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10년을 이야기할 때 ‘하이닉스 반도체’를 빼놓을 수 없다. 하이닉스의 태생부터 매각 진통, 이후 일어난 회생 기적은 모두 외환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99년 현대전자와 LG반도체의 빅딜로 탄생한 하이닉스는 당시 부채가 15조8000억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2001년 세계적인 반도체 경기 악재까지 겹쳐 하이닉스는 유동성 문제에 부닥쳤다. 회사의 주인은 채권은행들로 바뀌고 2002년 외국계 회사에 매각이 추진되기도 했다. 하이닉스라는 이름이 우리 기업사에서 영원히 지워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이닉스는 기적처럼 회생했다. 2003년 3분기부터 14분기 연속 흑자 행진을 하고 있다. 2005년 총 매출액은 5조9050억원, 순이익은 1조8051억원에 달한다. 2006년도 4분기 영업이익은 8580억원이었다. 같은 기간 하이닉스보다 많은 영업이익을 기록한 곳은 삼성전자(2조524억원)와 포스코(1조970억원) 뿐이었다. 2003년부터 반도체 경기가 좋아진 ‘운’도 따랐지만 믿을 수 없는 성공이다. 2001, 2002년은 ‘하이닉스가 죽어야 반도체 경기가 산다’‘하이닉스는 무조건 매각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다. 정부는 하이닉스의 독자 생존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 매각하는 것을 기정 사실화하는 방향으로 끌고 갔다. 채권단 역시 절반 이상이 매각에 찬성한 상태였다. 이후 이사회의 반대를 거치며 매각이 무산됐지만 이후에도 ‘매각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만약 하이닉스가 마이크론사에 매각됐다면 연 2조원 규모의 수익을 미국에 고스란히 넘겨주는 상황이 벌어졌을 것이다. 정부는 왜 하이닉스를 끝까지 매각하려 했고, 하이닉스 이사회는 막판에 마이크론과의 매각을 왜 부결시켰을까? 당시 정부와 채권단, 하이닉스 이사회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하이닉스가 유동성 위기를 겪었던 2000년 9월부터 매각이 결렬된 후 독자생존을 걷기 시작할 때까지의 숨가빴던 이야기들을 당시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다큐멘터리로 엮었다. 이를 통해 정부의 기업 구조조정 원칙의 성과와 과오, 교훈을 짚어봤다. |
| ▶2001년 외환은행 본점 회의실에서 열린 채권단 회의 모습. | |
유동성 위기의 시작 (2000년 9월~ 2001년 10월) 2000년 11월 말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13층 회의실. 씨티은행 임연빈 전무는 회의장에 모인 금융기관 실무진들을 둘러본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현대전자를 살리기 위해선 1조원의 신디케이트론(syndicated loan·금융기관이 차관단을 구성해 공통의 조건으로 일정액을 융자하는 대출방식)이 필요합니다. 금융기관들이 한 번만 더 힘을 모아 살려봅시다.” 은행 실무진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아니 도대체 반도체 가격은 언제 좋아지는 겁니까?” “애널리스트들이 낸 반도체 경기 보고서가 다 가짜예요.” “이번에 자금 조달해주면 살아나긴 하는 겁니까?” 현대전자의 신디케이트론을 주관했던 임 전무는 잠시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 ▶2002년 4월 30일 하이닉스 이사회가 양해각서 동의안을 부결시키자 서울 영동사옥 앞에서 시위하던 노조원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 |
“1조원 규모만 수혈해 준다면 당분간은 D램 가격이 떨어지더라도 견딜 수 있지 않겠습니까? 늦어도 2001년 하반기께 가면 가격이 회복되지 않겠어요? 기다려 봅시다. 10개 은행에서 1000억원씩만 지원해주면 1조원이 됩니다.” 신한은행 쪽에서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1000억원은 너무 큰 돈입니다. 저희 은행은 그 절반 정도로 조정해 보겠습니다.” 이날 회의 이후 금융기관들의 최종 신디케이트론 사인이 난 것은 12월 15일이다. 씨티은행과 외환·산업·한빛·제일·조흥·국민은행이 1000억원을, 신한은행이 500억원, 하나은행은 300억원, 한미은행이 200억원을 내서 1조원에서 2000억원이 모자란 8000억원을 조달하게 된다. 현대전자(하이닉스의 옛 이름)의 재무상태는 반도체 경기의 악화로 2000년 하반기부터 안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9~10월부턴 아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0년 초 8달러였던 64메가 D램 가격은 그해 말 1달러로 추락했다. 여기에 99년 빅딜로 부채까지 잔뜩 늘어난 현대전자는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부채가 11조원이나 됐던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인수하면서 현금 2조5600억원을 지급하고, 4조원의 부채를 떠안아 더욱 부실화된 것이다. 그러나 8000억원의 신디케이트론이 투입되고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2000년 말 현대전자의 회사채가 3조6000억원 규모였다. 회사채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2001년 하반기에 다시 유동성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2000년은 현대그룹 왕자의 난이 일어난 해다. 정부는 물론, 국민까지 현대그룹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현대상선, 현대건설 등 주력 계열사들이 유동성 위기에 빠지며 현대는 그룹 전체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다. 여기에 현대전자마저 휘청대면 현대그룹 전체의 도산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 ▶진념 당시 재정경제 부총리가 소액주주로부터 밀가루 세례를 받고있다. | |
“매각 못하면 현대 전체가 위험” 2000년 12월 22일 청와대. 강기원 금융감독원 부원장보, 이성로 신용감독 국장, 이연수 외환은행 부행장과 강경문 차장이 한 쪽에, 그 맞은편엔 권오규 비서관(현 부총리)과 실무 과장들이 앉아 있었다. ‘현대전자 자금 수급 관련 회의’가 서둘러 개최된 것. 강기원 부원장보가 먼저 입을 열었다. “2001년 회사채 시장은 불안합니다. 현대전자뿐만 아니라 현대그룹 전체에 회사채 문제가 걸려 있어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 정부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성로 신용감독 국장도 거들었다. “현대전자 자금도 급하지만 2001년은 현대그룹에 속한 회사들의 회사채 만기 연장이 되는 해입니다. 조급히 해결하지 못하면 더 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현대그룹 주거래 은행이던 외환은행의 이연수 부행장은 더 절박한 심정이었다.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인수하면서 현대건설을 보증으로 잡고 어음을 발행했습니다. 현대전자가 무너지면 그룹 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권오규 비서관은 긴 말을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여러분의 건의사항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로부터 나흘 후인 12월 26일. ‘자금시장 안정을 위한 회사채 발행 원활화 대책’은 이런 배경에서 발표됐다. 이연수 전 부행장의 회고다. “현대전자는 LG반도체를 자기 자본으로 인수한 게 아닙니다. 은행 빚으로 한 거예요. 현대전자가 어음을 발행해 6개월마다 4000억원씩 갚기로 한 것이죠. 이때 보증을 선 곳이 현대건설입니다. 즉 현대전자가 어음 결제를 못 하면 현대건설도 무너지고 어음을 유통시킨 LG그룹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하이닉스가 미국에 유진공장을 지을 때 해외에서 신디케이트론으로 자금을 조달했는데 이 공장에서 나오는 반도체 웨이퍼를 현대전자 본사가 전량 구매해 주기로 했습니다. 만약 현대전자가 도산해 웨이퍼를 구매해주지 못하면 현대종합상사와 현대상선, 현대중공업 3개 회사가 사주기로 했습니다. 이 회사들이 보증해 준거나 마찬가지죠. 현대전자의 재무구조가 나빠져 상환을 못 하면 LG와 현대상선, 현대중공업 등 현대그룹 전체에 영향이 미치게 돼 있었죠.” 이 전 부행장은 “결과적으로 현대건설이든 하이닉스든 위기를 잘 넘겨 문제는 없지만 무모한 ‘대마불사’ 여신 행위는 앞으로 다시는 있으면 안 된다. 그 길이 국가를 살리고 기업을 살리는 길”이라고 말했다. 부도 위기에 처해 있었던 현대전자는 2001년 3월 ‘하이닉스 반도체’로 회사 이름을 바꾸고 채권금융기관협의회의 공동 관리에 편입하게 된다. 이를 통해 거액의 부채 탕감과 출자전환 및 만기일 연장 등을 포함한 대규모 채무 재조정을 받게 된 것이다.
| ▶미국 오리건주에 있는 하이닉스 유진공장 전경. 이 공장을 지을 때 해외에서 신디케이트론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 |
하이닉스는 2001년 4월부터 살로만스미스바니를 주관사로 GDR(글로벌 주식 예탁증서) 발행을 추진, 그 해 6월 15일 GDR 12억5000만 달러(약 1조5000억원) 도입에 성공한다. 그러나 회사는 7월 자금 문제에 또다시 봉착한다. 채권금융기관들의 움직임이 다시 부산해졌다. 금세 좋아질 거라는 반도체 경기는 바닥으로 내려간 후 꿈쩍도 하지 않았다. 8월 20일 채권단은 하이닉스 처리에 관한 문제를 금감원에 보고한 것을 시작으로 22일 1금융권 회의, 23일 투신권 회의, 24일 리스회사 회의를 하는 등 분주하게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2001년 10월 31일 오후 5시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4층 대강당. 116개 금융기관 중 103개 은행의 여신담당 임원들이 참석한 이날 회의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회의를 주재한 외환은행의 김경림 행장이 침묵을 깼다. “하이닉스에 기존 여신의 출자전환과 신규자금 지원이 필요합니다. 채권은행들은 출자전환과 신규자금을 지원하든지 부채 탕감을 해야 합니다. 하이닉스 청산가치가 25.4%입니다. 기존 채권의 25.4%를 상환해주는 것으로 기본 골격을 잡겠습니다.” 이때 김정태 국민은행장이 손을 들었다.(이날 회의엔 은행장으로선 유일하게 김정태 행장이 참석했었다.) “신규자금 지원도 할 수 없고 25.4% 비율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만약 이 안이 안 받아들여지면 국민은행을 비롯한 다른 채권은행들도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참석자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회의를 끌고 갈 상황이 아니었다. 회의는 잠시 중단됐다. 1시간 후 다시 시작된 회의에서 김경림 행장의 얼굴은 비장했다. “하이닉스도 살리고 채권단도 사는 방법을 생각해봅시다. 김정태 행장이 제시한 28.4%안을 수용하겠습니다.” 외환·산업·조흥·한빛·씨티·농협 등 6개 은행이 추가 자금지원을 결정했고, 국민은행을 비롯한 나머지 은행들은 채권액의 28.4%만 회수하게 되는 채무탕감을 결정했다. 하이닉스 정상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매각 논의부터 결렬까지 (2001년 10월~2002년 4월 30일) 10월 31일 회의 직후 하이닉스 매각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정부가 서둘러 정상화의 틀을 마련해놓은 것도 매각을 위한 장치를 해놓기 위해서라는 추측도 나왔다. 11월 23일 서울 세종로 골드먼삭스 회의실. 마이크론의 스티븐 애플턴 회장과 CFO인 W G 스토브 주니어, 외환은행의 드로스트 부행장과 이연수 부행장, 하이닉스 박종섭 사장이 처음으로 마주앉았다. 언론에도 알리지 않은 극비 방문이었다. 애플턴 회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의중을 드러냈다. “하이닉스에 관심이 많다. 인수하면 주식으로 인수대금을 주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 협상을 잘 진행해보자.” 이연수 부행장과 박종섭 사장은 침묵했다. 드로스트 부행장도 말이 없었다. 박종섭 사장이 간단한 답변을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말하자. 마이크론 생각을 알았으니 우리 쪽에서도 신중하게 생각해보겠다.” 애플턴 회장은 이후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과 신국환 특위 위원장도 만나고 돌아갔다. 신국환 특위 위원장은 11월 24일 서울 강남의 리버사이드 호텔에서 마이크론의 애플턴 회장을 대면했다. 신 특위 위원장의 회고다. “애플턴 회장은 저한테 브리핑을 하는데 완전히 공짜로 먹겠다는 말이었습니다. 현금이 아닌 마이크론 주식으로 사겠다. 게다가 청주공장과 구미공장에 있는 비메모리 분야는 제외하고 메모리 부분만 가지고 가겠다고 하더군요.” 우리 쪽에서는 2001년 12월 18일 박종섭 사장이 마이크론과 협상차 미국에 갔다. 이후 2002년 1월 23일 박종섭 사장과 드로스트 부행장, 이연수 부행장이 미국에 가서 마이크론과 매각 협상을 벌였다. “마이크론은 처음엔 13억 달러인가 14억 달러를 준다고 했어요. 이 가격을 박 사장이 23억 달러까지 올려놨더라고요. 그 상태에서 2002년 1월 23일 협상때 48억 달러를 내놓으라고 했죠. 서로 밀고 당기다 40억 달러 정도에 타결을 봤습니다. 이 중 2억 달러는 비메모리 분야를 분리해 놓으면 거기에 자기들이 2억 달러를 투자해 비메모리 분야도 살리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메모리 분야는 38억 달러에 사겠다 해서 총 가격을 40억 달러로 본 것이죠.” 이연수 전 부행장의 회고다. 협상은 계속됐다. 2002년 3월 10일 2차 방미 협상이 진행됐지만 여기서도 타결을 보지 못했다. 채권단 대표로 이덕훈 행장이 갔다. 외환은행 드로스트 부행장, 이연수 부행장 등이 동행했다. 이후 협상을 팩스로 주고 받았지만 타결을 못 봐 협상 자체가 깨지는 게 기정사실로 굳어져 갔다. 이 와중에 채권 단장이 외환은행 김경림 행장에서 한빛은행 이덕훈 행장으로 바뀌었다. 이덕훈 전 행장은 채권단 중 가장 매각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금융감독위원회 고위 인사나 청와대 핵심에서는 현대의 부자 세습에 대해 부정적인 기류가 깔려있던 터였다. 그는 채권단 회의에 참석해서 매각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주 내비쳤다. 이덕훈 전 행장은 채권단장이 교체된 건에 대해 “당시 외환은행은 현대 주력 기업들의 문제가 연쇄적으로 발생해 힘든 상황이었다”며 “하이닉스의 주거래 은행은 외환이었지만 이 때문에 한빛과 산업은행 등에서 역할 분담을 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매각에 부정적이었던 외환은행보다 적극적이었던 한빛은행 쪽을 채권 단장으로 하는 게 나을 것이라는 정부의 의중이 있지 않았겠나라는 분석도 나왔다. 2002년 4월 17일 13층 외환은행 회의실. 안건은 한빛은행장 이덕훈 행장이 조건없는 MOU 체결 권한을 위임받게 되고 외부 전문기관에서 하이닉스를 실사하는 것이었다. 채권단 내에서도 의견 대립은 치열했다. 신규지원에 대부분 반대했기 때문에 채권단 대부분 매각에는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외환은행은 매각 조건에 반대했다. 이날 이덕훈 행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연수 부행장이 말을 꺼냈다. “마이크론 주식을 인수 대금으로 받았을 경우 주식시장 동향에 따라 막대한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위험이 매우 큽니다.” 그러나 외환은행을 제외한 채권단들의 생각은 달랐다. “문제 있는 기업이 시장에 나올 때는 가격이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보통 부실 채권 정리를 할 때 원래 가격의 5%부터 시작을 하거든요.” “게다가 마이크론의 생존 전략은 차입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채를 안 지고 주식으로 줬던 것도 그 이유입니다.” “마이크론에 넘긴다는 것이 리스크는 크지만 무조건 애국심에 호소해 매각 반대만 외치고 있을 상황은 아닙니다.” 이연수 부행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지금 매각에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각 조건이 너무 터무니없이 헐값이라는 거죠. 저희도 조건만 좋으면 매각은 당연히 해야 한다고 봅니다.” 4월 17일 회의에서는 찬성 4, 반대 3, 기권 5로 부결되고, 두 번째 채권단 회의인 4월 18일엔 찬성 9, 반대 2, 기권 1로 가결되기에 이른다. 바로 다음날 이덕훈 행장과 박종섭 사장은 미국으로 가 마이크론과 MOU를 체결하고 왔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4월 20일이다. 아서 앤더슨은 본격적인 실사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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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1월 하이닉스 소액주주들이 균등 감자 결정을 내린 정부와 채권단을 향해 항의 농성을 벌이고 있다. |
“마이크론 팔면 다른 쪽으로 혜택주겠다” 여기서 잠시 하이닉스 구조조정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던 신국환( 68· 현 국회의원) 전 산업자원부 장관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하이닉스와 마이크론사와의 매각은 우리 정부와 미국 정부의 사전 약속이었다”고 주장했다. “내가 하이닉스 구조조정특별위원장을 할 때 로버트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이 씨티그룹 회장이었어요. 그는 여러 차례 청와대를 찾아와 ‘골치 아픈 하이닉스를 팔고 구조조정을 해라. 만약 미국에 팔면 자동차나 다른 산업 쪽으로 혜택을 줄 수 있다’고 말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루빈의 로비는 마이크론사의 회장인 스티븐 애플턴 회장 부탁에 의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루빈이 청와대를 찾기 전인 2001년 여름 애플턴 회장은 두 번이나 한국에 와 하이닉스 인수를 타진하고 갔거든요.” 루빈은 정부 측에 “하이닉스를 마이크론에 매각하면 한국이 어려울 때 도와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정부가 하이닉스를 헐값으로라도 끝까지 매각하려 했던 이유가 이 때문인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게다가 씨티그룹의 자회사인 살로만스미스바니는 문제가 발생하기 전인 99년부터 현대전자의 실질적 재정 자문을 해 준 곳이다. 현대전자의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씨티은행이 마이크론 매각을 정부에 종용했다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신국환 의원은 2000년 8월 46대 산업자원부 장관을 역임한 후 2001년 10월부터 하이닉스반도체 구조조정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된다. 기존에 채권단 구조조정 위원회가 있었지만 하이닉스의 부실 악화로 대규모의 공적자금 추가 지원이 필요하자 정부 주도로 구조조정 특위를 만든 것. 특위 멤버를 보면 위원장은 신국환, 위원은 김경림 외환은행장, 이덕훈 한빛은행장, 조영제 한국투신운용 사장, 씨티은행 서울지점장 등 채권단 대표와 박종섭 하이닉스 사장, 장종현 부즈앨런&해밀턴 대표 등이었다. 신 의원은 특위 위원장 시절 정부 측 인사임에도 하이닉스 매각에 적극 반대했던 인물이다. 이번 취재 과정 중 그는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하이닉스 특위 위원장 시절 정부 고위층으로부터 매각에 반대하지 말라는 압력을 받았었다”고 말했다. 신 의원은 “산업자원부 국장 시절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 ‘현대는 반도체를 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말해 83년 현대전자를 만들게 했다”며 “내가 정주영 회장에게 현대전자의 초대 사장은 당신의 분신을 시키라 해서 몽헌 회장이 현대전자를 맡은 것”이라고 회고했다. 구조조정 특위 위원장의 청을 허락한 것도 이런 현대전자와의 뿌리깊은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특위 위원장으로 와보니 정부든 채권단이든 모두 하이닉스 매각은 당연한 것으로 몰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이닉스는 외국에 매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게 제 입장이었어요. 삼성과 하이닉스는 기술체계가 같습니다. 인피니언과 마이크론은 구멍을 파서 반도체를 만들고 삼성과 현대는 위로 집을 짓는 방식이었어요. 완전히 다른 기술체계죠. 만약 마이크론이 하이닉스를 인수하게 되면 우리의 기술 비밀을 다 가져가 버리는 셈이 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아마 삼성도 힘들어졌을 겁니다.” 당시 신 의원은 아더 앤더슨에 실사를 의뢰한다. 실사 결과는 “하루빨리 팔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가 그걸 뒤집었습니다. 겨우 두 달을 특위 위원장을 지내고 다시 장관으로 왔지만 정부에 와서도 끊임없이 설득했어요. 경기가 살고 기술만 따라잡으면 하이닉스는 반드시 살아날 기업이라고요. 단기간의 성과를 얻기 위해 가능성 있는 기업을 죽이려는 건 무모한 짓이라 생각했습니다. 정부의 원칙 없는 구조조정에 대항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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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국환 국회의원 (전 하이닉스 구조조정 특별위원장) “하이닉스와 마이크론사와의 매각은 우리 정부와 미국 정부의 사전 약속이었다” “하이닉스 특위 위원장 시절 고위층으로부터 매각에 반대하지 말라는 압력을 받았었다” | |
박종섭사장, 이사회서 반대표 2001년 12월. 신국환 특위 위원장은 신문에 난 삼성전자 인사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최진석’이란 이름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런 이름은 없었다. 최진석은 삼성전자 상무로 이름을 날리던 에이스 엔지니어였다. 삼성전자에서 물러난 것을 확인한 신 특위 위원장은 최 상무를 하이닉스로 영입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신 특위 위원장의 권유로 2002년 12월 하이닉스 상무로 오게 된 최진석 상무에게 신 특위 위원장은 한 가지 주문을 했다. “하이닉스를 한번 돌아보고 오세요.” 며칠 후 신 특위 위원장을 찾은 최 상무의 표정은 밝았다.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의외로 투자를 많이 해놨더군요.” “그럼 이연수 외환은행 부행장을 한번 찾아가 보세요. 하이닉스의 가능성을 잘 설명하면 이해를 할 겁니다.” 2001년 연말 이연수 부행장의 사무실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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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수 신용평가위원회 위원장 (전 외환은행장 직무대행)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인수하면서 현대건설을 보증으로 잡고 어음을 발행했다. 현대전자가 무너지면 그룹 전체가 흔들린다” “하이닉스를 반면교사로 삼아 ‘대마 불사’ 여신 행위는 근절돼야 한다” | |
“여보세요?” “…저 이연수 부행장님 계십니까?” “예 제가 이연수입니다.” “아… 저는 하이닉스의 최진석 상무라고 합니다. 제게 한 시간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최근 기자와 만난 이연수 전 부행장은 그 당시를 회상하며 “얼굴도 본 적 없고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찾아 오겠다고 해서 처음엔 당황했었다”고 회상했다. 이연수 부행장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며칠 후 최진석 상무는 가방 하나를 들고 이 부행장 앞에 나타났다. 그의 얼굴은 무척 상기돼 있었다. 인사를 꾸벅 한 최 상무는 진지하게 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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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백 현대유엔아이 대표 (전 하이닉스 구조조정본부장) “추가 매각이 진행될 기미 보이자 직원 60%의 사직서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중역의 30%, 전무급 이상 50%가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당시 절박한 심정이었다” | |
“제가 삼성전자에도 있었고 하이닉스에도 있어 봤는데 하이닉스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회사입니다. 와서 보니까 정몽헌 회장이 기초 투자를 굉장히 많이 해서 투자 자금이 그다지 많이 필요치 않습니다. 투자를 최소화시키면서도 생산 효율을 높이는 공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말을 마친 최 상무는 갑자기 프레젠테이션을 한다면서 가방 안에서 커다란 도표를 펼쳐보였다. 반도체 공정이 알기 쉽게 그려져 있었다. 그는 긴 막대기로 한 부분을 가리키더니 말을 이어갔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하이닉스는 돈이 없으니 전체 라인을 바꾸지 않고 이 부분만 공정을 바꾸면 최소 비용으로 생산수요를 높일 수 있게 됩니다. 하이닉스를 포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하이닉스 처분 문제에 대해 이 전 부행장 역시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였다. 이 전 부행장은 “솔직히 최 전무의 방문으로 하이닉스를 살려야겠다는 믿음을 굳힌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최근 우의제 사장 후임으로 하이닉스 신임 대표 물망에도 올랐던 최 전무는 하이닉스 회생 스토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하이닉스만의 공정 기법을 개발해 최소 투자로 최대 이익을 내는 데 기여한 일등공신을 언급할 때도 최 전무는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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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민 KAIST 교수 (전기및 전자 공학과) “메모리 산업은 돈과 경영, 기술 세 가지만 갖추면 된다” “투자가 이뤄지고 반도체 경기만 살아난다면 하이닉스는 충분히 회생할 수 있었다” | |
2002년 4월 29일 오후 3시.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13층 회의실. 이날 회의는 이연수 부행장이 주재했다. 회의에 참석한 채권 은행단 대표들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무거워 보였다. 1분여의 침묵이 흐른 후 이연수 부행장이 먼저 말을 떼었다. “MOU가 구속력이 있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했다는 표시이지 MOU가 체결됐다고 매각이 결정된 건 아닙니다. 일단 성의만 보여줍시다.” 회의장은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모 투신사 임원이 반대표를 던졌다. “MOU 조건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계약이 성사되면 저희 쪽 손실도 크게 됩니다.” 이연수 부행장은 재차 강조했다. “실사까지 마치면 그때 다시 생각해봅시다. 어차피 채권단이 오케이를 해도 하이닉스 이사회에서 부결시키면 무효입니다. 일단 채권단에선 통과시킵시다.” 씨티은행도 매각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도 이건 말도 안 됩니다. 만약 잘못되면 우리 채권단이 모든 책임을 질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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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재 메릴린치증권 상무 (전 현대증권 애널리스트) “회사를 경영 정상화하겠다는 의지보다 알맹이만 빼가겠다는 게 마이크론의 의도였다” “하이닉스가 죽으면 관련 산업들도 같이 무너지는 거였다” | |
오후 6시. 이연수 부행장은 회의를 정회했다. 그대로는 회의를 지속시킬 수 없었다. 이후 외환은행 본점의 전화통은 불이 났다. 외환은행 실무진은 금감원으로 보고하느라 분주했다. “지금 투산회사들이 거부했습니다. 네, 일부 금융기관들도 동조할 것 같은데요.” 금감원은 거부한 금융기관들의 임원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각 은행 본점에선 이날 회의에 참석한 임원들에게 다시 설득 전화를 하고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다. 오후 8시. 회의장엔 다시 참석자들이 모여들었다. 모두 표정은 굳어 있었다. “이 부행장 말대로 일단 이 회의에선 결론을 내고 실사 결과 보면서 더 신중하게 생각해봅시다.” 낮에 시작된 회의는 채권단의 실랑이로 오후 8시가 돼서야 끝이 났다. 결과는 80.5% 동의로 가결됐다. 채권단의 동의를 마쳤으니 남은 건 하이닉스 이사회의 결정이었다. 만약 하이닉스 이사회에서 통과되면 마이크론과의 매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이다. 4월 30일 강남 하이닉스 건물 영동사옥 12층 회의실. 박종섭 사장, 박상호 사장, 전인백 부사장 등 3명의 사내이사와 7명의 사외이사가 모였다. 이사회 분위기 역시 침울했다. 박종섭 사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잘 아시다시피 마이크론과 협상하고 온 내용은 38억 달러를 주식으로 이천의 메모리 부문만 가져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MOU는 마치고 온 상태입니다. 여러분의 결정만 남았습니다.” 박 사장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로 전인백 부사장이 말을 받았다. “메모리는 하이닉스의 몸통입니다. 메모리 자산을 떼어주고 회사가 생존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마이크론은 메모리 부분을 산 이후 비메모리 부분에도 추가투자를 한다고 했지만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다른 이사들의 의견도 비슷했다. 모두 하이닉스를 그렇게 헐값으로 넘겨주는 건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그 정도 헐값 조건이라면 채권단이 그 가격으로 마이크론의 손을 들어주기보단 우리에게 투자를 해주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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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가서 MOU를 직접 체결하고 온 박 사장 역시 마지막엔 다른 이사들 의견에 동조했다. MOU 체결을 위해서는 채권금융기관의 동의와 하이닉스 이사회 동의가 있어야 했다. 이날 이사진들의 전원 반대로 MOU 체결은 부결됐다. 하이닉스 매각 논란에 1차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하이닉스 이사회에서 MOU가 부결된 4월 30일. 외환은행 4층 강당에선 이강원 행장 선임을 위한 주주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단상에 있던 이연수 부행장에게 누군가 쪽지를 가져다 줬다. 쪽지엔 ‘하이닉스 이사회, MOU 추인 부결’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강원 행장은 부임하면서 “하이닉스 매각은 반드시 관철시키겠다”고 말했다. 이 행장이 취임하면서 이연수 부행장은 2002년 5월 31일자로 사표를 제출했다. 매각 무산과 외환은행장의 갑작스러운 인사 역시 시사하는 점이 있었다.
매각 결렬 그 이후 (2002년 4월 30일~현재) 4월 30일 이사회 결정에 따라 마이크론과의 매각 결렬 직후 하이닉스 내부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당시 전인백 부사장의 회고다. “내부에서는 환영했지만 외부에서는 여전히 재매각을 추진해야 한다는 여론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구조조정 위원장으로서 고민이 많았죠. 하이닉스 이사회가 제대로 하고 있기나 한 거냐며 안팎으로 비판을 받았어요. 하지만 내부 직원들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5월 2일. 마이크론은 하이닉스 인수협상을 중단한다는 공식 선언을 한다. 그러나 이사회의 반대로 매각 결렬이 되고도 하이닉스를 팔아야 한다는 여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금융감독위원회는 “이사회가 사업분할안을 수용한다면 나머지는 우량회사가 될 수 있다. 또다시 마이크론의 매각 절차를 밟을 수도 있다”는 입장을 표명해 매각에 대한 미련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 그룹이나 반도체 관련 공대 학자들은 하이닉스를 살리기 위한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정부와 하이닉스, 채권단, 그리고 학계까지 뒤엉켜 매각 여부를 놓고 치열한 대치를 형성한 것이다. 2002년 6월 4대 일간지에는 커다란 광고가 걸린다. “하이닉스 반도체 국외매각을 급하게 추진하는 것은 회사 가치를 반감시키는 것으로 국가 이익에도 합당하지 않다.” ‘나라 산업을 생각하는 교수협의체’(약칭 나산협)가 낸 광고였다. 나산협은 대학에서 반도체를 가르치는 전자공학 관련 교수들이 주축이 돼 발족된 협의체로 당시 세미나, 토론회, 신문기사 칼럼 등을 통해 하이닉스 살리기에 앞장섰다. 이 나산협을 이끈 주역 중 한 명이 경종민 카이스트 박사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반도체 전문가 중 한 사람이었던 경 박사는 당시 일간지에 연속해 “국가 기간사업이 될 하이닉스를 살려야 한다”는 칼럼을 썼다. 그의 신문 칼럼으로 한때 하이닉스의 주가가 오르기도 했다. 방송에서도 하이닉스는 뜨거운 이슈였다. 2002년 5월 9일 방영된 MBC 100분 토론. 이날 프로엔 ‘하이닉스, 최후의 선택은’이란 제목으로 매각 찬성과 반대쪽 패널들이 나와 열띤 논쟁을 벌였다. 이날 패널로 나온 경 박사는 “메모리 산업은 돈과 경영, 기술 세 가지만 갖추면 된다. 투자가 이뤄지고 반도체 경기만 살아난다면 하이닉스는 회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증권 리서치센터 팀장으로 있던 우동재 애널리스트(현 메릴린치증권 상무)도 대표적인 매각 반대파였다. 그도 100분 토론에 나와 경 박사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마이크론은 회사의 경영 정상화를 시키겠다는 의지보다는 알맹이만 빼가겠다는 뜻입니다. 만약 인수 후 차익금을 노리고 바로 처분해 버릴 수도 있다는 거죠. 하이닉스가 죽으면 관련 산업들도 함께 죽게 됩니다.” 또다시 마이크론과의 매각 재협상이 진행될 기미가 보이자 직원들은 연일 매각 반대 운동을 벌였다. 바로 그즈음 전인백 부사장 책상엔 하이닉스 직원 60%의 서명이 적힌 사직서가 놓여져 있었다.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될 시기였다. 2002년 5월. 하이닉스 이사진은 채권단과 대면했다. 이사진들의 얼굴은 침통했다. 긴 침묵이 흘렀다. 박종섭 사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매각 결렬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습니다.” 전인백 부사장이 말을 이었다. “중역의 30%, 전무급 이상 50%가 물러나겠습니다. 대신 하이닉스 기술자들은 모두 훌륭합니다. 구조조정을 통해 함께 살려주시길 바랍니다.” 채권단은 말이 없었다. 이사진과 채권단과의 면담이 끝난 후 이사진 중 한 명인 A씨가 전인백 부사장실을 찾았다. “아니 제가 왜 물러나야 합니까. 저는 수긍할 수 없습니다.” 항의하는 A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전 부사장은 입을 열었다. “저도 물러납니다.” A씨는 아무 말도 못하고 전 부사장의 방을 나갔다. 당시 하이닉스 이사회는 박종섭 사장, 박상호 사장, 전인백 부사장 등 3명의 사내이사와 7명의 사외이사로 구성돼 있었다. 이들 중 박종섭 사장과 전인백 부사장이 사임하고 사외이사 4명이 물러난다. 이후 부활 신화의 주인공은 내부 조직원들이다. 수조원대의 공적자금을 받아 회생한 하이닉스는 2006년 창사 이래 최대 매출과 업계 최고 수준의 영업이익률을 달성하면서 세계 반도체 업계 7위로 부상했다. 현재 하이닉스 반도체는 중국과 미국 등 전 세계 35개국에 수출되고 있다. 생산라인의 혁명, 블루칩 같은 신제품 개발 등은 모두 조직 구성원들의 노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하이닉스 사람들은 오히려 담담한 편이다. 지난 2월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하이닉스 내부 관계자는“외부에서 하이닉스에 대한 관심이 너무 높아 오히려 우리는 부담스럽다. 우린 더 이상 일희일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왕자의 난과 빅딜 후유증에 매각 협상까지 거치며 하이닉스 사람들은 깊은 상처를 받았던 걸까? 큰 일을 너무 많이 당해서 웬만한 어려움에도 크게 슬퍼하거나 좋은 일에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도전하면 응전한다’는 뚝심이 하이닉스 직원들에게는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 “모두 ‘하이닉스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외쳤습니다. 아무도 우리 편은 없었죠. 노력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우리끼리 뭉치지 않으면 살 방법이 없었어요. 죽기 살기로 했던 것이 기적을 불러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 하이닉스 사람들 모두 현대에서 분리될 땐 부잣집 도련님으로 있다가 길가에 나앉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강력한 저항을 많이 받아 오히려 내성이 생겼다고 할까요.” 하이닉스는 2005년 7월 1800만 달러 상당의 외부 자금을 조달하고 특별약정 체결을 완료함으로써 채권금융기관협의회의 공동 관리가 종료됐다. 그러나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 반도체 사업에 대한 거액의 자금 유치와 반도체 시장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지속적 장비 투자를 할 수 있는 재무 상태를 갖추지 않으면 또 한번 고비를 겪을 수도 있다. 그들 말대로 일희일비할 시점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오히려 하이닉스 사람들은 ‘회생’이라는 단어를 쉽게 꺼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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