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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어장에 낚시질 할 ‘꾼’이 없다

황금어장에 낚시질 할 ‘꾼’이 없다

천재들의 굴뚝 없는 공장. 바로 금융산업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전문가들은 금융산업의 핵심으로 자본·인프라·사람을 꼽는다. 이 중 사람, 즉 금융인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금융산업이 정보화, 고도화되면서 소수의 인재가 다수의 생존을 책임지는 인재산업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현실은 어떤가. 동북아 금융허브를 꿈꾸는 한국에 가장 필요한 게 바로 인재인데 금융업계는 인력난에 허덕이고 있다. 투자은행(IB), 상품개발, 자산운용 등에서 금융전문인력 부족 현상은 심각하다. 업계에서는 “인재(人才)가 인재(人災)를 불러 꿈(동북아 금융허브)이 좌초될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이코노미스트가 국내 금융전문인력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금융전문가들과 그 대안을 모색했다.
“배는 띄웠는데 노 저을 사람이 없다.” 증권업계 최고령 CEO인 김지완 현대증권 사장은 최근 금융권의 인력난을 이렇게 표현했다. 김 사장은 오래전부터 인재양성을 강조해 온 증권업계 대표적인 CEO다. 2003년 현대증권 사령탑을 맡으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도 MBA 등 우수 직원들의 해외연수였다.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선진금융기법을 터득한 스페셜리스트(금융전문인력)를 많이 육성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또 자체 연수원과 인재개발원을 설립하는 등 조직과 직원들의 역량 강화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도 김 사장은 최근 가장 큰 걱정거리가 인재 확보라고 말했다. 그는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이하 자통법)에 맞춰 조직을 개편하고 있지만 당장 쓸 만한 인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며 “그동안 업계가 너무 수익 내는 데만 안주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아쉬워했다. 인재 확보에 대한 고민은 김 사장뿐만이 아니다. 은행, 증권 등 금융권 CEO 대부분이 인재 확보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특히 투자은행, 상품개발, 자산운용, 리스크 관리 등 오랜 경험과 다양한 네트워크가 필요한 전문 분야의 경우 더욱 그렇다. 심지어 자통법 시행을 앞두고 있는 증권사 CEO나 임원들은 유능한 금융전문인력을 영입하는 것과 이탈을 방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업무가 돼버렸다고 한다. 시중은행 한 임원은 “요새는 투자은행, 파생상품 등 금융전문인력을 채용하는 일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며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계 금융기관마저 금융전문인력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어 내부 단속을 하는 것도 어려운 실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참여정부가 동북아 금융허브 정책을 발표한 지 4년이 지났지만 국내 금융기관 CEO들은 경쟁력의 원천인 사람, 즉 인재를 걱정하고 있다. 과연 국내 금융전문인력 인재풀이 얼마나 열악하기에 CEO들이 이렇게 전전긍긍하는 것일까.
전문인력 수준 61개국 중 42위
국내 금융전문인력 수준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금융인력네트워크센터에 따르면 2006년 말 현재 120개 국내 금융기관 전체 종사자(12만6000명) 중 금융전문인력 비중은 7.6%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 사무나 창구영업을 담당하는 보조인력이 89.8%에 달했다. 이에 반해 동북아 금융허브를 놓고 경쟁 중인 홍콩, 싱가포르 등은 금융전문인력이 전체 인력 중 40~50% 이상을 차지했고, 보조인력 비중은 20%도 채 되지 않았다. 자본시장을 주도하는 증권업계만 놓고 봐도 금융전문인력 비중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지난 6월 말 현재 국내 10대 증권사의 투자은행 부문 인력은 1230여 명 수준. 이는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인 골드먼삭스의 20분의 1, 메릴린치의 13분의 1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
당장 현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금융전문인력도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의 ‘2007년 국가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금융전문인력 구인 수준은 61개국 중 최하위 급인 42위에 머물렀다. 싱가포르(4위), 홍콩(5위)은 물론 중국(25위)에도 뒤처지는 부끄러운 수준이다. 외국인 고급 전문인력의 취업 선호도에서도 한국은 48위로 주요 경쟁국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인 고급 전문인력들은 한국보다는 싱가포르(1위), 홍콩(9위), 중국(17위) 등을 더 선호한다. 이는 국내 금융기관들이 외국인 고급 전문인력을 채용하는 것도 힘들다는 뜻이다. 금융전문인력 부족 현상은 국내 금융기관의 국제 경쟁력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국내 금융기관의 생산성과 수익성이 여타 선진국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것. 실제로 200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발표에 따르면 국내 금융산업 생산성은 전체 26개국 중 19위에 불과했다. 이건범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원은 “금융산업의 경쟁력은 일반 장치산업과 달리 조직과 인적자원에 의존한다”며 “외환위기 이후 국내 금융산업은 대규모 구조조정을 경험하면서 외형상으로 큰 변화가 있었지만 내실(인력)은 그렇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금융전문인력 부족 현상이 향후 심각한 인력난을 불러올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금융연구원은 국내 금융인력 구조를 감안하면 2008년 1500명 정도의 금융전문인력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했다. 또 2015년까지 무려 1만 명 이상의 공급 부족 현상이 나타날 것으로 내다봤다.
말 잔치뿐인 정부의 인재 양성
금융 전문가들은 국내 금융전문인력 수준이 바닥을 기고 있는 이유로 정부의 금융정책 실패, 금융기관의 수익성 위주 경영, 전문 금융교육시스템 부재 등을 꼽고 있다. 한마디로 금융전문인력을 키워낼 수 있는 밑바탕이 안 돼 있다는 것이다. 강종만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국내의 금융전문인력 부족 현상은 한두 가지 문제 때문이 아니다”며 “제도, 경영, 교육 등 전반적으로 후진적인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참여정부는 2003년 출범하자마자 야심 차게 동북아 금융허브 정책을 발표했다. 제조업 위주의 성장 한계를 금융선진화로 돌파하겠다는 취지에서였다. 이후 지난 4년간 각종 금융관련 제도 개선을 통해 인프라를 보강하고, 금융기관의 대형화를 유도했지만 정작 중요한 금융전문인력에 대해서는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증권사 고위관계자는 “금융전문인력 없이 금융 선진화를 논한다는 것은 ‘앙꼬 빠진 찐빵’과 같다”며 “동북아 금융허브 정책이 지지부진한 것도 핵심 요소인 금융전문인력 양성을 상대적으로 등한시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정부 당국이 금융전문인력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금융전문인력 양성 기본계획’을 내놓은 것은 지난해 6월. 그러나 이 계획마저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성과라곤 금융인력네트워크센터와 금융전문대학원을 설립한 것이 전부다. 이 기본계획을 수립, 진행하고 있는 금융허브추진위원회 산하 금융인력양성 분과위원회도 최근에는 활동을 거의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다가 금융허브추진위원회는 기본계획을 내놓은 지 1년도 채 안 돼 외국계 컨설팅회사에 새로운 계획을 의뢰하는 등 정책 추진의 일관성마저 상실한 모습이다. 이와 관련, 정부 관계자는 “한 달에 한두 번 모이던 분과위원회 모임이 최근에는 중단된 상태”라며 “(재경부) 인사이동 등으로 일이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는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또 “정권 말기에 접어들면서 정부의 동북아 금융허브 정책 의지도 한풀 꺾인 것 같다”고 우려했다. 국내 금융시장에 금융전문인력이 부족한 데는 개별 금융기관들의 잘못도 크다는 지적이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 금융기관들이 건전성과 단기 수익성 위주의 경영을 하면서 자체적으로 금융전문인력을 양성하는 데는 소홀했다는 것이다. 심규선 CJ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스페셜리스트를 양성하는 것은 장을 담그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국내 금융기관들은 외환위기 이후 숙성된 인재들보다는 리스크를 관리하고, 현업에서 단기실적을 올릴 수 있는 사람만 키워왔다”고 비판했다. 지금도 역시 금융전문인력을 양성할 수 있는 토양이 갖춰지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 단적인 예가 금융기관의 순환보직. 금융인력네트워크센터 조사 결과, 국내 금융업 전체 종사자 중 현 직무에 3년 이상 근무 경험이 있는 인력 비중은 24%에 불과했다. 나머지 76%가량은 3년도 채 안 돼 다른 직무로 옮겨가는 것이다. 더욱이 현재 투자직무에 종사하고 있는 금융전문인력마저 현 직무에서 3년 이상 근무한 사람은 28.3%에 그쳤다. 현업에 있어도 전문성을 갖추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금융인력네트워크센터 관계자는 “투자은행, 상품개발 등 금융전문인력은 오랜 경험에서 얻는 네트워크와 노하우가 가장 중요하다”며 “하지만 국내 금융권의 경우 동일 직무 근무 기간이 짧아 해당 직무에 전문성을 갖춘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이 내놓은 금융인재 양성 방안
▶ 단기 ○세계 한국 금융인 네트워크 구축 ○세계 금융채용박람회 개최 ○외국 고급전문인력 채용 활성화 ○성과보수제 확대 도입
▶ 중장기 ○경제특구와 같은 금융특구 개발 ○영어 공용화 ○금융권역별 연수시스템 통합 ○투자은행·파생상품 등 전문분야별 교육시스템 마련 ○금융전문대학원 등 MBA 활성화 ○해외 유수 금융전문교육기관과의 협력 체계 구축
금융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시스템이 부재한 것도 문제로 지목되고 있다. 최근 들어 대학 내 금융관련 학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지만 이론교육에만 치중하고 있어 현업에서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IMD의 국가별 대학교육 및 금융교육 경쟁력 순위가 각각 40위, 28위에 불과한 것도 이 때문. 그나마 지난해 정부 주도로 금융전문대학원이 설립됐지만 한 해 배출인력이 고작 100여 명 내외로 금융시장 수요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또 금융권역별 협회 차원에서 가동되고 있는 연수 시스템은 초보적인 교육 수준에 그치고 있어 현업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개별 금융기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내연수 시스템도 해외 금융시장에서 선진금융 기법을 배우기보다는 MBA 등 학위 취득에만 집중돼 있어 문제라는 지적이다. 증권업계 인사담당자는 “협회 차원의 연수시스템은 직원들에게는 교양과목과도 같은 수준”이라며 “국내에는 투자은행이나 파생상품 등의 전문분야가 정착된 지 얼마 안 되다 보니 현장에서 직접 금융기법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고 밝혔다. 금융 전문가들은 지금과 같은 척박한 금융인재 토양에서는 금융 선진화는 물론 동북아 금융허브 정책이나, 소득 3만 달러 실현도 힘들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수많은 선진 정예군을 둔 글로벌 금융기관들에 국내 텃밭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현재 국내 금융전문인력 수준을 고려하면 해외 글로벌 금융회사들과 경쟁할 수 있는 대형 금융기관 출현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금융환경 변화로 국내 금융시장은 성장하고 있지만 정작 시장은 외국계 금융기관이 지배하는 윔블던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도 크다”고 밝혔다. 이미 국내 회사채 인수 주선, 기업공개(IPO), 인수합병(M&A) 등 투자은행 부문에서는 외국계가 판을 치고 있는 상태다. 실례로 올 들어 3분기까지 국내 기업 M&A 자문시장은 그야말로 외국계의 ‘그들만의 리그’로 끝났다. 1위부터 10위까지 모두 외국계 투자은행 및 증권사가 휩쓴 것.
코페르니쿠스적 사고 전환 필요
1위는 두산인프라코어의 미국 건설중장비업체 인수 등 3건의 대형 M&A 자문을 맡았던 씨티그룹이 차지했다. 씨티그룹은 올 들어 9월 말까지 국내 M&A 시장에서 118억6700만 달러 규모의 거래를 성사시키며 30.5%의 점유율로 작년 5위에서 1위로 껑충 뛰었다. 2위는 론스타로부터 외환은행 지분을 넘겨받은 HSBC홀딩스(22.1%), 3위는 신한지주의 LG카드 인수 자문 등 3건의 대형 M&A를 맡았던 UBS(19.7%)가 각각 차지했다.
이 같은 투자은행 부문의 외국계 독식 현상은 갈수록 심화될 전망이다. 외국 금융기관들이 투자은행 조직을 더욱 키우고 있는 데다, 최근에는 새로운 글로벌 금융기관들도 속속 국내 시장에 진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 들어서만 악사(AXA) 등 전 세계 10여 개의 글로벌 금융기관이 국내 시장에 진출한 상태다. 금융전문가들은 정부와 교육계, 금융업계 모두가 지금이라도 금융전문인력 양성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고 있다. 정부는 성과보수제 도입, 금융특구 개발, 영어 공용화 등 제도 개선을 통해 금융전문인력이 자연 배출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고, 금융업계와 교육계는 선진화된 조직 및 성과문화 정착, 체계적인 교육시스템 마련 등으로 좋은 씨앗을 발굴,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베어스턴스은행에서 파생상품과 차익거래를 담당했던 최홍 ING자산운용 사장은 “인재 양성은 정부가 주도적으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해당사자들도 함께 참여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이라며 “모든 걸 뒤바꿀 수 있는 코페르니쿠스적 사고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 사장은 금융전문인력 양성 방안의 일환으로 경제 및 관광특구처럼 세제 지원 등이 가능한 금융특구 개발을 제안했다. 윤병철 한국자산운용전문가협회장은 영어 공용화, 외국 고급인력 채용, 이민정책 전향적 검토 등을 금융전문인력 양성 방안으로 내놓았다. 그는 최근 부산에서 개최한 국제금융포럼에서 “금융선진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인재 확보”라며 “이를 위해 영어 공용화, 이민정책 전향적 검토 등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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