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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등지고 피란길 나선 이라크인들

조국 등지고 피란길 나선 이라크인들


종파 간 유혈 폭력사태 피해 200만 명 이상 탈출… 심각한 두뇌유출로 국가 재건에도 악영향 그의 집은 난방장치가 없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였다. 가구라고는 플라스틱 의자들뿐이었고, 여기저기 곰팡이가 피어났다. 무릎 위에 어린 아들을 앉혀놓고 어르는 그의 표정에는 공허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내와 어린 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나날이 버둥거려도 벼랑 끝 삶만 지속될 뿐이다. 이라크인 의사 나파 압둘-하디(50). 그도 한때는 바그다드 시내 부촌의 넓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러나 재산을 빼앗기고 요르단으로 망명한 지금은 암만 동부에 있는 한 빈민촌 아파트에서 살아간다. 방사선과 의사였던 압둘-하디는 바그다드 거주 당시 참수형을 하겠다는 호전적인 괴한들의 협박을 받았다. 결국 지난해 7월 그는 의사직을 포기하고 출국 행렬에 동참했다. 이런 식의 대규모 탈출 움직임 때문에 이라크는 가장 귀중한 자산, 즉 한때는 성취욕이 강하고 역동적이었던 중산층을 잃었다. 종파분쟁에서 비롯된 대학살을 피해 이웃 요르단과 시리아로 피신하는 이라크인 수는 1년 전만 해도 비교적 적었다. 기껏해야 하루에 20여 명 정도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화이트칼라 전문직 종사자들의 탈출 행렬이 봇물을 이룬다. 이들은 안정된 사회라면 어디서든지 중추적 역할을 하는 부유한 중산층이다. 이처럼 조국을 등지는 이라크인 수는 모두 200만 명을 넘어 전체 인구의 10%나 된다. 1948~67년 아랍권과 이스라엘 간 전쟁으로 발생한 팔레스타인 난민 위기 이래 중동에서는 최대 규모의 이주 사태다. 아프리카와 인도 대륙에서의 대규모 난민 발생 사태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라크인들의 탈출 행렬은 처음에는 부유층이 비행기를 타고 출국하는 행태로 시작됐다. 언론의 관심을 끌 만한 모양새가 아니었고, 그래서 거의 보도되지도 않았다. 언론은 무질서하게 늘어선 피란민들과 수많은 천막 등 난민 위기의 전형적인 장면에 좀 더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 세대 전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처럼 이제 이라크인 망명자들이 중동의 또 다른 풀기 어려운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인 난민의 상당수는 아직도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의 빈민가에서 산다. 이라크인 망명자들은 처음에는 환영받았지만 지금은 빠른 속도로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 간다. 그들은 학교와 보건제도 등 망명지의 하부 구조에 긴장을 조성하고 집값과 물가를 부추긴다. 가장 나쁜 점은, 못마땅해 하는 기색이 점점 더 뚜렷해지는 현지인들은 물론이고 망명자 본인들도 언제 이라크로 돌아가게 될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탈출 사태의 부담이 가장 무겁게 느껴지는 곳은 이라크다. 이라크는 피폐하고 불안정한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처럼 될 위험에 직면했다. 그것도 국가 차원에서 말이다. 국민은 전쟁으로 파괴된 조국을 등졌고, 이라크는 석유와 함께 가장 귀중한 자산인 유능하고 교육받은 엘리트 계층을 놓쳤다. 압둘-하디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은 사담 후세인 치하에서 성장한 활력적인 중산층의 기둥이었다. 당시 이라크는 세계적 수준의 병원·대학·과학 연구소·미술관들을 자랑했었다. 이라크 항공의 기술자들은 보잉 항공사의 가장 정교한 기술직에서도 일할 능력을 갖췄다는 평판을 들었다 그들 중 다수는 풍부한 장학금을 받으며 해외에 유학했고, 그 비용은 전액 국가에서 부담했다. 요르단의 예비역 장성이자 고(故) 후세인 국왕의 절친한 친구였던 알리 슈크리는 “웨일스의 카디프 대학에서 공부할 때, 내가 수강했던 과목의 교실에는 늘 이라크인 유학생들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들은 대부분 공학이나 방사선 분야에서 대학원 과정을 공부했다.” 바로 그런 전문가들이 지금은 저항세력과 약탈자들이 탐내는 제물이 됐다. 착취·강탈·납치의 단골 표적이다. 전쟁 전 이라크의 의사협회에 등록된 의사 수는 3만 명이었다. 지금은 8000명뿐이다. “의사들은 첫 번째 표적”이라고 암만의 초라한 아파트에서 압둘-하디는 말했다. 현재 그는 한때 이라크에서 벌었던 돈에 비하면 아주 적은 보수를 받으며 암만의 한 공립병원에서 근무한다. “이라크의 보건 부문을 재건하는 데는 10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이라크의 대학들에도 해당되는 얘기일지 모른다. 이제 바그다드의 여러 일류 대학에서는 더 이상 첨단 연구가 이뤄지지 않는다. 많은 강의실에서 학생들은 종신교수가 아닌 보조 강사에게 수업을 받는다. 기술자, 과학자, 교사, 공무원, 상점 주인, 사업가 등 모두가 압둘-하디처럼 이라크를 떠난다. 지난해 여름 요르단에 도착한 수니파 이라크인 힌드 알 아자미는 “바그다드에 남은 사람은 강도와 바보들뿐이다. 과거의 모습을 복구하는 데는 한 세대가 걸릴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현재 그녀는 암만 서부의 부촌인 스웨이피에에서 남편과 함께 고급 의상점을 경영한다. 그런 얘기를 이라크 정부에 해줄 필요는 없다. 정부도 두뇌 유출을 막으려고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한다. 바그다드 측은 신규 여권 발급을 제한하는 규정을 강화했다. 또 이미 요르단에 망명한 자국민들을 송환하라고 요르단 정부에 압력을 넣는다고 한다. 암만에서 활동하는 한 유엔 구호요원에 따르면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 측은 최근 이라크와 요르단 정부의 압력 때문에 망명자들과의 면담을 취소하기 시작했다. 망명자들은 강제송환을 막는 보장책으로 UNHCR에 전쟁 난민으로 등록하기를 원한다. 앞서의 구호요원은 “탈출 사태는 이라크 정부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이라크를 재건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런 광범한 두뇌유출의 규모와 영향을 계량화하기는 어렵다. 시리아와 요르단에만 200만 명이 망명했다는 얘기가 통설이지만, 그 두 배나 된다는 추측도 있다. 요르단 정부의 거주 허가증을 받으려면 은행계좌에 10만 달러를 예치해 둬야 하지만, 그런 자금력이 있는 망명자는 드물다. 그래서 많은 난민은 몰래 국경을 넘어들어가 불법 체류자로 살아간다. 한편 레바논과 이집트에서도 이라크인 망명자 수가 점차 늘어난다. 두뇌유출은 사담 후세인 몰락 이후 몇 달 사이에 조금씩 시작됐다. 이라크의 부유층은 폭력사태 발생 초기에 다가올 재앙을 알아차리고 피란처를 찾아나섰다. 대다수는 암만으로 피신했다. 높은 평판을 받는 암만의 은행에는 자신들의 재산을 맡길 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동산에 투자하고, 고급차를 구입하며, 사무용 건물을 지었다. 그러고는 암만을 거점으로 삼아 고국에 남겨둔 사업체들을 관리했다. 잠자는 듯 조용했던 암만 시내가 교통량 증가로 시끄러워진 점을 제외하면, 이들 돈 많은 망명자는 현지 사회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사업체를 함께 들여와 현지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는 경우가 많았다. 바그다드를 떠나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로 이주한 이라크인 의류 무역업자 아드난 알 말라키는 아직도 고국에 남겨놓은 점포들의 재고품을 회수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라크의 의류 생산량이 감소하는 바람에 어쩔 도리 없이 시리아에서 수입하는 제품량을 두 배로 늘렸다. 알 말라키는 다마스쿠스의 한 고급 카페에서 커피를 홀짝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전에는 이라크에서 만들어내는 제품이 전체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제는 생산량이 줄어들어 그곳의 공장들을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이라크의 폭력 사태가 내전으로 변하면서 이웃 나라로 피신하는 난민 수도 급증했다. 망명지 주민들도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시리아 국민은 물가 상승, 혼잡, 그리고 범죄와 매춘의 급증을 투덜댄다. 경제 소식지인 시리아 리포트의 편집국장 지하드 야지기는 “난민들은 문제들만 들여 온다”고 지적했다. 요르단도 동정심 피로감의 증후를 보인다. 600만 명이던 인구가 15%나 증가했다. 암만에서는 저소득층의 주요 식료품인 ‘알라예 빈두라’(토마토·양파 튀김)의 가격이 두 배로 올랐다. 주택 가격은 3분의 1 이상 상승했다. 때문에 요르단의 많은 젊은 연인은 집값을 마련하지 못해 결혼을 연기해야 한다. 수니파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왕국인 요르단에서는 많은 사람이 시아파 난민의 급증 때문에 언젠가는 이라크를 분열시킨 바로 그 종파 간 폭력사태가 요르단에서도 발생하지 않을까 우려한다. 그래서 난민 유입을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간다. 이라크인 망명자가 몰려드는 리비아에서 농산물 가게를 운영하는 요르단인 압델-가니 압둘-하미드는 이렇게 투덜댔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이라크인들은 야만인처럼 행동한다. 지난주에는 내 상점 밖에서 이라크인들이 싸움을 벌였다. 이제 시민들은 그들의 입국을 허용한 정부를 비난한다.” 이에 응답이라도 하듯, 요르단 정부는 최근 망명자들의 무제한 출·입국을 허용해온 특별허가증의 발급을 중단했다. 요르단 측의 출입국 규제 강화를 비난할 사람은 거의 없다. 지난 수십 년간 요르단은 팔레스타인인 난민의 대거 유입에서 비롯된 정치적 부담 때문에 곤욕을 치러왔다. 토착 주민들은 난민 때문에 불편한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요르단은 또 미국의 우방인 데다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이슬람주의 과격파 단체들의 우선적 테러 대상이다. 57명이 사망한 2005년의 호텔 폭파 테러 사건의 기억도 아직 생생하다. 그래서 요르단 보안기구들은 이라크인 망명자의 유입이 일종의 ‘트로이 목마’가 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이라크의 시아파 성직자 모크타다 알-사드르 휘하의 민병대인 마흐디군 첩자들이 요르단에 침투했다는 소문도 나돈다. 몇몇 저명한 망명자 사업가는 요르단 주재 이라크 대사에게 납치와 암살을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이라크의 폭력 사태가 진정되면, 반군 세력이 불만에 가득 찬 이라크인 난민들과 연합해 요르단의 군주제를 공격 표적으로 삼을지도 모른다고 일부 보안 전문가는 경고한다. 물론 난민들의 종파는 다양하지만, 대다수가 수니파인 요르단인들은 자국 내에서 시아파 인구가 늘어나는 현상을 걱정한다. 미국과 이란 사이의 긴장 사태는 이른바 ‘시아파 초승달’(Shiite crescent: 시아파 국가들의 연대)을 우려하는 분위기를 더욱 확산시켰다.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은 약 2년 전 시아파 초승달 문제를 경고한 바 있다. 의회에서는 일부 국회의원이 시아파 무슬림을 요르단 안보의 위협 요인으로 규정했다. 브뤼셀 소재 국제위기그룹(ICG)의 중동 담당자인 조스트 힐터만은 이렇게 말했다. “교사들이 수업 중에 시아파를 비난한다면, 그것은 안 좋은 일이다. 이민국 관리들이 공항에서 입국자들에게 시아파인지, 수니파인지 묻는 행위도 바람직하지 않다. 게다가 수니파 성직자들이 시아파와의 투쟁을 촉구한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이라크로서도 두뇌유출은 궁극적인 파멸의 원인이 될지도 모른다. 화이트칼라 전문직 종사자와 기술직 근로자들의 탈출은 본질적으로 이라크에서 인간 자원의 상당 부분을 박탈함으로써 전쟁의 물질적 파괴를 완결시킨다. 내전은 갈수록 격렬해지고, 미국은 이라크 침공의 실패 부담을 감내하지 못한다는 조짐을 보인다. 그럴수록 두뇌유출 현상은 훨씬 더 심각해질 전망이다. 장차 이라크의 종파분쟁이 종식된다 해도 국가 재건에 필요한 경험 많은 인력은 계속 줄어들지 모른다. 해외로 빠져나간 사람들이 귀국한다는 보장도 없다. 이라크 정부 대변인 출신으로 현재 미 워싱턴 소재 국립민주주의기금(NED)의 고위 간부로 활동하는 라이스 쿠바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해외로 망명해 정착한 사람들은 이라크로 돌아가지 않을 듯하다. 그들은 오히려 요르단이나 시리아에 남아 자신들의 재능을 살리려 할지도 모른다.” 한편 절반 이상이 30세 미만인 이라크의 젊은 세대는 자신들을 지도하고 돌봐줄 교사·대학교수·의사들을 잃었다. 모두 제대로 작동하는 시민사회의 역할모델이 될 만한 인재들이다. 서방세계에서 공부한 이라크인 건축가로 현재 가족과 함께 암만에서 거주하는 잘랄 알 가오드는 “단순히 하나의 잃어버린 세대 문제가 아니다. 이라크는 두 세대를 잃었다”고 말했다. 핵심 인재가 빠져나간 이라크가 상처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전쟁의 잿더미에서 불사조처럼 회생하기는 더더욱 어려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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