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히든 챔피언’ 키운다
한국의 ‘히든 챔피언’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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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11일 경기도 평택시 평택상공회의소. 평택겳을?지역 중소기업인 45명이 모였다. 윤용로(54) 기업은행장이 매달 한두 차례씩 전국을 돌며 거래 중소기업인들과 만나는 ‘타운 미팅’ 자리. 중소기업 경영자들의 이야기는 절박했다.
“은행들이 중소기업을 지원한다고 하지만 실제 지점에선 움직이지 않습니다.”
“경기 침체가 오래 간다는 소식에 불안합니다.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좋을지 아이디어를 좀 주세요.”
윤 행장은 기업은행이 특화해 시행 중인 제도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골드 트랙과 사전여신한도, 기업평가 모델 변경 등이었다. 골드 트랙은 일시적으로 거래 기업이 자금 사정이 어려워질 때 종전에 한 달 이상 걸리던 대출 승인 과정을 생략하고 지점장이 보고만 하면 지역본부장 선에서 대출을 승인하는 제도다.
사전여신한도제는 기업이 은행에서 자금을 빌려 쓸 수 있는 신용한도를 미리 설정해두는 것이다. 가계의 마이너스 통장에 해당한다. 지점장이 신청하면 본점이 일주일 안에 한도를 정해준다.
선정된 기업이 자금을 요청하면 지점은 곧바로 돈을 내준다. 시행 한 달 만에 25개 업체에 3164억 원의 신용한도를 설정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나중에 대출이 부실해져도 지점장이나 관련 직원을 문책하지 않는 ‘면책’이다.
중소기업에 돈이 돌게 하라
외환위기 이후 11년 만인 2008년 11월 24일 기업 평가모델을 바꿨다. 과거 실적인 재무제표 등 숫자보다 CEO의 열정이나 비전 등 기업의 잠재력과 미래 가치에 대한 상대 가중치를 더 높였다. 윤 행장은 “경기 침체기에는 재무제표가 나빠질 수밖에 없다”며 “당장은 힘들어도 CEO와 종업원들이 똘똘 뭉쳐 불황을 이겨나가는 기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점장 평가 방식도 바꿨다. 2008년 11~12월 중소기업 대출 실적을 2009년 실적으로 넘겼다. 이전까지 지점장들은 대부분 대출 목표를 11월이면 채웠다. 이후엔 새로 대출한들 리스크만 커지고 이듬해 목표치를 높이는 압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영업을 꺼리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다.
윤 행장은 2008년 3월부터 시작해 12월까지 전국을 돌며 열일곱 번 ‘타운 미팅’을 마련했다. 타운 미팅은 앉아서 고객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찾아가 마을 회의를 하듯 자유스런 분위기에서 중소기업인들의 가감 없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 기획했다.
“큰 장소를 빌려 전국 거래 기업 대표가 모이도록 하자는 방안도 나왔는데, 기업인들에게 부담을 줄까 봐 저희가 찾아가기로 한 겁니다. 3월부터 전국을 도는데 원자재 가격 상승, 환율 상승, 키코(KIKO) 사태 등 그때그때 경제 상황과 지역에 따라 반응이 달라요. 처음에는 가만히 있다가 한두 사람이 말문을 열면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집니다. 미팅이 끝나 나가려는데 붙잡고 물어보기도 하고….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죠. 지난 11월엔 광주에서 했는데 지역 경제가 어려워서인지 발언 수위가 셌어요. 12월에 찾은 울산 지역은 상대적으로 질문이 적었고요. 다들 2008년보다 2009년 경기에 대한 걱정이 더 큰 만큼 지원책을 선제적으로 내놓아 자금 조달에 숨통이 트이도록 하겠습니다.”
타운 미팅은 중소기업인들과 은행 지점장들 간 상호 이해의 마당이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지점장 교육 시간이다.
“기업인들이 지방까지 찾아와준 데 일단 고마워합니다. 저희들의 설명을 듣고 수긍하고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장이 선 거지요. 그곳에 모인 지역본부장과 지점장 20~30명에게 제 뜻을 알리는 기회도 됩니다. 중소기업인들이 보는 앞에서 ‘이렇게 지원하자’, ‘저렇게 하자’고 약속하니까요. 저희들은 기업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으며 기업은행의 사명을 새삼 깨닫고, 기업인들은 은행의 현안과 고충을 이해합니다. 서로 보고 배우는 쌍방향 학습이 이뤄지는 것이지요.”
지점장들도 본점에서 보내온 공문을 보거나 은행 내부 방송을 들어야 알던 영업 방침을 행장에게 직접 들으니 좋다고들 평가한다.
2008년 4월 12일 직원들과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축령산을 오르면서. |
중소 제조업 탄탄해야 경제강국
본디 이름이 중소기업은행인 데서 짐작하듯 전국적으로 66만 개 중소기업이 기업은행과 거래한다. 예금만 거래하는 기업이 약 50만 개, 예금과 대출 거래를 함께 하는 곳이 16만 개다. 우리나라 300만 중소기업의 22%가 기업은행과 인연을 맺고 있다. 윤 행장의 표현대로 ‘유치원생부터 대학원생까지’ 다 있다. 이제 막 청년들이 창업한 소기업부터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곳에 이르기까지 거래 기업에 맞춰 다각화된 서비스를 해야 한다.
“이번 금융위기에 관계 없이 우리 경제가 위기라고 생각해요. 일본에 밀리고 중국에 쫓기는 샌드위치 신세잖아요. 우리가 수출을 이만큼 하는 것도 그동안 주로 물건을 팔아오던 미국, 일본, 유럽에 한계를 느껴 동유럽, 중남미, 아프리카 등지로 수출선을 다변화한 결과입니다. 이젠 경쟁력이 떨어져 먹고 살기 힘들어지는 상황에 대비해야지요.”
여기서 윤 행장은 ‘중소기업 대안론’을 강조한다. 실력 있는 중소기업을 키워 경쟁력을 떠받쳐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계 경제 10위권에 들기는커녕 12위도 지키기 어렵다. 다들 어렵다고 야단인 지금 우리나라 중소기업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얘기다.
윤 행장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세계에서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어디입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낸다. 유럽의 피터 드러커로 불리는 독일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이 쓴 <히든 챔피언> 이다. “20년 전에는 미국, 1990년대에는 일본, 그리고 지금은 중국이란 대답이 가장 많다고 그래요. 그러나 사람들이 아는 것과 달라요.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세계 수출 1위 국가는 독일이었습니다.”
벤츠자동차와 지멘스를 빼면 세계적으로 이름난 대기업이 별로 없는 독일이 수출 1위(2007년 1억4000만 달러)를 차지하는 원동력은 숨겨진 챔피언들이다. 연간 매출 40억 달러 이하로 그리 알려지지 않았는데 세계 시장에서 1위 또는 2~3위를 하는 기업들이다. 휴대전화 칩 접착제를 만드는 델로(Delo), 생선 가공 장비를 만드는 바더(Baader), 관상용 물고기 사료를 만드는 테트라(Tetra), 자동차 내비게이션처럼 외과의사에게 수술 도구의 위치를 가르쳐 주는 시스템을 만드는 브레인 랩(Brain lab) 등 세계 시장 점유율 60~80%인 중소·중견 기업이 1000개에 이른다.
“지금 전 세계가 금융위기의 여파로 몸살을 앓고 있잖아요. 바로 이런 시기에 한국의 히든 챔피언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도 와이지 원(YG1), 홍진크라운(HJC)처럼 세계 시장을 호령하는 히든 챔피언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어요. 경제 주체들이 힘을 합쳐 수백, 수천 개의 히든 챔피언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뒤를 기업은행이 받치겠습니다.”
새해 기업은행 슬로건을 ‘이제 다시 중소기업이다’로 삼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번 금융위기 상황에서도 선방하는 독일과 일본, 대만을 보세요. 모두 탄탄한 제조업과 중소기업을 가진 나라예요. 탄탄한 제조업의 뒷받침이 없는 서비스업은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히든>
중소기업 이름을 고쳐 드립니다 “명화금속이란 기업 들어보셨어요? 기업은행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기업인데, 세계에서 나사를 가장 잘 만드는 첨단 기업입니다. 그전에는 H빔에 드릴로 구멍 뚫고, 철판에 볼트와 너트를 조였잖아요. 그런데 여기선 그냥 철판을 놓고 못으로 박는데 단번에 끝납니다. H빔을 뚫으려면 그 못이 얼마나 강해야 하겠어요? 그래서 포스코에서 나오는 초고강도 철을 쓰냐고 물었더니, 중국산 값싼 철선을 갖고 한다는 거예요. 깎는 방법에 따라 철선이 강철을 뚫는답니다. 그게 노하우예요. 기술강국 독일과 일본에 수출합니다. 그런데 ‘금속’ 자 이름만 보고 젊은 사람들이 오질 않아요. 이름을 바꾸면 확 달라질 것입니다.” 기업은행은 제품 품질과 회사 재무구조는 좋은데 기업 이름과 브랜드가 시대 감각에 뒤처지는 곳을 찾아 바꿔주는 작업을 시작했다. 네이밍업체 크로스포인트(대표 손혜원)와 제휴했다. 회사 이름은 물론 브랜드와 제품 디자인, 제품 사용 설명서 등을 업그레이드 한다는 구상이다. 브랜드와 디자인을 고치는 데 필요한 자금은 은행이 대출해준다. 기업은행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기업부터 시작해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
지난 10월 29일 경기도 부천에 있는 휴대전화 케이스 제조업체 갑을플라스틱 공장에서. |
중소기업에 사람이 가게 하자
많은 중소기업 현장을 직접 가 본 윤 행장은 우리나라 중소기업을 농촌에 비유한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농촌을 등지듯 중소기업에 가지 않는다. 농촌에서 외국인 색시가 아기를 안고 있듯 중소기업에 가 보면 나이 든 한국인 CEO와 외국인 근로자밖에 없다. 농촌도, 중소기업도 심각한 저출산에 신음하고 있다.
“청년 실업자가 약 29만 명인데, 중소기업들은 종업원 20만 명을 못 구해 난리예요. 기업은행이 4월, 10월 일자리 박람회를 두 차례 열었는데 (연봉) 1800만~2000만 원짜리는 젊은이들이 오질 않아요. 세계 1등 최고 중소기업들을 모시는 기업은행 ‘명예의 전당’에 오른 기업들(현재 18개)도 구인난을 겪으니…. 다들 금융기관이나 투자은행(IB) 같은 데 들어가 몇 년 지나면 1억 원씩 받고 싶어해요. 눈이 너무 높아요. 젊은이들은 대기업을 가려 하고, 중소기업은 외국인 근로자를 쓰는 상태로 우리 경제가 얼마나 버티겠어요. 제조업체에 들어가 땀 흘려 돈 버는 것에 대한 가치를 알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기업은행은 중소기업 청년인턴 지원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거래 기업이 인턴사원을 신규 채용하면 6개월 동안 최고 100만 원까지 인턴사원의 월급을 대신 준다. 인턴 근무가 끝난 뒤 정규직으로 채용하면 추가로 6개월간 지원한다. 2009년 봄 지역을 안배해 괜찮은 기업 100개를 뽑아 100명의 인턴을 연결시키는데, 경비는 은행의 자발적인 경비 절감을 통해 마련한다.
해당 기업에는 대출금리 우대, 수수료 인하 등의 혜택을 추가로 준다. “단순한 인턴이 아니라 거기서 일하려는 인력을 뽑으려고 해요. 면접 과정에서 정말 그 기업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을 채용할 겁니다.”인력 채용을 원하는 중소기업들의 데이터베이스(DB) 구축에도 나섰다.
구직자에 대한 DB는 노동부 워크넷과 채용 포털인 리크루트, 인크루트 등 여러 곳에 잘 돼 있는 반면 기업의 구인 DB는 미흡하기 때문이다. “기업은행 거래 기업 중 종업원 30명 이상인 경우가 약 9300개예요. 여기에 기업은행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곳, 최고경영자 클럽에 가입한 곳을 합치면 1만3000개에 이릅니다. 이런 데는 정말 괜찮은 기업들이거든요. 이들 기업이 어떤 인재를 원하는지 DB로 만들어 2009년 1월 초 가동합니다.”
이밖에 기업은행은 중소기업 이름과 브랜드를 현대 감각에 맞게 고쳐주는 작업을 시작했다.“제가 잘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부에 있다가 은행에 오니 가장 걱정스러운 것이 건전성이었어요. 기업은행이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 심사 시스템은 가장 잘 돼 있지만 그래도 더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워치 리스트(watch list)를 만들었습니다.”
은행의 생명은 ‘건전성’
워치 리스트는 대출이 나간 중소기업을 본점 여신본부에서 살피며 지점에 주의할 점을 미리 알려주는 제도다. 들여다보는 방법이 과거보다 정교해졌다. 이를테면 중소기업 사장이 현금 서비스를 많이 받아간다든지(자금 융통에 문제 발생 가능성), 특정 상점에서 물건을 많이 산다든지(현물 융통 가능성) 등 이상한 징후가 보이면 지점에 전달한다.
2008년 9월부터 네 차례에 걸쳐 6800개 기업을 점검했다. 정상 기업군에서 골라낸 워치 리스트 기업 중 25%가 2008년 10~11월에 부도 처리될 정도로 예측력이 높았다. 대출 심사 과정도 확 바꿨다. 기본적으로 해당 영업점의 의견을 충분히, 많이 듣도록 했다. “사실 그 기업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지점장이잖아요. 그런데 지점장 전결 사항이 아닐 경우 본점으로 오면 ‘업종이 안 좋다’며 찍 긋기 일쑤였어요. 본점에서 여신 심사회의를 할 때 지점장이나 담당 직원을 참여시켰어요. 서로 안 되는 이유와 되는 이유로 토론을 벌입니다.”
윤 행장은 본점 여신 심사부장을 지점장으로 내보냈다. 만날 안 된다고 했는데 어떻게 되는지 현장에 가서 보라는 뜻에서. 그리고 지점 직원들을 심사부로 발령 냈다. 이렇게 교차 근무를 시키고 워치 리스트를 만들자 다른 은행보다 높았던 연체 발생률이 2008년 하반기부터 내려갔다.
“중소기업 대출을 많이 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은행의 기본은 건전성입니다. 지난 3년 동안 150조 원의 중소기업 대출이 늘어났어요. 250조 원에서 400조 원을 넘어섰어요. 역사상 이렇게 많은 돈이 중소기업 대출로 나간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금융위기라도 안 될 기업, 죽을 기업을 지원해선 곤란합니다. 살 수 있는데 일시적으로 어려워진 기업을 잘 골라내야 합니다.”
2002년부터 금융감독원에서 일한 윤 행장은 은행 영업의 쏠림 현상을 걱정했다. 부동산담보대출, 펀드 권유 등을 중심으로 한 외형 확대 경쟁이 불안했지만 마땅히 통제할 길이 없었다.
“정부가 뭐라고 하기엔 최근 몇 년 사이 은행들의 지표가 좋았어요. 감독당국이 개입하려 들면 ‘우리가 사회주의 국가입니까’라며 반발하고, 언론에선 대형화가 살 길이라고 강조했고…. 결국 부실이 더 많은 큰 은행이 내실 있게 경영한 작은 은행을 흡수해 물타기를 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결과 지금 큰 데를 중심으로 은행들이 어려워진 것이지요. 누가 그래요. 한국 은행들은 재무제표만 봐선 구별하기 어렵다고. 운영 행태가 비슷하니 그렇지요.”
윤 행장인 이런 면에서 볼 때 기업은행은 확실히 차별화된 길을 걷고 있음을 강조했다. 중소기업 대출이 가장 많은 ‘은행 중 은행’이라고 표현했다. 설립 근거법상 중소기업에 70% 이상 대출하도록 돼 있는 기업은행은 현재 전체 대출의 82%가 중소기업 대출이다.
“등기부등본을 보고 하는 주택담보대출 누가 못합니까? 가계대출이 대세면 왕창 늘리고, 중소기업이 좀 어려워지면 자금을 싹 빼고…. 그게 무슨 은행입니까? 다른 행장들한테 맞아 죽을지 모르지만(웃음), 중소기업 대출을 죽 유지해온 곳은 기업은행밖에 없어요. 다른 은행들이 중소기업의 사정이 어렵다며 우산을 빼앗을 때 기업은행은 더 (대출)했고, 다른 은행들이 열을 올릴 때 기업은행은 오히려 (자금을) 뺐어요. 경기 상황과 반대로 움직인 것이죠. 그 결과 좋은 고객을 확보할 수 있었어요. 몇 년 전 다른 은행들이 중소기업 대출을 많이 할 때 기업은행 지점장을 잡상인 취급하던 기업들이 지금은 우리를 찾아옵니다. 재무제표만 따지지 않고 직접 기업체에 찾아가 정문에서 안내하는 경비와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을 보면 그 기업의 미래가 보인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윤 행장은 기업은행은 민영화 이후에도 ‘중소기업에 특화한 은행’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소기업과 수출기업에 기반을 두고 그곳에서 일하는 근로자와 거래 대기업을 고객으로 끌어들이자는 전략이다.
새로운 IBK Way로 간다
윤 행장은 2007년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시절 ‘과잉 규제’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담보인정비율(LTV)·총부재상환비율(DTI) 제한을 통한 부동산담보대출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데 총대를 맸다. 2008년 4월 기자간담회에선 하반기에 은행 대출이 줄어들고 중소기업들이 어려움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솔직히 저라고 이 지경에까지 이를 줄 알았겠어요? 다들 어려워지리라고 짐작은 하면서도 그 충격의 폭과 깊이가 이렇게 크고 깊을 줄은 몰랐지요.”
윤 행장은 취임과 동시에 건전성과 소매금융 강화를 강조했다. 61년 농협을 둘로 쪼개 대도시 농협 점포를 지점으로 바꾸면서 출범한 기업은행은 지점 수가 적은 데다 그나마 지점의 65%가 공업단지에 있다. 그 결과 수신 기반이 취약하다. 공식적으론 중소기업은행인데 ‘중소’를 뺀 채 기업은행으로 부르다가 요즘 기업은행을 작게 쓰고 IBK라고 크게 적는 것도 일반 고객을 끌어오기 위해서다.
“기업은행이 왜 소매금융을 강화하느냐며 뭐라고들 하는데, 새 행장이 와서 영역을 넓히고 나쁜 짓 하려는 게 아니에요. 수신 기반이 탄탄해야 중소기업 지원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처럼 채권 발행이나 정부 지원에 기대선 한계가 있을 수밖에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지는 게 아니고, 중소기업 지원을 더 잘하기 위해 소매금융에 신경 쓰는 거예요. 타운 미팅 때 기업은행 금리가 왜 높으냐고 물으면 ‘사장님이 기업은행 카드를 안 쓰고 대출만 받으니 그렇다’고 말합니다. 주변에 지점이 적어 접근하기 어려우니 중소기업 근로자나 사장 부인도 대부분 다른 은행을 이용하고요.”
윤 행장은 ‘오늘은 어제와 다르게, 내일은 오늘보다 새롭게’라는 마음가짐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정부부처에 있을 때나 은행 CEO로 와서나 한결같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같으면 뭐 하려고 숨 쉽니까? 차라리 오늘 곱하기 몇 해서 살다가 죽는 게 낫지. 그게 아니라면 날마다 새로운 뭔가를 얻도록 생각과 행동을 바꿔야지요. 외환위기 때 선두 은행들이 대기업 금융을 잘못했다가 쓰러지자 그 뒤에 있던 은행들이 지금 리딩뱅크가 됐잖아요. 현재의 구도 또한 얼마나 오래 갈 지 모릅니다. 2009년이 창립 48주년, 제가 50주년은 못 보고 떠나겠지만 그 안에 기업은행을 바꿔 놓겠습니다.”
골프를 치지 않는 윤 행장은 주말에 직원들과 등산을 자주 한다. “산행은 좋은데 내려와서 ‘소폭(소주 폭탄주)’은 안 했으면 한다”는 그는 은행 홈페이지 ‘칭찬 코너’에 등장한 직원들에겐 피자나 치킨, 아이스크림을 보낸다. 지난 12월 초에는 변호사, 회계사 등 전문 계약직과 차를 마시면서 “사실은 나도 전문 계약직”이라고 말해 자리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2007년 말 선물받은 구두 뒷굽이 상당히 닳았다는 윤용로 행장. 요즘 ‘IBK Way(길)’에 관심이 많다. 그는 IBK Way 중 하나로 춘추전국 시대를 통일한 중국 진나라의 인재를 두루 기용한 열린 문화·유연한 사고를 염두에 둔다. “진은 별 볼 일 없는 변방국가로 망할 수 있다는 절박감 때문에 오히려 성장한 나라입니다. 진에 a를 붙여 오늘날 중국을 차이나(China)로 부를 정도로. 규모도 작은 데다 합병도 없어 조직문화가 폐쇄적인 IBK에 외부 인재를 들여와 함께 배우면서 실력을 키워 넓고 큰 세계로 달려가야지요.”
(필자는 본지 편집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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