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통행료’만 연 390억 달러
 | ▶도네츠크의 파이프라인 공장 | |
2006년 1월 1일. 이날 오전 10시 러시아 최대의 에너지 회사인 가스프롬은 우크라이나로 가는 가스 공급을 전면 중단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친서방 정책을 표방한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러시아 가스에 목을 매고 있는 서유럽 국가들에겐 ‘에너지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시위이자 도발행위였다. 비록 사흘 동안의 시위였지만 전 세계는 가스프롬을 앞세운 푸틴의 압박작전에 경악했다. 명목상으론 ‘시장 가격’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소련 시절엔 ‘친구 가격’을 받았지만 이젠 아니라는 것이 이유다. 협상 결과 1000㎥당 50달러 하던 가스값은 95달러로 ‘더블’이 됐다. 시장 가격(230달러)보다는 싸지만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겐 ‘미칠 노릇’이다. 가스값 인상으로 공공요금과 생필품값이 30% 이상 올랐기 때문이다. 친러시아 성향에다 공업도시가 많은 동부 사람들은 유셴코의 친서방 정책이 더 못마땅하다. 이 지역에서 나오는 철강·화학 제품이 주력 수출품인데, 가스값 인상으로 국제 가격경쟁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가스값 인상은 이렇게 우크라이나에 이중의 고통을 안겨준다.
러시아 가스 80% 지나가 다른 유럽 국가들에도 연초의 ‘우크라이나 사태’는 간단하게 볼 문제가 아니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체코·불가리아 등 주요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 가스의 60~80%를 우크라이나 가스 파이프라인을 통해 들여온다. 러시아의 대(對)유럽 수출용 가스는 하루 3억6000만㎥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러시아의 가스 공급 중단사태에 대해 미국과 유럽이 입을 모아 “러시아가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며 ‘자원 무기화’에 항의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적인 자원 대국이지만 우크라이나의 아킬레스건은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이 넉넉지 않다는 것이다. 석유나 천연가스 생산량이 자국 소비량에 훨씬 못 미친다. 가스 생산량만 해도 연간 200억㎥에 불과하다. 그런데 중공업 위주의 경제구조 탓에 가스 수입량(600억㎥)이 세계 4위, 소비량(연간 800억㎥)이 세계 6위다. 그중 30% 가량을 러시아(240억㎥)에 의존하고 있다. 70억㎥는 돈을 주고 사오고 나머지 170억㎥는 가스관 통과료 명목으로 받는 것이다. 나머지 360억㎥는 ‘가스 위에 떠 있는 나라’ 투르크메니스탄에 의존하고 있다. 어쨌든 가스 통관료, 즉 자릿세로만 연간 170억㎥의 가스를 공짜로 받는 것이다. 돈으로 치자면 약 391억 달러어치(㎥당 230달러 기준)다. 입이 쩍 벌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전 세계 가스 매장량의 4분의 1을 가지고 있는 러시아는 수출량의 80%를 유럽으로 보낸다. 그중에 80% 이상이 우크라이나를 거치게 돼 있다. 2004년 현재 가스 파이프라인 길이가 자그마치 2만69㎞(미국 CIA 자료)다. 영국계 석유회사인 BP가 주도해 바쿠~트빌리시~세이한을 연결한 BTC 라인(1770㎞)보다 11배나 긴 것이다. 지구 둘레가 4만여km인 것을 감안하면 우크라이나의 가스관으로 지구를 반 바퀴 가까이 돌릴 수 있다. 파이프라인은 벨로루시로부터 폴란드·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 등으로 촘촘하게 연결돼 있으며, 조만간 투르크메니스탄으로부터 시작되는 또 다른 라인이 완공된다. 또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로부터 가스 통과료로 100㎞마다 1.6달러를 받는다. 지난해 우크라이나를 거쳐 유럽으로 간 가스 총량은 13070억㎥. 수송 수수료로 받은 돈이 7억6400만 달러다. 국영 가스회사인 ‘나프토가즈 우크라이니(NaftoGAZ Ukrayiny)’가 가스 수송을 맡는다. 이 회사는 당연하게도(?) 우크라이나 부동의 톱 자리에 있다. 우크라이나 경제지인 ‘인베스트 가제타(Invest Gazeta)’는 매년 경영 컨설팅 업체인 어니스트 영의 감수를 거쳐 ‘100대 베스트 기업’을 발표하는데, 이 회사는 5년째 매출·이익·수출 등에서 1등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매출이 400억 그리브나(약 80억 달러)를 넘는다. 나프토가즈의 전 사장인 유리 보이코가 유셴코-야누코비치 연정에서 에너지부 장관에 기용됐다는 것으로도 이 회사의 ‘위상’을 보여준다. 우크라이나의 지경학(地經學·geo-economics)적 가치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파이프라인이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원유 수송루트인 ‘오데사-브로디 라인’이다. 지난 8월 우크라이나에서 발행되는 영자지 ‘키예프 포스트’에는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실렸다. 제목이 ‘오데사-브로디가 새로운 트위스트를 추게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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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는 이렇다. 우크라이나는 지난 2001년 총연장 667㎞ 길이의 오데사-브로디 파이프라인을 건설했다. 브로디는 우크라이나 서부의 폴란드 접경 도시다. 오데사-브로디 라인 연결로 우크라이나는 흑해에서 서유럽으로 직통하는 중요한 파이프라인을 갖게 된 것이다. 2004년까지만 해도 오데사-브로디 라인은 미국과 러시아의 견제 때문에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어디로 오일이 흐르느냐에 따라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선수를 친 것은 러시아다. 2004년 영국과 러시아 합작업체인 TNK-BP와 우크라트랜스나프타(UkrTransNafta)는 오데사-브로디 라인을 사용하기로 계약을 한다. 우랄산 원유를 브로디로 끌어와 오데사까지 보낸 다음 다시 유조선을 이용, 흑해를 통해 수출한다는 구상에서였다. TNK-BP는 우크라이나 송유관을 통해 연간 200만 배럴의 원유를 수출했다. 미국과 EU·터키는 반발할 수밖에 없다. 겉으론 “석유 물동량이 증가함에 따라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선박 지체현상이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내심 러시아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의존도가 더 높아지면 미국과 유럽의 영향력이 축소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어쨌든 러시아에 오데사-브로디 라인을 내주면서 우크라트랜스나프타는 TNK로부터 1억800만 달러를 받았다. 그러나 내년께부터는 이런 오일의 흐름이 달라질 듯하다. ‘브로디~오데사’에서 ‘오데사~브로디’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키예프 포스트’는 지난 7월 우크라트랜스나프타가 투자은행인 메릴린치로부터 1억2000만 달러를 투자받았다고 보도했다. 기사는 또 “우크라트랜스나프타가 이 돈으로 TNK로부터 투자받은 자금을 돌려주고 대신 오일의 방향을 바꾸려고 한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되면 카자흐스탄에서 캔 원유가 오데사를 통해 브로디로 간다. 카자흐스탄과 아제르바이잔에는 셰브론텍사코 등 서방 측 원유회사들이 주로 사업을 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폴란드 플로츠크와 브로디를 잇는 500㎞의 브로디-플로츠크 라인을 오데사-브로디 라인과 연결할 계획까지 가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입김이 그대로 작용한 것이다. 계획대로 되면 유셴코 정권으로서도 러시아를 향해 효과적인 시위를 한 셈이다. 여기에 이어 아제르바이잔-우크라이나-벨로루시 가스관 프로젝트도 진행되고 있다.
흑해 경제권이란… | 러시아·불가리아·우크라이나·루마니아·그루지야·그리스·터키 등 흑해 연안의 11개 나라가 주도해 만든 경제권. 흔히 ‘CEMN(Economic Corporation in the Black Sea Area)’으로 불리며 지난 1992년 창설돼 회원국 간 금융·산업·무역 분야의 협력 촉진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회원국 간 ‘색깔’이 너무 달라 흑해무역은행 개설 외에는 아직까지 구체적인 활동이 없는 상황이다. 임금이 싸면서 근로자 수준이 높고,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뛰어난 지정학적 이점으로 향후 전 세계에서 가장 잠재력 높은 경제권으로 꼽힌다. | |
‘파이프 라인’ 전쟁 치열 그런데! ‘자리’만 가지고 연간 수백억 달러를 챙기는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러시아가 가만있을 리 없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에너지 전략 2020’을 통해 단일 가스 공급 시스템(Unified Gas Supply System·UGSS)을 밝혔다. 요는 러시아 전역의 내수 및 수출용 가스 파이프라인을 단일 시스템으로 구축하고 국가가 관리·통제하겠다는 것이다. 야심적으로 추진하는 프로젝트 중 하나가 ‘북유럽가스관(NEGPC)’ 건설이다. 지난해 12월 푸틴은 NEGPC의 최고 책임자에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를 임명했다. 슈뢰더의 공식 지위는 주주위원회 의장이지만 NEGPC의 실권을 쥐고 있다. NEGPC는 47억5000만 달러를 들여 러시아에서 영국 사이에 1200㎞ 길이의 가스 파이프라인을 설치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다. 북해 바닷속으로 파이프라인이 들어갈 계획인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해 중간에 네덜란드 비보르크, 독일 그라이프스발트를 거쳐 영국 백턴으로 향한다. 유럽 국가들과 가스 직거래를 통해 에너지 대국의 실력을 제대로 인정받겠다는 계산이다. 또한 우크라이나와 폴란드를 견제하기에도 효과적이다. 독일이나 네덜란드로서도 가치가 있는 일이다. 독일의 대표적인 화학회사인 바스프도 이 매력적인 사업에 24.5%나 지분을 댔다. 한쪽에선 흐름을 바꾸고, 다른 한쪽에선 새로운 직항 라인을 개척하고-. 서로 발목을 잡고 당기는 ‘파이프 라인 전쟁’이 ‘형제의 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흑해 물류 중심 꿈꾸는 오데사 |
돈과 사람 몰리는 낭만의 도시  | ▶‘포템킨 계단’에서 바라본 오데사 부두. | | 영화학도들에게 오데사는 이름만 들어도 흥분되는 곳이다.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걸작 ‘전함 포템킨’에 나오는 유명한 계단 장면 때문이다.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아이가 탄 유모차가 아래로 떨어지는 ‘계단 장면’은 몽타주 기법의 교과서로 불린다. 오데사 부두와 시내를 잇는 이 계단은 지금도 바다 향기를 날리면서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다. 낭만의 도시 오데사는 1794년 예카테리나 여제에 의해 러시아 해안의 요새를 짓기 위해 개척됐다. 이후 러시아가 유럽으로 나가는 통로가 됐다. 지금은 크리미아 반도와 함께 우크라이나의 양대 관광지로 명성을 더하고 있다. 지금 오데사는 흑해의 물류 중심을= 꿈꾸고 있다. 오데사 해운항만청의 드미트리 보로비오프 운영 책임자는 “러시아를 비롯해 벨로루시·그루지야 등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이 항만시설을 이용한다”며 “흑해 연안 20여 개 항만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며 경쟁력 있는 항만”이라고 강조한다. 향후 흑해 경제권이 뜰 경우 가장 먼저 돈과 사람이 올 곳이란다. 보로비오프 씨의 말대로 우크라이나와 서부 러시아의 철강 유통은 대개 흑해를 통한다고 보면 맞다. 오데사는 연간 8900만t의 철강 제품을 취급한다. 우크라이나에서 유통되는 철강·곡물·원유·설탕 등 모든 물동량의 30%를 여기서 책임지고 있다. 벨로루시·러시아·몰도바·카자흐스탄 등지에서도 주문이 많다. 몰도바는 거의 모든 무역 물동량을 오데사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다. 오일 유통지로서도 중요한 길목이다. 러시아·카자흐스탄 원유가 연간 7000만t씩 유통되고 있다. 여기서 나온 원유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 이탈리아·터키·불가리아로 간다. 흑해 내에서 오일 수송량 1위다. 오데사 항만은 5만t급 일반 화물선 10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규모. 컨테이너 선석도 2개가 있다. 보로비오프 씨는 “폭이 32m가 넘는 7만t 급 컨테이너선이 접안할 수 있는 항만은 흑해에서 오데사가 유일하다”고 자랑한다. 다른 물류 인프라도 좋다. 키예프·모스크바를 비롯해 빈(오스트리아), 바투미(그루지야), 이스탄불(터키)을 잇는 정기항로가 잘 깔려 있고 최근엔 키예프~오데사 간 고속도로가 개통됐다. 무엇보다 국가와 주(州)정부의 오데사 항 개발에 대한 의지가 적극적이다. 유셴코 대통령은 흑해 지역에 8억8200만 달러를 투자해 새로운 컨테이너 터미널을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물류가 집중된 곳에 돈이 모이게 마련이다. 역시나, 외국계 자본이 들어와 있다. 심지어 인도 자본까지 들어와 있다. 다섯 개의 항만 터미널 가운데 두 곳이 이미 외국계 소유다. 가장 큰 제1항만은 독일계 마르트레이드와 오스트리아계 보리스트알파인이 합작 운영하고 있다. 제2항만은 이스틸이라는 인도 회사가 경영하고 있다. 보로비오프 씨는 “적극적으로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고 말한다. ‘믿을 수 있나’고 묻자 “교통부에서 보증한다. 오데사는 15년 후 두 배 이상 성장한 항만이 될 것이다”고 큰소리를 쳤다. 물론 오데사 항은 한계도 있다. 도심에 항만시설이 있기 때문에 규제가 많다. 컨테이너 물동량을 늘리고 싶지만 현재로선 1~2선석밖에 늘릴 수 없다. 그래서 오데사 주의 장기 계획은 인근의 유즈니 항과 일리체브스크 항을 동시에 개발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일리체브스크 항을 철강 유통의 중심지로 키우고 오데사는 대신 크루즈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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