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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 쇼의 ‘탈선’

리얼리티 쇼의 ‘탈선’

도로에서 교통위반 딱지를 건네는 경찰에게는 어떡하든 핑계를 대고 그 순간을 모면하려는 게 인지상정이다. “경관님, 아까는 노란 불이었다니까요?”나 “얼른 가서 애들 밥 챙겨줘야 하는데 늦었거든요.” 혹은 “너무 화장실이 급해서 그만….” 이런 유다. 아무리 읍소한다지만 최근 맷 롤로프가 사용한 알리바이에는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듯하다. 롤로프는 오리건주 워싱턴 카운티의 한 식당 주차장에서 차를 빼다가 곤란에 처했다. 우선 크게 원을 그리며 차를 돌리다가 중앙선을 살짝 스쳤다. 그리고 차도를 따라 진행하다 다시 한 번 중앙선을 살짝 넘어섰다. 몇 초 후 뒷거울을 통해 경찰차의 번쩍이는 경광등이 보였다. 경찰은 비틀거리는 차를 보고 음주운전이 의심된다고 말했다. 롤로프는 자신이 운전하는 밴의 페달이, 자신보다 다리가 몇 인치 짧은 부인에게 맞춰진 바람에 운전이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키가 고작 120㎝ 정도밖에 되지 않는 그는 차문을 열고 나와 운전석 페달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직접 보여줬다. 그걸 문제 삼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은 음주측정을 계속 요구했다. 롤로프는 결백을 주장하며 이를 거부했다. 결국 롤로프는 교통재판소에 출두했다. 그래도 위안거리는 있다. 롤로프는 TV채널 TLC에서 방송하는 프로그램 ‘작은 사람, 큰 세상(Little People, Big World)’의 스타다. 그의 법정 싸움은 3월 3일부터 시작된 시즌3 첫 회 분의 소재가 됐다. ‘작은 사람들’에게 극적인 소재가 필요해서가 아니다. 이 프로그램은 한 주에 700만 명의 시청자를 끌어 모으면서 소규모 TV제작사들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했다. ‘나는 비만이에요’ ‘우리는 한몸: 애비와 브리타니가 열여섯 살이 됐다’ ‘284㎏의 거구 여인’ 등이 그런 예다. 200여 년 전 엽기적인 소재로 장안의 화제를 모았던 P T 바넘처럼 미국적이면서도, 그 계보를 잇는 제리 스프링거 쇼처럼 특별히 새로울 건 분명 없다. 하지만 ‘0.5톤 남자’의 집에 뒹구는 정크푸드처럼 MTV부터 TLC까지 채널을 몇 번만 돌려봐도 어디서나 나오고 재방송도 끊이지 않는다. 이런 프로그램 중 다수는 의학정보나 개인의 자립을 명목으로 시청자의 관음증을 자극한다. 예컨대 ‘나의 거대한 발’이란 프로그램은 왼쪽 다리가 엄청나게 부풀어 오르는 림프부종에 걸린 여성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리얼리티 TV의 떳떳하지 못한 쾌락에 관한 윤리적 문제를 불러온다. 과연 오락의 끝은 어디고 착취의 시작은 어디인가?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이런 질문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다루는 소재의 긍정적인 측면을 돋보이게 할 수 있는 인물과 상황을 찾아내는 데 노력을 경주한다고 말할 뿐이다.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도록 부드럽게 권유하는 오락 프로그램”이라고 데비 마이어스 TLC 편성부국장은 말했다. “서로의 차이는 사라지고 결국,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된다.” 맞는 말이다. 사람들은 ‘작은 사람, 큰 세상’을 지켜보면서 롤로프네 가구들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고, 정상 체형을 가진 세 아이들과 부모처럼 몸집이 작은 한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지 지켜본다. 롤로프의 아내 에이미는 자신의 가족이 여느 가정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시청자들이 곧 깨닫게 되리라 말한다. “이런 TV프로그램이 아니었어도 사람들은 늘 우리를 쳐다본다”고 에이미는 말했다. “이젠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알게 됐다.” 스타가 되고 싶다는 개인의 욕구도 어느 정도 작용한다. 마이어스는 출연 지원자가 구름처럼 몰려든다고 말했다. 어찌됐건 소재가 너무 평범하면 안 된다. ‘가정의 평안’에는 가정문제를 상담해 주는 랍비가 주인공인데 시청자가 없었다. 마이어스는 “모두가 겪는 일을 다룬다면 그건 오락이 아니다” 고 말했다. 마이어스는 프로그램이 너무 칙칙해져도 안 좋다고 말한다. 주 메뉴는 ‘영감’이고 거기에 ‘변신’이 반찬으로 나간다. “우리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찾는다”고 마이어스는 말했다. “겉으로 보면 좀 달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말 멋지고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이 좋다.” 그런 사람은 많다. ‘반 쪽짜리 여인’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로즈마리 시긴스가 대표적이다. 유전자 이상으로 천골무형성이란 병을 앓는 시긴스는 어릴 때 두 다리를 잃었다. 그는 손으로 ‘걷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외출하는 게 편해졌다. 그러니 특이해 보일밖에. 시긴스는 의사의 진단(그리고 권고)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건강한 자녀를 둘이나 출산했다. TLC와 디스커버리 채널은 시긴스의 다큐멘터리 두 편을 만들었다. 둘 다 재방송될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ParentDish.com 같은 블로그는 엄마 시긴스에 대한 훌륭한 묘사를 들어 그 프로그램의 시청을 추천하고 나섰다. 그러나 모두가 리얼리티 쇼 출연을 행운이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마이클 헤브랜코는 TLC의 프로그램 두 편에 출연했다. 그 가운데 ‘0.5톤의 남자’는 그에게 씻을 수 없는 낙인을 찍었다. 고래를 실어 나르는 포대와 지게차를 이용해 뉴욕의 집에서 끌어 내어지면서 얼굴이 눈물 범벅이 된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방영됐다. 이런 비만 프로그램은 더러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등장인물들이 스스로 변신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잔인하기도 하다. 옷을 반쯤 걸친 거인이 중장비로 침대에서 끌어 내어지는 모습이 방영되는 동안 이런 해설이 덧붙여진다. “여기 350㎏이나 되는 산더미 같은 체구에도 계속 먹는 사나이가 있습니다.” 같은 주제로 내용만 달리한 프로그램은 한없이 많다. 그런 예가 TLC의 ‘대단한 의학’이다. 과거에 인기를 끌었던 의학드라마 ‘마커스 웰비’의 확장판 정도라 하겠다. 위장절제수술을 하는 부자(父子) 의사 이야기다. 환자에게 의학적으로 공감을 나타내면서도, ‘극단적인 피부 제거술’ 같은 줄거리에서는 엽기적인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런 프로그램들은 정말 끔찍하다”고 비만인 수용 향상을 위한 전국연합(NAAFA)의 프랜시스 화이트는 말했다. “‘작은 사람, 큰 세상’에 나오는 가족들은 아주 예쁘게 그리면서 왜 뚱뚱한 사람들 소재로는 그게 안 된다는 말인가. 그들은 존엄성 자체를 강탈당했다.” 지난 20년 사이 몸무게가 90㎏에서 450㎏으로 요동쳤던 헤브랜코도 그 말에 공감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엽기적인 볼거리를 좋아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는 출연을 고집한다. 응원 편지들에서 힘을 얻기도 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도움이 얼마나 절실한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방송 시작 후 뉴욕의 브룩헤이번 비만클리닉(헤브랜코도 여기서 치료를 받는다)에서 촬영했던 출연자 두 명이 사망했다. “그나마 내게 가치가 있는 건, 그들이 집 안에 틀어박혀 그냥 죽기만 기다리는 대신 바깥 세상으로 손을 뻗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라고 헤브랜코는 말했다. 프로그램 주인공들의 반응은 미묘하게 엇갈린다(출연료를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애비 헨슬과 브리타니 헨슬은 운전면허를 따는 과정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유합쌍둥이(머리는 둘이지만 몸통과 팔다리는 하나인 사람)인 자매는 가속 페달(애비)과 깜빡이(브리타니)를 각각 맡기로 했다. ‘애비와 브리타니가 열여섯 살이 돼요’는 섬세하게 연출된다. 소녀들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선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자신의 신체에 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더 이상 물끄러미 쳐다보거나 사진을 찍지는 않을 거다. … 최소한 우리가 누군지는 알게 될 테니까.” 영상물에 대해 소녀들이 말했다. 하지만 영상물을 찍는 동안 미네소타 집을 떠나 있을 때가 많았는데 그중에도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아이들이 모욕을 당한 느낌을 받았다”고 어머니 패티는 말했다. “아이들이 어떻게든 서커스 광대처럼 자라나게 하고 싶지 않다”면서 다큐멘터리에서 패티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2년 전 처음 영화를 찍고 나서는 아이들의 언론 접촉을 막기도 했다. 지금 그 영화를 보면 왜 그들이 그토록 외부의 관심을 피하려 했는지 이해가 간다. 그 영상물은 디스커버리 헬스 네트워크에서 끊임없이 재방송된다. 소녀들이 도자기를 만들고 서로 머리를 빗겨주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뭔가를 열심히 훔쳐보는 듯한 불편한 감정을 떨쳐내기 어렵다. 해설자는 설명한다. 그들이 “거의 모든 감성에서 완벽하게 정상적인 10대”라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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