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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는 1인자 권력 지키는 자리”

“참모는 1인자 권력 지키는 자리”

김영삼(YS) 정부 시절 4년 가까이 정무수석 자리를 지킨 이원종(69)씨. 그는 ‘그림자 참모’로 유명했다. 청와대 재임 시절 단 한 차례도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고 총선 출마도 고사했다. 오로지 대통령을 위한 막후 참모 역할만 꿋꿋이 했다. 대학 출강과 우리누리 이사장을 맡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나 참모론을 들었다.
“왜 우리는 이원종 수석 같은 사람이 없나.” 김대중 정부가 각종 정치 스캔들로 고전을 면치 못할 때 가신들 사이에서 나온 푸념 중 하나다. 이원종(69) 전 정무수석은 김영삼 정부 시절 내내 정무수석 자리를 지키며 대통령을 보좌했다. 본인이 판단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엔 대통령 앞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고 다혈질이라 ‘핏대’라는 별명도 얻었다. 청와대를 나온 이후 그는 온갖 정치적 유혹을 뿌리치고 대학 시간강사와 사단법인 우리누리 이사장으로만 지내고 있다. 지난 6월 25일 서울 안국동에 있는 우리누리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역대 대통령 참모의 롤 모델로 인터뷰하고 싶다는 요청에 그는 한사코 자신은 “적임자가 아니다”며 거절했다. “그럼 차나 한 잔 마시러 가겠다”는 제안에 그는 “YS에 관한 구체적 얘기는 단 한마디도 할 수 없다”고 초반부터 못을 박았다. 33㎡(10평) 남짓한 방은 에어컨을 켜지 않아 무더웠다. 이 전 수석은 요즘 출강하는 학교 학생들 기말 성적을 매기느라 분주해 보였다. 그는 인하대와 명지대, 고려대와 한양대 대학원 등 4개 대학 5개 과목의 정치학 강의를 나가고 있다. “시간당 5만원짜리 보따리 장사를 하느라 바쁘다”고 말하는 그의 주변엔 여전히 ‘참모 고수’에게 한 수 배우려는 현역 정치인·관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최근 대통령 비서실장에서 물러난 류우익씨도 청와대에서 러브콜을 받은 직후 이 전 수석의 방문을 노크했었다. 류 전 실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한반도 대운하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인수위에서 이름이 빠지자 본업인 세계지리학회 사무총장에 전념하겠다고 했다. 그러다 대통령이 비서실장을 맡으라고 하자 이 전 수석을 찾아왔던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라고 묻는 류 전 실장에게 이 전 수석은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 “미련 없이 툭툭 털고 그 자리를 사양한다면 아름다운 사람이 될 테고 만약 수락한다면 당신이 아무리 잘해도 족쇄가 될 거다.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이 전 수석의 예언대로 류 전 실장은 취임 4개월여 만에 족쇄를 차고 물러났다. 본인의 능력 여부를 떠나 참모라는 자리가 만만치 않음에 틀림없다. 만약 이 전 수석 제안대로 류 전 실장이 그 자리를 거부했다면 그는 끝까지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았을지 모를 일이다. 새로 임명된 2기 청와대 비서실 수석 중 A씨도 대통령 면담을 끝낸 직후 이 전 수석을 찾아와 상담하고 돌아갔다. 그에게도 이 전 수석은 어김없이 참모의 자세에 대해 충고를 건넸다. “정치하던 사람이 왜 수석 자리에 가나. 임기를 마치면 국회의원 할 것 아니냐. 자신을 위한 목표를 가지고 대통령을 모시면 안 된다. 대통령의 비서는 오로지 지금 모시는 대통령만 보여야 하는 자리다.” 그의 충고에도 A씨는 결국 수석 자리를 맡았다. 이 전 수석은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괴로운 일”이라며 “그들을 인간적으로 백번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YS 정부에서 4년간 정무수석을 맡았다. 대통령에게 인정받은 가장 큰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한마디로 궁합이 맞은 거다. ‘부시의 두뇌’라고 불린 칼로브도 부시를 만났으니까 뛰어난 참모로 인정받은 거 아닌가. 아무리 참모 개인이 잘나도 그 능력과 자질을 모르는 보스를 만나면 소용없는 거다. 나는 정무수석만 4년 넘게 했다. 정무수석은 다른 수석보다 어려운 자리다. 경제도 문화도 모두 정무적 입장에서 보는 감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대통령의 행위가 다 정무 행위라고 보면 된다. 항상 대통령의 통치철학을 보완하고 통합할 수 있는 보좌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행에 옮겼다. YS는 그런 나를 인정해줬다.”

- ‘핏대’라는 별명이 인상적이다. 대통령 앞에서 쓴소리 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김영삼 대통령은 정치 10단이다. 아무리 뛰어난 참모도 속을 다 꿰뚫어 볼 정도로 고수 정치인이다. 내가 정무수석을 하면서 얼마나 그 앞에서 떨었겠나. 아무리 묘수를 말해도 그는 이미 내 머리 위에서 내려다봤다. 대통령에게 공식, 비공식 라인으로 들어오는 정보도 엄청났다. 직언을 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이 때문에 항상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머뭇거리지 않고 답변할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말을 할 때도 기술을 익혔다. 보스를 내 입장에서 설득하려 하지 않고 이미 ‘그분’의 생각이었듯 말하는 기술을 썼다. 참모는 자신이 직언한 것이 안 받아들여졌다고 불평하거나 받아들여졌다고 다른 곳에 가서 자랑삼아 떠들고 다니면 안 된다. 수석의 생각은 오로지 대통령의 입으로만 표출돼야 한다. 잘못 말했다간 참모의 말이 대통령의 말로 둔갑해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정무수석 시절 가장 힘들었던 ‘직언’이 있었다면 무엇인가.
“노동법 개정 때다. 원래 노동법은 헌법 개정보다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대통령이 의지를 갖고 밀어붙였기 때문에 내 생각을 관철하기가 힘들었다. 당시 목표가 노동시장의 유연화였는데 나는 임기 내 안 했으면 좋겠다고 건의했다. 5년 단임제 대통령 정책으론 리스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95, 96년은 개혁 리더로서의 인기도 많이 빠졌을 때였다. 노동법 개혁으로 이득을 보는 건 힘 없는 다수 국민이었고, 손해를 보는 건 힘 있는 소수였다. 힘 있는 자들의 저항을 막아야 했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걸 그때 알았다. 난 결국 대통령의 뜻을 꺾지 못했지만 조율하는 과정에서 더 탄탄한 정책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금융실명제나 공직자 재산공개, 군 개혁 등은 그 시대에 필요한 개혁이었고 지금까지 평가를 받고 있지 않나. 이런 개혁들을 구상하고 보좌한 건 수많은 참모의 몫이었다.”

-이번에 1기 청와대 참모진이 불명예 퇴진했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나.
“보스와 참모진 양쪽 다 문제다. 대통령은 자신의 입맛에 맞게 참모를 뽑고도 그 참모들을 믿지 못해 물의를 일으켰다. 참모가 애당초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든 보스도, 눈치 보느라 아무 말도 못하고 행동하지 못한 참모들도 책임이 있다. 대통령이 경찰서까지 찾아다니게 만든 건 참모가 제 역할을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라도 참모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직언을 하고 말려야 한다. 기분 나쁘지 않게 말이다.”

-2기 청와대 참모진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대통령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비서일 뿐 수석들의 상부 조직이 아니다. 비서실장은 비서실 수석 회의를 주재하는 사람일 뿐이다. YS는 오랫동안 참모를 부린 노하우 중 하나로 수석들 간의 분할 통치 방식(divide and rule)을 철저하게 지켰다. 경제수석은 경제를, 정무수석은 국정 전반을 지켜보며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대통령을 중심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참모는 자신의 권력을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1인자의 권력을 지켜주는 자리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그는 요즘도 주변에서 수도 없이 회고록 집필 요청을 받고 있지만 침묵하고 있다. 한 시대의 권력을 누렸다면 미련 없이 떠날 것, 보스와의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갈 것 등이 그의 참모 철학이다. 영원한 ‘그림자 참모’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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