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을 떠나라.” 박사급 인재가 몰려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연구개발단지인 대전시 유성구와 대덕구 일대의 대덕연구개발특구에서는 요즘 구조조정이 한창이다. 부서를 통폐합하거나 사람을 줄이는 구조조정이 아니다. 연구실에만 틀어박혀 있던 박사들의 아이디어와 연구실적을 비즈니스로 연결하기 위한 구조조정이다. 2005년 7월 28일 대덕연구단지를 포함해 대전시 대덕구·유성구 일대 2130만 평이 대덕연구개발특구로 지정된 이후 시작된 일이다. 대덕이 특구로 지정되면서 내건 비전은 “세계 초일류 혁신클러스터”이다. 첨단기술을 공급함으로써 대덕을 창업과 생산활동의 메카로 육성해 새로운 국가 성장동력을 창출하겠다는 게 목표다. 이를 위한 당면 과제는 연구 실적의 비즈니스화다. 연구를 위한 연구만 할 게 아니라 돈이 되는 연구를 해보자는 것이다. 대덕연구개발특구지원본부의 박인철 이사장은 최근 대덕의 변화에 대해 “국내 과학기술의 요람인 대덕을 리모델링함으로써 우리나라를 업그레이드해 보자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지난 30여년 동안 30조원을 투자해 대덕에 축적된 혁신역량을 극대화하고 글로벌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앞으로 10년 내에 세계 5위권의 혁신클러스터로 도약하겠다는 것이다. 특구 내 기업체 수를 2010년 1500개, 2015년 3000개로 늘리고 이들 기업에서 2010년 12조원, 2015년에는 30조원의 매출을 올린다는 것이다. 모두 2130만 평에 이르는 대덕연구개발특구는 크게 5개 지역으로 구성돼 있다. 기존의 대덕연구단지 840만 평과 현재 개발이 진행 중인 대덕테크노밸리 129만 평, 개발이 완료된 대전 3, 4산업단지 95만 평, 북부 그린벨트 지역 753만 평, 국방과학연구소 150만 평 등이다.
연구실적 판매경쟁 치열 허허벌판이던 대덕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기까지 걸린 기간은 30년이 넘는다. 대덕의 발전 양상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이석봉 대덕넷 대표는 “연구단지가 중심이던 2000년까지가 1기라면, 잇따른 벤처 창업으로 과학기술과 벤처의 ‘한 지붕 두 가족’ 시대를 열었던 2000~2005년의 대덕밸리시대가 2기, 그리고 연구결과의 사업화에 나선 2005년 이후의 특구 시대를 3기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구 지정 이후 대덕에서는 활기가 넘치고 있다. 곳곳에 타워크레인이 들어서고, 시끄러운 중장비 소리도 일상사가 됐다. 특구를 상징하는 ‘대덕이노폴리스’라고 쓴 현판이 곳곳에 서 있다. 특히 호남고속도로 대덕밸리 IC 인근 테크노밸리 쪽의 변화가 눈에 띈다.
대덕 특구가 성공하려면 |
클러스터 네트워크 허브 지향 문턱을 낮춰라. 대덕만으로 클러스터를 형성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광역 클러스터를 만들어라.
폐쇄적인 대덕 문화 버려라 초일류 혁신 클러스터의 관건은 강하면서 유연한 산·학·연 연계다. 특히 인적 교류가 활발해야 기술 사업화도 꽃핀다.
맞춤형 인력공급 구조 확보 인력양성도 현장 중심으로 해야 한다. R&D 역량을 극대화하려면 기업 수요에 기초한 인력양성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대덕 고유의 비즈니스 모델 창출 클러스터 성공 방정식에는 모범답안이 없다. 기존 자산을 활용해 대덕 고유의 벤처 생태계를 만들어라. 박용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 |
상가 건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 들어서는가 하면, 고층아파트도 쑥쑥 올라가고 있다. 대덕테크노밸리가 들어선 곳은 불과 5~6년 전만 해도 벌판이었던 곳이다. 특구지원본부에서도 산업용지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특구지원본부 서준석 국제협력팀장은 “1단계로 대전시 유성구 죽동·신성·방현 등 3개 지구 45만 평이 2012년 말까지 개발된다”며 “이곳에는 새로 창업하는 벤처기업들을 집중 유치할 계획”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2단계로 북부 그린벨트 지역의 신동·둔곡 지구 등을 중심으로 127만 평을 개발해 산업용지로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이 같은 양적 팽창과 함께 대덕특구의 질적 변화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 중이다. 방향은 네 가지다. ▶연구성과 사업화 촉진 ▶벤처생태계 조성 ▶글로벌 환경구축 ▶타지역 연계, 성과 확산 등이다. 현지 연구소나 기업들이 특히 역점을 두는 부분은 연구성과의 사업화다. 특구 출범 이후 7개월여 만인 2006년 3월 대덕에서는 원자력연구소가 출자해 제1호 연구소기업인 ㈜선바이오텍을 창업했다. 기술의 사업화에 성공한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인텍플러스는 한국기계연구원의 기술지원을 받아 차세대 반도체 외관 검사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 회사가 개발한 기술로는 시간당 3만 개의 반도체칩을 검사할 수 있다. 종전 제품에 비해 1.5배의 속도다. 이 회사 이상윤 연구책임자는 “2008년까지 검사 속도를 시간당 4만 개까지 높여 그 해 370억원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며 “2009년에는 1100억원의 매출로 세계시장의 34%를 차지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와이브로도 대덕서 나와 기술 이전 및 거래도 활발하다. 특구 출범 이후 1년 새 600여 건의 기술이 벤처기업 등으로 이전됐다. 2005년의 559건에 비해 10%가량 늘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이를 위해 IT기술이전본부까지 만들었다. 특구지원본부는 올 들어 두 차례에 걸쳐 기술이전 설명회를 갖고 앞으로도 분기별로 열기로 했다. 벤처기업들도 활기가 넘친다. 1년여 전 서울에서 대덕으로 본사를 옮긴 서울프로폴리스㈜의 이승완 대표는 “대덕은 서울과 달리 벤처기업과 지원기관들이 한곳에 몰려있다 보니 마케팅이나 기술 등 도움이 필요할 경우 곧바로 받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고 말했다. 특구 내 벤처기업을 위한 투자펀드도 만들어졌다. 지난 9월 800억원으로 출범한 이노폴리스 투자조합에는 과학기술부가 400억원을 출자하고 모태펀드, 대전시, 산업은행 등이 참여했다. 이 펀드는 내년 말까지 1000억원으로 규모를 늘린다. 그렇다면 대덕특구가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장점을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면 된다. 사실 대덕만큼 장단점이 뚜렷한 곳도 없다. 첨단분야를 선도하는 연구소와 고급 인력, 세계적인 기술력은 대덕이 성공하기 위한 충분한 잠재력으로 꼽힌다. IT는 물론 BT, 나노기술(NT), 기계, 부품소재, 항공우주, 국방 등 과학기술 각 분야의 인력과 기술이 풍부하다. 사실 30여년 동안 축적된 대덕의 R&D 인프라는 국내 최고, 최대 규모다. 21개 정부출연 연구기관이 있고, 우리나라가 보유한 지적재산권의 10%가 있다. 또 국내 박사급 연구인력의 10%인 5800여 명이 몰려 있다. 연구장비를 기준으로 하면 전국의 24%가 이곳에 있다. ETRI 같은 주요 연구기관이 보유한 해외특허도 1814건에 이른다. CDMA 상용화와 D램 반도체 개발, 전전자교환기(TDX) 개발, 와이브로와 DMB 개발, 한국형 원전개발, 핵연료 국산화 등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고 있는 굵직굵직한 업적들이 모두 대덕에서 나왔다.
산업단지로서의 입지도 뛰어나다. 우리나라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는 데다 교통망도 사통팔달이다. 경부와 호남 고속도로가 갈라지고, 기존 철도는 물론 KTX도 통과한다. 국내 어느 지역이건 두 시간 이내에 도착한다. 인근 공주·연기 지역에는 행정중심 복합도시가 들어설 예정이다. 대덕 자체의 주거환경도 대폭 개선됐다. 1980년대만 해도 대전시에서 뚝 떨어져 연구원들끼리 모여 살았지만 90년대 갑천 건너편의 둔산지구가 개발되면서 대전의 핵심 지역으로 떠올랐다.
‘고립된 섬’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단지가 처음부터 연구실 중심으로 커오다 보니 산업생산을 주도할 대기업이 없다는 게 문제다. 비싼 땅값과 부족한 용지가 걸림돌이다. 벤처생태계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도 문제다. 금융과 법률, 경영 컨설팅 등 초창기 벤처에 필요한 지원은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국제화도 더디기 짝이 없다. 특구 내 외국인 투자기업은 34곳, R&D센터는 4곳에 불과하다. 그나마 테크노밸리에 집중돼 있을 뿐 연구단지에는 외국인 기업이 한 곳도 없다. 과학기술부가 주도하고 있는 특구 개발의 주체도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연구단지 시절엔 과기부가 대덕의 발전을 이끌었으나, 기술의 사업화를 당면과제로 정한 만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산업자원부 등 경제부처의 참여 폭을 대폭 넓혀야 한다. 부처 간 원활한 협력을 위해서는 총리실에서 주관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연구원들의 비즈니스 경험 부족을 보완할 시스템 마련도 시급하다. ETRI의 박권철 IT기술이전본부장은 “연구소 기업을 장려하지만 연구만 하다 보니 기업에 대한 개념이 부족해서 어려움이 많다”며 “민간기업의 노하우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부권 다른 산업단지와의 협력 및 연계도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충남의 탕정 LCD 단지나 충북의 오창 단지까지는 20~30분 거리에 불과하다. 대덕은 IT 연구인력이 풍부하고 탕정과 오창은 R&D보다는 생산거점으로서의 성격이 짙다. 이들 중부권 신생 산업단지와의 역할분담도 고려해야 할 사안이다. 삼성경제연구소 박용구 수석연구원은 “과거 ‘고립된 섬’으로 불리던 대덕이 특구로 성공하려면 열린 클러스터로 전환하려는 보다 적극적인 의지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인터뷰 박인철 특구지원본부 이사장 |
“첨단의료단지 대덕에 유치하겠다” “소득 1만 달러까지의 발전모델은 카피 기술과 외자, 값싼 노동력이 중심이었지만 이를 뛰어넘으려면 이런 전통적 방법을 버리고 연구개발(R&D)과 산업을 연결해 이를 혁신시키는 모델로 가야 한다.” 대덕특구의 화두는 ‘연구실적의 비즈니스화’다. 각종 연구소와 벤처기업들은 요즘 사업 가능한 아이템을 찾느라 눈이 벌겋다. 특구지원본부의 박인철 이사장은 대덕의 역할에 대해 “전국 산업단지에 대한 R&D 기능도 하고, 자체적으로 기술의 산업화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 산업구조는 외환위기 이후 크게 달라졌다. 대덕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외환위기 이후 벤처 붐을 타고 대덕에서도 많은 벤처기업이 설립돼 우리 경제를 되살리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창업 4~6년차에 접어들면서 기술 맹신주의 등으로 실패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특구지정 이후 대덕은 지난 30년 동안 축적된 기술역량과 인프라에 사업화 능력을 결합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전통산업에 첨단기술을 접목함으로써 기존 산업단지에서는 찾을 수 없는 혁신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연구실적을 산업화하기 위한 방안은. “대덕은 IT 비중이 50%를 넘는다. BT를 늘리고 관련 기술의 융복합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추진 중인 첨단의료복합단지가 대덕에 들어서야 한다. 대덕에는 IT, BT, 하이테크 등 없는 게 없다. 생명연, KAIST, ETRI 등도 대덕에 있지 않나. 의료복합단지 부지는 이런 점을 감안해 경제적 관점에서 결정돼야지 정치적 차원에서 결정되면 안 된다. 중복 투자는 국가적으로 낭비다.” 대덕에는 대기업이 없다. 유치 방안은? “일단 사업테크노밸리 내 3만여 평을 대기업을 위해 개발해 유치활동을 진행 중이다. 이와 별도로 첨단기술 기반의 스타 기업을 육성하고, 중견기업과의 기술협력을 강화함으로써 비즈니스 기능을 강화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특구가 성공하기 위해 더 필요한 게 있다면. “우선 기업가정신이다.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연구원들의 마인드가 달라져야 한다. 하드웨어도 부족하다. 디자인이나 장비개발 등은 신생 기업에서 개별적으로 투자하기 어렵다. 필요한 부분은 외부 기관에서 지원해주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글로벌화도 과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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