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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업체야, 컴퓨터회사야?

대부업체야, 컴퓨터회사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부업계에 ‘족쇄’가 채워질 전망이다. 대부업을 영위하는 모든 업체의 상호에 반드시 ‘대부’라는 단어를 삽입해야 한다는 대부업법 개정안이 제출됐기 때문이다. 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본업이 대부가 아닌 업체들도 꼼짝없이 ‘대부’가 들어간 상호를 사용해야 한다. 이를테면 한국IBM은 ‘한국IBM대부’로, 전자지급결제업체의 선두주자 인포허브는 ‘인포허브대부’로, 휴대전화 제조업체 팬택씨앤아이는 ‘팬택대부’로 불릴 판이다.
‘장막 뒤에 숨어 있는’ 대부업체들에 대한 ‘커밍아웃’ 요구가 잇따르고 있다. ○○캐피탈, ○○파이낸스 등 일반 여신금융기관으로 오인하기 쉬운 대부업체들의 상호에 ‘대부’라는 문자를 삽입하자는 것. 일반 여신금융기관과 제도권 금융회사 이름을 그대로 베낀 대부업체를 확실하게 구분하자는 취지다. 상호 혼동으로 인한 소비자 피해를 방지하자는 게 목적이다. 실제 상호 도용 대부업체에 속아 피해를 보는 사례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금융감독원에 접수된 대부업 관련 피해 상담건수는 전년 대비 11.61% 증가한 3421건으로 나타났다. 불법 혐의가 있어 수사당국에 통보된 업체 수 또한 전년보다 18개 늘어난 57개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최근엔 대부업법 개정 움직임도 보인다. 금융위원회가 국회에 제출한 ‘대부업법 개정안’에 따르면 대부업체 상호에 반드시 ‘대부’라는 문자를 사용해야 한다. 대부중개업자도 마찬가지다.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여신금융기관을 가장한 대부업체들이 설 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본업이 대부가 아닌 업체들도 ‘대부’가 들어간 상호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충격파가 가장 클 것으로 예상되는 곳은 대출·할부·리스 제도를 운영하는 업체들. 현행법상 대출·할부·리스 등의 업무를 영위하기 위해선 대부업 등록을 해야 한다. 한국IBM(전자계산기 및 사무용 기계 판매·임대업체), 귀뚜라미홈시스(보일러 제조판매업체), 한국정보통신(전문 부가통신업체), 나진코퍼레이션(무역업체), 한국가스산업(가스매매업체), 서울옥션(미술품 경매업체)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업체는 대부업법이 개정되면 ‘대부’라는 단어를 꼼짝없이 상호에 넣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벌 받게 된다. 이를테면 한국IMB대부, 귀뚜라미홈시스대부, 한국가스산업대부, 나진코퍼레이션대부, 한국정보통신대부처럼 말이다. 한국IBM 송용기 실장은 “고객들을 대상으로 리스제도를 운영하고 있고, 이를 위해 대부업에 등록했다”며 “돈 장사를 하는 대부업체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고 했다. 상호에 ‘대부’를 포함시킬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다.
귀뚜라미홈시스 조순제 차장도 “비교적 고가인 냉·난방기를 구입하는 데 부담을 느끼는 영세사업자들을 도와줄 목적으로 리스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며 “그럼에도 대부업체라는 족쇄를 채우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인포허브, 사이버패스 등 전자지불(PG)업체 상황도 마찬가지. 이들 기업도 대부업체로 분류된다. 대금지급 시기 차이에 따른 수수료를 받기 때문이다. 대부업법 개정 여부에 따라 이들 업체의 상호가 인포허브대부, 사이버패스대부로 바뀔 수 있는 이유다. 전자지불업계 안팎에서 ‘대부업법 적용을 받는 것도 억울한데, 이제는 상호까지 변경하라는 말이냐’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포허브 추정주 팀장은 “전자지불의 특성상 대금지급 시기가 당연히 차이가 난다”며 “그런 이유로 대부업체로 등록돼 있는 것이지, 돈을 빌려주는 등의 행위는 전혀 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또 “상호에 대부라는 문구를 삽입해야 한다는 이번 대부업법 개정안은 업계의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며 “인터넷기업협회에서도 전자지불업체를 대부업법 적용 범위에서 빼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주먹구구식 법 개정 도움 안 돼”
이뿐 아니다. 한때 대부업을 영위했던 팬택씨앤아이(휴대전화 제조 및 SI), 대교홀딩스(경영컨설팅)도 난처한 상황이다. 박병엽 팬택계열 부회장이 100%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팬택씨앤아이의 전신은 대한할부금융주식회사. 2004년 팬택계열이 인수하면서 할부금융업 등록을 취소했다. 하지만 남은 금융채권 관리를 위해 대부업 등록은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대부업법 개정이 확정되면 대한할부금융의 잔재 때문에 팬택씨앤아이대부라는 상호를 사용해야 할 판이다. 지금은 대출사업을 전혀 하지 않는 대교홀딩스도 비슷한 처지다. 김문구 팬택씨앤아이 과장은 “잔여 금융채권을 처리하기 위해 대부업에 등록한 것인데, 어떻게 사명을 바꾸겠는가”라고 항변했다. 김용옥 대교네트워크 차장도 “5년 전 직원을 대상으로 운영한 대출제도가 있었는데, 지금은 종료됐다”며 “이런 상황에서 사명을 바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이유에서 ‘이번 대부업법 개정안은 탁상 행정의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 일반 여신금융기관과 대부업체를 획일적으로 나누는 데 주안점을 둔 나머지, 업계 실정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소비자금융협회 이재선 사무총장은 “문제가 가장 심각한 곳은 무허가 대부업체들”이라며 “이 때문에 대부업계에서 무허가 업체들을 솎아내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부상호 강제’보다 무허가 대부업체들을 규제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을 먼저 강구해야 한다는 얘기다. 중앙인터빌 한치호 이사는 “○○캐피탈 등 제도권 금융기관 이름을 딴 대부업체들을 규제하는 것은 일면 타당하다”면서도 “하지만 이들 업체를 규제하려다 선의의 피해 기업들이 양산될 수 있다는 점이 우려된다”고 강조했다. 한 이사는 또 “대부업법의 규제가 상대적으로 느슨하기 때문에 피해가 끊이지 않는 것”이라며 “이에 따라 규제를 피해 대부업계에 의도적으로 들어온 업체를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지, 대부라는 명칭을 일률적으로 사용해 규제하겠다는 발상은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주먹구구식’ 법 개정은 결코 대부업계의 정화에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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