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세계 경제의 ‘큰손’ 사막의 왕족들

세계 경제의 ‘큰손’ 사막의 왕족들

▶지난해 1월 부시 미국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아라비아의 전통 복장을 하고 모텝 압둘라 왕자(오른쪽)와 함께 했다.

“오일 머니가 세계를 사들이고 있다.” 지난해 말 뉴욕타임스는 2008년 더욱 거세질 오일 머니의 공세를 예견했다. 오일 머니가 넘치면서 중동은 호황기를 맞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쿠웨이트 등 주요 산유국 왕족은 국가의 최대 생산수단인 석유 자원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막대한 원유 수입은 왕족의 손을 거쳐 투자되고 분배된다. 이코노미스트는 ‘검은 황금’의 지배자인 사막 왕족들의 돈의 향연과, 그에 따른 전 세계 ‘부’(富)의 이동을 집중 취재했다.
유가가 100달러를 돌파한 올해 1월 초. 이집트 나일강 가의 카페에는 흰색의 다슈다샤(원피스형 걸프 남성 전통복장)와 흰 두건에 검은 이칼(머리띠)을 두른 젊은이들이 우글거렸다. 이슬람의 성지순례인 하지가 끝나고 희생제 축제기간을 맞이해 인근 아랍국으로 휴가차 달려온 사우디 청년들이다. 중동권 최대 관광지 카이로 시내의 이 강변 카페는 이날 문을 걸어 잠갔다. ‘왕자님’이 오셨다고 한다. 카페 입구에는 미국 프로레슬링에 등장할 법한 백인과 흑인 ‘떡대’들이 지키고 서 있다. 걸프 왕족의 개인 경호원으로 최근 고용이 늘고 있는 서양인들이다. 왕자의 이름을 물어보니 그리 영향력 있는 인물은 아닌 듯하다. 6000여 명에 달하는 사우디 왕자 중 한 명일 것이다.
젊은 왕자 일행 50여 명의 파티
카페 입구를 중심으로 좌우로 포르셰 등 유명한 고급 스포츠카와 리무진이 자동차 박람회에 전시된 듯 늘어서 있다. 관광국가 이집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술을 파는 이 카페 입구로 택시들이 계속 밀려온다. 택시에서 내리는 손님은 대부분 야한 복장을 한 아가씨들이다. 묘령의 아가씨들은 ‘중개인’을 따라 카페로 계속 들어간다. ‘퇴짜’를 맞았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택시에 오르는 이들도 있다. 카페 안에서는 박수 소리와 괴성이 이어진다. 이 왕자와 친구 및 수행원 50여 명을 위해 나일강 가의 ‘람세스 힐튼’ 호텔 7개 층 스위트룸은 일주일 동안 다른 손님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2002년 고유가가 시작된 이후 많게는 2조 달러 정도로 추산되는 오일 머니를 둘러싼 중동의 풍속도다. 며칠 휴가만 생기면 이집트, 레바논, 요르단 등 아랍권 내 ‘즐길 수 있는’ 개방된 국가로 향하는 걸프 남성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최근 중동권에서는 휴일에 역내 항공권을 구입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이 때문에 아예 고급 차량을 몰고 수천㎞를 달려 시리아, 요르단 등지로 향하는 사우디, 쿠웨이트 출신 남성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산유국이 아닌 가난한 아랍국가 정부와 관광업체들은 걸프의 ‘큰 손님’들 모시기에 여념이 없다. 패키지로 최고급 ‘서비스’를 제공하는가 하면 전용기에 대해서는 공항 일정을 조정해서라도 영접하는 분위기다. 걸프 산유국의 지배 왕족을 상징하는 ‘알’(가문)이 마지막 이름 앞에 붙었다 하면 호텔과 관광회사는 물론 정부의 고위 공무원들도 긴장한다. 사우디의 알사우드, 아랍에미리트의 알나흐얀과 알막툼, 쿠웨이트의 알사바흐, 카타르의 알사니 등의 가문 이름은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이름’이라고 한다. “연줄이 없으면 시멘트를 구하기도 어렵습니다.” 신흥 건설회사 알디글라 그룹의 알리 자파르 현장소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 남부의 마디 지역에 위치한 대부분의 공사장은 최근 조용하다. 인부가 와글거리고 오가는 트럭이 모래먼지를 일으켜야 하는데 사막의 겨울바람만 중단된 공사장을 방문하고 있다. 건축자재 부족 사태가 1년 이상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료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시멘트공장 등에 문제가 생겨서도 아니다. 수요가 너무 엄청나다 보니 공급이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파르 소장은 “우리 같은 중소기업은 자재를 못 구해 문 닫을 판이다”고 강조했다.
부동산 투자 등 게걸스러운 오일 머니
중동에 최근 불고 있는 건설 붐의 한 단면이다. 이집트만 해도 지난 3년간 부동산 가격이 250% 상승했다. 걸프 산유국의 왕족들이 막대한 오일 머니를 부동산 개발에 집중 투자하면서다. “오일 머니라는 괴물이 우리의 땅과 건물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다”고 한 언론인은 개탄했다. 개발 붐으로 카이로 시내는 물론 시외에도 건설 현장이 수두룩하다. 무카윌룬 알-아랍 같은 정부 회사들만이 그나마 건축자재를 공급받을 수 있다. 그것도 웃돈을 얹어서다. 최근에는 두바이의 최대 부동산 개발회사인 이마르, 다막 등도 이집트에 진출하면서 건축자재 품귀 현상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시작단계일 뿐”이라고 중동 경제주간지 알아흐람 알이크티사디는 지난해 말 전망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돈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라크 전쟁 전후로 시작된 고유가가 예상외로 오래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도 유가가 급락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이집트는 최근 중동 내 ‘잘나가는’ 경제의 한 예일 뿐이다. 앞으로 30년 동안 수백 개의 고층 빌딩이 올라가는 두바이를 중심으로 중동 전역이 들썩이고 있다. UAE의 아부다비, 카타르의 도하, 쿠웨이트, 바레인의 마나마 등에서는 현재 짓고 있는 최고층 빌딩이나 플랜트 시설을 쉽게 볼 수 있다.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방중 중인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오른쪽)이 2006년 1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나라마다 사막의 노다지를 잡아라
오일 머니가 풍부하게 회전되면서 중동은 호황기를 맞고 있다. 증시도 급등하고, 소비도 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1500달러도 안 되는 이집트인들도 노키아보다는 고가의 삼성 휴대전화를 더 찾고 있다. 대형 쇼핑몰이 속속 들어서고 외국 명품도 줄을 이어 입하하고 있다. 인프라 투자와 소비가 동시에 성장하는 모습이다. 앞으로 수년간은 중동 시장에 파란불이 계속 켜질 전망이다. 세계 최고급 승용차 생산업체인 포르셰가 ‘페달 포르셰 모형’으로 두바이, 바레인 등에서 ‘포르셰 어린이 운전학교’를 매년 개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포르셰를 자연스럽게 선택하도록 어릴 적부터 인식시킨다는 상술이다. 우리 기업이 지난해 중동에서만 228억 달러의 건설 수주를 한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2006년 100억 달러를 약간 넘긴 것에 비하면 1년 새 두 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건설교통부는 1월 초 “중동 국가의 오일 머니 등에 힘입어 향후 3~4년 동안은 지난해와 비슷한 350억~400억 달러를 수주할 것으로 기대된다”며 중동 붐이 지속될 것임을 전망했다. 한국뿐 아니다. 이슬람권 과격세력과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의 거대 에너지 및 건설회사인 핼리버튼은 2007년 3월 두바이로 본사 이전을 결정했다. 수주와 기타 비즈니스의 중심이 중동이 되었음을 명확히 입증하는 사례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부(富)의 이동이 진행되고 있다.” “오일 머니가 세계를 사들이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2007년 12월 말, 2008년 더욱 거세질 오일 머니의 공세를 예견하는 글을 실었다. 석유 생산국들의 전 세계 투자액이 4조 달러가 넘는다는 통계도 내놓았다. 이 중 절반 정도인 2조 달러가 걸프 산유국에서 나왔다. 이 정도는 상당히 점잖은 표현이다. 2007년 11월 말 뉴욕 선(New York Sun)은 “사막의 베두인들이 오일 머니로 서방을 공략해 중세의 암흑시대를 다시 열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았다. 실제로 넘쳐나는 걸프 자본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온건한 중동 국가를 ‘싹쓸이 한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부동산 등을 매입하고 있다. 각국의 주식 및 펀드 시장의 큰손으로도 자리매김했다. 미국의 외교적 압박을 받고 있는 시리아와 이란도 오일 머니 진출에 예외가 아니다. 두바이의 최대 부동산 개발업체인 이마르는 2006년 중반 시리아에 34억 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부동산 투자를 시작했다. 같은 해 9월 강경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 이란 관광산업 개발 프로젝트를 내놓았을 때도 걸프 자본이 그 지원을 담당한다는 보도가 나왔을 정도다.


오일 머니를 활용한 주요 국부펀드(추정치) ■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투자청(ADIA) :

8750억 달러 ■ 노르웨이 국가연금펀드 :

3300억 ■ 사우디아라비아(계획 포함) :

2500억(전체 3300억) ■ 러시아 안정화펀드 :

1000억 ■ 쿠웨이트투자청 :

700억(전체 2130억) ■ 브루나이투자청 :

300억 ■ 카타르 :

200억∼600억

“베두인이 오일 머니로 서방 세계 공략”
미국과 충돌을 벌이는 나라로도 뻗어가는 오일 머니가 서방의 투자기회를 놓칠 리 없다. 산유국들은 풍부한 오일 머니로 국부펀드 등을 조성해 부동산과 기업을 사들이는 등 적극적인 해외투자에 나서고 있다. 최근 아랍에미리트의 국부펀드인 아부다비 투자청이 시티그룹에 75억 달러를 투자해 최대주주로 올라선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투자 지역도 다양해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 중심에서 점차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확대하고 있다. 투자 대상이 채권 같은 안전자산에서 기업이나 헤지펀드, 부동산 등으로 다양화하는 것도 새로운 경향으로 꼽힌다. 리먼 브러더스의 에드워드 모스 에너지담당 연구원은 “걸프 지역 국가들만 해도 매주 50억 달러에 이르는 돈을 굴려야 하는 상황”이라며 “이는 투자 대상과 운영방식 등을 결정하는 데 있어 쉽지 않은 작업”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유가의 고공행진이 꺾이지 않는 한 오일 머니가 해외 자산과 부동산 쪽에 몰리는 경향이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아랍의 민족주의적 학자들은 “기회가 왔다”며 “서방의 금융과 주식시장에 확고한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중동 내 투자자들을 부추기고 있다. 산업혁명을 바탕으로 18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유럽의 중동 식민지화는 이제 역전되고 있다. 이제 서방은 ‘검은 혁명’이라며 오일 머니의 진군에 안보를 이유로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2006년 초 두바이포트월드의 미국 내 항만 운영권 인수를 미국 여론과 정치인들이 막아낸 것이 한 예다. 천문학적인 오일 머니가 지배층인 왕족에게 집중되는 현상은 중동 산유국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유전의 법적 소유주는 국가지만 국가의 통치자와 CEO는 국왕과 왕자들이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부족 혹은 가문이 국가의 지배층이 되는 세습왕정 정치제도 아래서 국가의 재정수입은 우선적으로 왕족의 손을 거치게 된다. 특히 석유의 경우 유전 개발 자체가 외국 석유 메이저와 왕족 간 대규모 계약 체결로 시작된다. 결국 사우디, UAE, 쿠웨이트 등 주요 산유국 왕족들은 석유 자원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는 소위 ‘렌티어’(Rentier·地貸추구) 경제구조 위에서 권력을 더욱 강화한다. 국가의 최대 생산수단을 독점함으로써 이를 바탕으로 국가와 국민을 통제한다. 생산에 따른 재화의 분배도 국가, 즉 왕족의 몫이다.
‘검은 황금’의 지배자 중동의 왕족들
사막 지역에 사는 일반 국민은 석유 주도 국가산업을 대체하거나 이에 도전할 생산수단이 없기 때문에 지배층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걸프 왕정국가가 안정적인 왕정을 지속하고 민주화를 거부해도 큰 정치적 도전을 받지 않는 배경에 이 같은 생산과 분배 시스템이 존재한다. 소득의 상당부분을 국가의 분배에 의존하는 국민으로서는 힘이 없는 것이다. 석유를 둘러싼 생산 수단과 부의 축적을 둘러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이미 50여 년 이상 대부분의 걸프 국가 국민을 길들여 왔다. ‘검은 황금’ 석유를 놓고 벌이는 사막 왕자들의 돈의 향연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일이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제조업 자동화’ 가늠자 ‘로봇 밀도’...세계 1위는 韓

2영풍, 고려아연에 배당금만 1조1300억 수령

3KT, 1.6테라 백본망 실증 성공...“국내 통신사 최초”

4'윤여정 자매' 윤여순 前CEO...과거 외계인 취급에도 '리더십' 증명

5‘살 빼는 약’의 반전...5명 중 1명 “효과 없다”

6서울 ‘마지막 판자촌’에 솟은 망루...세운 6명은 연행

7겨울철 효자 ‘외투 보관 서비스’...아시아나항공, 올해는 안 한다

8SK온, ‘국내 생산’ 수산화리튬 수급...원소재 조달 경쟁력↑

9‘국내산’으로 둔갑한 ‘중국산’...김치 원산지 속인 업체 대거 적발

실시간 뉴스

1‘제조업 자동화’ 가늠자 ‘로봇 밀도’...세계 1위는 韓

2영풍, 고려아연에 배당금만 1조1300억 수령

3KT, 1.6테라 백본망 실증 성공...“국내 통신사 최초”

4'윤여정 자매' 윤여순 前CEO...과거 외계인 취급에도 '리더십' 증명

5‘살 빼는 약’의 반전...5명 중 1명 “효과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