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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 과학화에 인생 건 ‘최씨 고집’

한방 과학화에 인생 건 ‘최씨 고집’

초등학교 4학년 중퇴 학력으로 약 외판원 생활을 시작했다. 3년 연속 판매왕에 ‘등극’해 번 돈으로 제약회사를 차렸다. 한방 과학화에도 앞장섰다. 시장점유율 1등 제품 쌍화탕, 우황청심원, 비타500, 옥수수수염차 등을 만드는 광동제약 최수부 회장 이야기다. ‘한방 외길 최씨 고집’으로 통하는 그의 브랜드 밸류는 회사 브랜드만큼이나 높다.

1935년 일본 출생
화원소학교 중퇴, 고려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서울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 수료
1963년 광동제약 창업, 사장
1989년 광동제약 기업 공개
1990년 식품사업부 신설
1994년 광동한방병원 개원
현재 광동제약 대표이사 회장
한국전문경영인학회 제3회 한국CEO대상 수상

"요즘 기업 환경이 어려우니까 중소기업인들이 약한 소리를 합니다. 이럴 땐 조직을 줄이고, 사장이 직접 뛰어야 합니다. 인내심을 발휘해 경기가 좋아질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야죠.”

45년 한방 외길을 걸은 최수부 광동제약 회장은 “요즘은 신입사원도 집에서 왕자와 공주로 커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최 회장은 열두 살 때 전 재산을 날리고 실의에 빠진 아버지를 대신해 소년 가장이 됐다.

아홉 식구의 생계를 떠맡아야 했던 그는 도둑질 말고는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한다. 그러느라 초등학교를 4년 만에 중퇴했다. 사업을 시작한 후엔 모함을 당해 99일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IMF 체제 당시 부도 위기도 겪었다. 온갖 역경을 이겨낸 그의 눈에 요즘 사람들은 너무 나약해 보인다.

맨주먹으로 시작해 3000억원 매출(2008년 목표)의 제약회사를 일군 그는 이름마따나 ‘빼어난 사나이’(秀夫)다. 2004년 펴낸 자서전 『뚝심경영』에서 그는 지금의 전방위적 경제 난국을 예견이라도 한 듯 “대한민국 사장 여러분 포기하지 맙시다”라고 썼다. 직원들을 생각해서라도 당당히 재기하라고 ‘선동’했다.

특유의 뚝심은 유년 시절부터 엿보였다. 최 회장은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태어났다. 소학교에 입학한 소년 최수부는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일본인 동료들에게 노골적인 멸시와 폭행을 당했다. 해방되던 해 봄 3학년 1학기 때였다. 괴롭힘을 견디다 못한 그는 어느 날 아버지 공장에 있던 검도 호신 도구를 가방에 넣었다.

학교에서 여느 날처럼 일본 학생들이 시비를 걸자 그는 이 도구를 꺼내 무차별적으로 휘둘렀다. 그 길로 미련 없이 교문을 나섰고 그날 오후 퇴학 처리됐다. 몇 달 후 광복을 맞아 귀국한 그는 우리말이 서툴렀다. 이번엔 조국의 아이들이 ‘쪽바리’라고 놀렸다. 그렇게 다시 2년,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등교를 중단했다.

그는 ‘가방끈’이 짧지만 그 때문에 무시 당한 적은 별로 없다고 털어놨다. “스스로 나를 낮춰 처신한 덕이죠. 겸손은 기업 하는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덕목입니다.”최 회장은 창업주 CEO로는 드물게 TV 광고에 몇 차례 출연했다. 10여 년 전 우황청심원 광고에서 “다른 건 몰라도 우황 고르는 일만큼은 30년째 내 손으로 해오고 있다”고 밝힌 그는 요즘도 우황·사향·웅담 등의 약재를 직접 확인하고 오케이를 놓는다.

한 달에 두 번 공장을 찾아 무작위로 약재의 품질을 검사한다. 품질이 수익의 원천이라는 믿음은 쌍화탕을 제조하면서 몸에 배었다. 1975년 쌍화탕 제조사들이 약재를 제대로 쓰지 않은 쌍화탕을 출고가 30원, 소비자가격 50원에 팔 때였다. 쌍화탕을 본격적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과당 경쟁으로 당시 보건사회부로부터 제조 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쌍화탕을 만들던 작은 제약회사 서울신약을 합병한 그는 제대로 된 쌍화탕을 제조해 출고가 70원, 소비자가격 100원에 내놓았다. 약국에 샘플을 돌리자 약사와 그 가족들이 먹기 시작했다. 6개월 만에 150만 병이 팔려나갔다. 3000만 병이 팔리자 구로동 공장 앞에 도매상 차량들이 줄을 섰다. 그는 “한약이든 양약이든 약재의 비중이 85%가량 되고, 나머지 15%는 제조공정 관리에 달렸다”고 말했다.

경쟁사들은 왜 최 회장만큼 약재를 중요시하지 않을까? 그는 “시장의 원리를 잘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제품을 잘 만들면 수요가 늘어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시장 점유율이 높아지면 이번엔 제품의 브랜드 밸류가 올라가죠. 이 선순환이 이뤄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물건 잘 만드는 수밖엔 없습니다.”

그가 다른 회사 출신의 관리약사를 채용했을 때의 일이다. 처방에 따라 경옥고를 만드는 데 30㎏의 인삼 가루가 필요했다. 그런데 30㎏의 가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35㎏의 인삼을 빻아야 한다. 5㎏의 손실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는 분쇄기에 35㎏을 넣으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그 약사가 전 직장에서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인삼 가루 30㎏이 필요하면 회사에서 인삼 10㎏을 내줬다는 것이다. 그는 나중에 그 일로 법적 처벌을 받을까봐 회사를 그만뒀다고 했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20대 후반의 청년이 어떻게 제약회사를 차릴 엄두를 냈을까? 1960년 군에서 제대한 그는 혈액순환을 고르게 하는 경옥고 외판원을 시작한다.

제대 군복 차림으로 면접시험을 보러 간 외판원 지망생은 어렵게 고려인삼산업사 대리점 사원이 됐다. 3년 동안 그는 주말도 없이 출근했다. 외판원이었지만 약재를 받아 분말로 만들고 반죽하는 일까지 했다. 포장까지 직접 해 팔러 나서는 그는 외판원이자 경옥고를 만드는 약사 겸 공장장이었다. 몸을 아끼지 않고 일을 거들면서 경옥고 제조법을 익힌 그는 마침내 광동제약사를 창업했다.

창업 자금은 경옥고 외판원 생활로 마련했다. 3년 연속 판매왕에 오른 그의 영업 노하우는 끈기, 배짱 그리고 착실한 고객 관리였다. 그 시절 재무부 이재국장 방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양복 차림도 아닌 그가 “좋은 약이 있어서 소개해 드릴라꼬 왔다”고 말문을 열자 이재국장이 여비서를 불러들여 벼락을 내렸다.

“어디 감히 약장수 따위를 내 방에 들여보내? 그러고도 월급 받을 거야?”여비서는 그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날 밤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 날 한참을 기다려 이재국장을 다시 만났다. “어제는 죄송하게 됐십니더. 오늘은 약을 팔려는 게 아니라 긴히 드릴 말씀이 있심더. 저도 세금 꼬박꼬박 내는 이 나라 국민입니더. 서울대를 나오셨을 거 같고 존경도 받는 분이 어제 면전에서 대놓고 사람을 면박 주신 건 납득 못하겠심더. 제 동생도 서울대 다닙니더.”

전날보다 더 기분이 상한 표정이었던 이재국장은 그의 말이 끝나자 사과했다. “약 하나 사주면 마음이 좀 풀어지겠느냐”는 이재국장에게 그는 “기왕 사실 거면 온 가족이 다 드실 수 있도록 큰 걸로 사달라”고 졸랐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그는 ‘어떤 경우에도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상임위가 열리고 있는 국회 회의실에 들어가 경옥고 홍보 전단을 돌린 적도 있다.

그때 서울대에 다니던 동생은 그가 벌어서 공부시켰다. 동생이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는 학생 차비를 내기 위해 동생의 교복을 빌려 입었다. 동생은 그 후 행정고시에 패스해 공직에 들어섰다. 한때 광동제약 사장도 지낸 최선길 서울 도봉구청장이 그다. 당시 최 회장은 경옥고 판매액의 15%를 수당으로 받았다.

몇 십 명이나 되는 동료의 수당 총액보다 그의 수당이 더 많았다. 취직한 지 몇 달 만에 15만환이 넘게 받았는데 지금으로 치면 월급 1000만원이 넘는 고소득자였다. 그 돈을 벌기 위해 그는 걷고 또 걸었다. 구두를 장만하면 두 달을 못 넘겼다. 여름엔 면도칼로 환기구멍을 내 신고 다녔다. 약장수라고 푸대접하는 곳은 더 자주 들렀다.

아침에 출근할 때 아예 오장육부를 빼 놓고 나섰다. 접대용으로 화랑 담배를 품고 다녔지만 혼자 있을 땐 파랑새를 피웠다. 멀쩡한 양복 입고 좌판 앞에 앉아 수제비를 사먹을 때면 지나가던 대학생들이 수군거렸다. 그렇게 벌어 3년 만에 경옥고를 만드는 광동제약사를 창업했다. 광동이란 회사 이름은 광화문에 있던 한 작명소 작품이다.

경옥고의 원료가 한약재라 한약재의 본산인 중국 광동성에서 따온 것이다. 냉전시대엔 이 이름을 좋지 않게 보는 사람이 많았다. 냉전체제가 종식되고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자 사람들이 선견지명이 있었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광동제약의 창업과 성장을 뛰어넘는 최 회장의 공로는 한방 과학화다. 그는 과학화하지 않으면 한약재를 대중화할 수 없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두툼한 한약재 한 첩 달이면 양이 반 대접은 됩니다. 그런데 주요 성분만 추출해 알약이나 캡슐로 만들면 간편하게 서너 알만 먹으면 돼요. 한약재 이용자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꾸준히 시설투자를 하고 냉동 건조법에 대해서도 연구합니다.”


국민음료로 우뚝 선 ‘비타500’

TIP
최수부 회장이 말하는 ‘하우 투 브랜드’
■ 끈기와 배짱이 자산
‘최씨 고집’이라는 브랜드는 끈기와 배짱에서 나왔다. 거기에 착실한 고객 관리를 더하라. 사람에 대한 신뢰가 제품에 대한 신뢰로 이어진다.

■ 신용을 얻으면 다 얻는다
돈을 얻으면 조금 얻는 것, 명예를 얻으면 많이 얻는 것, 신용을 얻으면 모두 얻는 것이다. 반대로 신용을 잃으면 다 잃는다.

■ CEO는 움직이는 광고판이다.
사람들은 CEO의 처신을 보고 해당 기업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남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조차 언행을 삼가라.
광동제약의 1등 제품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비타500’은 정제 비타민이 연간 50억원어치씩 팔리는 것을 보고 착안했다. 최 회장은 이미 경옥고와 우황청심원을 드링크 또는 현탁액으로 만든 경험이 있었다.

갈수록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니 마시는 비타민을 만들면 박카스보다 오래갈 것 같았다. 액상 비타민은 정제보다 흡수도 빠르다. 문제는 맛이었다.

‘이 정도면 되겠다’는 맛을 만들어내는 데 7~8개월 걸렸다. “드링크로 차별화하면 된다는 감이 왔습니다. 박카스가 나온 지 40여 년 됐는데 100년 가는 음료가 될 거라고 개발 당시 확신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많이 팔 때 월 6300만 병까지 나갔습니다. 온 국민이 그달에 비타500을 한 병 반씩 마신 셈이죠. 장차 국민음료가 될 거라고 자신합니다.”

2004년 11월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시중의 비타민C 음료를 수거해 함량을 조사했다. 롯데, 동화약품 등이 만든 제품은 비타민 함량 미달이었다. 비타민C가 아예 나오지 않은 제품들도 있었다. 비타500만이 함량을 제대로 지키고 있었다. 이들 제품에 처음부터 비타민C를 적게 넣거나 아예 넣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빛과 열, 산소에 약한 비타민C의 특성을 모르고 투명한 병이나 일반 알루미늄 캔을 용기로 사용한 것이다. 이 발표 후 비타500의 인기에 편승한 미투 제품이 시장에서 거의 퇴출되다시피 했다. 광동의 히트 제품은 유저 프렌들리를 겨냥하고 있다. 전통적인 탕약은 복용이 편리한 정제로 변환시켰고, 기존의 정제는 드링크로 업그레이드시켰다. 비타500의 미투 제품이 도태된 것은 맛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최 회장은 강조했다.

선발 출시에 따르는 선점 효과 아닐까? 비타500은 과연 다른 비타민 음료보다 더 맛이 있을까? “이 맛이다 할 때의 그 맛을 못 내는 거죠. 다른 회사 제품을 권해도 입에 대 보면 이게 아니다 싶으니까 비타500을 찾는 거예요. 맛의 차이가 70%, 광동 제품이니 다른 회사 것보다 나을 거라는 사람들의 믿음이 30%라고 봅니다. 옥수수수염차도 다른 회사 유사품이 맛을 못 따라오는 겁니다.”

2006년 여름 선보인 광동옥수수수염차는 출시한 지 1년 5개월 만에 2억 병이 팔렸다. 또 하나의 대박이었다. 국내 차 음료시장 1위 제품인 옥수수수염차는 제2의 비타500을 꿈꾸고 있다. 그의 꿈은 2세가 회사를 물려받아 국민 제약회사로 키우는 것이다. 최성원 광동제약 사장이다. 15년 전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온 최 사장이 광동에 첫 출근하기 전 그는 아들과 대화를 나눴다. 엄하게 키워 “누나들보다 나에게 더 가혹하시다”고 했던 외아들이다.

“제약회사를 해보니 정신적·육체적으로 고통스럽더라. 남부럽지 않은 학벌이니 어디 가도 상당한 연봉을 받을 수 있을 거다. 굳이 복잡한 회사를 맡길 생각은 없다. 열흘 동안 생각해 보고 답하거라.” 아들은 “아버지가 고생해 창업한 회사를 고통을 각오하고 한번 키워 보겠다”고 화답했다. 최 사장을 포함해 최 회장 측의 광동제약 주식 지분은 약 21%다. 2만4000여 명의 개인 소액주주가 약 6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오너가 절대 지분을 쥐고 있는 무늬만 상장사가 아니다. 최 회장은 그래서 창업은 자신이 했지만 광동은 공기업이라고 주장한다. “80세 넘어서도 명예회장으로 있으면서 가르칠 건 가르칠 겁니다. 은퇴해 버리면 겉늙어서 안 돼요. 경영 승계 후에도 2세가 국민의 신뢰를 받고 주주에게 존경 받는 기업으로 키울 겁니다. 인류의 건강을 지키는 멋진 기업으로 커갈 거예요. 5년 후면 창립 50주년인데 그때까지는 한 우물을 팔 생각입니다. 2세 체제에서 다른 좋은 사업을 잘 골라서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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