 되니 (기술에 대한) 평가 정도는 하겠더군요. 회로 설계와 소프트웨어 독자 개발은 3년째인 2004년에나 가능했어요. 디지털 TV 생산은 2002년부터 시작했지만, 자체기술을 갖기까지 만 3년이나 걸린 겁니다.” 모든 것을 건 베팅은 2003년 9월 30인치 LCD TV와 42인치 PDP TV가 생산되면서 황금알로 변하기 시작했다. 전체 생산량 중 수출(ODM)이 60∼70%인 이레는 현재 국내 시장에는 자체 브랜드로 진출, 삼성전자·LG전자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중견기업 중 ‘시리즈’(다양한 구색)를 생산하는 곳은 이레전자가 유일하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연구원 규모가 500명 이상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60여 명이지만 화질이나 그래픽에서 손색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정 사장은 이미 다음 아이템에도 도전하고 있다. DMB(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 시대를 맞아 PMP를 개발해 놓고 있고, 얼마 전에는 차세대 디지털 TV로 평가되는 ‘J2’를 개발했다. 한 치 양보 없는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는…

“매출 1조하면 물러날 것” “품질에서만큼은 절대 뒤지지 않아요. 일단 제 목표는 삼성·LG에 이어 3등이 되는 겁니다. 각 회사들이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아 추측이긴 합니다만 지난 1분기 우리는 국내 (디지털TV) 시장에서 7~10%의 점유율을 기록했다고 봅니다.” 요즘 그는 숨을 고르고 있다. 너무 빨리, 너무 성급하게 달려온 것 같아서다. 빨리 달린다고 생존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레전자 주력 품목들의 경쟁자는 대기업. 승산이 있을까? “방법을 찾아야죠. 좋은 자본주를 찾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생존은) 가능할 겁니다. 하이마트 같은 곳에서는 우리가 삼성·LG를 제치고 가장 잘 팔리고 있어요. 앞으로는 (TV시장에서) 3등과 4등까지만 생존할 겁니다.” 규모가 커지면서 CEO 역할 하기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스스로와의 싸움이죠. 사실 이게 가장 힘들어요.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하면 (시장과 조직을) 리드할 수 없거든요. 외롭고 고독하죠. 스스로 역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면 괴로워요.” 책을 상당히 많이 읽으시는데요. “사장이 모르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대화가 안 되거든요.” 앞으로의 목표는 뭡니까? “(웃으면서) 솔직히 언제 물러날까 하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매출 1조원을 한 번 해보고 싶어요. 2008년을 1차 시점, 창립 20주년인 2010년을 2차 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 사장과 이레전자의 지난 15년은 중소기업이 어떻게 기술 도약을 이뤄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는 해답이다. 그는 특히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문식 사장 1962년 生
1981년 한양공고 전자과 졸업(야간)
1990년 이레전자산업 설립
1999년 벤처기업 대상. 전자산업 유공 대통령 표창
2000년 1000만불 수출탑 수상
2002년 코스닥 등록
승패를 가른 3가지 비결



“사업에는 지름길도, 급행료도 없다” 최근 정 사장은 많은 강의요청을 받는다. 그때마다 쏟아지는 질문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어떻게 가능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된 대답을 못한다. 사업에는 지름길도 급행료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가지는 추릴 수 있다.

1. 정보와 보는 눈이 있다 정 사장이 사업 시작 이후 단 하루도 거르지 않는 일이 있다. 신문을 보는 일이다. “(나보다) 더 많이 배운 사람과 경쟁하기 위해, 아니 조금이라도 앞서 가기 위해” 그는 하루 5개 이상의 신문을 읽었다. 정보에 대한 욕심은 본능에 가깝다. 사업 초기 그는 밤만 되면 인근 공장의 고스톱판으로 ‘출근’했다. 담배 심부름을 해 주면서 업계 동향을 귀동냥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귀동냥 눈동냥은 몇 년 후 박람회나 전시회 참관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입력된 정보를 그는 ‘미래를 보는 망원경’으로 활용한다. 그와 한 번이라도 일해 본 사람이라면 하는 말이 있다. “보는 눈이 있다”는 것이다. 휴대전화 부문을 맡고 있는 임영일 상무는 “보통 하나가 잘되면 우려먹기 십상인데 항상 다른 것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2. 신용은 처음이자 끝이다 열세 살 때 청계천 밑바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정 사장은 신뢰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다. 사업 초기 그는 정확한 납기와 철저한 품질로 신뢰를 키웠다. 이 같은 원칙은 지금도 지킨다. 특히 손해가 나더라도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그는 그렇게 생겨난 적자가 더 큰 흑자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제가 내세울 것은 신용밖에 없었습니다. 최대의 신용은 가장 좋은 품질이죠.” 정 사장과 오랫동안 일을 해온 곽덕근 부장은 “거드름을 피우는 일이 전혀 없고 심지어 용역직원에게도 인간적인 대우를 해준다”고 말했다. 직원들과의 신뢰도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3. 결정적인 승부수를 던진다 휴대전화 충전기를 개발한 정 사장은 어느 날 현대전자를 찾아갔다. 우여곡절 끝에 샘플을 납품한 뒤 2주일쯤 지나 연락이 왔다. “아주 훌륭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4000대가 필요한데 첫 납품은 언제쯤 가능할까요?” “내일 당장 납품하겠습니다.” “아니 4000대 물량 말입니다.” “그래요. 내일 납품할 겁니다.” 당시 현대전자는 대대적인 휴대전화 판촉을 앞두고 갑자기 기존 거래처의 충전기에 하자가 발생해 다급한 입장이었고, 정 사장은 납품을 위한 성능 테스트를 통과하기도 전에 전량을 미리 만들어놓는 승부수를 던졌던 것이다. 그는 “사업가라면 기회를 포착하는 매서움이 있어야 한다”며 “남처럼 하면 남 이상 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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