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경영] 영웅은 절망의 순간 나온다
[역사와 경영] 영웅은 절망의 순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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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범상한 필부가 되랴” 소진은 강태공이 지은 병법서인 『주서(周書)』의 ‘음부(陰符)’를 찾아 열심히 읽어 1년여 만에 ‘췌마술(萃摩術)’을 터득했다. “이것만 있으면 당대의 모든 군주를 설득할 수 있으리라.” 췌마술은 상대의 내심을 헤아려 그것을 자기의 뜻으로 바꾸는 술책을 말하는데 정말 효과가 있었는지 소진은 연·조·한·위·제·초 6국의 임금을 구워 삶아 강대국 진나라에 맞서는 6국의 남북 연대를 이뤄냈다. 이러한 소진의 합종책(合從策) 탓에 동쪽으로 세력 확대를 꾀하던 진나라는 십 수년 뒤로 야망의 실현을 미뤄야 했다. 6국의 재상이 된 뒤 임금 부럽지 않은 행차로 고향을 지나는데 소진의 형제와 처족들은 차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지 못하고 엎드려 기어서 식사 심부름을 했다. 소진이 웃으며 형수에게 말했다. “전에는 그렇게 위세를 부리더니 어째서 지금은 이토록 공손하십니까.” 형수는 몸을 떨며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사과했다. 소진은 탄식하며 말했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부귀하면 친척도 우러러 보고 빈천하면 업신여긴다. 하물며 남이야 더 말할 것 있으랴. 만약 내게 밭 두어 뙈기만 있었던들 오늘날 이렇게 여섯 나라 재상의 인수를 찰 수 있었겠는가.” 그것이다. 모든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는 위기가 없었다면, 그저 두어 뙈기 밭에서 나오는 소출로 만족하며 살았다면 소진은 오늘날 이름을 남기기는커녕 범상한 필부로 살다 먼지처럼 사라졌을 것이다. 위기란 곧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소진도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기를 기회로 일궈낸 이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였다. 2000년에 뉴욕 타임스는 지난 밀레니엄 동안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엘리자베스 1세를 엄지로 꼽았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위세에 눌려 유럽의 작은 섬나라에 불과했던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사람이 바로 엘리자베스 1세인 것이다. 그녀의 삶은 그야말로 위기의 연속이었다. 우선 출생부터 그랬다. 아들을 얻기 위해 로마 교황과 등을 지면서까지 스페인 공주 캐서린과 이혼을 강행한 헨리 8세가 궁녀 앤 볼린과 결혼해 낳은 자식이 바로 엘리자베스였다. 헨리 8세의 실망이 오죽했을까. 아들을 낳기 위한 지극 정성에도 앤 볼린이 유산과 사산을 거듭하자 헨리 8세의 사랑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결국 결혼 3년 만에 앤 볼린에게 간통 혐의를 씌워 참수형에 처하고 만다. 한때 사랑하던 아내의 목을 자른 뒤 11일 만에 헨리 8세는 제인 시모어와 재혼하고 둘 사이에 드디어 아들 에드워드가 태어난다. 헨리 8세는 에드워드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앤 볼린과의 결혼을 무효라 선언했고 졸지에 서출이 된 엘리자베스는 왕궁에서 쫓겨나 하트필드의 사유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병약했던 에드워드 6세가 열여섯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캐서린의 딸 메리 1세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열렬한 구교 신봉자였던 메리의 등극은 엘리자베스에게 치명적 위험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메리 여왕은 이미 국교가 뿌리 내리기 시작한 영국을 다시 가톨릭 국가로 바꾸기 위해 국교도들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대학살을 감행한다. 그녀의 통치기에 워낙 많은 사람이 죽어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아버지 헨리 8세 아래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국교회 신자가 됐던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번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메리 여왕 앞에서 구교로 개종할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개신교도 토머스 와이어트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나자 여왕은 배다른 동생 엘리자베스를 공모자로 몰아 런던 탑에 가뒀다.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위기 속에서 살아가던 엘리자베스는 1558년 메리 1세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자유의 공기를 마실 수 있게 된다. 여왕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숱한 위기를 극복한 엘리자베스 1세지만 위기를 기회로 만든 그녀의 진가가 발휘된 것은 여왕이 되고 나서다. 1588년 스페인의 필리페 2세가 리스본 항에 전함 122척과, 함포 2000문, 병사 1만9000명으로 구성된 무적함대를 소집하는 순간 영국과 엘리자베스 1세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았다. 16세기 말의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자랑하는 나라였다. 그에 비해 영국의 해군력은 이름만 남은 해안경비대뿐이었고 육군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국이 스페인의 공격을 물리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온갖 위험을 용기로 극복 엘리자베스 궁정의 신하들과 보좌관들은 필리페 2세와 협상에 나서 영국과 여왕 자신을 구하라고 진언했다. 하지만 그녀는 평화를 구걸하는 것은 나라를 빼앗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혹독했던 유년기부터 온갖 위기와 위험을 겪으며 터득한 교훈들을 잊지 않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교훈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무적함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무장한 상선을 포함해 80척의 배를 동원함과 동시에 손수 보병을 소집해 스페인 병사들의 육지 상륙을 저지하도록 했다. 보좌관들은 여왕에게 영국군이 집결해 있는 틸베리 캠프에 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정정이 불안한 상황에서 영국 내 가톨릭 동조 세력이 여왕 암살을 기도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절망적으로 자신의 왕국을 지키는 병사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야 했다. 그래야만 더 큰 위험을 막을 수 있었다. 스페인 침공이 예상되는 바로 전날 엘리자베스는 기병장교의 갑옷으로 무장하고 틸베리 캠프를 전격 방문했다. 병사들의 놀람 속에 여왕의 힘찬 연설이 캠프에 울려 퍼졌다. “사랑하는 나의 병사들이여! 나의 안전을 염려한 몇몇 측근이 내게 무장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한다. 나를 사랑하는 충직한 병사들을 믿지 못하면서까지 구차하게 살 생각은 없다. 폭군들이나 두려워 떨라. 나는 지금까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신께 맹세하건대 (…) 내가 온 것은 기분 전환을 위해서가 아니다. 여러분과 생사고락을 같이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다. 신과 나의 왕국, 그리고 나의 백성들을 위한 일이라면 내 명예와 목숨을 티끌같이 여길 것이다. (…) 비록 갈대처럼 연약한 여자의 몸이지만 내게는 왕의 심장과 용기가 있다.” 엘리자베스는 병사들의 맹목적 애국심을 강요하지 않았다. 먼저 자신의 목숨을 걸었고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에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보상을 약속했다. 그러한 용기와 현실 인식 능력이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틸베리 캠프의 병사들은 단 한 번도 전투 명령을 받은 적이 없었다. 스페인 병사들이 영국 땅을 밟을 엄두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적함대는 플리머스 연해에서 영국 함대를 잡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프랑스 북부 도시 칼레 연해에서 불타는 폐선을 돌진시킨 영국군의 기습적 화공 전략으로 타격을 입었다. 무적함대는 어쩔 수 없이 북쪽으로 달아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지나 가까스로 스페인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풍랑까지 만나 리스본 항에 입항한 배는 고작 54척에 불과했다. 대서양의 패권이 스페인에서 영국으로 넘어오는 순간이었다. 이 같은 해상권을 바탕으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북아메리카 버지니아 식민지의 기초가 확립됐다. 셰익스피어, 스펜서 등 영국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지는 국민 문학의 황금시대가 펼쳐진 것도 이때였다. 위기를 기회로 승화시킨 엘리자베스 1세의 용기와 지혜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던 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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