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땅콩 알레르기와의 외로운 싸움

땅콩 알레르기와의 외로운 싸움

딸 리디아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학부모 모임에 가면 어떻게 말할까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입학식은 아직 몇 달 남았지만 미리 생각해 둬야 한다. 우리 딸의 생명을 지키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부는 선뜻 도와줄 마음이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난 1월 리디아는 땅콩과 견과류 알레르기로 진단 받았다. 희한하게도 그 전에는 알레르기가 있는 식품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인 적이 없다. 천식이 의심돼 검사를 받던 중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 그래서 정밀검사를 받아본 결과 알레르기가 확실했고, 땅콩 알레르기는 아주 심했다. 며칠 사이에 우리 가족의 삶이 달라졌다. 리디아가 견과류를 먹을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은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원래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보니 왜 안 좋아했는지 알 것 같다. 문제는 예상치 못했던 부분에서 더 심각하게 나타났다. 우리는 중국식 뷔페 식당에 자주 갔는데 이젠 근처도 안 간다. 중국음식 중에는 땅콩기름이 들어가는 음식이 많은 데다 뷔페 식당에서 교차감염의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 가게나 제과점, 도넛 상점에도 가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보기에 애처로웠던 일은 다섯 살짜리 꼬마가 자기 허벅지에 에피네프린 주사 놓기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에피네프린은 만약 리디아가 우연히 소량의 땅콩이라도 먹게 됐을 경우 신속하게 투여해야 할 생명의 약이다. 리디아는 앞으로 친구의 생일파티에 갈 때도 집에서 구운 컵케이크를 갖고 가야 한다. 또 음식점에 가면 자신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식품 목록을 적은 종이를 가져가 직원에게 보여주고 요리사가 신경 써서 조리해 주기를 빌어야 한다. 그 애가 10대가 됐을 때 체면 때문에 음식에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묻는 걸 꺼리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다. 지금은 친구 집에도 마음대로 못 간다. 그 친구 어머니가 리디아에게 응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처요령을 잘 알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자녀의 친구들을 집에 초대한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잘 놀고 먹을 수 있도록 해 주는 일만으로도 벅차다. 거기다 더해 초대한 아이들 중 한 명이 급성과민반응을 일으키지 않도록 신경 쓰는 일까지 기꺼이 해 줄 어머니는 그리 많지 않다. 리디아는 알레르기 진단을 받은 후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많아졌다. 그 전에는 늘 하던 일들이었다. 견과류를 조리하던 기구로 만든 과자를 먹었고,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나오는 간식은 뭐든 먹었다. 또 손에 땅콩버터를 잔뜩 묻힌 오빠와 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하기도 했다. 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지금은 뭐가 달라진 걸까? 리디아의 혈액 속에 숨어 있는 항체가 소량이나마 견과류와 접촉하면 과민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점이 다르다. 우리가 지금 과민반응을 하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너무 운이 좋았던 것이다. 땅콩 알레르기는 뮤추얼 펀드와 같다. 과거에 아무리 운이 좋았더라도 미래가 보장되는 건 아니다. 지난번에는 입술만 가려운 증상으로 지나갔을지 모르지만 다음 번엔 죽을 수도 있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두드러기가 날 수도 있고 구토를 할 수도 있다. 다음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어떻게 보면 그 점이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정말로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을 막기 위해 불편을 겪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알레르기에 관해 공부해 두려고 인터넷을 뒤지다 어떤 남자가 올린 글을 읽었다.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승객들의 불평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 땅콩을 먹을 수 없게 된 데 불평하는 내용이었다. 댓글에서 어떤 네티즌들은 그 사람의 이기심을 비난했다. 하지만 몇몇은 그를 응원했고, 알레르기 환자들에게 몰래 땅콩을 접촉시켜 ‘보복’하라는 제안까지 했다. 내 면전에서 그렇게 악의에 찬 말을 한 사람은 아직 없다. 하지만 전에 신학기 학부모 모임에서 어떤 학부모가 일어나서 “우리 아이가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어서요…”라고 말을 시작했을 때 다른 학부모들이 ‘뭐 저런 일로 야단인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을 봤다. 몇 달 전에 나 자신도 딸 아이가 생일파티에 초대하고 싶어 하던 친구 한 명이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속으로 투덜댔다. 그 아이의 가족이 우리가 파티를 연 음식점의 다른 좌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것을 보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제야 알겠다. 그 가족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에피펜 자기주사기를 준비해 놓고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나와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게 아이의 안전을 떠맡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다른 부모들에게 그런 부탁을 하고 싶지 않다. 내 아이가 땅콩 근처에 가면 안 되기 때문에 그들의 아이들에게까지 좋아하는 과자를 주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나나 우리 딸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기를 원치 않는다. 그래도 나는 말을 할 것이다. 나 혼자서는 우리 딸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미시간주 파밍턴 힐스에 산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수험생도 학부모도 고생한 수능…마음 트고 다독이길

2‘동양의 하와이’中 하이난 싼야…휴양·레저 도시서 ‘완전체’ 마이스 도시로 변신

3불황엔 미니스커트? 확 바뀐 2024년 인기 패션 아이템

4최상위권 입시 변수, 대기업 경영 실적도 영향

5보험사 대출 늘고 연체율 올랐다…당국 관리 압박은 커지네

6길어지는 내수 한파 “이러다 다 죽어”

7"좀비버스, 영화야 예능이야?"...K-좀비 예능2, 또 세계 주목받을까

8킨텍스 게임 행사장 ‘폭탄테러’ 예고에...관람객 대피소동

9美항모 조지워싱턴함 日 재배치...한반도·中 경계

실시간 뉴스

1수험생도 학부모도 고생한 수능…마음 트고 다독이길

2‘동양의 하와이’中 하이난 싼야…휴양·레저 도시서 ‘완전체’ 마이스 도시로 변신

3불황엔 미니스커트? 확 바뀐 2024년 인기 패션 아이템

4최상위권 입시 변수, 대기업 경영 실적도 영향

5보험사 대출 늘고 연체율 올랐다…당국 관리 압박은 커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