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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양으로 나가지 못하면 블루오션도 없다”

“대양으로 나가지 못하면 블루오션도 없다”

한화그룹은 매년 10월 9일이면 샴페인을 터뜨려 왔다. 창업자인 고 김종희 회장이 한화그룹의 모체인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설립한 날이기 때문이다(1952년 창립했다). 하지만 올해는 이 자축연을 잠시 미뤄야 할지도 모른다. 며칠 뒤인 10월 15일께 한화그룹이 사운을 걸고 추진하는 대우조선해양 인수자 확정 발표가 있어서다. 포스코, GS, 현대중공업 등 3개 기업과 벌이는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서 이겨야만 샴페인 잔을 들 수 있다. 그러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뼈아픈 10월로 기억될지도 모를 일이다. 대우조선해양은 세계 조선업계 3위 업체로 지난해 매출 7조1047억원을 올려 올해 국내 인수합병(M&A) 시장의 최대 매물로 꼽힌다. 외환위기 이후 대우그룹이 무너져 1999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기업으로 지정되면서 산업은행 자회사로 편입됐다가 이번에 공개경쟁입찰 방식으로 민간에 매각된다. 이에 한화그룹은 지난 4월부터 서울 중구 장교동 한화빌딩 25층 그룹 경영기획실 산하에 16명의 정예 임직원으로 구성된 대우조선 인수 TF팀을 가동해 왔다. 이 팀을 이끄는 유시왕 부사장은 “대우조선 인수는 ‘한화 글로벌 경영’의 핵심 사업”이라고 중요성을 강조했다. 글로벌 경영? 재계에서는 사실 해묵은 화두일지 모른다. 하지만 한화는 비교적 늦은 지난달 1월에서야 글로벌 경영이 최대 화두로 등장했다. 김승연 그룹 회장은 2006년 10월 창립기념식에서 ‘대륙을 횡단하는 철새 본능’을 강조하면서 임직원들에게 글로벌 경영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그는 “한화그룹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무한경쟁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건 아닌가”라며 위기의식을 불어넣었다. 지난해 1월엔 계열사 CEO 등 그룹 핵심 임직원 50여 명을 태국 방콕에 불러모아 ‘해외사업진출 전략회의’를 열기도 했다. 신규 사업은 모두 해외에서 추진하라고 다그치는 등 글로벌 경영 발대식을 방불케 했다고 당시 참석자는 전했다. 지난해 말엔 그 후속 작업으로 아시아 및 유럽 지역의 이머징 마켓을 4개 권역(동유럽 권역, 중앙아시아 권역, 중동 권역, 동남아 권역)으로 나눠 사업 타당성을 살폈다. 글로벌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해외지역 전문가과정’도 개설했다. 글로벌경영 소양과 자질을 갖춘 직원들이 세계 각지에서 1년 동안 언어와 문화를 익히도록 해 그룹의 인적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의도다. 그룹 직원들의 해외 우수 대학 진학을 돕는 ‘MBA 지원제도’ 등도 도입했다. 한화석유화학, 한화무역, 한화건설, 대한생명 등 그룹 내 10개 계열사도 단독 또는 컨소시엄을 통해 해외 도시개발, 플랜트 건설, 자원개발, 환경사업 등 사업 기회를 면밀히 검토 중이다. 글로벌 경영에 대한 목마름은 답답한 매출 구조가 부채질했다. 한화그룹은 화약, 석유화학, 유통, 레저, 금융 등 주요 업종에 계열사가 40개에 달하지만 대부분 내수에 몰려 있다. 지난해 그룹 매출 27조원 중 해외 비중은 10%대에 머물렀다. 대우조선을 놓고 힘을 겨루는 포스코(해외매출비중 30%),현대중공업(89%)은 물론 공정거래위가 발표한 자산총액순위에서 한화(12위)보다 아래인 하이닉스(14위· 98%), STX(15위· 54%) 등에도 뒤져 있다. 한국의 내수 시장은 사실상 제자리걸음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997년부터 2006년까지 10년간 수출은 연평균 12.4% 증가했지만 내수 증가율은 매년 고작 2.1%씩 늘어나는 데 그쳤다. 외환위기 이전(1987~1996년) 내수와 수출 증가율이 연평균 9.6%, 10.9%로 쌍끌이 성장세를 보이던 시절은 옛일이 된 지 오래다. 게다가 한·미, 한·EU 자유무역협정(FTA) 등 세계 경제권이 하나로 통합되는 게 오늘날의 흐름이다. 이런 추세라면 성장이 한계에 부닥쳐 글로벌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건 물론이고 생존조차 어려울지 모른다는 기류가 한화그룹 저변을 흐른다. “무한경쟁이 펼쳐지는 FTA 시대에 내수시장에 머물러서는 기업의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다”고 주철범 한화그룹 경영기획실 부장이 말했다. 이러한 현실인식은 내수에 치우쳐온 한화의 성장속도가 2000년대 들어 지체되고 있다는 자각과 맞물려 위기감을 부채질해온 게 사실이다. 한화그룹 일부 주력 업종의 미래도 불투명하다. 한화 주력 업종은 제조와 금융, 건설·서비스 등 3개다. 제조의 중심인 한화석유화학만 해도 앞뒤 압력이 드세다. 원유를 수출하던 중동 국가들이 이제는 정유시설까지 갖춰 석유화학제품을 팔겠다고 나서는가 하면 최대 수요시장 중국도 이제는 자기네가 정유산업에 손을 댄다.

▶서울 중구 장교동 한화빌딩 1층 현관(왼쪽). 2007년 1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해외사업진출 전략회의에 참석한 김승연 회장과 그룹 임원진.

금융, 건설·서비스 업종은 아직 전도양양해 한화의 주력으로 가져가겠지만 제조업에선 획기적인 변화를 주고 싶은 게 한화의 본심이다. 문제는 글로벌 경영 강화 방법론이다. 기존 사업체에서 새 기술과 제품을 개발해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방안과 아예 외부의 유망기업을 인수하는 방안이 있다. 주철범 부장은 “현재 주어진 규모와 기술을 토대로 세계 선두권 기업으로 치고 나가자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며 이미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대우조선 인수에 나선 배경을 설명했다. 올해 매출목표를 9조9040억원으로 잡은 대우조선은 그동안 매출의 98~97%를 해외에서 올렸다. 한화의 글로벌 경영 갈증을 한꺼번에 씻어 줄 청량제나 다름없다. 한화가 내놓은 청사진에 따르면 대우조선을 인수하면 그룹의 해외매출 비중이 2012년 49%(전체 매출 60조원), 2017년 50%(전체 매출 100조원)로 뛰어오른다. 글로벌 한화의 꿈이 이뤄지는 셈이다. 이때쯤 대우조선 매출이 그룹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35%(35조원)로 간판기업으로 발돋움한다. 한화도 제조업 불안감을 조선산업으로 털어버릴 수 있다. 업계 판도도 바뀐다. 자산총액 8조7000억원(지난 4월 공정거래위 집계)이나 되는 대우조선을 인수하면 한화의 재계 자산순위도 12위에서 10위권으로 껑충 뛴다. 한화는 M&A를 통해 많은 재미도 봤다. 그룹 관계자는 “대형 M&A를 통해 매출은 1980년보다 35배, 자산은 111배 늘었다”고 설명했다. 인수기업들이 그룹의 주력사로 성장해 전체 매출의 75%를 책임진다. 대한생명, 갤러리아백화점, 한화리조트, 한화석유화학 등 핵심 기업 상당수를 사들여 키웠다. 어렵게 기업을 인수해도 남는 것 없이 손해만 본다는 이른바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를 한화는 잘 피해 간 셈이다. 한국기업평가 송수범 선임연구원은 “한화는 구조조정을 심하게 하지 않는 직원 친화적인 기업으로 M&A에 강점을 가진 건 사실”이라고 진단했다. 물론 과거에 그랬다고 반드시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한화가 글로벌 경영 기치를 내세워 대우조선에 눈독을 들이자 본격적인 심사에 들어가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견제가 들어온다. 대우조선 노사 간부 10명으로 구성된 ‘대우조선 지분 매각에 대한 노사공동위원회’는 인수 참여 기업들의 도덕성과 총수의 비리 등 과거 행적도 평가에 반영돼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경실련도 인수 기업은 대주주의 도덕성 등 조건이 1차적으로 고려돼야 한다고 가세했다. 이에 대해 한화는 기업은 정당한 방법으로 이익을 내는 게 중요하다고 반박한다. 유시왕 부사장은 “인수한 회사 자금을 유용하거나 주주에게 해를 끼쳤다면 도덕적인 문제가 되지만 대주주 개인의 문제를 인수문제에 연계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말했다. 원만한 노사관계를 확립하고, 대우조선을 흑자를 내는 주력회사로 우뚝 세우는 게 더 중요하지 않으냐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한화그룹 홍보실은 한화라는 기업의 ‘인간적’ 면모가 있는 그대로 소비자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고 아쉬워한다. 나아가 제품의 대부분이 내수용이면서도 생산재인 까닭에 소비자들이 한화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기회도 다른 기업보다 흔치 않다. 예를 들어 한화는 경영 철학으로 ‘신용’과 ‘의리’를 가장 중요시한다. 모기업이었던 한국화약주식회사가 만들던 화약은 민감하고 솔직한 제품이라 불량이 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한다. 창업 시점부터 끈끈한 신용과 의리를 따지는 문화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으며 그래서 한 번 쓴 사람은 좀처럼 내치지 않는다는 게 한화의 화합론이다. 물론 대우조선의 인수는 “돈을 크게 베팅하는 기업에 돌아가게 마련”(대우증권 성기종 애널리스트)이다. 한화는 경쟁 기업과의 자금조달 경쟁은 물론이고 사회 여론에서도 밀리면 안 되는 처지다. 경쟁 업체인 포스코·현대중공업·GS 등도 두툼한 실탄을 바탕으로 총력전을 펴고 있다. 10월 중순께 한화를 비롯해 내로라하는 기업들의 희비가 극명하게 갈릴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대우조선 창립기념일도 10월 11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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