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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의 정치, 감의 경영시대?

감의 정치, 감의 경영시대?

시게이트 테크놀로지는 플레이스테이션3과 마이크로소프트 X박스에 사용되는 하드 드라이브를 만들어 연간 110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세계적인 회사다. 2006년 가을 이 회사는 경영관리 연수회에 강사 한 명을 초빙했다. 실리콘 밸리의 저명한 컨설턴트 명단엔 없는 사람이었다. 시게이트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 담당 전무이사 가브리얼 로슨이 초빙한 로라 데이(49)는 테크놀로지 분야 경험이 전혀 없는 멋쟁이 뉴요커였다. 뉴스위크 인터뷰에서 로슨은 “데이는 정말 놀라운 여성이었다”고 말했다. 사내 연구팀과 마케팅팀의 불협화음을 그녀가 순식간에 집어낸 것에 대한 감탄이다. 로슨은 “그녀의 능력을 이용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지만 그 100배의 효과를 얻는다”고 말했다. 데이의 능력은 정확히 무엇일까?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그냥 육감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고객들은 그녀를 심령술사라고 생각한다. 재계의 거물급 인사들 사이에서 데이의 육감은 인기 있는 상품이 됐다. 미지의 것을 알아내는 능력으로 그녀는 연간 수십만 달러를 번다. 탤런트 에이전시인 윌리엄 모리스는 어떤 연예인과 계약하고 어떻게 회사를 키울지에 관해 데이의 능력을 활용한다. 윌리엄 모리스의 문예 담당 부사장 제니퍼 월시는 “마치 포커 게임에서 상대방의 패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2006년 할리우드의 저명한 제작자 한 사람은 탐나는 만화영화에 투자하려다 데이의 조언에 따라 포기했다. 데이는 그 영화가 흥행에 참패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됐다. 백인 엘리트들의 법률회사 여러 군데에서 특별고문으로 일하는 맨해튼의 한 여성 법조인은 배심원을 선정하고 소송 상대방의 논변을 예상할 때 데이의 통찰력을 이용한다. “사건을 맡았을 때 데이의 조언대로 하면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이 법조인 역시 실명 공개를 원치 않았다. 심령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불가능하다. 심령술사가 깊은 통찰이 담긴 듯한 대답을 하는 것은 단순히 고객의 언행에서 충분한 실마리를 얻기 때문일까? 또는 운 좋은 추측일 뿐일까? 데이는 자신과 같은 심령술사들의 도움을 받는 기업인들이 “그 사실을 숨기려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고객의 이름을 대부분 밝히지 않았다. 기업의 심령 상담가로 활동하는 데이 같은 사람들은 아직 수는 적지만 점차 늘어나고 있다. 머리 스카프와 수정구슬로 더 잘 알려진 심령술사들이 전문 직업인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직관론자(intuitionist) 혹은 유심론자(mentalist) 같은 새로운 직업명이 붙었다. 미국 주류 사회의 체면에 더 잘 어울리는 표현이다. 이런 심령 고문들은 최근 몇 년 동안 활동영역을 넓혀 주류 경제계로 진출했다. 침체된 경제 속에서 돌파구를 찾는 법조·금융·연예계의 의사결정자들이 심령 고문들을 활용한다. 데이는 고객들의 특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주로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며, 비싼 고기를 먹고 바니스 같은 고급 백화점을 이용하는 A형 행동양식(긴장하고 성급하며 경쟁심이 강하다)을 가진 사람들이다.” 한 달에 1만 달러를 내면 데이의 육감을 이용할 수 있다. 그녀는 매달 평균 5명의 고객을 상대하며 하루 24시간 무제한 상담에 응한다. 뉴욕 트라이베카의 아파트에서 고객들의 전화상담에 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16세 아들을 둔 주부로서 집안일도 잘 처리한다. 아들의 친구들이 떼거리로 집에 놀러 올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런 소란한 분위기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녀가 ‘엉뚱한 세계’에서 사물들에 관한 통찰력을 얻는 동안 “나의 이성적인 사고 능력을 바쁜 상태로 유지해 주기 때문이다.”(그러나 데이는 10대 아들이 마음을 산란케 한다는 점도 인정한다. “아들이 그 여자애와 새벽 2시까지 무슨 일을 하는지 보고 싶지 않지만 눈에 보인다.”) 지난해 초 월스트리트의 저명한 펀드매니저 한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다. 위험성 높은 에너지 분야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했는데, 빠져나와야 할지 여부를 묻는 전화였다. 당시 데이는 “내 직감으론 당신이 투자수익을 거두지 못할 듯하다”고 말해 줬다. 그 펀드매니저는 데이의 충고를 받아들여 투자금을 회수했다. 그 직후 그 투자처는 큰 손실을 봤다. 데이의 직업적인 심령술사 생활은 1990년대 초에 시작됐다. 이혼으로 생계 유지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헤지펀드에 근무하는 한 남자친구에게 주식 종목에 관한 조언을 해 주면서 대가를 받았다. 친구도 만족할 만한 수준의 정확한 정보였다. 나중에 그녀는 ‘실용적인 직관(Practical Intuition)’이란 저서에서 자신의 영적 능력을 소개했다. 이 책은 뉴욕타임스에서 베스트셀러로 선정됐고, 데이가 세미나 초빙 강사로 명성을 날리는 초석이 됐다. 요즘 그녀는 하버드 경영대학원 여성 동문회 회원들에게 육감 활용 방법을 강습한다. 월례 강습회에서 참가자들은 갈색 종이백에 담긴 물체를 직감으로 알아맞히는 훈련도 받는다고 수강생인 캐런 페이지는 회상한다. 당시 수강생들은 그 물체를 만지거나 냄새 맡지도 않았지만 ‘노란색’ ‘신맛’ ‘과일’이란 느낌을 떠올렸다. 종이백 속의 그 물체는 레몬이었다. 영화배우 제니퍼 애니스턴과 데미 무어 같은 유명 연예인들도 데이의 조언을 듣는다. 전적으로 입소문과 소개로 일하지만 데이는 지난 15년간 1000만 달러 이상 벌었다고 말했다. 1990년대였다면 데이처럼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엔 ‘심령 친구들의 네트워크(Psychic Friends Network)’란 단체와 ‘미스 클레오’라는 자메이카 출신의 어설픈 심령술사가 TV에 저질 광고를 자주 내보내는 바람에 일반인들 사이에선 심령술사의 이미지가 안 좋았다. 그때의 낙인은 지금도 일부 남아 있다. 앞서의 할리우드 인사는 자신이 심령술사의 조언을 듣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우리 회사에 투자한 헤지펀드들이 자금을 회수하려 들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쟁터 참호 속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처럼 암울한 경제 분위기에선 심령 능력을 믿고 싶은 사람이 늘게 마련이다. 심령술사인 칼라 배런은 자신이 매주 제공하는 20~30종류의 심령 정보 중 절반가량이 요즘은 경제와 관련된 내용이라고 말한다. 배런은 법률 전문 방송 코트TV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육감 증거(Haunting Evidence)’에서 경찰의 범죄 수사를 돕는 유명한 심령술사다. 또 유람선과 코미디 클럽에서 다년간 활동한 심령술사 존 스테트슨(48)은 지금은 기업들의 ‘직관 연수회’(사실상 심령 연수회다) 초빙 강사로 일한다. 고객 중에는 포춘 500대 기업들도 있다. 보스턴에 사는 스테트슨은 “이것은 미개척 분야로 세인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심령술사와 권력자의 관계는 옛날부터 가까웠다. 구약성서에 보면 요셉은 이집트 파라오의 꿈을 신비한 방법으로 해석해 총애를 받았다. 여러 세기 뒤 노스트라다무스와 ‘미친 수도사’ 라스푸틴도 비범한 예언 능력으로 권세가들의 사랑을 받았다. 캘리포니아대(샌타바버라) 역사학 교수 캐서린 앨버니즈에 따르면 형이상학적 능력에 대한 미국인들의 믿음은 건국 초기에도 있었으며 “당분간은 계속 확산될 조짐이다”고 말했다. 특히 격변기나 전쟁·불황 같은 시련기엔 사람들이 불확실한 미래의 두려움 때문에 그런 능력에 의지하려 한다고 앨버니즈 교수는 설명한다. ‘왜 사람들은 초자연을 믿나?(Why People Believe Weird Things)’의 저자 마이클 셔머가 인용한 설문조사를 보면 미국인 3명 중 2명은 심령술적인 통찰의 가치를 인정한다. 오늘날 자신의 ‘감(感)’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정치인이나 재계 거물이 늘어나는 현상도 심령술사들에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자신이 “감에 따라 판단한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지난해 여름 마이클 처토프 국토안보부 장관은 테러 공격 위험성이 고조된다고 경고하면서 이는 자신의 ‘감’에 따른 판단이라고 말했다. 부시와 처토프처럼 데이의 예언 역시 언제나 정확하지는 않다. 데이는 그 점을 인정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신이라면 세상을 더 많이 변화시켰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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