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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불리려 빨리가다 악재와 충돌

세 불리려 빨리가다 악재와 충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행권의 화두는 메가 뱅크(거대 은행)였다. 메가 뱅크를 외치던 목소리는 이제 쑥 들어갔다. 은행권의 경영 지표가 이처럼 악화된 건 미국발 금융위기 전에 무분별했던 외형확장 경쟁 탓이다.
신동규 은행연합회장(오른쪽 두 번째) 주재로 열린 은행장 간담회.

1단계 : 후순위채 발행 등 자구노력, 2단계 : 산업은행 등 국책은행과 연기금 이 참여해 은행 자본확충 펀드 조성, 3단계 : 공적자금 투입. 최근 금융위원회가 청와대에 보고한 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높이기 위한 방안이다. 특히 2단계 방안은 펀드 형태를 띠고 있지만 사실상 공적자금 투입에 준하는 조치다.

물론 이런 방안은 은행의 상황이 더 나빠졌을 때를 위한 비상대책인 만큼 현재 상태에선 실행 가능성이 크진 않다. 그러나 중요한 건 정부가 이런 비상대책을 짜야 할 만큼 은행의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9월 말 현재 시중은행의 BIS 자기자본비율(이하 BIS 비율)은 10.62%로 금융감독원 기준(8% 이상)보다는 높다.

그러나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9월 중순 리먼브러더스의 파산보호 신청 이후 금융 불안이 고조되면서 은행의 BIS 비율이 나빠지고 있다”며 “BIS 비율 하락의 영향으로 국제신용평가사가 은행 등급을 낮추기라도 하면 한국 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BIS 비율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은행에 ‘중기대출을 늘려라, 자금을 회수하지 말라’고 아무리 소리쳐 봐야 소용 없다는 얘기다. 한국은행이 돈을 풀어도 돈이 돌지 않는 것은 이처럼 은행이 제 앞가림하기에 바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강제적 수단을 써서라도 BIS 비율을 높여 은행이 돈을 풀게 하는 게 금융당국의 최우선 과제가 된 것이다.

12월 초 금융감독원이 은행별 자본확충 규모를 적시한 공문을 시중은행들에 보내 BIS 비율을 끌어올릴 것을 주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 시중은행의 전략담당 부행장은 “대통령을 위시해서 너나 없이 은행을 욕한다. 마치 동네북이 된 느낌이지만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은행의 잘못은 많다.

한국경제연구원의 배상근 연구위원은 “은행에 직격탄을 날린 건 미국발 금융위기지만 위기의 싹은 이미 은행 간 과열 경쟁 와중에 돋아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공적자금 80조 원을 빨아들인 은행 정상화 조치와 연이은 합종연횡을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은행이 전열을 정비한 건 2004년. 포문은 우리은행이 열었다.

우리은행이 주택담보대출과 건설사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 등으로 자산을 빠르게 늘려가자 신한곀毬?은행 등이 뒤를 이었다. 정부 규제로 주택담보대출에선 더 이상 전선을 넓히기가 어렵게 되자 2006년부터 은행들은 중소기업 대출로 방향을 틀었다. 우리겱탭?은행은 선두 은행인 국민은행을 따라잡기 위해, 하나은행은 선두권과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혈전을 벌인 것이다.

자산경쟁에서 비교적 의연한 모습을 보였던 국민은행도 우리겱탭?은행이 턱밑까지 쫓아오자 별 수 없이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외형 확대에 나섰다. 국민은행의 총 자산 규모는 2004년 말 200조 원이었다가 2008년 9월 말 274조6000억 원으로 373%나 커졌다. 결국 이 같은 외형 확대 경쟁으로 같은 기간 주택담보대출은 170조 원에서 235조 원으로, 중소기업 대출은 245조 원에서 399조 원으로 불어났다.

덕분에 시중은행의 총 자산도 734조 원에서 1183조 원으로 커졌다. 문제는 이처럼 몸집은 불렸지만 돈 빌려주는 데만 급급해 금고가 비어가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주식시장이 호황을 이어가면서 은행의 예금은 급속도로 증시로 빠져나갔다. 인기를 끈 증권사의 자산관리계좌(CMA)도 은행의 예금이 줄어드는 데 한몫했다.

한국은행은 금융기관 전체 유동성에서 은행채와 양도성예금증서(CD) 등을 제외한 수신이 2004년 말 42.4%에서 2008년 6월 말에는 33.5%로 급감했다고 밝혔다. 반면 같은 기간 자산운용사의 펀드 잔액이 전체 유동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4.7%에서 19.9%로 커졌다. 상황이 이쯤 됐을 때 멈췄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은행은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로 변해 있었다. 한 시중은행의 자금담당 부행장은 “부동산 버블이 우려되긴 했지만 좋은 시절이 계속 될 것이란 분위기가 은행 내에 팽배했었다”고 말했다. 은행은 예금이 줄어드는 걸 뻔히 보면서도 당장 눈앞의 이익에 급급해 CD 발행은 물론 국내외에서 대규모로 은행채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2006년 말 95조 원이었던 은행채 발행 잔액은 지난 11월 말 현재 160조 원으로 불어났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은행의 총 수신액 가운데 CD와 은행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2001년 5.7%였지만 2008년 6월에는 21.4%로 크게 늘었다. 들어오는 돈보다 과다하게 대출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금 잔액 대비 대출액이 얼마나 되는지를 나타내는 예대율을 보면 금방 드러난다.

금융위원회는 9월 말 현재 은행의 예대율이 103%라고 밝혔다. 예금액을 넘어 대출이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특히 CD를 예대율 계산에서 제외하면 수치는 126.5%로 치솟는다. 80%를 적정 예대율의 기준으로 삼는 미국과 유럽의 상업은행들이 예대율을 계산에서 CD를 제외하는 것을 감안하면 국내 은행의 예대율이 미국 등보다 40% 가까이 높은 것이다.

물론 경기가 좋다면 은행채와 CD를 마구 발행해 그 돈으로 대출을 늘인 게 특별히 문제될 건 없다. 채권 만기를 연장하거나 다른 채권을 발행해 기존 채권을 갚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융시장 불안으로 이런 방식이 통하지 않게 되자 은행이 앞뒤 가리지 않고 대출을 회수하고, 신규 대출은 사양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똑같은 논리가 은행의 외화차입에도 적용된다. 은행들은 외화를 차입해 무역금융 재원으로 활용하기보다는 중소기업의 운전자금, 병원 등 자영업자들에게 대출해줬다. 그러다 만기 연장이 거의 불가능할 지경으로 시장이 나빠지자 정부가 나서 지급보증까지 해주는 사태로 비화됐다.

삼성경제연구소의 권순우 거시경제실장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비우량 주택담보대출)에 따른 금융위기는 이미 2007년 8월부터 본격화됐는데도 국내 은행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듯하다”고 말했다. 내상이 깊어지고 있는 가운데도 은행들은 제2차 인수·합병(M&A)을 의미하는 ‘메가 뱅크’ 야심을 감추지 않았고, 경쟁적으로 해외 진출에도 열을 올렸다.

우리금융, KB금융지주 등이 M&A와 해외 진출 계획을 경쟁적으로 내놓은 것도 모두 2008년 상반기다. 불감증에 걸린 것은 감독당국도 마찬가지다. 2007년 8월 김용덕 금융감독위원장은 취임사에서 “M&A를 통한 금융회사의 대형화를 적극 유도하겠다”고 밝혔고, 전광우 금융위원회 위원장도 취임 후 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의 민영화, 우리금융지주의 지분 매각 일정을 내놓으며 은행 간 M&A에 불을 당긴 것이다.

이제 은행권에서 M&A 얘기는 싹 사라졌고, 야심 차게 진행하던 해외 진출도 모두 중단됐다. 은행마다 그렇게 갖고 싶어 안달했던 외환은행에 대해서도 인수 기회가 생겼는데도 소 닭 보듯 하고 있다. 그러나 몸을 움츠리고 있는 것으로 위기가 진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더해진다.

10월 말 현재 49조 원에 달하는 은행의 PF 대출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다. 중소기업 대출은 물론 대기업 대출도 전혀 안전지대가 아니다. 특히 최근 1~2년 새 급증한 M&A 관련 대기업 대출이 경기침체에 따라 은행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하는 은행 대출의 28%를 차지하는 주택담보대출도 수도권의 집값 하락세가 지속되고 경기가 나빠져 연체가 급증하면 금방 부실자산으로 변해 버린다.

금융연구원의 김동환 실장은 “정부는 일을 벌인 은행이 먼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지만 경제 상황은 그 이상으로 꼬여가고 있다”며 “은행의 자구노력이 지지부진하다는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할 때 과감하고 선제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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