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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문제다

정치가 문제다

일본은 쌀을 수입할 필요도 없고 지도자들이 그것을 원치도 않는다. 실제 일본의 2007년 쌀 농사는 풍작이었으며 집권 자민당은 오래전부터 자국 농민들을 외부경쟁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애썼다. 보통 수입쌀은 창고에서 몇 년 묵힌 뒤 나중에 과자나 미소(콩과 쌀로 만든 일본 된장) 재료로 팔거나, 해외에 원조식량으로 보내거나 요즘엔 닭·돼지·소 등의 가축 사료로 먹이는 일도 흔하다. 일본이 쌀을 많이 수입하는 이유는 오직 세계무역기구(WTO)의 요구 때문이다. 일본은 1993년부터 연간 평균 국내 소비량의 4~7.2% 쌀을 수입해 왔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지난해 원하거나 필요하지도 않은 쌀을 77만t이나 들여와 전 세계에서 폭동과 소요를 유발하는 쌀값 폭등의 작지만 중요한 원인을 제공한 셈이다. WTO는 자유무역이란 명분으로 일본 쌀시장의 빗장을 풀었다. 일본과 이웃나라인 한국이 막대한 보조금으로 자국 농민들을 보호하는 탓에 소비자들이 그들의 주식인 쌀에 세계 평균 가격의 서너 배를 지불한다는 논리였다. 가령 태국의 농민들이 훨씬 더 적은 비용을 들여 더 싼 가격에 쌀을 공급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폐쇄적인 정책 탓에 개도국 농민들이 세계의 주요 쌀 시장에 진출하지 못하고 따라서 계속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그들은 주장해 왔다. 그러나 막상 일본이 시장을 개방하자 가장 큰 혜택을 본 쪽은 역시 막대한 보조금을 받는 캘리포니아주의 부자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1995년 이후 일본 수입 할당량의 절반가량을 차지했다. 같은 기간 그 지역(캘리포니아) 농민들에게 지급된 20억 달러의 보조금 덕분이었다. 이 사례에서 요즘 세계 식량위기를 초래하는 가장 큰 요인 가운데 두 가지가 드러난다. 하나는 크게 왜곡된 세계 농업무역 체제다. 부국(주로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들은 농민들에게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한 뒤 잉여분을 신흥시장에 싸게 팔아 치운다(일방적인 무역협정으로 개도국 시장을 강제로 개방하는 경우도 많다). 또 다른 요인은 개도국들이 농업 투자에 너무 소극적이라는 점이다. 이들 나라의 지도자들은 수입식량이 늘 쌀 것이란 그릇된 가정 아래 이를 합리화한다. “그들은 [농업투자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유엔 산하 국제농업개발기금(IFAD)의 레나트 바게 이사장은 말했다. “헛된 자기만족에 빠져 나태해졌다.” 이제 그들의 발 등에 불이 떨어졌다. 어느 모로 보나 분명 1980~2003년 사이의 이른바 ‘값싼 식량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듯하다. 새로 바뀐 환경에선 식량부족, 곡물가격 급등, 시장 불안 그리고 아프리카와 남아시아에 기아가 만연할 것이라는 근거 있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신흥시장에서 중산층이 뚜렷이 부상하면서 더 좋은 식량을 더 많이 소비하려는 데 기인했다. 이뿐만 아니라 한심하기 짝이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정책 실패도 한몫했다. 각양각색의 무역규제가 농업 원자재의 세계 무역을 왜곡하고 있다. 무역장벽의 형식은 아시아와 유럽, 미국과 중남미에서 저마다 다르지만 그 목적은 똑같다. 식량 마련이 아니라 자국 농민, 그리고 갈수록 줄어드는 농촌 사회의 보호다. 시장왜곡의 정도는 심각하다. 세계은행의 한 조사에선 부국의 수출 보조금과 관세 때문에 빈국 농민이 입는 손실 규모가 1년에 1000억 달러로 추산됐다. 뉴질랜드 총리 출신인 마이크 무어 WTO 의장은 WTO 회담을 조속히 매듭지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렇게 되면 2013년까지 농업수출 보조금이 없어지고 “부채경감과 해외개발원조를 모두 합친 규모의 네다섯 배를 아프리카에 지원”하게 된다. 2006년에 개발원조만 1000억 달러를 넘었으니 막대한 지원 규모다. 그러나 이번 식량위기로 WTO 협상은 완전히 공염불이 됐다. 특히 미국과 유럽을 비롯해 많은 회원국이 시장자유화를 위해 누가 무엇을 더 해야 할지 열띤 논란을 벌였지만 지금은 앞다퉈 시장에 빗장을 걸고 있다. 인도·베트남·태국·캄보디아 등 쌀이 남아도는 나라들은 국내 물가상승을 억제하려고 새로이 수출규제를 실시해 필리핀·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주요 수입국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이런 근린궁핍화 정책(타국의 희생 위에 자국의 번영이나 경기회복을 도모하려는 경제정책을 말한다) 탓에 세계물가가 오르고 위기가 더욱 악화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농업시장 조작이 문제의 원인인데 시장 조작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이치에 안 맞는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수십 년간 농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지난해 OECD 국가들의 보조금 총액은 2830억 달러) 국내 가격을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했다. 그러다 과잉생산 문제가 심각해지면 잉여분을 세계 시장에 싼값에 내다 팔았다. 그 덕에 최근까지 식량가격이 낮게 유지됐다. 멕시코가 대표적인 예다. 1993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된 뒤 보조금 지원을 받은 미국산 옥수수가 멕시코 시장에 범람하면서 몇 년이 안 돼 현지 옥수수 가격을 70%나 끌어내렸다. 같은 식으로 값싼 유럽산 설탕이 아프리카를, 미국산 쌀이 카리브해 지역을, 그리고 유럽과 미국산 닭이 가나와 카메룬을 휩쓸었다. 그러면서도 유럽연합과 미국은 높은 관세장벽을 세워두고 개도국의 역내 시장 진입을 막았다. 식량원조조차 지원을 위장한 덤핑인 경우가 많다고 영국의 농업정책 감시단체 Farmsubsidy.org의 설립자 잭 더스턴은 말했다. 지난 겨울 곡물 가격이 폭등했을 때(태국 쌀은 12~4월 사이 280% 올랐다) 빈국들이 전혀 식량 증산 채비를 갖추지 못한 데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가격 폭등의 원인은 수요 증가와 공급 충격(생산 증가율 둔화, 악천후, 옥수수의 바이오연료 전용)이었다. 물론 부국들에만 잘못이 있는 건 아니다. 아시아와 상당수 선진국 정부도 무역을 왜곡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공급을 제한하는 실수를 범했다. 이들 국가에선 관개시설이 망가지고, 정부의 농업지출이 감소하고, 소중한 농지가 “홍콩보다 LA를 표본 삼아 건물을 높이 올리기보다 널찍하게 짓기를 좋아하는 도시 계획자”들의 마구잡이 도시개발에 수용됐다고 스탠더드 차터드 은행이 최근 중국 관련 보고서에서 지적했다. 국제쌀연구소에 따르면 베트남·태국·방글라데시에선 1년에 수만ha의 주요 농지가 도시지역과 공업지역으로 바뀐다. 대규모 쌀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 때문에 수입에 크게 의존해 온 아시아 국가들은 요즘 후회 막급이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농민들에게 수출용 야자유 생산을 장려했다. 자국의 기후와 지형에는 쌀 농사보다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요즘 연간 식품비 지출이 너무 커지자 압둘라 바다위 총리는 최근 사라와크에 13억 달러를 들여 대규모 농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19세기 이래 쌀을 수입해 왔으며 현재는 세계 최대 수입국인 필리핀조차 수입 의존을 재고하고 나섰다. 아서 얍 농무장관은 “무슨 일이 있어도” 2011년에는 쌀 자급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려면 케루 빈 같은 지역에 대대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 케루 빈은 1973년에 이어 1980년대에도 기근이 휩쓸고 간 네그로스 섬의 불모지 마을이다. 가격이 많이 오른 요즘엔 주민 대부분이 쌀을 사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해 얌(마의 일종)이나 카사바를 심어 주린 배를 채운다. 근년 들어 엄청난 양의 식량을 소비하고 있는 두 고도성장 대국 중국과 인도에서 작황이 줄어든 데는 정책당국의 잘못도 크다. 베트남은 농민들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해 주고 장기적으론 생산량 극대화를 위해 힘쓸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방법으로 쌀 주요 수출국이 됐다. 반면 중국의 농민들은 힘 있는 현지 당 간부들의 부동산 개발사업에 자신들의 논을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한다. 그것이 “중국의 농민 대다수가 땅에 큰 투자를 하지 않고 한 세대를 그냥 지내온” 큰 이유라고 시애틀 농촌개발 연구소의 로이 프로스터만 명예회장은 말했다. 인도의 1800만 빈민 가구(1억 명 이상)는 땅이 없는 탓에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다. 이들은 주로 논에서 날품팔이를 하면서 약간의 돈벌이를 하지만 식량가격이 급등하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진다. 기근을 부르기에 딱 좋은 환경이다. 양국의 정책 당국도 땅 문제의 해결에 나섰다. 베이징 당국은 농민의 토지소유권을 강화하는 새로운 법령을 제정하고 인도는 1800만 영세민 가정에 테니스장 크기만 한 텃밭을 제공해 급등하는 곡물값의 충격을 덜어줄 계획이다. 보조금 지원을 받는 식량만 기아 위기를 부채질하는 건 아니다. 미국의 면화 보조금, 유럽의 허울뿐인 설탕시장 개방(정제되지 않은 값싼 설탕만 해당), 그리고 커피에 대한 구미(歐美)의 ‘경사 관세’(tariff escalation: 자국 제조업을 보호하려고 원자재 수입엔 관세를 부과하지 않거나 낮게 부과하는 대신 완제품 수입엔 가공도에 따라 관세를 올리는 방식) 관행도 가난한 농촌지역의 평균소득을 깎아내린다. “콩을 갈고 포장하고 브랜드를 붙이고 그밖에 어떤 식으로든 부가가치를 높일수록 관세가 올라간다”고 무어는 말했다. 이런 정책들 때문에 콜롬비아나 이집트 같은 나라는 기근에 빠질 위험이 커진다. 바이오연료의 인기도 마찬가지다. 서구 농업 로비스트들이 옥수수 에탄올(그리고 유채 바이오디젤 같은 다른 바이오연료)에 관심을 갖는 것은 생산 잉여분을 처리하고 거액의 농업보조금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그 결과 방대한 면적의 토지가 에너지용 작물 생산에 전용됐다(독일과 프랑스 경작 가능 토지의 15%, 그리고 미국 옥수수 생산량의 약 20%). 프로스터만 회장은 이렇게 경고했다. “보조금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 이대로 둔다면 자동차에 들어가는 옥수수가 15~20%가 아니라 그 두세 배에 이른다. 그것이 전 세계의 식량공급에 어떤 영향을 줄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농업학자들은 지구의 잉여식량 생산능력이 한계에 달하려면 아직 멀었기 때문에 팽창하는 인구를 먹여 살릴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주장하다. 이번 식량가격 위기는 그런 식량 생산 잠재력을 적극 개발하는 농업 활성화 정책을 마련토록 정치인들을 자극하는 촉매가 될 수 있다고 경제전문가들은 말한다. 관료적 행정절차를 줄이고 무역장벽을 허물고 농업투자가 가장 필요한 분야로 흐르도록 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한 가지 고무적인 현상은 이번 식량 위기를 계기로 아프리카를 비롯한 빈국들이 서로 수입관세를 철폐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면 당연히 생산이 늘어난다. 그리고 최근 몇 년 간 유럽연합은 다른 나라에 피해를 주는 수출 보조금을 감축하기 시작해 1990년대 최고 150억 유로에서 작년 30억 유로 이하로 줄였다(하지만 아직도 고율의 관세 다수를 없애지 않는다). 식량위기를 해결하려면 근본적인 태도변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일본이 수십만t의 쌀을 식량창고에서 묵히고 있는 한 조만간 그런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 전망이다.


With ROD NORDLAND in Rome, AKIKO KASHIWAGI in Tokyo and CHRIS YABES in Neg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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