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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성장 발목 잡는 ‘규제 올가미’

경제성장 발목 잡는 ‘규제 올가미’

오피니언 리더 100명 중 59명이 기업활동 규제를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여섯 번째 화두로 꼽았다. 일반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8.9%가 기업활동 규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정부가 1998년 규제개혁위원회 출범 이후 꾸준히 규제 완화를 추진했지만 국민 눈에는 아직도 ‘규제공화국’으로 비치고 있는 셈이다. 외국인들도 한국에 투자하는 데 대한 애로점으로 경직된 기업활동 규제를 서슴지 않고 꼽고 있다. 무역협회의 ‘규제현장조사위원회’는 지난해 8월부터 5개월간 100여 명의 인력을 투입, 규제 현장을 조사했다. 그러는 와중에 부산시의 한 항만구역 안에 1만2000㎡의 창고를 지은 한 기업이 1억1000만원을 들여 현대 미술품을 구입한 사례를 접했다. 이 회사가 미술품을 사들인 이유는 1만㎡ 이상의 건축물을 지을 때는 미술 장식품을 설치하도록 의무화한 문화예술진흥법 시행령을 지켜야만 준공 승인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항만구역은 일반인의 출입이 차단된 곳인데도 이 회사는 경직된 규제에 막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큰돈을 들여 미술품을 구입한 것이다. 무역협회 관계자는 “경제 현장에 아직도 이처럼 경직된 규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마당에 기업인들이 정부의 규제 완화를 체감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정부는 그동안 규제 완화를 꾸준히 추진했다. 2004년에는 총리실 규제개혁단을 출범시키고 새로운 규제가 생기는 것을 막는 한편 새로운 규제가 경제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사전 검토한 뒤 규제를 도입하는 제도를 도입했으며 지난해에는 행정조사기본법을 입법 예고했다. 이런 노력은 외관상으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98년 말 1만191건이던 규제 건수가 지난해에는 8028개로 줄었다. 중앙정부의 인허가 수는 98년 말 2422개이던 것이 2004년에는 1700개로 감소했다. 하지만 기업인이 체감하는 규제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창업을 예로 들어보자. 김광희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발표한 ‘기업환경 개선을 위한 규제개혁 연구보고서’를 통해 “세계은행이 155개국의 창업 환경을 조사해 순위를 매긴 결과 우리나라는 97위였다”고 밝혔다. 2004년을 기준으로 서울에서 ‘주식회사’ 형태의 기업을 창업하려면 12단계의 승인 절차를 거치고, 22일이 소요되며, 비용은 1인당 국민총소득(GNI)의 15.2%인 2195달러가 드는 것으로 조사됐다. 창업 절차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평균(6단계)이나 전체 평균(9단계)보다 복잡한 것은 물론 소요 기간과 비용도 OECD 평균(19일, 1인당 GNI의 6.5%)보다 훨씬 부담스러운 수준이다. 특히 공장 건설을 하는 제조업을 창업하는 경우에는 관련 규제가 328건이나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KDI는 같은 보고서에서 “한국의 규제 강도는 호주·영국·미국·일본·EU·캐나다 등보다 훨씬 강하며 OECD 국가 가운데서도 중위권 수준에 머물고 있다”며 “한국은 여전히 규제가 심한 나라에 속한다”고 결론지었다. KDI 설광언 선임 연구위원은 역대 정권이 규제 완화를 경기 활성화 대책으로 다룬 탓에 실효가 없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역대 정권 모두 집권 초기에는 규제개혁을 중요 정책으로 내걸었다가 경기가 좋아지면 이를 등한시했다”며 “경제가 나빠지는 상황이 오면 규제가 경기회복의 걸림돌이라고 지적하며 이를 다시 내세웠다”고 밝혔다. 이런 현상이 반복된 탓에 규제개혁은 민간의 자율성을 확대하고 창의성을 높이자는 목적으로 실행되기보다는 경기 부양을 위해 기업의 애로사항을 해결해 준다는 차원으로 다뤄졌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업 활동과 관련된 각종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에만 치우쳐 왔다는 얘기다.

중소기업, 30년째 ‘300명 미만’ 우리 경제의 몸집은 비대해졌지만 산업 현장에서는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낡은 제도가 변함없이 이어져 오는 경우도 많다. 제조업의 중소기업 범위를 지정한 규정이 대표적이다. 현행 규정은 ‘자본금 80억원 이하 또는 근로자 300명 미만’인 기업을 중소기업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 중 ‘300명 미만’ 규정은 76년부터 30년째 이어져 온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수도권 공장 총량 규제나 수도권 기업에 대한 취득·등록세 3~5배 중과세 제도도 큰 틀의 변화가 없는 제도다. 외부 감사 의무화 기업도 98년 자산 규모 70억원 이상으로 상향 조정된 뒤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반면 1998~2005년 GDP는 무려 67%나 상승하면서 외감법인 대상 기업 수는 98년 7725개에서 2005년 9월 현재 1만4029개로 늘어났다. 이런 규제 중에는 오랫동안 국민 정서를 토대로 규제 명분을 축적해온 탓에 이제는 아예 개정 논의조차 금기시되는 ‘성역화된 규제’도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수도권 공장 총량 규제, 출자총액제한 제도 등은 성역화한 규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한다. 수도권 공장 총량 제도는 수도권 인구 집중을 막자는 취지에서 생긴 규제. 재계 관계자는 “인구 집중을 억제하는 효과가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업 투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평가까지 받고 있지만 정부의 태도는 요지부동”이라고 말했다.

연도별 행정규제
 
1968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규제 건수
10191
7129
7158
7462
7726
7838
7828
8028
삼성전자가 2003년 차세대 성장 산업인 반도체 산업에 대한 투자를 위해 경기도 화성공장의 증설을 추진했지만 이 같은 규제로 인한 허가 지연 등으로 애를 먹었다. 출자총액제한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경제연구원 황인학 연구조정실장은 “출자총액제한 규제는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을 막는다는 규제 효과가 이미 없어졌다”며 “하지만 정부는 ‘대기업 개혁의 후퇴’라고 받아들여질까봐 개정이나 완화를 미루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쪽도 이 같은 규제의 문제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최근 대한상의가 주최한 간담회에 참석해 “원칙적으로는 개별 행위를 규제하고 단속하면 되는데도 현실적인 조사기능 부실 등으로 원천 봉쇄 규제와 출자총액제한 제도, 금융·산업 분리 등의 제도를 이용하고 있는 모순점이 있다”며 “이 같은 규제가 기업들에 필요 이상의 부담을 주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무역협회에 따르면 한 무역회사가 제주시 탑동 연안에 3000t 규모의 배를 정박시켜 해상 예식장 겸 뷔페사업을 하려고 사업 허가를 신청했으나 거부당한 사례가 있다고 한다. 제주시가 허가를 거부한 것은 해상 예식장이라는 업종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현행 관광진흥법 시행령은 해양관광 업종으로 수상관광호텔업, 관광유람선업, 요트장업 등 3개만 허용한다. 돈을 투자해 고용도 늘리고 새로운 관광 서비스 산업을 개척하겠다는 기업의 의지가 경직된 규제 때문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규제는 기업의 투자를 위축시키고 기업의 의욕을 꺾는다. KDI는 최근 “우리나라가 국제경영대학원(IMD)에서 조사하는 42개국 평균 수준으로 기업활동을 규제했다면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연평균 약 0.5%p 정도의 추가적인 경제성장을 이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정부가 고용 창출의 새로운 터전이 될 것으로 기대하는 서비스업 분야는 규제개혁이 더욱 시급하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서비스업은 제조업보다 규제의 수가 많아 발전 속도가 늦다”며 “출자총액제한 제도를 완화해 대기업들도 서비스업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서비스업의 규제로 인한 진입 장벽을 낮추고 유통업에는 토지 이용이나 입지에 관련된 규제를 줄이면 서비스업의 투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료 서비스업의 경우 현행법이 민간 의료법인에 대해 비영리 활동만을 허용하고 있어 의료법인들이 대규모 투자 유치를 하기 힘든 상황이다. 이런 탓에 노인의료·의료관광 등 새로운 의료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고 있지만 이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외국 병원에 빼앗기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태국 병원들의 경우 푸껫 등 자국의 휴양지 관광과 건강검진 등 의료 서비스를 연계해 한 해 100만 명 이상의 의료 관광객을 유치하는 등 호황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태국보다 훨씬 앞선 의료 기술이 있는 우리는 관련 규제로 인해 뒤처지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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