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은 늘 거지들로 북적댔죠”
“집 안은 늘 거지들로 북적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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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째 노조 ‘위원장’ 직함을 가진 강성천(68)씨를 만나러 마포구 성산동 자택으로 향했다. 버스 기사로 잔뼈가 굵고 노동운동 현장에서 평생을 보낸 투사이니 얼마나 ‘터프’하고 우락부락할까 지레 짐작하면서. 첫 만남 순간 선입견이 와르르 무너졌다.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에 느릿느릿 조용한 말투는 전혀 투사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1·4후퇴 때 함북 성진에서 마지막 기차를 타고 내려왔어요. 기차가 지나가면서 굴과 교량을 전부 폭파했지. 무개차라 텐트를 치고 그 밑에 사람들이 탔는데 공비들이 총을 마구 쏴요. 나중에는 배 타고 거제도 피란민수용소까지 갔다가 국군이 북진한다고 해서 고향 가려고 주문진까지 갔지. 그런데 다시 철수한다는 거요. 피란 보따리를 메고 저녁이 다 돼서 걸어 내려오는데 피란민들 머리 위로 포탄이 쏟아졌어.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방공호에서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우물에 빠뜨려 죽인 시체를 신작로 양 옆에 좍 깔아놨는데 그 사이를 걸어서 남하한 거요.” 그는 며칠 밤을 새워도 끝이 없을 어린 시절 생생한 고생담으로 말문을 열었다. 생사를 건 북새통 와중에 큰누나는 함흥에서 이산가족이 됐고, 전북 이리(현 익산시) 피란민수용소에 정착한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와 강 의원 네 식구였다. 이때부터 그는 12세 어린 나이에 소년가장이 됐다. “아버지는 거동을 못할 때야….” 말끝을 흐려 아버지에 대해선 더 묻지 못했다. 이북에 살 때는 부족함 없이 지내다 졸지에 소년가장이 된 그는 역에서 석탄을 주워 가족의 생계를 꾸렸다. “그때는 석탄을 때는 증기기관차가 다닐 때였어요. 이리역에 가서 기관차 밑을 막 흔들면 다 탄 석탄이 주르르 떨어지는 거야. 그걸 맨손으로 긁어 모아 가져와 집에서 불을 때고 다시 팔았지. 그 돈으로 생활한 거요. 그때 석탄을 퍼 담느라 열손가락에서 피가 났어. 손 끝 만져 봐요. 얇지? 지금도 이런데 그땐 피가 철철 날 수밖에….” 13세 나이로 동네 미곡상에서 급사로 일할 땐 80kg 쌀을 메고 나르다 힘에 부쳐 나무에 정강이를 찧었다. 그 상처가 아직도 오른쪽 다리에 3cm 흉터로 선명히 남아있다. 배고픔을 해결하느라 학교를 가는 둥 마는 둥 하다 이리중학 2학년 때 먹고살 길을 찾아 가족이 서울로 이사했다. 그 길로 학교와는 끝이었다. 대신 버스 기사 조수를 시켜달라며 무작정 낯 모르는 기사에게 매달렸다. “조수 시켜달라고 길거리에 세워둔 차를 무작정 닦고 쓸었지.” 그렇게 2년 반을 공들여 조수도 하고 운전도 배웠다. 1958년, 만 18세의 나이로 운전면허증을 받아 들자 돈을 벌 수 있다는 기쁨이 밀려왔다. 버스회사에 예비운전사로 취직해 6개월쯤 지났을까. 어느 날 신사가 와서 명함을 내밀며 전화하라고 했다. 공장을 가지고 버스 두 대를 굴리는 사장이었다. “그 양반이 나한테 정식 기사로 운전을 맡기더라고. 죽기 살기로 열심히 했더니 딴 기사들보다 수익이 좋아요. 그런데 삥땅도 안 치고 그대로 갖다 주니까 나를 인정하는 거야. 공부가 하고 싶어 운전할 때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니까 잘 봤나 봐요.”
안내양 몸 수색하는 사감 혼내주기도 22세 되던 해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다. 제대 후 택시회사에서 5년간 일하면서 돈도 잘 벌었지만 신진자동차 버스 기사로 다시 입사했다. 처음 그에게 운전을 가르쳐 준 기사가 그곳 노조 분회장(현 위원장)으로 있었다. 다음 분회장 선거 때 열심히 그를 도와 재선에 성공하자 강 의원에게 부분회장 자리를 맡겼다. 그리고 1년이 채 안 돼서 분회장이 사고로 사망했다. “술을 좋아하던 양반이었는데 저녁에 술 잡숫고 넘어져서 뇌혈관이 터진 거야. 돌아가셨지요. 그래서 내가 분회장 자리를 거저 줍게 된 거지.” 72년 분회장이 된 후 버스 운전에서 손을 뗐다. 이때만 해도 기사나 안내양은 사람 취급을 못 받던 시절이었다. 노동조합이 막 생겨나던 초창기라 사업주는 법 위에 군림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사업주, 회사 간부들과 싸우자면 우선 법부터 알아야 했다. “학력이 중졸도 못 되니 아는 게 없잖소. 근로기준법이 전문 103조인데 하얀 건 종이고 까만 건 한자더라고. 그땐 법조문이 다 한자로 되어 있었어요. 펜으로 한문을 그리면서 공부한 거야. 모르는 거 있으면 전무한테 가서 물어봤지. 싸울 때 싸우더라도 동생같이 잘 가르쳐 줬어. 그땐 인간적인 게 좀 있었지.” 근로기준법을 통달한 그는 모태인 헌법까지 전부 외웠다. 지금도 조합원들을 만나면 “헌법 4조가 뭐야?”하고 불쑥 질문을 던져 곤혹스럽게 만들곤 한다. 돈이 없어 공부를 못했던 그는 바쁜 시간을 쪼개 3개 대학 특수대학원을 수료했다. 그가 앞장서 만든 자동차노련 장학재단은 현재 기금만 250억원이 쌓여 있고 14년간 집행한 금액은 350억원에 달한다. 매년 40억원 안팎을 조합원과 자녀 교육비로 쓰고 있다. “장학금으로 공부하고 유학한 버스 기사 자녀들이 법조계 등 사회 요직에 많이 진출해 있어요. 연맹 사무실 직원만 해도 석·박사가 수두룩해. 공부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장학금을 주지. 산별노조 가운데 우리보다 장학재단 규모가 큰 게 없어요. 노총 장학금보다 우리가 많아.” 해병대 출신에 의협심이 강해 불합리한 꼴을 보면 참지 못했던 그는 분원장 시절 수시로 버스 종점에서 활극을 벌였다. 안내양이 있던 시절 관리 차원에서 회사가 고용한 사감이 있었다. 사감은 안내양들이 돈통을 들고 회사로 들어오면 세숫대야를 갖다 놓고 자신의 몫을 뒤로 받아 챙겼다. 그걸 피하면 ‘삥땅’ 한 돈이 없는지 몸수색을 하며 괴롭히곤 했다. 버스 기사들은 사고가 나면 자기 돈으로 피해자와 합의를 봐야 했다. 회사에 손해를 끼치면 그날로 밥줄이 끊기기 때문이다. “손님이고 회사 간부고 머리 허연 기사한테 반말은 예사고 이 새끼, 저 새끼 하던 시절이니 억울하고 부당한 일이 얼마나 많았겠소. 우리 같은 젊은 혈기에 피가 끓잖아. 한번은 안내양들 괴롭히는 사감을 혼냈지. 따귀를 때렸어. 근데 알고 보니 동생이 종로경찰서 정보과에 있는 거야. 나를 잡으러 온 경찰관하고 종점에서 한판 붙었어. 그땐 내가 싸움을 잘했지. 나중에 경찰서로 연행됐는데, 이만저만한 일로 경찰과 붙은 건데 왜 나를 연행하느냐고 따졌어. 당신들 그러면 우리 조합원들 몰려와서 가만 안 있을 거라고 항의했지. 근데 진짜로 조합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경찰서 앞에서 소리치고 난리를 피우는 거야. 그냥 풀려났지 뭐.” 밖에서는 ‘노동자의 대부’ ‘거지 아버지’로 찬사를 받았지만 집에선 빵점 아빠, 빵점 남편이었다. 75년 3월 10일 노동절(근로자의 날 전신)에 12세 연하 부인과 결혼한 강 의원은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33년을 부부로 살았지만 부인은 지금까지 그의 월급이 얼마인지 모른다. 누군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부인의 고생은 끝이 없었다. ‘가장’이라고 변변히 집에 갖다 주는 돈도 없이 늘 버스 종점이나 길에서 만나 데려온 거지들로 집 안이 넘쳐났다. “그땐 종점에 서 있는 버스 안에 들어가 밤 사이 약 먹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었고, 추우니까 거지도 빈 버스에 들어와 자고 그랬어요.” 버스회사에 취직해 서울로 올라온 기사들을 몇 년씩 집에 묵게 했고, 서울로 공부하러 온 기사 자녀들까지 수년씩 뒷바라지하며 데리고 있은 적도 많았다. 70년대 버스 기사들이 중동으로 취업을 나가면 행여 부인들이 남편 없이 어려움을 겪거나 바람날까 염려돼 부인들을 집에 몇 년씩 데리고 있기도 했다. 어느 날 강 의원이 갓난아기를 안고 왔다. 뒤에는 행색이 남루한 여자가 꽃바구니를 들고 그를 따랐다. “집사람이 내가 어디서 바람 피워서 낳은 자식인 줄 알고 깜짝 놀란 거요. 애를 업고 거리 행상을 하는 아줌마였는데 아무도 꽃을 사는 사람이 없어. 집사람한테 밥 먹이고 꽃을 다 사주라고 했어요. 그래도 싫은 소리 하는 법이 없어 고맙지요. 또 미안하고.” 부인이 “국화꽃. 잊어버리지도 않아요, 내가”하고 거들었다. 버스 기사와 그 부인들, 고아소년, 거지까지 쉴 새 없이 집 안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그에게 부인이 “거지 아버지 노릇 그만하라”고 핀잔하면 출근길에 회사로 데려가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여 보내야 직성이 풀렸다. 집이 온갖 사람들 ‘정거장’이 됐지만 그래도 부인이 큰 소리를 내거나 바가지를 긁은 적은 없다고 했다. “가장이랍시고 집사람에게 발길질 한 번, 화 한 번 안 냈으니 그만하면 괜찮지 않으냐”고 웃는 그에게도 가슴 한편에 묻어둔 미안함이 있다. 어느 날 노사정위원회 상무위원들과 회의를 하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회의 중이라 바쁘다”며 내용도 묻지 않고 끊었다. 그날 밤 잠을 자는데 옆에서 부인이 ‘으윽’ 소리를 냈다. 그날 낮, 부인은 심장수술을 받고 왔다. 낮에 회의 도중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집에서 일을 도와주던 도우미였다. 심장수술을 앞두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보호자 사인이 필요하다는 병원 측 말을 그에게 전하려던 것이었다. 결국 도우미가 강 의원 대신 사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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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들에게 꿈 심어줘 뿌듯”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4번을 받던 날,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는 그는 휴대전화에 불이 나도록 축하전화를 받고서도 믿지 못했다. “노사정 상무위원 회의를 하다 전화를 받았어요. 후보 4번이라는데 안 믿어져. 그전까지 14번이다 17번이다 여러 말이 있었거든. 나중에 집에 와서 8시 뉴스를 보는데 내 사진하고 이름이 나오는 거야. 기쁨과 동시에 온몸에서 맥이 쭉 빠져. 우리 집사람은 수고했다는 한마디가 다야.” 그는 드라마 같은 인생을 국회의원으로 잘 마무리하면서 부인과 아이들, 그동안 힘이 되어준 조합원들에게 보답하겠다고 했다. “사실 그동안 국회의원들 욕 많이 했어요. 그런데 이 나이에 정작 내가 초선의원이 된 건데 어깨가 무거워요. 가정의 영광이고 크게는 우리 조합원에게 꿈과 희망을 줬다는 데서 자부심을 가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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