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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이 ‘녹색’이다

원자력이 ‘녹색’이다

▶독일의 원자력 발전소들이 폐쇄되지 않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에너지 비용 급등으로 유럽에서 가장 집요한 정치적 금기 중 하나가 흔들리고 있다. 원자력 발전을 극도로 기피하던 독일의 태도가 바뀔 조짐이다. 원자력 반대 분위기가 독일처럼 문화정치적 DNA 속에 깊이 뿌리 박힌 나라는 없었다. 요즘 40~50대에 들어선 독일인의 다수는 1970~80년대에 반핵 시위를 하며 성인이 됐다. 녹색당과 사민당 소속 정치인들은 원자력을 거부하며 정치 경력을 쌓았다. 녹색당은 환경 보호를 주창하기 전부터 반핵을 외쳤다. 독일의 반핵 운동은 2001년 의회에서 ‘원자력 퇴출 법안’이 통과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당시 19개였던 원자로를 2021년까지 폐쇄한다는 게 그 법의 골자였다. 2개는 이미 폐쇄됐다. 에너지 안보와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세계 각국이 핵 에너지에 다시 투자하기 시작했을 때도 독일은 원자력 퇴출법을 고수했다. 원자력은 사악하다는 독일인들의 믿음은 신앙심에 가까웠다. 그러나 독일이 그 법을 제정한 이래 에너지 산업의 환경은 크게 변했고, 마침내 독일인들도 시대 조류에 순응하기 시작했다. 이제 세계는 1986년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재발보다는 기후변화를 더 우려한다. 독단적인 러시아와 불안정한 중동으로부터의 연료 수입(輸入)이 늘어나면서 에너지는 국가안보 문제가 됐다. 그러나 독일의 태도를 바꾸게 한 결정적 요인은 비용이었다. 독일 의회가 원자력 퇴출법을 제정했을 당시 석유 가격은 배럴당 20달러도 안 됐다. 올 8월 초 석유 값의 6분의 1 수준이다. 요즘 독일인들은 치솟는 전기료에 큰 부담을 느낀다. 전기 수요의 25%를 공급하는 원전을 폐쇄하는 건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국민이 더 많아졌다. 독일에선 1973년 1차 오일쇼크 뒤에 원전 건설 붐이 일었던 적이 있다. 오늘날의 에너지 관련 우려는 당시와 매우 비슷하다. 최근 여론조사에선 유례없이 많은 54%의 독일인이 기존 원자로를 유지하길 원한다고 응답했다. 지난해 12월의 40%에 비해서도 크게 높아진 비율이다. 그 결과, 오랫동안 금기시됐던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원자력 활용을 둘러싼 공개 토론이다. 지난 6월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기민당 소속 의원들은 원자력 퇴출법 폐지와 원전 추가 건설을 골자로 한 법안을 제출했다. 저렴한 핵 에너지 활용을 내년 총선의 쟁점으로 삼겠다는 약속도 했다. 심지어 사민당 내에서도 당론과 달리 원자력 발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예컨대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와 볼프강 클레멘트 전 경제장관 같은 유력 인사들은 사민당이 에너지 정책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독일 원자력 협회인 아톰포럼의 디터 마르크스 회장은 “엄청난 변화다. 국민 여론이 이렇게까지 변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함부르크에서 열린 연례 총회에서 원자력을 반대한 참석자는 15명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독일이 원자력 정책을 재고하게 된 데는 높은 에너지 비용 외에도 이웃나라들의 압력이 있었다. 핵 에너지는 탄산가스를 생성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독일은 핵 에너지를 거의 일방적으로 거부해 왔다. 이는 전 세계 환경 지도자로 자처하는 독일의 이미지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올여름 초 도쿄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회담에서 메르켈 총리는 이상한 사람으로 비쳤다. 각국에서 탄산가스 배출을 줄이는 방법 중 하나로 핵 에너지를 사용하자는 제안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전기의 80%를 원전에서 생산한다. 국민 1인당 탄산가스 배출량도 선진국 중 가장 적은 수준이다. 최근 프랑스는 61번째 원전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프랑스는 독일처럼 원자력을 외면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풍력과 태양력 발전을 추진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도 지난 7월 ‘탈(脫)석유 경제’를 구축하기 위해 향후 15년간 원전 8개를 신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도 독일과 비슷한 단계적 원전 폐쇄 계획을 재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스웨덴은 이미 2005년에 그런 계획을 중지했다. 국민 여론의 급속한 변화에 순응해 내린 결정이었다. 기후변화를 야기하는 탄산가스 배출을 줄이는 일이 원전 폐쇄보다 우선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한 것이다. 독일이 회원국으로 있는 국제원자력기구(IAEA)도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3중 전략을 제창했다. 에너지 효율 개선, 재생 에너지 활용, 세계적으로 1300개의 원전 신설 등이다. 독일은 유럽에서 에너지 소비가 가장 많은 나라다. 만약 이런 독일이 원자력 활용 추세에 동참한다면, 유럽연합(EU)은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 심화 추세를 둔화시키거나 심지어 역전시킬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진다. 그러나 독일의 변화는 합의를 중시하는 복잡한 국내 정치 과정 때문에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메르켈 연립정부의 파트너인 사민당은 자신들의 집권기에 제정된 원전신설 금지법을 느슨하게 만드는 어떤 시도에도 강하게 반발한다. 사민당이 원자력 폐기법의 개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사민당의 힘이 아직 강하다는 걸 의미한다. 한편 독일의 전기회사들은 가장 오래된 원자로의 가동 시한을 내년 총선 이후까지 연장하기 위해 일시적 조업 중지라는 편법까지 동원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총선 이후 메르켈이 좀 더 원자력 친화적인 연정을 이끌게 되길 희망한다. 메르켈의 업무 처리 방식은 공개적인 갈등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래서 원자력에 관해선 총선 이후까지 현상유지 정책을 고수하겠다고 약속했다. 심지어 장기적 환경 전략을 개발하도록 돼 있는 정부 산하 환경자문위원회(CEA)조차 의제에서 핵 에너지 문제를 제외한다. CEA 위원이자 베를린 자유대학 환경정책센터 소장인 미란다 슈레우르스에 따르면 CEA의 토론 의제는 비교적 합리적으로 변하기 시작했지만 기존 원자로의 가동을 연장하는 문제에 국한돼 있다. 기민당 의원들이 대담해지긴 했지만, 원자로 신설은 대다수 국민에겐 아직 비현실적인 꿈이다. 메르켈 자신도 원전 신설은 배제한다. 슈레우르스는 “오래된 금기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말한다. 사민당의 입장은 훨씬 더 복잡하다. 사민당 소속 환경장관 지그마르 가브리엘은 석탄과 핵 에너지의 대체 수단으로 풍력과 태양력을 이용하는 정책을 고수한다. 그리고 사민당 지도부는 핵 에너지에 관한 새로운 논의 자체를 당의 화합을 해치는 위협으로 간주한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당원과 유권자가 사민당을 버리고 극좌파 연합세력 쪽으로 옮겨가는 상황이다. 8월 초의 여론조사에서 사민당은 역사적으로 낮은 22%의 지지율을 얻었다. 사민당의 분열은 이미 시작됐다. 8월 사민당 중재위원회는 동료 여성 당원의 반핵 정책에 대한 클레멘트의 비판을 “해당 행위”로 규정하고 그를 출당하기로 의결했다. 내년 총선 이후까진 상황이 동결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환경의식이 지극히 높은 독일인들 사이에서도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 원자력이 에너지 수입 비용과 이산화탄소를 줄여준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민당의 분열이 진행 중이고, 메르켈은 원전 건설을 지지하는 자민당과의 제휴를 고려 중이다. 독일이 원자력 폐기 계획을 철회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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