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Serenade] 내 삶의 모태… 33년 만의 귀향
[Seoul Serenade] 내 삶의 모태… 33년 만의 귀향
미국 미시간대학 교정에는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기 전 개발도상국 사람들을 도울 계획을 발표한 현장을 기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그의 이상이 구체화되면서 1961년 평화봉사단이 발족했다. 이를 계기로 나도 세계를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기로 결심했다. 앤아버에서 졸업식 날이 다가오면서 길고도 지루한 신청 절차가 시작됐다.
시카고에서 열린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면서 나는 한국행을 선택했다. 그 후 뉴잉글랜드에서 3개월 간 집중적으로 한국어 공부를 했다. 내가 속한 K-20 그룹은 1972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의 첫인상은 온통 갈색이었다. 갈색 들판, 갈색 논, 황톳길, 초가집, 그리고 헐벗은 야산 등. 통관 절차를 거치고 나온 우리는 평화봉사단 사무국 직원과 기존 단원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내 머릿속은 김치 냄새와 오랜 여행에서 오는 피로감으로 빙빙 돌 지경이었다. 사흘 동안은 정말이지 잠만 자고 싶었다. 우리들은 각자 어느 학교로 배정될지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가게 될 중학교의 교감이 나를 데리러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기차로 5시간 거리인 충청남도 서천의 서천중학교였다.
남학생만 다니는 그 학교엔 영어 교사가 6명 있었지만 영어회화가 가능한 교사는 3명뿐이었다. 문득 더는 허비할 시간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2년간에 걸친 나의 서천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는 ‘해피 티칭’으로 알려진 강의법을 개발해 큰 인기를 끌었다. 다른 교사들은 암기 중심의 교육을 했지만 나는 여러 가지 보조 교재를 직접 만들어 미국인들의 실생활 회화를 가르쳤다.
학생들은 나의 ‘콩글리시’에 낄낄댔다. ‘치약’이 ‘쥐약’으로, ‘존경하는 선생님’이 ‘존경하는 생선님’으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내가 “How many teachers are there?”라고 물으면 학생들은 일부러 “There are two teachers” 대신 “There are too many teachers”라며 놀렸다. 당시 시골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수돗물도, 에어컨도, 중앙난방 시스템도 없었다.
나는 때를 벗기러 공중목욕탕을 갔고, 점차 재래식 화장실에도 익숙해졌다. 학교는 교무실에 있던 석탄 난로를 제외하면 한겨울에도 난방시설이 없었다. 셔츠를 받쳐 입고 겨울 코트를 입은 채 수업해도 온몸은 거의 얼어붙다시피 했다. 쉬는 시간마다 몸을 녹이려고 교무실로 달려가곤 했다. 나중엔 김치와 불고기 등 한국 음식도 좋아하게 됐지만 오징어와 개고기만큼은 예외였다(개고기도 어쩌다 먹어보긴 했다). 가장 힘든 순간은 오랫동안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야 할 때였다(187cm의 키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끔 회의 참석차 갔던 서울행은 뉴욕행과 비슷했다. 햄버거와 아이스크림도 먹고, 새로 생긴 지하철을 타고 미국 영화도 볼 수 있었다. 세련된 영어를 다시 들으면 이상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다른 평화봉사단과 서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소중한 순간이었다. 서천으로 돌아가면 나는 다시 ‘유명인사’로 돌아왔다.
둥글고 푸른 눈에 갈색 머리와 큰 코와 큰 키 덕분이었다. 나는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척하면서 많은 사람을 놀려줬다(그런대로 통했다). 점차 한국 생활이 익숙해지면서 내겐 ‘나영복’이란 한국 이름도 생겼다. 예정된 2년이 끝나갈 무렵 연장 근무를 신청하면서 서울의 ‘한국 법학원’에서 일하게 됐다. 그곳은 미 대법원만큼 권위있는 곳이었다.
나는 대법관 3명, 판사 여러 명, 검사 다수에게 영어를 가르쳤지만 수강생들의 체면을 이유로 직급별로 반 편성을 해야 했다. 가령 검사들 앞에서 대법관의 잘못된 영어 표현을 바로잡으면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됐다. 수돗물과 난방이 갖춰진 서울 생활은 매우 좋았다. 쏜살같이 지난 3년째 어느 날 미국 대학원에서 합격통지서가 날아들었다. 한국의 친구들과도 작별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 한 백화점에 들렀다가 온갖 종류의 상품이 진열된 것을 보고 당황해 하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동안 나는 한 종류의 치약(럭키 치약)에만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도 자동차가 너무 크게 느껴져 당혹감이 들었다. 립 밴 윙클(미국의 초기 작가인 워싱턴 어빙의 단편집 ‘스케치북’에 나오는 옛 이야기의 주인공)이 20년간 잠에서 깨어났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평화봉사단 경험은 내게 매우 소중하다. 그 경험은 내가 교육학 석사학위를 따는 데도 도움을 줬다. 물론 나중엔 컴퓨터과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포드자동차의 정보기술 책임자로 25년간 일했지만 한국에서 가르친 경험은 지금도 큰 도움이 된다. 지난해 은퇴 후 공직에 출마해 입실렌티 카운티의 공립학교 교육위원으로 당선되면서 느끼는 점이다. 그동안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려왔다. 이제 10월 초면 내 꿈이 실현된다. 내 제2의 고향이 얼마나 변했을지 궁금하다.
[필자인 톰 리버는 70년대 초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서 영어교사로 일했다. 그가 뉴스위크 한국판에 보내온 글을 편집진이 번역해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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