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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 ‘목 참판’ 집 앞에 조선인 관리 북적

서양인 ‘목 참판’ 집 앞에 조선인 관리 북적

1876년 개항 이후 부산, 원산, 인천 세 곳의 개항장에는 일본 상품이 쏟아져 들어오지만, 6년이 지나도록 조선은 해관(海關: 세관)을 설치하지 못해 관세를 징수하지 못한다. 해관 설치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조선에 초빙된 인물은 35세 된 독일인 묄렌도르프! 그는 누구였고, 어떤 계기로 조선까지 오게 되었을까?
크리인(F. Krien) 주 조선 독일영사가 독일공사관 뜰에서 개최한 파티(1895). 명성황후 시해 직후여서 조선인 대신들은 백립(白笠)을 쓰고 있다.

1869년, 군복무를 마치고 공무원 임용을 기다리던 묄렌도르프(P.G. von Mollendorff)에게 연방정부 인사 담당자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청국 해관에서 독일인 직원을 구하는데 지원해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할레대학에서 법학, 언어학, 동양학을 공부한 묄렌도르프는 외교관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는 청국 해관에서 몇 년 일하다 보면, 청국 주재 독일공관에 외교관으로 임용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해 9월, 묄렌도르프는 200파운드의 선금과 임명장을 받아 들고 머나먼 중국을 향해 출발했다. 22세 야심만만한 독일 청년은 중국이 자신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줄 기회의 땅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상하이에는 4000여 명의 유럽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의 첫 번째 직장인 상하이 해관만 해도 영국인, 프랑스인, 러시아인, 노르웨이인 등 17명의 유럽인이 근무하고 있었다. 상하이는 유럽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목 받을 수 있는 도시는 아니었다. 상하이 해관에서 근무한 지 불과 한 달 만에 묄렌도르프는 차 무역의 중심지 한커우(漢口)로 전출되었다.

묄렌도르프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해관에서 일하고, 퇴근 후에는 과외선생을 구해 부지런히 중국어를 익혔다. 어릴 때부터 외국어 능력이 탁월했던 그는 대학 시절 이미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히브리어 등 8개국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중국어를 배운 지 불과 몇 해 만에 자유롭게 필담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한문 실력이 늘었고, 어지간한 방언도 알아듣게 되었다.



청국 해관과 독일 공관의 연이은 박대

하지만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더라도 영국인이 장악한 청국 해관에서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중용할 리 없었다. 그는 베이징에서 근무하기를 희망했지만, 한커우의 영국인 해관장은 그를 3년 동안 실컷 부려먹고 주장(九江)으로 내쳤다. 한커우와 주장에 거주하던 유일한 독일인이었던 묄렌도르프는 해관에서 근무한 5년 동안 독일어로 말할 기회가 단 한 번도 없었을 정도로 고독한 시간을 보냈다.

해관 일은 창의력이라곤 털끝만큼도 발휘할 필요가 없는 무미건조한 사무의 반복이었다. 1874년, 묄렌도르프는 해관에 사표를 제출하고 광둥(廣東) 주재 독일영사관 통역으로 들어갔다. 휴가도 연금도 없는, 영사 눈 밖에 나면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비정규직 통역이었다. 정식 통역으로 임용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였다.

그마저도 외교관 신분이 아닌 단순한 공관 고용인 신분이었다. 1878년, 묄렌도르프가 통역으로 근무하던 상하이 영사관이 총영사관으로 승격되었다. 묄렌도르프는 영사가 총영사로 승진하면 자신이 부영사로 임용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베를린의 외무성은 중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를 부영사로 내려 보냈다.

묄렌도르프는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굴욕을 참았다. 이듬해, 묄렌도르프는 톈진 영사관의 대리영사로 임명되었다. 비서도 통역도 없고, 정식 외교관도 아닌 말 그대로 ‘대리’였다. 비록 ‘대리’였지만 톈진에서 영사로 재직하는 동안, 묄렌도르프는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았다.

북양대신 겸 직예총독 리훙장은 톈진에 머물면서 청국의 외교를 전담했다. 영사가 부임인사를 가면, 리훙장이 답례로 영사관을 방문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리훙장은 자신이 관할하던 청국 해관의 하급직원이었던 묄렌도르프에게 답례 방문을 하지 않았다. 묄렌도르프는 독일의 위신 문제라고 생각하고, 리훙장에게 답례 방문을 하지 않는다면 베이징 총리아문(總理衙門: 외교부)에 항의할 수밖에 없다고 통보했다.

이튿날, 리훙장이 독일영사관으로 찾아왔다. 묄렌도르프는 테라스에 꼿꼿이 선 채 리훙장을 맞았다. 리훙장을 서재로 안내해 자리에 앉게 한 후, 책상으로 돌아가 무엇인가 열심히 적었다. 리훙장이 “무슨 일로 그렇게 바쁘시오?” 하고 묻자, 묄렌도르프는 “예의범절에 관한 책을 집필하는 중이오. 요즘 예의범절을 모르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하며 유창한 중국어로 대답했다.


1.고종이 묄렌도르프에게 하사한 임오군란 때 살해된 민겸호의 저택. 망령이 출현한다고 빈집으로 방치되었던 집이었지만, 묄렌도르프는 기쁘게 받아 서양식으로 개조했다.
2.관복을 입은 묄렌도르프.

50대 중반의 노회한 세도가 리훙장은 30대 초반의 젊은 독일인의 당돌한 대답에 한바탕 크게 웃으며 “우리는 분명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오” 하며 묄렌도르프의 어깨를 두드렸다.

중국인에게 ‘친구가 되겠다’는 말은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의미였다. 리훙장은 베를린 외무성에 묄렌도르프를 정식 영사로 임용해 달라는 편지까지 보냈다.

대리영사로 근무한 2년 동안 묄렌도르프는 청국에서 독일의 이권을 수호하고 독일인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1881년 베를린 외무성은 또다시 중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엉뚱한 인물을 톈진 영사로 내려 보냈다.

묄렌도르프는 상하이 영사관으로 돌아가 새파란 후배의 통역으로 일해야 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이번에도 굴욕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이것으로 묄렌도르프는 한낱 공관의 고용인이지 정식 외교관으로 임용할 뜻이 없다는 독일 외무성의 의도가 분명해졌다. 이듬해 묄렌도르프는 독일공사관에 사표를 던지고, 청국의 공직을 얻기 위해 리훙장 휘하로 들어갔다.



통역에서 외무성 차관으로 ‘벼락출세’

1882년, 조선은 관세를 징수해 재정 수입을 늘리고, 조선 상품을 보호하기 위해 해관 설치가 시급했다. 서양 열강과 수교도 마냥 미룰 수만은 없었다. 고종은 리훙장에게 사신을 보내 해관과 외교 업무를 총괄할 인재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다. 리훙장은 조선도 곧 서양과 통상하게 될 것인데 어차피 외국인을 고용할 형편이라면 서양인을 고용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고했다.

세무에 밝고 한문에 능통한 서양인을 고용해 조선 관리와 함께 해관을 관리하다가, 조선청년을 교육시켜 점차 서양인의 자리를 대체해 나가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서양인을 고용하라는 것은 뜻밖의 권고였다. 애초 고종이 희망한 인재는 서양 유학을 다녀온 중국인이었다. 하지만 청국으로서는 자기 나라 해관도 외국인 손으로 운영되는 마당에 조선 해관의 책임자로 중국인을 보낸다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외교와 내치의 자율성을 부여한 속방(屬邦)인 조선에 중국 관리를 상주시킨 전례도 없었다. 리훙장은 자신의 휘하에 들어온 묄렌도르프에게 조선어를 익히고, 해관 설치에 관한 서적을 공부할 것을 지시했다. 묄렌도르프는 청국의 앞잡이 격으로 조선에 파견되는 셈이었다. 묄렌도르프가 조선 국왕의 고문 겸 해관장으로 파견된다는 소문이 톈진 외교가에 퍼지자 그의 숙소에는 조선으로 진출하기를 희망하는 상인들과 조선에 자제들을 취직시키려는 중국 관리들이 줄을 이어 찾아왔다.

그는 더 이상 청국 해관과 독일 공관에서 무시당하던 천덕꾸러기가 아니었다. 고종은 신정왕후(조대비)의 조카 조영하를 톈진에 보내 묄렌도르프를 정중히 데려오게 했다. 고종이 묄렌도르프에게 하사한 벼슬은 신설되는 통리아문(외교부) 참의(차관보) 겸 해관총세무사(관세청장) 겸 전환국(조폐공사) 총판(총책임자). 외교, 통상, 통화 정책을 독점하는 막강한 지위였다.

통리아문이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개편되면서 그는 한 달 만에 협판(차관)으로 승진했다. 리훙장은 조선으로 떠나는 묄렌도르프를 위해 연회를 열어주었다. 작별 인사를 하는 묄렌도르프에게 리훙장이 물었다. “조선 왕 앞에 무릎을 꿇겠느냐?” “총독께도 그러한 경외의 표시를 하지 않았는데, 그런 일을 할 리 있겠습니까?” 리훙장과 청국의 이익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다짐이었다.



청국을 배반하고 러시아와 결탁하다

조선에서 묄렌도르프는 목인덕(穆麟德)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협판 벼슬의 옛 이름이 참판이었기 때문에 ‘목 참판’이라 불렸다. 묄렌도르프는 연미복에 훈장을 단 차림으로 안경을 벗은 채 고종을 알현했다. 세 번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밤을 새워 외운 조선어로 “신을 귀국으로 불러주시니 감축(感祝)하와 힘이 다하도록 받들 것이니 전하께서도 신을 신임하시옵기 바라나이다” 하며 충성을 맹세했다.

고종은 어전에서 안경을 낄 수 있도록 허락했고, 관복과 임오군란 때 살해된 민겸호의 저택을 하사했다. 국왕의 총애를 받는 ‘목 참판’의 집 앞은 선물을 싸들고 몰려드는 관리들로 북적였다. 고종은 묄렌도르프를 수시로 불러 국정의 조언을 들었고, 묄렌도르프는 자신을 믿고 아껴주는 고종을 열과 성을 다해 섬겼다.

해관을 세우고, 일본과 관세 협정을 체결하고, 청국에서 차관을 도입하고, 뽕나무 10만 그루를 수입해 심고, 상하이~인천 간 정기항로를 개설하고, 영국·독일·프랑스와 국교를 맺고, 전환국을 세워 당오전을 발행하고, 광산을 개발하는 등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몸은 비록 고달팠지만, 자신의 포부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조선에서 생활은 더없이 행복했다.

그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준 기회의 땅은 중국이 아니라 조선이었다. 묄렌도르프는 청국과 일본 사이에서 조선이 독립을 지키려면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서로 세력의 균형을 이루게 하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러시아와 국교를 맺은 후, 묄렌도르프는 고종의 묵인 아래 조선을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게 하는 밀약을 체결했다.

청국의 앞잡이로 파견된 ‘본분’을 잊고, 청국의 이권을 러시아로 빼돌린 셈이었다. 1885년 조러밀약이 알려지자, 리훙장은 묄렌도르프를 톈진으로 소환하고, 그 자리에 미국인 데니(O.N. Denny)를 파견했다. 묄렌도르프가 러시아에 매수돼 리훙장을 배반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아껴준 고종의 은혜에 감동해 자신의 ‘본분’을 잊었을 가능성이 크다.

3년 동안의 꿈같은 권력을 맛본 묄렌도르프는 톈진으로 소환된 이후에도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1년 54세의 나이에 닝보(寧波)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묄렌도르프의 당오전 발행 주장에 김옥균 “안 된다” 맞서
당오전 대 본위화폐

묄렌도르프의 건의로 1884년 전환국에서 주조한 당오전.
묄렌도르프가 조선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해 노력한 것은 분명하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실패한 정책으로 대표적인 것이 당오전 주조다. 당오전은 1전짜리 상평통보보다 2배의 소재를 이용해 5배의 액면가로 주조한 화폐다.

1866년, 당백전을 발행했을 때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음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민씨 정권은 시급한 재정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당오전의 발행을 주장했다. 묄렌도르프는 민씨 정권에 영합해 어전에서 “금은화폐를 주조하는 것이 정도나 경비가 없으니 먼저 당오전을 주조해 목전의 시급함을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

고 당오전 발행을 주장했다. 이에 반발해 김옥균은 “당오전은 보조화폐다. 보조화폐를 주조하면 이익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재정을 튼실하게 하는 길은 본위화폐를 정해 화폐제도를 안정시켜야 한다”며 근대적인 화폐제도의 창설을 주장했다.

김옥균은 일본으로부터 300만 엔의 차관을 도입하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민씨 정권의 방해 공작으로 일본과 차관 협상이 결렬되자, 1884년 묄렌도르프의 주장대로 당오전이 주조되었다. 그 결과, 우려했던 대로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야기되었고, 통화제도는 근본부터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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